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1장 1-10절 (나귀를 드리고 난 후에 후회? 감사?)

우리는 누군가에게 선물이나 도움을 주고, 후회 할 때가 있거나, 오히려 감사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뜻대로 되면 감사하지만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도움 준 것을 후회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하실 때의 내용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흥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혁명가로, 왕으로 오실 것을 기대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예수님은 제자 둘을 보내어 매여 있는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합니다.  나귀주인이 누가 쓰겠느냐고 하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귀를 발견하고 나귀 주인에게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말하고 나귀를 끌고 옵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합니다.

나귀를 주님에게 내어준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당시의 나귀는 족장급들이 가질 수 있는 중요한 재산입니다.  오늘 날의 아주 비싼 자동차와 같습니다.  나귀를 아무나 타지 못합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 베드인 족들이 나귀를 타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귀를 내어준 사람은 예수님이 이 나귀를 타고 우리의 죄의 용서를 위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으로 가는 것을 알았을까요?  아니면 예수님이 우리의 가난과 문제를 해결하시는 예루살렘의 왕으로 입성하시는 것으로 알았을까요?  우리는 나귀 주인이 어떤 목적을 나귀를 내어 주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귀의 사용은 단순했습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우리의 죄의 용서를 위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십니다.  그리고 부활하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과 교회를 위하여 헌신합니다.  우리의 시간과 물질을 드립니다.  우리의 사랑과 희망을 교회에 갖습니다.  하나님에게 우리의 나귀를 드립니다.

이렇게 하나님에게 나귀를 드렸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도와 다른 결과가 나타날 때에 분노하고, 절망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에게 드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귀 주인에게 주가쓰신다고 하라고 합니다.  주는 성경에서 Qurios, Lord,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에게 나귀를 드린 것입니다.

저는 나귀 주인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실망했는지, 감사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나귀를 사용하시는 것은 우리의 죄의 용서와 구원입니다.  이것이 만족하는 우리의 헌신과 충성이 되길 바랍니다.

마가복음 10장 46-52절 (우리의 밑천)

모든 일에는 밑천이 필요합니다.  기본적인 것이 있어야 무엇인가 할 수 있습니다.  밑천없이 어느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건강이 밑천입니다.  지식이 밑천입니다.  돈이 밑천입니다.  상상력이 밑천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가시다가 거지 소경의 불쌍히 여겨 달라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믿음을 보시고 기적을 베푸십니다.  또한 믿음보다 그들을 불쌍히, 긍휼히 여기시어 기적을 베푼 내용들이 성경에 많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초점이 약간 다릅니다.  당시의 거지들은 겉옷을 펴고 구걸을 했습니다.  사람들을 지나가면서 그 옷위에 돈과 먹을 것을 던져줍니다.  그의 겉옷은 생계 수단입니다.  자신의 맹인과 거지 신분을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에게 겉옷이 없다면 그는 먹고 살아갈 길이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부르신다는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행동합니다.

(v.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그는 그의 밑천을 버렸습니다.  그의 생계 수단을 버렸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구걸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제부터는 과거와 다르게 살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겉옷을 버린 그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질문하고 그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v.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내가 너를 위해서 무엇을 해줄까?  자신의 밑천을 버린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이 새로운 밑천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우리의 밑천을 버릴 때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실 것이 있습니다.  그는 보기를 원한다고 대답합니다.

문제는 우리는 밑천을 버리지 못합니다. 밑천은 그야말로 우리의 밑 바닥입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닥입니다.  끝입니다.  그 밑천이 없다면 우리는 죽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자존심, 중요한 소유, 인간관계가 우리의 밑천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밑천을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의 겉옷을, 우리의 밑천을 버리면 어떤 일이 일어 날까요?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적이 상상으로 끝나는 것과 현실로 나타나는 것은 단 하나의 차이입니다.  우리의 밑천을 버릴 때입니다.

