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5장 32-46 (인간의 존엄-1)

어제 Trump 대통령이 DACA program을 종료시켰습니다. 불법으로 부모를 따라 미국에 온 자녀들이 불법체류자가 됐습니다. 미국의 의회가 다루어야 합니다. 의회도 Schedule이 너무나 빡빡해서 다룰지도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걱정이 됩니다.  몇 차례 나누어 본문을 다룹니다.

오늘 본문은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었고 헐벗고 병들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돌본 것이 작은 자 소자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이러한 자들에게 양이라고 하며 하늘나라를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난하고 헐벗고 옥에 갇힌 자들을 돌보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소자를 무시한자들에게 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면서 이들을 염소라고 하며 영원한 형벌로 내어 쫓습니다.

소자는 우리의 도움을 받지만, 우리에게 보상하거나 갚을 능력이 없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돌보는 것이 예수님을 돌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제가 비유하는 것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고대 시대의 노예와 불법체류자, 영주권자를 비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가 오늘의 미국과 미래의 미국을 이해하게 됩니다. 불법체류자나 영주권자는 시민권자에 의하여 법적 제한과 제제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철학의 탄생지가 그리스 지역입니다. 그들은 도시국가를 이루며 살았고, 항상 전쟁을 하며 살았습니다. 전쟁을 해서 승리하면 노예를 얻게 됩니다. 노예는 국가의 산업의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노예에게 신분적 차이를 두고 그들을 짐승과 같이 다룰 때에 문제가 많은 발생합니다. 노예의 반란과 외부의 적과 내통하여 국가의 존립을 어렵게 합니다.  그러다고 전쟁을 안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끝없이 토론하는 자들이 소피스트입니다. 노예를 짐승으로 볼 것인가 사람으로 볼 것인 가입니다. 어떤 도시들은 노예들에게 일정한 권한과 자율권을 주어서 함께 살아가는 정책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플라톤은 노예의 주인들에 욕심으로 국가의 존립이 어려워진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플라톤은 국가의 존립은 노예가 문제가 아니라 노예 주인이 (Demos 법적 보호를 받으며 투표권이 있는 자들) 문제이기에 국가의 정치는 자신의 이익과 명예를 따르지 않은 현인, 철학자가 정치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현인정치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는 노예주인 Demo-Critic 정치적 발언권을 가진 시민들에 의하여 거부당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예제도에 대해서 탁월하게 대응한 사람이 그리스의 Alexander 대왕입니다. 그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에게 정치적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노예를 탄압하거나 마구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노예에게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지만, 정치적 권리를 제한합니다.

그리스의 Alexander가 세계 정복에 성공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과거의 정복자와 다르게 노예에 대한 자율권입니다. 노예를 짐승에서 인간으로 보는 존엄성이 나타납니다.

로마제국도 Alexander의 방법을 사용합니다. 노예를 짐승과 같이 다루는 것에서 벗어납니다. 로마도 노예와 지배국가에 대한 착취와 탄압이 결코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지 아니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노예들에게 군대복무의 기회를 주어 시민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오늘 날의 미국의 영주권 제도와 DACA program은 여러 가지 면에서 로마의 흔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나 로마나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미국의 미래도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미국은 이민자의 국가입니다. 백인우월주의자들이 구호중의 하나가 Blood and Soil,피와 땅입니다. 백인들이 피를 흘려서 Indian과 Mexican과 싸워서 미국을 건설했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미국의 주인은 백인들이라고 합니다.

내일 계속합니다.

마태복음 25장 14-30 (하나님을 믿지만 두려워하는 자는 믿지 않는 자보다 못하다).

예수님 당시에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에는 반이 노예였습니다. 로마시민과 노예들의 숫자가 거의 동등했습니다. 로마는 수많은 국가를 정벌하면서 식민지에서 쓸만한 사람들을 노예로 데려옵니다. 로마의 라틴이 당시 지중해의 헬라 국가를 군사적으로 정복했지만 문화적으로는 헬라가 라틴을 정복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노예들이 로마의 가정교사를 했기에 로마의 자녀들은 헬라 교육이 아닌 라틴 교육을 받습니다.

