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7장 (용서 할 수 없다면)

우리에게 어려운 것이 있다면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라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잘못이지만 용서할 수 없기에 내 자신이 고통을 당 합니다.  또한 내가 용서를 받아야 하지만 용서 받지 못한 상태에서 지낸다는 것도 지독한 고통이 됩니다.  그럼으로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잘못을 했다고 시인하지 아니했는데 용서 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이 잘못 했다고 하지만 나에게 용서의 준비가 없을 때도 고통스럽습니다.  상대방이 잘못 했다고 하지만 그 진의를 알 수 없을 때에도 오히려 내가 농락 당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밧세바와 간음과 우리아 장군의 살인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사건으로 자식들이 죽어가는 골육상쟁을 죄의 대가로 치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 하셨지만 그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죄악은 오늘도 성경을 통해서 분명하게 들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용서하시지만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야 합니다.  이러한 죄의 용서를 믿는 자는 용서를 받습니다.  예수님의 죄의 용서를 믿지 아니하면 결코 용서 받지 못합니다.

그럼으로 우리들이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에는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용서 하는 것은 신자의 덕목이지만,  우리 자신이 용서 할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용서 할 수 있고 용서 받을 상대방은 용서 받을 자격도 갖추어야 합니다.

본문의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로 그들의 죄를 용서 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다리오 왕입니다.  바벨론의 포로에 해당하는 시기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성전 파괴로 그들의 죄가 용서 되는 길이 없어졌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죄가 용서되는 길은 선행입니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에 대한 선행입니다.  선행으로 그들의 죄가 용서 될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죄의 용서의 제사가 막힌 유대인의 죄가 용서 되는 길은 선행과 구제와 이웃에 대한 돌봄입니다.  구약의 예언서에서 사회정의를 강조하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물론 사회 정의, 공평한 재판과 빈부의 격차가 해소되어야 하지만 그 배경은 죄의 용서 받을 수 없는 유대인들이 택하는 방법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죄의 용서를 받지 못하기에 선행과 구제로 그들의 죄의 용서를 간구합니다.  10월과 11월은 유대인들의 회개와 죄의 용서의 절기이지만 실제로 그들에게 제사장과 성전이 없기에 실질적 용서는 막혀있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선행과 구제를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금강석 같다고 합니다.  위선의 행동입니다.  용서를 빈다고 금식하지만 금식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로하는 금식이라고 합니다.

용서를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상대방을 용서 할 수 없다면, 최소한 나의 마음의 분노는 가라 앉힐 수 있습니다.  내가 먼저 나를 용서해야 합니다.  나의 용서가 없다면 그 누구도 용서하지 못합니다.  나의 마음을 정리하고 가라 앉힐 때에 타인에 대한 용서가 시작됩니다.   나의 마음의 불길을 잡아야 합니다.  그 불이 나를 태워 죽일 수 있습니다.

나를 용서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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