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8장 – Money, Power, Sex에서 하나님과 우상의 차이

본문은 우상 숭배로 인한 유대와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입니다.

이 시대의 개혁주의 설교가 John Piper 목사는 돈과 권력과 섹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Money, Power, Sex 자체를 죄악시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죄의 성품이 문제이지, 돈과 권력과 섹스는, 문제가 아니라고 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종교 개혁이전에는 일반 은총을 특별 은총의 하위개념으로 이해했습니다.  그 결과 Catholic 교회는 이러한 돈과 권력과 Sex을 죄악으로, 우상으로 못을 박았습니다.  사제들은 교인들에게 물질적 절제와 권력에 대한 죄악성, 성적 절제를 요구합니다.  교회가 교인들을 통제하는 장치로 사용했습니다.,  그 결과 Catholic 교회 자체가 사제들의 돈과 권력과 성적 타락의 본거지가 됩니다.

이러한 현상이 가장 적나라하게 들어난 것이 프랑스 혁명에서 제 1 계급 종교 계급의 타락입니다.  당시의 사제들의 사생아는 조카들이였습니다.  자신들의 자식을 조카라고 했습니다.  외형적으로 경건한 그들은 사생아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돈과 권력으로 가장 부유했습니다.  귀족을 포함한 사제 계급 2%가 나라의 부를 차지했습니다.  그들은 이러힌 것들을 지키려다가 혁명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이 오늘 우리 교회에 똑같이 반복이 됩니다.  교회는 권력과 돈과 성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죄악시합니다.  한국 교회의 치명적 약점은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특별 은총의 하위개념으로 강조하고, 설교합니다.  그 결과 세상의 모든 것을 죄악시하고, 교회만이 정상이라고 합니다.  신학적 무식의 소치입니다.  일반 상식도, 법도,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 되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 권력과 물질과 성적 타락은 세상과 하나도 차이가 없습니다.  교회의 분열은 정점은 재산 싸움입니다.  100% 세상 법정에서 판가름이 납니다.  최고의 윤리성을 강조하는 교회가 세상에서 가장 타락한 집단으로 질타를 받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끝없이 발생하는 성적타락은 세상과 하나도 차이가 없습니다.

본문이 이러한 우리의 타락에 대한 답을 줍니다.  (v.5-9) 이방인이 우상으로 섬기는 금송아지를 이스라엘 백성들도 금송아지를 우상으로 섬깁니다.  이방인들에게 금송아지는 자신들에게 번영과 안전을 보장하는 우상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금송아지는 자신들에게 번영과 안전을 보장하는 하나님입니다.  금송아지가 자체의 기능은 똑 같습니다.  이방인들에게는 금송아지,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세상과 동일한 가치와 목적과 수단을 믿고 사용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금송아지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기도하면 모든 것을 이겨냅니다.  목사인 저 자신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맞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기도하면 모든 것을 이겨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은총입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돈과 권력과 섹스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신자나 불신자나 자신의 노력과 양심에 따라 성공 할 수 있고, 실패 할 수 있습니다.  돈은 사용자의 인격에 따라, 사람을 구제 하는 도구도 되지만,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됩니다.  Power는 권력의 소유자의 양심에 따라,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든지, 사리사욕을 채웁니다.  Sex는 윤리성과 절제에 따라, 종족 번성과 인간이 즐기는 최고의 즐거움도 되지만, 타락과 파괴의  도구로 전락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면, 우리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특별은총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일반은총도 확신해야합니다.  우리의 상식과 준법 정신과 교양과 정직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상은 법당의부처, 성당의 마리아상, 교회의 십자가, 무당의 굿만을 우상숭배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고전 8:4) 이러한 우상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Nothing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우리의 우상은 바로 우리 자신의 탐심과 욕심이라고 합니다.

(골로세서 3장 5절)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에베소서 5장 5절)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탐하는자,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

우리의 탐심을 채우는 목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기도를 강조하면 이 모든 것들은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나 탐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복주심과 기도를 강조하면 다음과 같이 달라집니다.

돈은 사람을 구제 하는 도구가 됩니다.  Power는 공공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Sex는 종족 번성과 인간이 즐기는 최고의 즐거움이 됩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세상이 우리의 도덕성과 윤리성에 항복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건전한 상식과 예의와 사회적 질서를 추구합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하나님 심판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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