당시 노예들에게는 이러한 능력과 지식에 따라 다양한 계층과 직분이 주어지게 됩니다. 노예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본문의 종은 Dou’lo 하인으로 번역이 됩니다. 영어로는 Servant입니다. 주인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며 자신의 의사를 나태 낼 수 없습니다. Doulo 보다 높은 직급이 Diavkono입니다. 주인에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 할 수 있습니다. Diavkono는 집안의 살림을 책임지고 다른 종들 관리 감독합니다. 오늘 날의 Deacon 집사라고도 합니다.

주인과 함께 일하는 종이 있습니다. Sunergov입니다. 합성어로 // Suvn // ~와 함께 // Ergon // 일하다 입니다. 주인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입니다. 주인이 결정하지만 그 과정에 Sunergon이 깊게 관여합니다. 이 단어는 손(Hand)으로 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의사 Surgeon도 이 단어에서 유래했을 것입니다. 당시의 의사는 노예들이였습니다.

본문의 주인은 타국으로 가면서 3명의 종에게, 1 달란트, 2달란트, 5 달란트씩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오늘 날로 한 달란트를 백만 불로 계산 할 수 있습니다.

이 세 명의 종은 Servant, Deacon, Surgeon에서 Surgeon에 해당합니다. 우리들이 이 성경을 가장 오해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에게 받은 달란트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의 결과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본문이 종들은 주인의 동역자입니다. 믿음과 신뢰의 관계입니다. 주인은 자신의 전 재산을 맡기고 타국으로 떠납니다. 아마로 전쟁하러 갔기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믿어주는 종들에게 재산을 맡긴 것입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5 달란트 받은 자와 장사를 하여 5 달란트를 남기고 2 달란트를 받은 자도 장사하여 2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주인의 칭찬이 이상합니다.

(v.21 &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적은 일에 충성했다고 합니다. 주인의 입장에서는 많이 남기고 적게 남긴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인은 나를 믿어 준 것을 칭찬합니다. 5 달란트 2 달란트 남긴 것은 작은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v.21 & 23-b)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정확한 번역은 I will make thee ruler over many things. 나는 너를 Ruler로 만들겠다고 합니다.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주인과 같은 통치자 지배자입니다.

관계의 변화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달란트 받은 것으로 더 많은 것을 만들어 내야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이해합니다. 아닙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이해하면 바로 1 달란트 받은 자와 같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한 달란트를 땅에 파묻습니다.

그는 주인을 굳은자라고 합니다. 메마른 나무와 같다고 합니다. 냉정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는 주인을 심지 않는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는 데서도 모으는 자라고 합니다. 씨앗을 뿌리지도 아니라고 열매를 찾는 무자비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1 달란트 받은 자는 (v.25) 주인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을 Dulos로 생각했습니다. 자신을 Deacon, Surgeon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신자들은 자신의 결과로 자신의 신앙을 증명합니다. 그들은 Dulos입니다.

본문은 천국의 비유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신자들은 종말을 두려워합니다. 자신을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하나님에게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게으른 종이라고 합니다. 이단은 이러한 약점을 이용해서 종말을 두려움과 공포로 만들어서 게으른 것을 공갈협박을 합니다.

우리들이 열심히 열매 맺는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열매 맺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이해해야합니다.

계시록 12장 8절에 기가 막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심판의 순서가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동일한 취급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두려워하는 자는 믿지 않는 자보다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감사하고 기쁨으로 사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25장 1-13 (천국과 지옥의 차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합니다. 2017년, 9월 23일 입니다.  앞으로 한달도 남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행성으로 인하여 지구에 종말이 온다고 합니다. 그들이 인용하는 구절은 (계시록 12:1)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 그 발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12개의 별이 일직선이 되어 종말이 온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천국은 신랑을 맞으러 나가는 열 처녀와 같다고 합니다. 슬기 있는 자들은 기름통과 등불을 함께 준비했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이 들어있는 등불만을 들고 신랑을 맞이합니다.

