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지나가시다가 세리로 앉아있는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당시의 세리는 로마 정부의 청부업으로 로마가 정한 금액을 징수하고 나머지는 착복을 했습니다. 세리는 유대인의 입장에서 로마에 빌붙어 먹고사는 매국노며 사기꾼이며 약자를 괴롭히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마태가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부르셨습니다. 마태는 세관의 자리에 앉고 싶어서 앉은 자리가 아니라 돈과 힘이 있기에 그 자리를 앉아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치욕과 멸시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나면 당장 먹고 사는 길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다시 주저앉아 자리를 지킵니다.
우리들이 앉아있는 자리들은 다 똑같습니다. 우리는 현재의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만 일어나지 못합니다. 우리의 각박한 현실이 오늘의 자리를 지키게 합니다.
(v.9-c)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님은 그 자리를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죄의 자리입니다. 돈의 힘이 눌려 있는 자리입니다. 인간의 자유와 희망을 빼앗아가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인격과 인격이 만나지 못하는 자리입니다. 돈이 중요하지만 돈이 우리 자신을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돈의 노예가 죄입니다. 돈의 사슬을 벗어나는 것이 사람입니다,
마태가 이렇게 돈의 지배를 벗어나자 예수님은 세리 마태의 친구가 됩니다.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십니다. 예수님 그 누구도 함께 하지 않는 세리와 함께 하십니다.
돈의 지배를 벗어나면 수용 능력이 생깁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받아들입니다.
우리들에게 이러한 수용능력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타인에 대한 수용능력을 가진 자들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이 시대의 세리를 수용하지 못하면 우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마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우리들이 이슬람을 얼마나 수용 할 수 있습니까? 촛불과 태극기를 얼마나 수용 할 수 있습니까? 일본 사람을 얼마나 수용 할 수 있습니까? 나와 다른 인종을 얼마나 수용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일치와 사랑과 희생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있는 곳에는 분열과 미움과 착취입니다.
미국은 우리만 잘 살아보겠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서 이러한 수용 능력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은 촛불과 태극기가 사로의 수용 능력이 없기에 분열과 갈등이 생깁니다. 이렇게 수용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세리를 미워하는 유대인들과 같습니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하늘나라가 없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불편한 자리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수용 능력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창기의 친구가 되십니다. 나와 다른 것을 포용하십니다. 이것이 천국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