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다음과 같이 제사를 드립니다.
(v.5)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에게 열정적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그 제사에 대해서 하나님이 다음과 같이 반응하십니다.
(v.2)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이를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 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도 그리하리라.
하나님이 북 이스라엘을 앗수르의 포로로 끌고 가시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가난한 자를 압제하기 때문입니다. 힘있는 자가 힘 없는 자를 지;ㅅ누르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이 자연 재해로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냅니다. 그 내용이 6절에서 10절입니다. 6-7절을 예로 듭니다.
(v.6-7) 또 내가 너희 모든 성읍에서 너희 이를 깨끗하게 하며 너희의 각 처소에서 양식이 떨어지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v.7) 또 추수하기 석 달 전에 내가 너희에게 비를 멈추게 하여 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시대는 강자와 약자로 나누어집니다. 지식적 강자와 약자, 경제적 강자와 약자, 권력의 강자와 약자들이 있습니다. 인간은 이러한 힘의 강약의 차이로 불평등이 존재합니다. 강자는 약자를 착취하고, 부당하게 대우합니다. 약자는 이러한 강자와 맞서 싸워 자신의 권리와 힘의 회복을 추구해왔습니다.
칼 마르크스는 인류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라고 합니다. 현재 미국도 한국도 계급투쟁이 일어나고 잇습니다. 한국의 금수저와 흙수저의 논란과 미국의 소수 1% 가 미국 재산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현상입니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시작한 셰계 경제의 세계화는 이러한 경제적 양국이 극단적으로 벌어지게 했습니다. 더욱이 지식이 강자와 약자는 이 시대의 경제적 약자와 강자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시대 우리 자녀들이 대학을 졸업해서 30년 전과 같은 위치를 결코 회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특정한 지식만이 경제적 사회적 위치를 보장 할 것입니다.
더욱이 지식이 강자와 약자는 이 시대의 경제적 약자와 강자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시대 우리 자녀들이 대학을 졸업해서 30년 전과 같은 위치를 결코 회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특정한 지식만이 경제적 사회적 위치를 보장 할 것입니다. 이러한 지식은 소수만이 공유하고 나눕니다. Google, Internet, 항공, 우주 산업, 고도의 지식의 산업을 제외한 나머지는 그 지식의 노동자로 전락합니다. 세상에서 출세 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영화 Hunger Game이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공평한 계급에서 계급과 경제적 투쟁은 자연 발생적입니다. 이것이 작금의 흑백 갈등입니다. 특히 트럼프의 등장으로 이러한 갈등은 노골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가는 미국사회가 한국사회가 넘어야 할 산이지만, 근본적 해결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사회적 윤리성입니다. 강자가 약자에게 얼마나 양보하는가입니다. 성경도 이러한 사회적 경제적 윤리성을 강조합니다. 과부와 나그네와 고아에 대한 관심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요구합니다. 또한 바울은 이러한 약자들에게 상전에 대한 힘 있는 자들에 대한 순종도 요구하고 있습니다. 칼을 가진 자- 힘을 가진 자들에 대한 순종입니다. 물론 이러한 내용은 신학적 논쟁의 여지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착각하는 것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이 크기에 그들을 구원과 직결시키는 시도가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의 천국과 부자의 지옥을 예로 듭니다. 물론 가난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인정하지만, 그듫이 가난하기에, 착취 당하기에, 사회적 고난을 당하기에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은 너무나 작의적 해석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방적 부르심입니다. 우리의 자격과 조건을 부르시지 않습니다. 흙수저이기에 구원을 받고 금수저이기에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것은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약한자의 편이십니다. 그러나 강하고 힘있는 자의 편도 되십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구원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이렇게 반박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약자, 흙수저, 가난한 자로, 태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선택이고, 어떤 사람은 강자와 금수저로 태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선택이냐고 합니다. 이러한 성경의 해석은 아주 잘못된것입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선택을 강조하는 것은 구원이 하나님이 절대은총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일반적 은총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표현대로 유대인의 하나님, 이방인의 하나님, 강자와 약자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신분, 경제, 사상, 피부의 색갈에 관계 없이 부르십니다.
이것이 공의,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아모스는 이러한 하나님의 정의, 구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v.12-13)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 (v.13) 보라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이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니라
우리는 사회적 경제적 정의를 실현해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정의, 공의는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 부르심입니다. 우리들이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구원에서 우리는 우리 삶의 현장에서 윤리적이고, 도덕적 정의를 추구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