신랑이 왔다고 맞으러 나오라고 합니다. 5명의 미련한 처녀들은 등불에 기름이 떨어져갑니다. 5명의 슬기로운 처녀는 Extra 기름통이 있기에 불을 계속 밝힐 수가 있습니다.

천국 앞에서 지옥이 나타납니다. 기름을 갖고 있는 자와 갖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과 지옥에서 식사하는 풍경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천국이나 지옥이나 음식이나 환경이 전혀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천국과 지옥에서 먹는 음식은 모두 같았습니다. 굉장히 긴 젓가락을 쓰는 것도 같았습니다.

밥 먹는 시간이 되자 드디어 천국과 지옥의 차이점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지옥에서는 밥을 먹으려고 긴 젓가락으로 음식을 각자 자기 입에 넣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긴 젓가락 때문에 먹을 수가 없어 서로 짜증을 내며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그 긴 젓가락으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을 다정하게 먹여 주면서 식사하는 것이었습니다. 보기에도 너무도 평화롭고 즐거운 식사시간이었습니다.

기름이 없는 처녀들이 기름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 기름을 꾸어 달라고 합니다. 절대로 줄 수 없다고 합니다. 결국 5명의 처녀들은 잔치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천국 앞에서 지옥이 나타납니다.

천국에 가려면 타인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기름이 없으면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기름을 주지 않는 처녀들은 현명하다고 합니다. 우리의 판단에는 그들은 지옥에 가야 할 사람인데 천국을 갑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까? 천국을 가는 것은 신부 집에 오기 전에 이미 결판이 났습니다. 천국 앞에서 지옥이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지옥은 이미 잔치하기 전에 나타났습니다. 지옥은 잔치와 상관 없이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이미 나타납니다.

(v.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슬기로운 자는 처음부터 마지막을 계산했습니다. 신랑이 언제 올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마지막을 생각하며 한 그릇의 기름을 더 준비했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이 바로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추가로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천국을 가는 자들은 언제나 한 병의 기름이 더 있습니다. 지루함입니다. 기다림입니다. 실망과 낙심입니다. 예수님이 언제 올 줄 모릅니다. 그저 기다릴 뿐입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은, 세상의 사건입니다. 현상입니다. 그들은 2017년, 9월 23일에 세상에 종말이 온다고 합니다. 그들은 100%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들에게 기름을 나누어 줄 필요가 없습니다. 12개의 별이 일직선이 되어 종말이 온다고 하는 자들은 적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도 알지 못하는 것을 자신들은 알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도 수많은 거짓 목사와 예언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 구절로 세상의 종말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준엄합니다.

우리는 언제 올지 모르는 예수님을 지루하게 기다립니다. 이것이 천국가는 신자입니다.

마태복음 24장 29-51 (종말은 공격 축구이냐? 수비 축구이냐?)

오늘 한국이 이란과 월드컵 예선 축구를 합니다. 축구는 공격축구와 수비축구로 나눕니다. 공격을 잘 하지만 수비를 제대로 못하면 경기에 패배하게 됩니다. 수비를 잘 하지만 공격을 못하면 승리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공격 축구를 더 좋아합니다. 사실 유명한 프로 선수들은 공격축구 선수들입니다. 그들은 수비 선수에 비해서 엄청난 인기와 연봉을 받고 있습니다. 공격수를 Star라고 합니다. 수비수로 Star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종말을 축구의 공격으로 해석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종말의 특정한 때와 사건과 현상에 깊은 관심을 갖습니다. 세상의 현상을 공격적으로 보고 종말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도 공격적으로 해석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주 위험한 해석입니다.

성경의 종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종말의 내용을 강조하면 종말은 우리에게 공격적 내용이 강조됩니다. 오늘 마태복음 24장도 종말이 일어날 때에 세상의 현상과 사건과 때가 강조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은 종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종말은 세상의 질서가 깨어지고 하늘의 질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내는 징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우리에게 구원이며 영광과 승리입니다. 그럼으로 이렇게 강조하십니다.

