질문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묻는 것입니다.  질문을 하면 대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또한 질문은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질문으로 답을 알려 줄 때에 사용되기도 합니다.

비가 오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과학선생에게 질문하면 답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비가 오는 이유를 알고 있는 선생님은 비가 왜 오느냐고 학생들에게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철학에서는 이러한 질문과 대답, 즉 토론을 퉁해서 정답을 알아가는 것을 진리 추구라고 합니다.  철학적 진리는 질문과 대답을 통해서 나타난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에 따른 수많은 변증 방법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다음과 같이 반응을 합니다.

 (v.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제자들은 이해하지도 못하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묻는 것도 두려워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했다는 Hella의미로 알지 못해서 죄를 짓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지식적 이해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알아 듣지 못했습니다.  알아 듣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생긴 것이고 그래서 제자들은 묻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철학에서 대답 할 수 없는 질문이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과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사람들은 비가 오는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에는 그 누구도 비가 오는 이유를 질문하면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과거에는 비가 오는 이유를 신이 주는 축복과 저주로 생각했습니다.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과학으로 비가 오는 이유를 설명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비가 오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입니다.

예수님이 죽고 부활한다는 것은 제자들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도 우리들이 죽고 예수님과 같이 부활 할 것이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과학적 개념에서 맞지 아니하기에 거짓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과학을 진리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과학은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지 그 설명이 진리는 아닙니다.  그럼으로 과학적 설명은 항상 변하고 다르게 나타납니다.  진리가 아닙니다.  지금도 수많은 학설로 과학적 사실들은 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과학으로, 우리의 지식으로,  이해 할 수 없고, 대답 할 수 없다면 이것은 진리입니다.  신의 영역입니다.  우리들이 대답 할 수 없다고해서 진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철학체계, 사상의 체계를 뒤집는 것입니다.  엄청난 모순입니다.

그럼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진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