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에 이어 계속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4명의 사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느 6장) 산발랏, 도비야, 게셈과 사마리아 사람과 대항하는 스룹바벨, 여호수아, 에스라, 느헤미야입니다. 그들은 선지자, 예연자, 제사장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을 대장장이라고 합니다. 영어번역으로, Carpenter, Craftsman, Blacksmith로 번역했습니다. 각종 기술자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직업은 성전을 세우는데 필요한 기능적 직업입니다. 성전의 제사나,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는 기능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직업으로 성전 공사를 방해하는 사람들을 물리칩니다.
오늘 날의 우리의 신앙의 체계는 2 가지의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첫 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현대사회의 특징의 하나인 다극화는 절대 가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절대 초월과 절대 신의 개념이 없습니다. 모든것이 상대화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모든 종교는 동등하고 그 종교에 속한 신도 동등하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믿는 하나님의 절대성을 세상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구약 성경의 내용은 다른 종교의 문헌과 비교하여 신화적 이나 문학적으로로 다루게 됩니다. 그 결과 오늘 날의 지성인과 일반인들에게 기독교의 절대성은 받아 들일 수 없는 영역이 됩니다. 만약에 이러한 절대성을 용납하면 다극화된 세상에서 고립됩니다.
두 번째는 신앙의 고도화된 윤리성과 도덕성으로 발전입니다. 이렇게 종교가 동질화되면 종교의 특징은 윤리성과 도덕성으로 각 종교의 자웅을 겨루게 됩니다. 인간과 인간의 영역에서 최고의 가치는 고상한 인격입니다. 이제는 종교가 한 인간의 인격의 형성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가에 따라 해당 종교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오늘 날 달라이 라마가 아주 좋은 예가 됩니다.
티벳 불교나, 중국의 장자 사상은 서구 기독교가 줄 수 없는 인간 내면의 울림과 감동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연과의 일치는 인공지능과 각종 IT의 발전으로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현대인들에게 정신적 피난처가 됩니다. 종교가 인간의 정신적 해소 역활의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이러한 종교적 행위의 공통점은 인간의 종교적 심성의 극대화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와 반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어 우리를 찾아오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되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공감 (Compassion) 하십니다. 초월의 영역이 인간의 체계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때에 우리에게 찾아오는 증거는 인격의 변화입니다. 지난 주에 설교드린 하늘의 지혜와 땅의 지혜의 차이입니다.
오늘 날 현대인들은 자신의 변화, 인격적 변화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인격적 변화는 나에 대한 질문과 싸움입니다. 사람이 도덕적 윤리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초월의 영역이 들어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관조합니다.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와 목적을 발견합니다. 그 결과 인격의 변화가 나타납니다. 나의 삶의 영역이 땅의 영역에서 하늘의 영역으로 확장되기에 내가 오늘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4명의 대장장이를 보여주십니까? 성전을 짓는데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의 직업과 삶으로 짓는 것입니다. 흙에서 흙으로 갈 것이라면 성전을 지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흙에서 하늘로 갑니다. 그러기에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는 생각과 행동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직업과 가정과 사업을 땅의 생계의 유지가 되지만, 하나님의 세계를 이 세상에 나타내는 도구입니다. 나의 직업과 사업으로 나에게 주어질 미래의 모습을 지금부터 연습하는 것입니다.
오늘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다극화되고, 절대적인 것이 인정 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절대적 영역, 초월의 영역,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면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