(v.30-31)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통곡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v.31)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이단은 이것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이단은 계시록의 특정한 부분을 차용해서 하나님은 피에 굶주린 심판자로 강조합니다. 그러한 사건은 우리와 무관한 사건입니다.  이단은 이렇게 강조합니다.

(계 8) 종말의 때에 땅의 1/3 타고 바다의 1/3 피가 되고 세상의 1/3이 피가 되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도 우리에게는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이단, 적그리스도는 믿는 자를 유혹하려고 종말은 세상에 대한 공격적 현상을 우리에게 강조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종말에 수많은 적그리스도들이, 거짓 메시야, 거짓 예수가 나타난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이유는 이러한 시대 상황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늘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의 상황을 잘 파악하라고 하십니다.

(v.45-46)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v.46)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종말에 이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축구의 수비수로 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종은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종은 (이 부분을 잘 이해해야합니다.) 그 집사람들에게는 종이 아니라 그 집의 살림을 종을 관리하는 감독 청지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지만 이 세상 사람에게는 청지기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청지기로 세상 사람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줍니다. 우리는 종말에 이중신분을 갖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종으로 양식을 맡겼고 우리는 세상에 하나님의 양식을 나누어줄 청지기입니다.

우리의 종말은 수비 축구입니다. 어떠한 자연적 재해나 세상의 현상으로 종말을 보지 않습니다.  자극적이거나 짜릿하거나 감각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받은 은혜와 사랑을 우리 주변에 나누는 일상의 삶을 사는 것이 종말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종말입니다.  청지기로 나의 삶을 나의 이웃과 나누는 것이 종말입니다. 우리는 수비의 축구를 합니다.

한국의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은 종말에서 수많은 공격축구를 했습니다.  박태선, 오대양, 다미 선교회, Dr. Kemp, 이스라엘 회복 운동을 합니다.  그러다가 수없는 실패로 세상에서 수치와 조롱을 당했지만, 오늘도 공격축구를 합니다.  수비축구를 하면 누워서 축구한다고 침대 축구라고 조롱합니다.  사악한 이단과 대형교회들이 연합해서 공격적 축구를 합니다.  신학도 성경도 없는 교회가 됐습니다.

종말은 수비입니다. 오늘 주어진 삶에서 신자답게 언제 종말이 올 것인가를 기대하며 지루한 삶을 사는 것이 종말입니다.  이것을 믿고 사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24장 15-28 (종말의 증거 -죽음과 생명)

이단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성경은 요한 계시록과 다니엘서입니다. 두 성경의 공통점은 세상의 종말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단이 이 성경을 악용하는 이유는 신자들에게 공포심을 조장하고 돈을 뜯어내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단은 복음을 공포심을 갖게 만듭니다.

(v.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예수님이 다니엘을 인용하시는 예수님이 Messiah 우리의 구세주 되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가 우리에게는 종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말이 정립되지 아니하면 종말은 특정한 시간과 특정한 사건이 되어버립니다. 많은 적그리스도들이 예수님이 언급한 다니엘서 9장으로 종말의 시간을 계산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계산하는지 계산 방법은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그때를 기다릴 뿐입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경고하십니디.

(v.23-26) 그 때에 사람이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고 합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큰 기적과 능력을 보여 우리들을 미혹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골방에 있다 하여도 // 믿지 말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는 수많은 거짓 Messiah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속아서 비참한 죽음을 당합니다. 오늘 날도 수많은 적그리스도에게 속아 재산과 생명과 가정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적 그리스도의 증거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믿으며 사는 것을 종말론적 삶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미래적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현재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에 예수님을 어떠한 모습으로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들이 미래의 사실을 믿기에 현재에 우리의 삶의 내용과 인격이 주님을 만날 만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올바른 종말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왜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인다고 하십니까? 복음을 가장한 적그리스도는 죽음과 공포를 주입합니다.

