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주어진 공간과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지구라는 공간과 주어진 한계가 있습니다. 지구라는 공간과 한계를 벗어나면 사람은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을 한계 상황이라고 합니다. 일반인들에게 주어진 공간과 한계는 학교, 가정, 직장, 사회등 자신이 속한 공동체입니다. 이것을 벗어나면 죽음의 상황이 찾아옵니다.
공동체 // Community // Common ground라는 단어가 의미하듯이 사람은 한계 상황을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또한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는 것을 배반자로 죄악시합니다. 주어진 상황과 공간을 벗어나는 것은 공동체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기에 죄악을 의미합니다. 모두가 정한 규례와 법칙을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주어진 공간과 한계에서 질서를 유지하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서 법과 질서가 필요하게 됩니다.
그러나 지구를 다시 작게 쪼개어 본다면 나라와 국가마다, 문화, 정치, 경제 사회의 다양한 질서로 자신의 공동체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공동체에 다른 공동체가 개입하면 적의 침입으로 간주하고 전쟁을 하게 됩니다. 다른 공동체와 경쟁도 합니다. 이것이 오늘 날의 국가와 사회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공동체를 더 작게 세분화 되면, 같은 국가 안에서도, 지역주의 사회적 빈부의 갈등, 가정의 갈등로 나타납니다. 인간은 이렇게 주어진 공간과 한계에서 갈등과 미움과 전쟁으로 살아갑니다. 죄악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오늘 날의 정치와 경제와 사회를 이러한 개념으로 보면, 테러와 전쟁은 자신의 공동체를 지키려는 인간의 최악의 수단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공간과 한계를 성경적으로 이렇게 해석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만드시고, 한계, 공간을 주십니다. 에덴동산이라는 한계와 공간입니다. 그리고 선악과와 생명나무로 인간의 규칙과 질서를 정하십니다. 그러나 뱀 // 사탄의 등장으로 인간의 공간과 한계는 죄악으로 철저하게 파괴됩니다. 뱀의 유혹도 있지만 인간의 대표자인 아담과 이브의 죄성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야망과 욕망입니다.
우리는 매우 이중적입니다. 주어진 공간과 한계를 지키려고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공간과 한계를 벗어나려는 욕망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표적 증거가 여행입니다. 여행은 나에게 주어진 공간과 한계의 탈피입니다. 책임과 의무를 벗어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러기에 여행은 즐거운 것입니다. 다른 공동체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요엘서를 잘 보시면 이러한 내용이 잘 나타납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주어진 공동체 에덴 동산이 파괴됩니다. 엄청난 무질서가 찾아옵니다. 죄악의 결과로 다른 Community // 적들이 침입을 합니다. 유대인 공동체가 파괴됩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됩니다. 앗수르의 포로가 됩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한계와 공간, 이스라엘을 벗어나는 경험을 합니다.
이러한 한계를 벗어 나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개입을 하십니다. 죄악으로 무질서해진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새로운 질서와 구원을 베푸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이 임합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v.28-32)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v.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v.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v.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v.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무질서 // Chaos는 // 질서로 // Cosmos로 가는 여정입니다. 창세기의 창조도 혼돈에서 질서로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십니다. Chaos에서 Cosmos가 됩니다. 무질서가 계속된다면 인류를 멸망합니다. 우리의 국가와 사회는 파괴됩니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는 사람의 실력과 능력으로 해결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개입이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역사가 우리에게 나타나야만 합니다.
이것이 신의 존재 증명,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증명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는 베드로가 사도행전에서 인용한 요엘서의 본문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영, 성령,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철학에서는 한계 상황을 벗어나 인간은 신의 초월적 개입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가장 잘 정리한 학자가 야스퍼스입니다. 이것은 지난 번에 간단하게 언급을 했습니다.
예배와 기도는 우리의 주어진 한계와 공간을 벗어나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Liminal 또는 Liminality 라고 합니다. 사람의 경계와 하나님의 경계 중간에 있는 것이 우리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복입니다. 이 자리는 아무나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설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들이 하나님에게 드리는 예배와 기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경계를 벗어나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순간과 장소가 됩니다.
그러나, 오늘 날 교회의 타락과 죄악은, 하나님의 찾아오심으로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안정과 번영을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합니다. (제가 지금 축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이 단어 자체도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단어입니다. 무질서하게 사용하길래 이해하시라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 우리들이 인간의 경계와 하나님의 경계에서 하나님의 찾아오심으로 성경이 강조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 참고 바랍니다.)
글이 너무나 길어져 오늘 이것으로 줄입니다. 좋은 하루가 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