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국가, 사회, 공동체가 올바른 길을 가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정의로운 국가와 사회가 되어, 올바른 길을 가야만 공동체는 존재 합니다. 만약에 부정한 공동체라면 병든 것과 같아서 쉽게 무너지고, 분열이 생깁니다. 이러한 정의를 추구하는 중요한 수단은 법적 장치와 그 법적 행동을 수행하는 정치와 군대, 경찰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정의가 실현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현재 Baton Rouge에 발생한 총격 사건은 백인 경찰과 흑인 사회의 충돌입니다. 이 사건에서 법적으로 누가 정의롭고, 불의한가를 판단 받을 것입니다. 이러한 법적, 정의로운 판단에 경찰과 흑인 사회의 수용은 매우 다르게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을 예상한 일부 흑인들은 백인 경찰을 총으로 조준 암살하기도 했습니다.
경찰은 경찰 대로 정의로운 이유를 개진하고, 흑인 사회는 흑인 사회대로 정의를 주장 할 것입니다. 양쪽을 만족 시킬 수 있는 법적 정의 실현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미국 사회의 소수민족에 대한 불의는 분명하게 존재합니다. 저도 몇 차례의 Town 공청회 과정을 통해서 일방적으로 당한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불의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지만, 저는 희망을 갖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결코 정의롭지 않습니다. 우리도, 소수민족도, 결코 정의로운 집단이 아닙니다. 제가 양비론적으로 양쪽을 비난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자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새로운 대안을 찾아도, 우리는 인간은 불의합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결코, 정의를 추구 할 수 없으며, 정의롭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정의로운 국가와 사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정의롭지 못하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암 3:1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서리에나 걸상의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도 건져냄을 입으리라.
사자가 양을 잡아 먹지만, 일부는 남겨둡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 하실 때에 일부는 남겨두시겠다고 합니다. 그들은 호화로운 침대에와 의자에서 이방인들과 종교적 간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지만, 사자가 먹고 남기는 귀와 다리처럼 남겨 두시겠다고 합니다. 남은 귀와 다리는 앗수르의 포로로 끌려가는 고난을 당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사자와 같이 철저하게 죄에 대해서 질책하십니다. 양을 잡아 먹는 것 같이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일부는 남겨 두십니다. 남겨 둔자들이 앗수르의 포로이고, 바벨론의 포로입니다.
이렇게, 양의 귀와 다리처럼 남은 자들은 노예로 심한 고난을 당합니다. 이러한 고난에서 그들은 신앙을 회복합니다. 앗수르의 고난을 당한 포로들은 사마리아 교단을 세웁니다. 바벨론의 포로들은 유대 교단을 세웁니다.
오늘 날의 유대교의 성경과 신앙은 바벨론 포로 후손들이 세운 것입니다. 사자가 먹고 남은 귀와 다리들입니다. 고난 당한자들이 세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하나님은 고난 당 할 자를 남겨두시고, 고난을 통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다가올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 (Typology)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전통에서 예수님이 오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류의 죄에 대한 정의를 세우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로 남겨 두십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정의가 새롭게 구현되는 방법입니다.
그럼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정의 구현은 고난에 대한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가십니다. 바울도 스스로 고난의 길을 갑니다. 바울이 (고후 11:4) 사십에 하나를 감한 매를 맞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이기에 이러한 태장을 맞지 않아도 됩니다. 고후 11장에 여러번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바울이 얼마든지 고난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의도적으로 선택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미국 사회의 법적 정의는 어느 당사자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정의롭지 못할 것이고, 갈등과 분열은 증폭 됩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모든 국가와 사회에서 정의가 실현되는 전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는 당하는 자의 의도적 고난에 참여입니다. 당하는 자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 자들이 정의로운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형을 보여준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이러한 십자가를 본 받은 비폭력의 간디와 마틴 루터 킹 목사입니다.
그들은 폭력으로 정의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상대방에게 정의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자신들에게 정의를 요구했습니다. 그러기에 간디는 종교가 고난을 자초하지 아니하면, 종교가 아니라고 합니다. 스스로의 희생이 없는 종교는 결코 사회적 정의를 세우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나의 고난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에게 고난을 해결해달라고 합니까? 아니면,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정의를 찾으려고 노력하겠습니까?
Baton Rouge의 총격 사건을 하나님의 정의에서 바라보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