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이 신앙을 너무나 단순화시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단순 논리에 빠집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우리들이 죄를 지면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죄 짓지 말아야 합니다.
또는, 우리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럼으로 예수를 믿는 자는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죄인이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들이 일반적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화 시킬 때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깊이를 스스로 포기합니다. 하나님의 깊고 높고 위대하심에서 스스로 멀어집니다. 이것이 우리의 불행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기독교가 고민하지 않으며, 세상의 조롱을 받으며, 세상 철학보다 못하게 전락하는 결정적 이유가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북이스라엘과 남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를 하십니다. 죄에 대한 벌을 주십니다. 그 벌의 내용이 매우 재미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북 이스라엘이고 유다는 남 유다입니다.
(12)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좀 같으며 유다 족속에게는 썩이는 것 같도다. 좀은 썩기 일보 직전입니다. 좀과 썩는 것은 다릅니다.
(13)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병에 걸린 것과 상처도 다릅니다. 병 // Sick은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 사회는 상처 // Wounded는 상처를 입으면 치료 할 방법이 적었습니다.
(14)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늙은 사자의 공격력과 젊은 사자의 공격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단순하지 않으십니다. 벌을 주시지만 각 사람에 대한 차별이 있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환경과 책임에 대한 내용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이 남 유대보다 우상 숭배등 더 사악한 죄악을 저질렀지만 남쪽 유대를 더 심하게 징계하십니다. 그들에게는 썩는 것 // 상처 // 젊은 사자입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날까요? 단순논리의 위험성은 너와 나를 동급의 차원으로 봅니다. 단순논리는 윤리와 도덕성의 결여을 만들어냅니다. 나의 행동이 나의 행동보다 우월 할 때에 나의 도덕성과 윤리성은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단순논리는 선과 악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게 합니다. 선과 악이 차별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동등해집니다.
소크라테스는 검토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매일 검사했습니다. 자신에게 질문했습니다. 자신을 의심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물어 봤습니다. 그러한 검사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검토했습니다. 절대로 단순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철학의 시조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단순하게 살아갑니다.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에게 질문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믿음을 절대화합니다. 타인의 평가에 대해서 배타적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지 못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현재의 상황이 하나님의 축복인지, 심판인지도 구별 못합니다.
하나님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복잡하게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검토하며 사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놀라운 은혜에 있는 가를 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