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모든 종교의 기초적 시작은 현세구복입니다. 현실에서 자신이 믿는 신에 의하여 주어지는 도움과 유익과 해방입니다. 기독교 신앙에도 이러한 현세구복적 내용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른 이유는 현세구복적입니다. 질병과 가난과 고통에서 해방입니다. 이러한 어려움에서 나타나는 기적과 능력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신적 인물로 이해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종교에서 항상 요구되는 기초적 현상입니다.
또한 종교는 죽음 이후에 세계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의 현실에서 살아가는 모습과 종교적 행위가 죽음 이후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가 현실의 문제 해결에 집착하면 하등종교에 속하게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당의 굿입니다. 굿은 조상의 도움으로 현실은 해결하지만 본인 자신의 죽음 이후에 대한 내용은 없습니다.
그럼으로 모든 종교는 현세구복과 죽음 이후에 대한 갈등을 겪게 됩니다.
기독교에서도 현세구복을 강조합니다. 보수 기독교는 개인적 현실 구원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언급합니다. 진보적 기독교는 사회적 구원, 사회 정의를 강조합니다. 이러한 신앙은 죽음 이후에 믿음이 상대적으로 약화됩니다. 그리고 더 심각한 결과는 현실 구원을 강조하고 죽음 이후에 대한 강조가 약화되면 비윤리적, 비상식적, 비 도덕적 종교로 전환됩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있다는 당위성을 갖습니다. 우리들이 가장 기초적인 것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죽음 이후만을 강조하면 그 종교는 윤리, 도덕이 강조되게 됩니다. 신자의 살아가는 내용이 죽음 이후의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사회성과 인간 관계성이 약화됩니다. 초월적 현상에 관심이 크기에 율법적 행동을 하게 됩니다. 또한 자신의 책임과 이성적 판단을 유보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와 자신의 기도라는 추상적 언어를 사용하게 됩니다. 이러한 태도는 매우 근본적 성향을 갖습니다. 특정한 종교적 행위가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이 됩니다. 교회의 사역이 중요해지고, 가정과 사회가 부정시됩니다.
오늘 날 교회는 이러한 이중적 신앙에 설명하는 것이 매우 부족합니다. 현실을 축복을 강조하면서 죽음 이후를 강조하면 심각한 모순이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날 교회는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 매우 쉽습니다. 그 결과는 교회는 극단성을 갖게 됩니다. 성경대로 살겠다 하는 주장을 하면서 사회성이 결여되고 세상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스스로 약화 시킵니다.
이러한 결과로 우상숭배가 나타납니다. 신앙이 극단성을 가지면 우상은 나타납니다.
많은 교회와 신자들이 이러한 태도에 만족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태도를 신랄하게 비난합니다. 오늘 본문 하나님의 백성, 북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유적지에 가보면 그들의 우상숭배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바알과 각종 우상들이 동네 입구에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이러한 우상이 마을을 지켜주고 자신들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했습니다. 그 우상이 하나님입니다. 우상을 하나님으로 섬겼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이 제 2 계명에서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성경이 이렇게 지적하는 것은 바알을 하나님으로 간주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알로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알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출 32)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 후에 아론에게 우리를 출애굽 시킨 신을 만들어 보여 달라고 합니다. 아론이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이렇게 말 합니다. 이 송아지가 우리를 출애굽 시킨 너희의 신이라고 합니다. 신은 Hebrew로 Elhoim입니다. 영어번역은 gods입니다. 우리들이 글로 하나님과 우상을 구분 할 때에는 God와 gods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귀로 들을 때에는 하나님으로 들려집니다. 우상과 하나님이 똑같습니다.
가끔 무식한 학자들이 이러한 단어를 예로 들면서 하나님, God는 우상, gods에서 출발했다고 하는 억지를 부리기도 합니다. 바알도 Hebrew 주입니다. Lord입니다. 주인입니다. 남편입니다. 바알이 바알인 것 같지만 주인, 주님과 같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할 때에 그 주와 동일합니다.
그러기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3 계명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부르다 보면 우상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아니하고 쓰지도 못했습니다. 다만 우리들이 발음 기호로 추측을 할 뿐입니다. YAHW정도입니다.
성경의 우상은 우상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하나님으로 변형 시키는 행동입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럼으로 우리의 신앙, 오늘 날 우리의 신앙에서도 우상 숭배가 얼마든지 일어 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게도 우상숭배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군상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Catholic 의 형상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십자가도 우상 되기에 교회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이러한 우상숭배에 대한 태도를 이해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회의 역사와 신학 논쟁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성경을 근거로 예표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 우리들이 현세구복과 죽음 이후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없을 때에 우리는 오늘의 현실 해결이 우상이 되고 우리의 죽음 이후가 우상이 됩니다. 우상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상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기초와 근본에 머무르면 우상 숭배로 전락 할 수 있습니다.
우상이 무엇인지는 내일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