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9장 1-9 ( 최순실)

오늘 본문은 유대를 괴롭힌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며서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교회에 고통을 준자들 이방나다들 같습니다.  우리에게 나타날 하나님의 심판이 두렵습니다.

지난 몇 주간 조국이 격은 수치와 참담함은 말로 못합니다.  우리의 실망과 분노는 표현 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더 답답한 것은 종교계는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특히 기독교는 아주 조용합니다.  물론 몇 사람이 모여서 뭐라고 발표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교회의 소리에 전혀 무게를 두지 않습니다.  듣지 않습니다.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우리들이 말을 하지만 세상은 듣지 않습니다.

종교는 2가지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개인적 기능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예배와 기도의 생활입니다.  이러한 개인들이 함께 모여 교회를 이룹니다.   개인적 신앙은 한 개인의 인격과 주변에 많은 영향을 줍니다.  그럼으로 교회라는 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는 예배와 삶이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근거하지 아니하면 교회가 아닙니다.

둘째는 종교는 사회적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교인들의 모임인 교회와 교계는 사회성과 정치성을 갖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윤리성과 도덕성도 나타납니다.  이러한 정치성과 사회성과 윤리성이 세상의 가치와 판단보다 우위를 가질 때에 종교는 순기능을 합니다.  세상의 윤리성과 정치성에 미치지 못하는 저급이면 종교는 역기능을 갖게 되고 그 결과 그 종교는 사회의 해악스러운 존재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사회적 처벌과 처단을 받습니다.

이러한 역기능의 예가 러시아의 공산혁명입니다.  스탈린은 러시아의 모든 교회당을 러시아 알파벳 순으로 파괴합니다.  죵교가 사회적 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세상에서도 버림을 받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의 영광은 가리워집니다.

그러나 종교가 순기능의 역활도 합니다.  Martin Luther의 종교개혁입니다.  Catholic이 사회적 역기능을 나타날 때에 종교 개혁은 유럽을 변화시킵니다.  사실 오늘 날의 유럽의 정신과 문화의 중심에는 종교 개혁이 있습니다.  또한 Catholic도 Counter Reformation을 합니다.  Catholic도자체 종교 개혁을 합니다.  순기능은 또 하나의 순기능을 만들어냅니다.

문제는 우리들의 실력이 이러한 개혁을 만들어 낼 정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대한민국과 우리들의 종교적 기능은 매우 개인적입니다.  종교가 갖는 사회성에 대해서는 거의 무책임합니다.  우리의 정치성, 도덕성 윤리성은 이미 바닥입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의 개인적 신앙을 세상에 설명 할 실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믿는 하나님을 세상에 설명 한다는 것은 나에게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모습은 우리끼리 교회 안에서, 또는 우리를 알지 못하는 선교지에서 나타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력을 잘 알고 있는 나의 직장에서 친구에게, 세상에는 나타내지 못합니다.  그 결과 세상은 우리의 목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을 마귀의 세상, 또는 세상이 우리를 탄압한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잘못된 이유는 청와대와 똑같습니다.  종교적 세뇌입니다.  이유는 우리끼리, 우리 교회만 잘되면 된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죽든 망하든 상관 없습니다.  성경의 몇 구절을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데 악용합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약자와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은 없습니다.  공공성, 윤리성이 없습니다.

우리는 청와대에 돌을 던지기 전에 우리안에 최순실과 같은 종교적 마력에 세뇌되고 놀아 났다는 것을 인정해야합니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