그들은 특정한 사건과 때를 종말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특징은 매우 성경적인 것 같은데 삶의 내용이 매우 비인격적입니다. 가장 큰 특징은 매우 문란합니다. 돈을 중요시합니다. 공포감을 조성합니다. 자신을 신격화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공통점은 교회를 비난하고 공격합니다.  교회가 잘못하면 비난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를 허물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허무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이러한 거짓에 속아넘어 교회를 떠납니다.    이것이 죽음입니다.

죽음과 생명을 구별해서 적그리스도를 이기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4장 1-14절 (예루살렘과 세상의 종말.)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3개의 성전이 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 스룹바벨의 성전, 헤롯대왕의 성전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헤롯 성전은 BC 20년에서 시작해서 AD 64년에 완성됩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십자가에 죽고 부활 할 때까지 성전은 공사중이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주님이 승천하시고도 약 25년 후에 완공됩니다.  그리고 AD 70년에 로마의 티투스에게 완전히 파괴됩니다.

파괴되고 남은 일부가 오늘 날 통곡의 벽입니다.  오늘 날 성전은 오스만 터키가 쌓은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성전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과 스룹바벨의 성전은 이방인에 의하여 파괴됐기에 현재 공사중인 헤롯 성전도 파괴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성전 모독에 대한 불경죄에서 벗어나려고 완곡하게 성전의 미래를 질문합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위하여 쓰인 서신이기에 성전이 무너지는 질문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성전이 무너지는 것은 엄청난 모독입니다. 동시에 죽음을 당합니다.

예수님은 돌 위에 돌 하나 없이 파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도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 만에 세우겠다는 것을 유대인들은 성전모독으로 이해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예수님은 부활로 새로운 성전이 세워질 것임을 이미 가르쳐 주셨습니다.

역사적으로 솔로몬의 성전은 바빌론에게 스룹바벨의 성전은 시리아에게 헤롯의 성전은 로마에 의하여 파괴당합니다. 성전 파괴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엄청난 죽음을 당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팔렸고 고국을 떠나야했습니다. 유대인에게 Diaspora의 시작이고 세상의 종말이 됩니다.

오늘 날 세대주의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인용하는 본문입니다. 또한 오늘 날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맹목적 회복을 강조하는 근본주의자들의 시작이 여기서 나타납니다.

특히 한국 교회가 이러한 영향으로 성경과 신학에 근거하지 아니하는 선교가 나타납니다. 선교와 복음 전도를 앞세워 이러한 일에 대형교회들이 앞장 서는 것이 통탄 할 일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회복되면 예수님이 오신다는 유대적 사고방식을 예수님에게 적용하는 아주 잘못된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3번의 성전 파괴 역사에서 하나님은 성전을 파괴한 나라들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합니다. 그 대신에 유대인들을 건재했고, 성전은 다시 지어졌습니다. 바벨론과 시리아 제국도 사라졌고 로마 제국도 사라졌습니다. 유대인들은 다시 유대 땅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제자들이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v.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예수님에게 종말은 복음이 온 민족에게 전파 될 때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세상의 종말은 특정한 시간과 특정한 때가 아닙니다. 지금이 종말입니다. 현재가 종말입니다. 이단은 항상 어떠한 상황과 현상을 차용해서 특정한 때와 시간을 말합니다.

이단들은 성전이 회복 될 때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에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세상의 종말은 현재입니다. 오늘입니다.

(딤후 3:1-7)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2)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4)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6)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7)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성경은 오늘이 말세입니다.  오늘이 세상의 종말입니다. 우리들이 현재 종말에 있습니다. 이단은 이것을 거부합니다.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종말이 특정한 사건과 시간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성경의 진리를 거부합니다.