우리의 밑천을 버리지 않으면 어제와 오늘이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밑천을 버리면 오늘 예수님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오늘 우리의 밑천을 생각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가복음 10장 32-45절 (갈등)

갈등은 갈나무와 등나무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나무를 감아 올라갑니다.  그럼으로 하나는 왼쪽으로 다른 하나는 오른쪽을 꼬여 올라갑니다.  갈등은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등합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아무리 잘 설명해도 상대방의 전하는 내용의 20% 정도만 알아 듣는다고 합니다.  상대방의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합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특별한 2가지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듣고 싶은 말만 듣습니다.  내가 듣고 싶지 않은 말에는 마음의 문을 닫습니다.  지루하면 상대방을 무시합니다.  또한 공격적이거나 비난이면 방어자세를 취하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는 상대방의 말을 하기전에 내가 하고 싶은 말과 듣고 싶은 말을 이미 정해놨습니다.  자신을 미리 세뇌하는 것입니다.  Brainwash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정해논 목표에 자신의 생각과 말을 미리 씻어버리는 것입니다.  사기꾼들이 가장 많이 쓰는 방법입니다.  사기꾼들은 거짓을 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실을 이야기 한다고 자신을 세뇌합니다.  자신을 정당화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속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고 삼일만에 부활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예수님이 혁명을 일으키실 것이고 자신들은 새로운 정부에 총리와 장관을 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 자리를 놓고 다투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죽을 것이라고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죽지 않고 승승장구 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20% 알아들은 것이 아니라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등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이미 정해놨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으면 거짓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말은 거짓말이 되기에 무시하고 모욕을 줍니다.

또한 자신을 의로운 존재로 스스로 세뇌를 했습니다.  거짓말을 진실처럼 말합니다.  그의 말로 수많은 사람들은 악하고 거짓의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거짓을 진실로 착각하고 진실을 말한다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 불쌍 할 뿐입니다.

이 시대는 갈등의 시대입니다.  많은 분들이 아파하고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갈등의 시대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으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 모두 이 말씀을 사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가복음 10장 23-31절 ( 비트코인)

이 세상이 비트코인 열풍에 쌓여있습니다.  적은 돈을 투자하면 몇 백배의 이익을 얻는다고 합니다.  국가마다 비트코인에 대한 정책을 확정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적은 것을 투자하고 몇 백배의 수익을 얻기에 정부들이 간섭의 한계가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부자가 천국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구멍을 빠져 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십니다.  그럼으로 나와 복음을 위하여 아비나, 자식이나, 재산이나을 버린 자는 죽기전에 집과 형제와 재산을 백배로 받고 죽은 다음에 영생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버리면 죽기전에 백배를 받고, 죽고 난 후에 영생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정말로 이렇게 백배를 받습니까?  수학적으로 엄청난 이익입니다.  비트코인 이상으로 이익이 발생합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의 12제자 버리고 주님을 쫓았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백배의 이익을 받지 못한 것이 확실합니다.  요한을 제외한 대부분 예수님을 위하여 순교를 당했습니다.  세례 요한과 바울은 참수를 당했습니다.  그들은 수학적으로 100배를 얻은 것이 아니라 100배를 빼앗겼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100배라고 하십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v.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박해를 겸해서 받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비트코인에는 박해가 없습니다.  비트코인으로 박해와 고난을 벋어나려고 합니다.  고통과 가난을 벗어나려고 비트코인에 투자합니다.  미래가 없는 청년들이 100백의 이익을 얻고, 가난과 실업과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난과 고통과 시련이 있다고 합니다.  박해는 우리의 입장에서 정말로 불필요한 사족입니다.  이 말 한 마디만 없으면 예수님의 말씀은 100배의 이익을 얻는 비트코인입니다.

우리들이 우리의 것을 버리면 가난함과 비참함이 나타납니다.  텅빈 것이 나타나고 허전함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은 바울은 고린도 전서 1장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v.26-28)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v.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v.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우리들이 버릴 것을 버리면, 약해지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합니다.  우리들이 버릴 것을 버리면 미천하고, 가난해지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미천한 것으로 높은 것을 없애 버립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버림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비트코인과 비교 할 수 없는 100배가 주어집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일하십니다.  이것이 100배를 받는 것보다 더 큰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것이고 천국을 영생을 확신하는 길입니다.

