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7장 6-29 (선교와 전도 누구의 책임인가?)

교회 역사를 공부해보면 매우 재미 있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교회의 선교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 교회에서 박해가 나타나자 교회가 이방지역으로 흩어지면서 복음이 전파됩니다.  아리우스가 삼위일체로 이단성의 지적을 받자 그들은 오늘 날의 유럽, 바바리안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 바바리안들이 나중에 로마를 망하게 하는 주축 세력이 됩니다.  그러나 바바리안들은 이미 기독교적 문화와 전통에 익숙한 관계로 쉽게 기독교에 포용이 됩니다.

로마 Catholic은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에 대한 스스로의 종교 개혁을 합니다.  소위 역 종교 개혁이라고 합니다.  Counter Reformation입니다.  로마에서 활동의 근거를 상실한 로마 카톨릭은 남미와 아시아 이방 선교를 시작합니다.

그럼으로 선교를 역사적으로 보면 박해나 또는 교회의 약화 둘중의 하나의 원인으로 선교가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와 아리우스는 박해로 선교가 시작된 것입니다.  Roman Catholic은 근거지를 상실하자 교회의 자구책으로 선교가 시작된 것입니다.

현재 미국은 세계 최대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습니다.  한국도 2 순위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습니다.  두 나라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예를 들어 드린 것 처럼, 자국에서 박해는 아닙니다.  특히 한국의 교회는 자국에서 기독교적 영향력이 약화되어가는 중에 선교가 확장되는 것을 주시해야합니다.  선교의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교회가 교회의 생존 방법으로 선교를 택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선교라는 사명도 있겠지만 선교로 전도로 교회의 정체성으로 삼은 것입니다.

교회의 정체성은 선교와 전도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미국은 선교사의 증가의 시작은 영적 대각성운동 이후에 급증합니다.  자국의 교회가 부흥 할 때에 선교적 부흥이 일어납니다.  그럼으로 미국의 선교는 교단적입니다.  개교회가 선교하는 것이 아니라 교단의 정책과 훈련에 따라 선교합니다.  그 결과 지속적입니다.  장기적 안목으로 시작합니다.  선교의 열매는 1-2 세대를 지나야 열매가 맺혀집니다.

이렇게 장기적 시간이 요구되는 이유는 선교는 문화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복음적이지만 선교와 전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문화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럼으로 한국에서 선교하는 많은 외국인 선교사 가족들이 몇 대에 걸쳐 선교사로 봉사는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선교는 어떠 할 까요?  매우 개인적입니다.  담임 목사와 친분 관계가 강하게 작용됩니다.  수많은 선교가 이러한 인간관계로 좌지우지됩니다.  담임 목사 바뀌면 선교지도 바뀝니다.  선교부장 장로님만 바뀌어도 선교지가 바뀝니다.

더 큰 문제는 개 교회적입니다.  각 교회가 선교합니다.  그 결과 우리의 선교는 복음적입니다.  문화적이지 않습니다.  선교에 대한 신학적 지식이 매우 낮습니다.  열정은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지식이 없습니다.  지식이 없는 열정은 무서운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열매가 있는 것 같지만 매우 단기적입니다.  성공적 선교를 한 선교사가 죽거나 병들거나 그 자리를 떠나면 그 누구도 책임지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문제는 대한민국의 교회 자체가 약화 되어지는 상태에서 선교가 급증했습니다.  자국의 근거를 상실 할 때에 교회의 선교가 급증했습니다.  미래의 원동력이 선교지 자체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것은 1-200년 걸리는 사업입니다.  현재 선교지에서 스스로 생존 할 수 있는 선교가 몇 개 될 수 있는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IMF 때에 수많은 선교사님들이 고생하고 어려움 당한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면에서 미국 장로교 선교는 아주 성공적입니다.  문화적이고 몇 대에 걸쳐서 지금도 계속중입니다.

(마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거룩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진주는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거룩한 것과 진주를 나누어주는 우리에게 문제가 있음을 말씀합니다.  개나 돼지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들이 잘못 주면 개나 돼지가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우리들이 비싸서 잘 먹을 수 없는 T-bone Stake을 개에게 줍니까?  우리들이 고기를 먹고 개에게는 뼈다귀를 주는 것이 정상입니다.  주인이 뼈다귀 먹고 개에게 고기를 주는 것은 비정상입니다.  돼지에게 콩을 주는 것이 정상이지, 콩과 유사한 진주를 주는 것은 비정상입니다.  이것은 주는 자의 책임입니다.

제가 목회자로, 선교를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날 교회는 교인들에게 뼈다귀를 주고 선교지에는 고기를 줍니다.  오늘 날 한국 교회는 교인들에게 콩을 주고 선교지에는 진주를 줍니다.  선교와 전도가 교회의 정체성과 생존을 Program으로 전락했습니다.  선교 전도하지 아니하는 목사와 교회는 목사도 아니고 교회도 아닙니다.  교회의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들 자신이 하나님의 귀하신 선교적 전도적 명령을 천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회개 할 문제입니다.

선교는 장기적입니다.  처음에는 문화적입니다.  목사에 따라, 교회에 따라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신학적 성찰과 재정적 계획으로 헌신된 사람을 발굴 해서 장기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선교가 나타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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