예루살렘에 세워진 이슬람 성전이 파괴되고, 그 자리에 유대인들의 성전이 세워진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구약의 유대인들이 됩니다. 또한 많은 한국 교인들은 Messianic Jew //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습니다. 일부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와 삼위일체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오늘도 사람의 손으로 성전을 회복한다면 그 성전은 반드시 누군가 의하여 파괴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 통치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하늘에서 새 하늘과 새 예루살렘이 올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땅의 예루살렘이 우리의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이 거하실 만한 처소가 되기 위하여 성령 안에서 지어져가는 성전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우리가 성전입니다.  오늘이 종말입니다.

그럼으로 조급한 종말론에서 벗어나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23:29-39 (정상적 인간, 정상적 인격)

아주 본질적 문제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천국에 간다고 합니다.  그러면 지금 예수 믿고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직전에 가장 신랄하게 공격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 사두개인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이 전체가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니고데모,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숨어서 예수를 믿는 종교지도자들도 있습니다.

(v.29-30)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이러한 예언자들의 무덤을 화려하게 장식합니다. 이러한 의인들에게 기념비를 세워줍니다. 악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은 이러한 의로운 선지자들이 조상에게 핍박 받으며 죽은 것을 안타깝게 여깁니다. 자신들이 조상들과 같이 선지자와 의인을 죽이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날까요? 왜 조상들의 실수를 반복할까요?

우리들도 나는 저러한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합니까? 좀 더 직설적 표현하면 우리를 왜 똑같은 죄를 매일 반복하면서 살아갑니까?  매일 회개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렇게 살다가 천국가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신앙은 인격입니다. 우리에게는 미래의 하늘나라가 있고 현재의 세상이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중간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격의 변화입니다.  많은 신자들은 이러한 인격을 신앙과 무관하게 생각합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는 율법을 다 지켰기에 완벽한 종교인입니다. 예수님이 너의 것을 팔아 가난한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그는 근심하며 주님을 따르지 못합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까? 그는 인격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따르지 못합니다.  그의 물질과 돈이 그의 인격을 압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물에 손을 씻으면서 자신이 예수를 죽이는 것에 죄가 없다고 하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죽음으로 보냅니다. 왜 이러한 모순의 행동을 합니까? 빌라도는 예수님을 만났지만, 인격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은 인격입니다. 나의 인격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감당하는 인격이 되지 못하면 평생 신앙 생활이 매우 고생스럽습니다. 종교로 자신을 증명하려고 노력하는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위선자가 됩니다. 자신의 열심과 능력으로 자신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한국 교회는 이러한 거짓의 행동을 축복이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극단적 성령주의에 빠져서 자신의 인격을 상실하는 영지주의자가 됩니다. 세상과 분리하려고 합니다. 세상을 왜곡하고 자신의 인격과 양심을 믿지 않습니다. 극단적 이원론을 지지합니다. 이성과 분리되는 행동을 합니다. 세상의 법과 질서를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자들을 화인 맞은 양심이라고 합니다. 성령님을 인격의 영으로 믿지 않습니다.

신앙은 인격입니다.  정상적인 인간이 되어서 하늘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정상적인간으로 만들어 놓으시려 합니다.  정상적 인간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르는 인격입니다.

마태복음 23장 25-26 (깨끗한 그릇과 큰 그릇)

우리들이 사람 됨됨이를 그릇에 비유합니다동양은 그릇의 크기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그러나 서양은 그릇의 깨끗함을 강조합니다오늘 본문은 이러한 내용을 다룹니다.

 천하를 담는 그릇이라고 할지라도 더러우면그 사람과 많은 사람들이 불행해집니다그러나 비록 작은 그릇이지만 깨끗하다면 그 사람에 의하여 많은 사람들이 행복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12명의 작은 그릇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예수님은 죄가 없는 깨끗한 그릇이기 때문입니다우리들이 수천수억이 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이겨내지 못합니다우리의 그릇은 더럽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우리는 깨끗해지기보다 큰 그릇이 되려고 합니다이것이 사탄의 유혹입니다우리는 이러한 유혹에 쉽게 빠집니다.

(v.25-26)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v.26)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입니다그들은 다른 사람에 비교하면 큰 그릇들입니다상석에 앉고 백성들로부터 대접을 받았습니다오늘 날의 목회자들입니다.

