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6장 오해된 사랑

Mothers Theresa는 이 세상에세 가장 가난한 나라는 인도의 빈민가도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도 어니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는 미국이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너무나 가난한 나라가 미국입니다.  Mother Theresa가 가난하다고 한 이유는 인간과 인간 관계의 정신적 가난일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외롭게 가난하게 살아갑니다.  입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도 그의 마음은 가난합니다.    이러한 가난은 가정과 교회에서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랑이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의 것을 베푸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구제입니다.  자선입니다.  이러한 구제와 자선은 받는 사람의 문제와 어려움이 해결이 목적입니다.  구제와 자선을 하는 것도 고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주는 것도 베푸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인격을 주고 받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자식에게 사랑을 주지만, 인격적 교류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자식은 괴물로 변질합니다.  그 자식은 부모에게 구제와 자선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자식을 가장 가난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사랑에는 징계도 있습니다.  사랑에는 고난과 시련과 눈물도 있습니다.

가정과 교회에서 사랑을 강조합니다.  어떠한 사랑입니까?  상대방의 필요를 채우고 있습니까?  구제와 자선입니다.  물질적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너와 나의 만남이 없다면 그것은 비극과 가난의 시작입니다.

Martin Buber는 너와 나의 만남에서 인격적 만남이 아닌 물질적 만남은 비극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너와 나 사이에 It, 제 3인칭, 물질이 있다면 인간은 불행하진다고 합니다.  너와 나는 It 아니라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실력입니다.  It 없이도 너와 나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바탕으로 나의 것을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면 It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격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반대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도와 주시고, 책임져 주신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강조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가난한 관계입니다. 불행한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죄의 제거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It, 죄가 제거되어야 하나님과 우리는 만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 되시는 이유는 자신의 모든 것,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제와 자선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난하게 하려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만나시려고 인격적 관계를 가지시려고 십자가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오늘 날 교회와 가정은 본질과 비본질이 구별이 안 됩니다.  본질이 비본질이 되고 비본질이 본질이 됐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죄의 용서입니다.  이 사랑에 만족해야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이 사랑으로 만족하며, 기뻐해야합니다.  이 사랑에는 죽음과 눈물과 고통과 배신이 있습니다.  이 사랑에는 죽음을 이기는 부활과 승리와 영광이 있습니다.

호세아는 (v.1) 하나님에게 돌아가자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찢으셨으니 낫게해주실 것이고 치셨으니 싸매어 주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병도 주고 약도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1절의 짧은 구절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이러한 진노에서 나타납니다.

이러한 사랑을 받으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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