이러한 100배의 비밀과 영생을 알고 있는 제자들과 바울과 세례 요한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마가복음 10장 17-22절 (영생-Eternal life)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 영생의 조건을 묻습니다.  우리는 영생을 죽어서 영원히 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영생은 오늘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치 천국이 죽음이후에 있지만, 실제로 천국도 오늘 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영생을 묻는 자에게 예수님은 5-10 계명을 지켰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이 이 계명들의 준수여부를 질문하시는 것은 이 계명들은 우리의 현실적인 것들이고, 영생, 천국의 시작입니다.  영생을 원하는 자가 다 지켰다고 합니다.

만약에 다 지켰다면 영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천국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자에게 주고 나를 쫓으라고 합니다.  그는 재물이 많아 자신의 것을 팔지 못하고 슬픈 얼굴로 떠납니다.  예수님의 지적은 너는 계명을 지키지 못했기에 영생은 얻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동일합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하지만, 전쟁에 나가면 살인해야합니다.  거짓말 하지 말라고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지키려면 거짓말을 해야합니다.  이웃을 사랑하지만, 나의 것이 먼저이고 남는 것으로 이웃을 사랑합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계명은 우리의 양심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계명은, 율법은 우리들이 넘어 갈 수 없는 절벽앞에서 절망하는 인간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럼으로 바울의 말대로 율법은 우리를 죽이는 것이지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으로 우리에게 영생은 다른 방법으로 찾아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찾아옵니다.  많은 분들은 예수를 믿으면 계명을 지키는 사람과 같은 영생의 기쁨을 누린다고 착각을 합니다.  이것은 이단이 즐겨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어도 우리의 현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변함 없는 우리의 현실에서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 찾아옵니다.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상황과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오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만을 변화시켜갑니다.  이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착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인간입니다.  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현실의 상황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우리는 고민과 아픔과 고통에, 예수님이 함께 하십니다.   이러한 천국과 영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10장 13-16절 (현재의 천국)

예수님은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한 사람들이 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천국을 어린아이에게 비유하시는 이유는 천국은 미래의 나라이지만 현재의 나라라고 하십니다.

아이들은 부모를 의지합니다.  부모의 말을 듣습니다.  부모와 함께 있을 때에 불안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있는 것이 천국입니다.  만족하고, 평안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믿기에 우리도 이렇게 만족하고 평안해야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의 수많은 문제들은 우리의 평안과 기쁨을 빼앗아갑니다.  슬픔과 고통이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과 행복도 있지만 마음에는 허전함도 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과 같이 순진하게 살아갈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의 현실이 너무나 냉혹하기에, 이 세상을 천국으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미래의 천국을 확신하지 못합니다.

  (v.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이 말씀에 해답이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하게 천국을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유괴범들이 사탕으로 아이들을 유혹합니다.  아이들은 미련하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사탕으로 유괴 당하지 않습니다.  어른들은 지식과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 미련합니까?  아이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이들과 같으라고 하십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사탕에, 유괴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미련하게 믿어야 합니다.  천국을 미련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의 이성과 감정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늘도 기도로, 말씀으로 우리의 감정과 이성을 비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미련함이 나타나면, 천국이 나타날 것입니다.  오늘의 천국이 미래의 천국입니다.

 

마가복음 10장 1-12절 (이혼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이혼에 관한 법이 있었습니다.  신명기 24장에 이혼에 관한 법이 있습니다.

법은 법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석하는 가 더 중요합니다.  그럼으로 이혼법에 대한 해석도 유대사회는 양분되어 있습니다.  강하게 해석화는샴마이와 방법과 약하게 해석하는 힐렐로 분리되어 있엇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갈라진 의견에 기준을 세웁니다.  하나님이 짝지운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합니다.  이혼은 죄라고 명시합니다.  예수님은 이혼자체를 부정하십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이혼에 대한 여지를 남겨 놓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럼으로 캐톨릭은 본문을 근거로 결혼은 7 성사에 들어갑니다.  천국가는 조건입니다.  이혼하면 영성체를 받지 못합니다.  이혼을 죄라고 철저하게 가르칩니다.  삼마이적 해석입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힐렐의 해석을 따릅니다.  매우 관용적입니다.  죄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혼을 묵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개신교도 캐톨릭도 아닙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야담과 이브를 짝을 지우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선악과의 사건으로 짝 지운 것을 파괴합니다.  그 파괴의 대표적 현장이 가정입니다.  부부관계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육체적 이혼은 없어도 정신적 이혼은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끔대로 살지 못합니다.