 그들은 겉은 깨끗했습니다거룩했습니다종교적으로 완벽했습니다그러나 그 안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합니다.

 오늘 날의 언론과 Gossip으로 돌아다니는 목회자들과 차이가 없습니다금전적 부정을 저지르고설교를 표절하고추악한 이성 관계를 갖고잘못된 중독에 빠져있는 종교인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의 특징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똑같습니다하나님의 말씀으로 죄인과 의인을 구별해서 만들어냅니다상대방을 죄인으로 만들고 자신을 의인으로 만듭니다자신의 추악함과 죄악을 감추려고 자신이 누구보다도 거룩하다고 강조합니다그러기 위해서 상대방을 죄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상대방을 몇 절의 성경 구절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위선의 종교인들의 손에는 항상 돌이 들려져있습니다자신의 죄악을 모르기에 화인 맞은 양심이기에용서와 사랑은 전혀 없습니다수많은 변명과 이유로 자신의 정당성을 나타냅니다이것이 이 시대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종교인들입니다.

 우리는 겉은 깨끗합니다그러나 안이 더럽습니다이제 부터는 겉으로 자신을 판단하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우리의 안을 보고겉의 위선과 거짓에서 회개해야합니다.          

마태복음 23장 23-24절 (십일조)

우리들은 돈에 매우 민감합니다. 교회에는 수많은 십일조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와 간증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십일조를 했더니 많은 축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이기에 더 이상 십일조 드리지 아니해도 된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십일조 설교하는 목사는 믿음이 좋은 목사이고 십일조 설교하지 못하는 목사는 비겁한 목사라고도 합니다. 십일조는 교회의 폭탄과 같다고 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분문에 따르면 잘못된 십일조입니다. 열의 하나를 드려도 십일조입니다. 그러나 열의 하나를 못 드려도 십일조입니다. 열의 다섯 또는 아홉을 드려도 십일조입니다.

본문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완벽한 십일조를 했습니다. 그들은 계산상으로 완벽한 십일조를 했지만 주님으로부터 저주를 당합니다.

(v.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합니다. 박하, 회향, 근채는 이스라엘의 어느 곳에서도 쉽게 얻는 작물들입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식물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아주 사소한 것 까지 철저하게 완벽하게 십일조를 했습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오해하는 것은 십일조를 열의 하나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정확히 하나님에게 십의 삼조, 수입의 30%을 드리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첫째 십일조는 모든 수입의 10%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십일조입니다.

두 번째 십일조는 레위지파를 위한 이스라엘 11 지파의 십일조가 있습니다. 레위지파는 이러한 십일조로 생계를 유지하고 이것을 저축해서 일 년에 한 차례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여행경비로 절기를 지켰습니다.

세 번째는 십일조이지만 매 3년 마다 레위인 이방인 고아 과부를 구제하는 특별헌금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 3년 마다 십일조로 구제를 했습니다.

그럼으로 십일조가 아닙니다. 최소한 20% 또는 30%을 드렸습니다.

나의 수입이 $ 5천불이기에 $ 5백 불을 하는 것으로 십일조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일조는 20-30%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천불 또는 천 오백불을 해도 주님으로부터 저주를 당합니다.

이 부분이 우리를 안심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많이 해도 예수님에게 책망을 듣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분들은 수입에서 TAX을 포함하느냐 아니 하느냐 질문도 합니다.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New Jersey에서는 아이들 2-3명 키우면 최소한 4-5천불 이상의 생활비가 듭니다. 교회에 십일조 할 여력도 없습니다. 십일조 하면 생활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헌금은 고사하고 적자입니다. Credit card 빚만 늘어갑니다.

성경에 보면 주님이 부자의 헌금과 과부의 두 렙돈의 헌금을 비유합니다. 예수님은 과부가 생활비의 전부를 헌금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헌금을 강요하고 그 결과 우리들이 정상적 생활을 못하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이러한 과부의 헌금을 거절하고 오히려 예수님이 돈을 주시어 생활비에 보태 쓰라고 할 것 같습니다.

