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서는 베드로의 사도 행전의 설교의 본문으로 등장합니다. 요엘서 2장을 베드로가 인용합니다. 요엘서는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매력적인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다른 예언서와 달리 유대의 죄악에 대한 철저한 징계가 나타나지만, 유대인의 회복으로 말씀이 끝을 맺습니다.
다른 예언서는 유대인의 죄악에 대한 심판으로 하나님의 분노가 나타나고, 치유와 용서가 계속 반복됩니다. 그러나 요엘는 다릅니다. 요엘서는 1장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분노가 나타나지만, 2-3장에서 하나님의 신, 성령의 임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를 핍박하던 나라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유대는 영원할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요엘서는 유대인들에게 Zionism의 교과서입니다. 곳곳에 나타나는 이른비, 새포도주 등은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오심이지만, 유대인들과 이야기해보면 요엘서는 예루살렘의 성전을 회복시켜줄 Messiah 대망입니다. 시오니즘의 교과서입니다.
하나의 성경이지만 우리와 엄청난 시각의 차이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시오니즘을 일부 한국 개신교가 차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예루살렘 회복입니다. 외형적으로 이슬람, 유대인 전도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성전회복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오실 종말까지 연결시킵니다. 성경을 작위적으로 해석합니다.
아주 보수적인 유대인들도, 예루살렘 회복에 대해서는 아주 조심합니다. 솔로몬이 세운 예루살렘의 성전 자리에는 현재 이슬람의 황금 사원의 자리로 추정합니다. 유대인들은 그곳에 마음대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실제로 들어가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시간이 제한되어 있고, 만약에 유대인으로 들어가겠다고 할 때에, 사원경찰이 제지하면 들어가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이 마음대로 기도하고, 예배하는 곳은 황금 사원 아래에 위치한 통곡의 벽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Messiah가 오면 그 자리에 성전이 새롭게 지어질 것을 기대합니다. 또한 유대인들도 보수, 개혁 보수, 진보, 세속화된 유대인에 따라 성전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의 메시아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이고, 우리의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죽으시는 가장 큰 이유의 하나는 성전 모독죄입니다.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 후에 세우시겠다는 말씀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이 성전을 거론했는가를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구원 받았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증거로, 에베소서는 우리들이 하나님이 거하실만한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중입니다. (It is being built). 수동태 진행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성전으로 지어가고 계십니다. 우리들이 짓는 것이 성전이 아닙니다. 우리의 실력으로 성전을 회복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들이 성전을 짓겠다면 우리는 유대교를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일부 개신교는 선교와 전도의 이름으로 예루살렘 땅을 회복하자고 합니다. 성전을 회복하자고 합니다. 전도와 선교는 거룩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들이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명령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교회를 부인하는 방향으로 사용하는 것은 사탄의 사악한 짓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한 이사야, 다니엘, 에스겔을 통해서 하나님은 유대의 하나님, 예루살렘의 하나님에서 이 세상의 하나님, 우주만물의 창조 하나님으로 계시되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기에 계시의 하나님입니다. 그러기에 2016년 7월에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 내용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성전의 한 구석으로 몰아넣는 사악한 짓이 얼마나 하나님 말씀, 성경에 위반되고 있는 가를 깨달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