[막 10:7-8]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v.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이렇게 살아가는 부부가 있을까요?  우리는 참고 인내하며 살아갑니다.  상대방을 이해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이 요구하는 한 몸의 사랑은 하지 못합니다.  히브리어로 한 몸의 의미는 나의 혓바닥입니다.  나의 아내갸 남편이 나의 혓 바닥과 같아야 하고 내가 그의 혓바닥과 같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가 나의 혓바닥이 되길 원하지 내가 그의 혓바닥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잣대에서 다 이혼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우리의 아내와 남편 앞에서 죄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혼은 죄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혼하지 않았기에 죄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이혼 한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우리 모두 죄인입니다.

우리들이 부부로 어떻게 살아가는가  돌아보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가복음 9장 38-50절 (영적 불구자)

지난 주에 San Deigo회의 참석으로 새벽 묵상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오늘 부터 다시 보냅니다.

2차 세계 대전 대에 독일의 Hitler는 사회적 약자들, 유대인들, 집시들, 독일인이지만, 신체적 불구자, 정신병자들을 죽음의 수용소에 보냈습니다.  독일을 인종적으로 순수하겠다는 발상입니다.

문제는 독일 교회가 침묵으로 Hitler 일에 지지를 보냈습니다.  심지어 독일 교회는 Hitler을 Messiah (메시아)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교회에 실망한 독일인들은 교회를 떠납니다.  제가 독일에 가서 보니 교회 건물이 술집으로, 가게로 사용되는 것을 봤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절망적인 독일 교회를 지켜낸 것이 독일의 고백교회입니다.  독일 고백 교회의 2개의 기둥이 있습니다.  칼 바르트 (Karl Barth)와 디티리히트 본훼퍼 (Dietrich Bonhoeffer) 목사입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신학자입니다.  이들은 신학적으로 Hitler을 미치광이로 봤습니다.  정신적으로 강박증 환자로이해 했을 것입니다.  그럼으로 두 사람의 신학적 사고는 이 시대의 중요한 판단 자료입니다.

Hitler는 본훼퍼를 교수형으로 죽입니다.

오늘 날의 한국 교회, 이민 교회는 마치 Hitler 시대의 독일 교회와 같습니다.  일부 목회자들이 정신적으로 강박증에 걸려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나를 반대한지 않는자는 나를 따르는 자라고 하십니다.  문자적 의미는 나와 함께 하지 않지만 그들은 나의 사람입니다.  확대해석하면 제자들과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입니다.

41절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물을 한잔 주면 그는 상을 받습니다.

42절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소자를 실족하게 하면,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물에 빠져 죽는 것이 낫다고 하십니다.

본문의 초점은 예수님의 12제자와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는 자들의 관계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아니했기에 그들을 반대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반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시대는 똑같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나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면, 신앙의 태도가 다르면, 생각이 조금 다르면 상대방을 철저하게 응징합니다.  Hitler의 독일 교회와 같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비난하고 공격합니다.  우리들이 적 그리스도입니다.  마귀입니다.  이렇게 비난하는 사람들은 신앙의 강박증에 걸려있습니다.  강박증은 하나의 정신병입니다.

우리들이 이단과 신자를 구분해야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강박증 환자들은 이단과 신자를 동일하게 취급합니다.  이렇게 행동하고 말하면 그들은 영적 장님입니다.  영적 귀머리입니다.  영적 절름발이입니다.

오늘 날 많은 신자들이 영적 불구자을 지도자로 따릅니다.  이민 교회와 한국 교회의 미래가 보입니다.

이러한 현상의 가장 큰 이유는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와 분리 시키는 이원론적 사상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신학의 부재입니다.  그들은 세상을 적대시합니다.  전형적 세대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2 천년 전의 사건으로 만 믿고 있습니다.  철저한 신학의 무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오늘도 일어나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들 이러한 믿음의 고백을 하면 이 세상이 마귀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승리하시는 세상이 됩니다.