두 렙돈은 당시 로마의 목욕비입니다. 로마는 먹는 것보다 목욕이 더 중요했습니다. 목욕은 최저 생계를 의미합니다. 왜 예수님이 이렇게 냉정하십니까? 왜 그녀를 도와주지 않습니까?

그녀는 자신의 생활비도 하나님의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목욕도 생활이며 헌금도 생활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당연하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비 5천 불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5백 불을 십일조를 드렸기에 4천 오백불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4천 5백불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들이 4천 5백불을 사용하면서 하나님에게 얼마나 감사합니까? 얼마나 신자답게 사용합니까? 적자이지만, 적지만, 하나님에게 감사합니까?

그럼으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3-b)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 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우리들이 헌금을 드리고 남은 생활비에 정의 (Justice)와 긍휼 (Mercy)와 믿음 (Faithfulness)가 있습니까? 우리 생활비에 이러한 것이 없다면 우리의 헌금은 위선과 거짓의 헌금입니다.

십일조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정하는 신앙고백입니다. 십일조도 중요하지만 그 나머지를 우리들이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수입만 십일조 아닙니다. 우리의 시간, 재능, 지식, 기술 모든 것이 십일조입니다.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과부에게는 목욕도 헌금이고, 생활비도 헌금입니다.

마태복음 23장 16-22 (신앙의 일식)

(컴퓨터 관계로 늦어져 죄송합니다.)

어제 일식을 봤습니다.  저도 Solar Glasses을 구하지 못해서, 유리에 촛불로 검정 그슬림을 만들어 일식을 봤습니다.  태양의 실제 크기가 작다는 것을 알았고 매우 놀라운 모습이였습니다.  VBS 선생님들도 제가 만든 유리로 일식을 볼 수 있었습니다.  뉴저지는 일식이 80% 정도 일아났다고 합니다.

NASA TV 중계를 통해서 일식이 100% 일어난 곳은 대낮인데 초저녁과 같이 어두워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낮이 밤과 같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식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와 태양 사이에 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달이 태양의 빛을 가리우기 때문에 우리는 태양의 빛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도 일식 현상이 나타납니다.  본문은 맹세에 대한 내용입니다. 당시에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을은 금과 은으로 드리는 맹세의 제물은 반드시 지켜야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금과 은으로 제물을 들리면 자신들에게 제물의 일부가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전이나 제단에게 맹세하면 그 맹세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자신들에게 금전적 이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제단이나 성전을 뜯어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금전적 이익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세 자신의 이익을 따라서 맹세를 판단하는 종교지도자들을 맹인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만 4 차례 맹인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당시의 맹인은 선천적 맹인이 아니라 후천적 맹인입니다.  과거에는 시력이 좋았지만 현재는 시력이 매우 나쁩니다.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들이 눈에 일식이 일어난 것과 같습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금전적 욕심, 자만감, 교만, 욕심은 우리를 맹인으로 만듭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마음에 가득차면 우리에게 일식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못 보게됩니다.  이것이 맹인입니다.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그러나 자신이 어둡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은 대낮과 같다고 합니다.  의롭고, 당당하고 휼륭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당시의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의 모습입니다.  종교 생활하는 자들의 특징이 바로 이러한 자들입니다.  자신들은 의인이고 타인들은 죄인입니다.

오늘 날 수많은 영적 맹인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과 야망 때문에 맹인이 되어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것들로 인하여 일식이 일어나 마음이 어둡습니다.  거짓과 미움 때문에 자신이 어떠한 일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마음의 일식으로 마음이 어두워져 죄악을 죄악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맹인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많은 것들이 사라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눈이 떠집니다.  이것이 영적 안목입니다.  영적 안목은 이상한 체험과 신비적 사건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진정한 영적 안목은 (갈 5) 인격적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죄악들이 사라질 때에 영적 안목이 생깁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