이렇한 신앙고백을 하면 우리는 세상의 소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소자들에게 물을 주어야 합니다.  그가 작은 예수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형제를 소자를 실족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Hitler와 같이 소자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물을 주어야 합니다.

마가복음 9장 33-37절 (너와 나 사이에서)

제자들이 서로 누가 높은 가를 논쟁합니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당연히 위계질서가 생깁니다.  예수님이 어린 아이 하나를 제자들 앞에 세우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v.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고대시대에 전쟁에서 패배는 노예가 되거나 죽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자신들의 생명을 지켜줄 사람은 적과 싸울 수 있는 장성한 성인들입니다.  무기를 들고 싸우지 못하는 여자들과 아이들은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재산의 일부이기에 부모의 빚으로 노예로 팔리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는 너와 나의 인간관계에서 상대방을 수단과 목적으로 삼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을 나와 같이 여겨 달라고 합니다.  너와 나 사이에 나의 목적과 수단이 있으면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너와 나 사이에 수단과 목적이 없고,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 있다면 상대방의 슬픔과 기쁨이 나의 슬픔과 기쁨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철저하게 쓰레기로 매도하고 자신을 의롭게 여긴다면 그 인간은 상대방을 수단과 목적으로 삼는 비참한 인간입니다.

너와 나 사이에 하나님이 있다면 우리는 낮아지고 겸손해집니다.  거짓과 야망이 사라집니다.  그 상대방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람입니다.

2018년에 우리는 비극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이 알고 있는 알량한 성경구절과 몇개의 지식과 성령 체험했다는 것으로 우리의 신앙에 긍지와 자랑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극의 시대에 우리 자신의 자화상을 회복해야합니다.  타인을 존중하고 그 사람의 존엄성을 인정해야합니다.  만약에 이러한 행동이 없다면 그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과 수단을 만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극적 인간입니다.  비참한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교만하지를 대적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사람에게서 긍지와 자랑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는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누구를 바라보든지, 이해와 겸손과 사랑을 태도를 갖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가복음 9장 30-32절 (물어야 할 것을 묻지 못하는 사람들)

질문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묻는 것입니다.  질문을 하면 대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또한 질문은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질문으로 답을 알려 줄 때에 사용되기도 합니다.

비가 오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과학선생에게 질문하면 답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비가 오는 이유를 알고 있는 선생님은 비가 왜 오느냐고 학생들에게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철학에서는 이러한 질문과 대답, 즉 토론을 퉁해서 정답을 알아가는 것을 진리 추구라고 합니다.  철학적 진리는 질문과 대답을 통해서 나타난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에 따른 수많은 변증 방법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다음과 같이 반응을 합니다.

 (v.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제자들은 이해하지도 못하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묻는 것도 두려워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했다는 Hella의미로 알지 못해서 죄를 짓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지식적 이해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알아 듣지 못했습니다.  알아 듣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생긴 것이고 그래서 제자들은 묻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철학에서 대답 할 수 없는 질문이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과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사람들은 비가 오는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에는 그 누구도 비가 오는 이유를 질문하면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과거에는 비가 오는 이유를 신이 주는 축복과 저주로 생각했습니다.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과학으로 비가 오는 이유를 설명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비가 오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입니다.

예수님이 죽고 부활한다는 것은 제자들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도 우리들이 죽고 예수님과 같이 부활 할 것이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과학적 개념에서 맞지 아니하기에 거짓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과학을 진리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과학은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지 그 설명이 진리는 아닙니다.  그럼으로 과학적 설명은 항상 변하고 다르게 나타납니다.  진리가 아닙니다.  지금도 수많은 학설로 과학적 사실들은 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과학으로, 우리의 지식으로,  이해 할 수 없고, 대답 할 수 없다면 이것은 진리입니다.  신의 영역입니다.  우리들이 대답 할 수 없다고해서 진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철학체계, 사상의 체계를 뒤집는 것입니다.  엄청난 모순입니다.

그럼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진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