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3장 13-15 (종교와 신앙 그리고 신학의 차이 -2)

어제 미국 장로교에서 새롭게 목회 할 7분의 목사님들에게 헌법 (Polity)의 기본 정신을 강의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 분이 이렇게 언급 했습니다. 한국의 정치와 사회에서 중요한 주제가 포퓰리즘 (Populism) 대중 영합주의가 있는 것처럼 오늘 날 교회에도 Populism 이 있다고 합니다.  포퓰리즘 (Populism) 은 지도자가 일반 백성들이 원하는 대로 맞추어주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요구에 영합하는 것입니다.

당장 백성들의 필요를 충족시키지만  장기적 관점에서는 국가나 단체가 어려워질 가능성도 내포합니다.  또한 Populism 대중 영합주의는 일반 교우 (대중)들과 목회자들이 분리되는 현상을 만들어냅니다. 일단 대중은 일반 교우들은 목사와 같은 지도계층이 아니라는 의미가 됩니다. 제가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만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종교적인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유대 종교의 경직성을 파괴하신분입니다. He come to destroy the religious rigidity of the Judisim.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종교지도자들에 의하여 공격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예수님의 기적과 능력은 당시의 백성들에게 포퓰리즘 (Populism) 대중 영합주의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이것으로 자신이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는 방법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과 제자들은 이것을 오해해서 예수님을 정치적 경제적 Messiah로 추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대로 포퓰리즘 (Populism) 대중 영합주의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백성들의 요구를 거절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백성들은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칩니다.

예수님이 포퓰리즘을 거부하시는 중요한 단서가 예수님의 설교입니다. 예수님의 많은 설교는 대중영합주의가 아닙니다.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이 아닙니다. 흑백논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설교가 당시의 백성들에게 많은 부분에서 불투명했습니다.  그럼으로 예수님은 많은 예화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럼으로 귀있는 자가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죽음 이후에 일어날 생명과 영생을 말씀하셨습니다. 죄인에 대한 심판과 의인에 대한 구원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우리 입장에서는 흑백이 아닌 회색지대입니다. 믿어야만 합니다. 확실하고 뚜렷하지 아니하기에 믿음으로 받아들어야 합니다.

오늘 날 우리 목회자의 설교가 어떠한 지 반성합니다.  많은 부분에서 흑백입니다. 단순합니다. 복잡하면 안 됩니다. 교인들의 입장에서는 회색지대가 없습니다.  목회자들은 교인들에게 은혜를 주어야 한다는 강박증에 빠져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이삭을 죽이는 것이 단순합니까? 모세가 출애굽 하여, 광야에서 백성들과 다투며 사는 것이 간단합니까? 다윗이 사울과 아들에 의하여 왕이 되는 과정이 단순합니까? 욥기의 욥의 기도가 흑백논리로 설명이 됩니까?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우리들이 의심하지 말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수많은 갈등과 고민과 아픔과 기쁨과 행복을 내포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을 가장 신학으로 잘 적립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대부분의 바울 서신은 당시의 복잡한 상황에 대한 신학적 내용입니다. 당시의 교인들이 할례와 율법의 흑백 논리에서 벗어나 혼란스러운 상황에 있을 때에 보낸 서신입니다.

우리는 저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나 신약의 히브리서는 이러한 혼란한 상황에 대한 완벽한 신학적 증명입니다. 이것이 오늘 날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럼으로 저는 유감스럽지만 오늘 날 교회에는 대중적 영합주의 Populism이 존재한다고 확신합니다. 예수님에게 대중영합적 인 것이 있지만, 끝내는 거부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많은 부분에 목사들이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에 영합하는 교인들의 책임도 피하지 못합니다.

우리 교우들이 고민하지 아니하고 신앙 생활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됩니다.

예수님이 나의 문제의 해결사가 된다면 우리는 주님을 다시 한 번 십자가에 죽이게 됩니다.

마태복음 23장 13-15 (종교와 신앙 그리고 신학의 차이)

종교는 해당 종교가 요구하는 대로 행동하면 선과 진리이고, 그 종교가 요구하대로 하지 못하면 악과 거짓이 됩니다. 종교는 그 종교가 요구하는 행위의 결과로 Right and Wrong, 옳고 그름을 만들어냅니다. 이러한 종교를 원리주의 또는 근본주의라고 합니다.

기독교도 종교가 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정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부당한 사람이 됩니다. 죄인이 됩니다. 그럼으로 그들은 율법을 만들어 종교적 행위로 자신들의 신앙의 정당성을 증명합니다. 율법에 맞지 아니하면 죄인이 됩니다.

(v.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고 하십니다.

오늘 날 많은 신자들이 종교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과 못 사는 것으로 자신과 이웃을 판단합니다. 그 결과는, 죄인과 의인을 만듭니다. 종교적 행위, 기도 예배, 봉사 헌신, 선교는 우리의 신앙을 형성하는 중요한 그릇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교에서 신앙으로 발전해야합니다.

신앙은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면 모든 일들이 옳고 그른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을 알게 됩니다. 종교는 흑백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흑과 백이 아니라 회색지대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만 선과 악의 구별이 안 됩니다. 기도하지만, 예배 드리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과 우리들이 차이가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여러가지 면에서 우리보다 낫습니다.  승리보다 패배가 많이 나타납니다.

실화입니다. 길에서 두 사람이 피가 터지게 싸웁니다. 싸움을 본 사람 중의 하나가 Police에게 전화로 신고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옆의 사람이 전화를 못하게 합니다. 만약에 전화해서 Police가 오면 저 두 사람 중의 하나는 감옥에 가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더욱 더 불행해지고, 그 일로 가족에게 고통을 줄 것이다. 차라리 저렇게 둘이 싸워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저들에게 더 낳은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친구가 이렇게 말을 덧 붙입니다.  만약에 저들이 Police에게 체포되면 너는 증인으로 경찰에게 찾아가야하고 심지어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해야한다. 그래도 경찰에 신고하겠는가? 그는 경찰 신고를 포기합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면 많은 회색지대가 나타납니다. 선과 악의 구분이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신앙은 이러한 고민을 줍니다.

신앙은 두 사람이 피가 터지게 싸우는 것을 보면서, Police에게 전화를 하는가 못하는 가의 상황을 주게 됩니다. 선과 악의 구분이 확실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판단에 상황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해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인본주의적 신앙과 같은 모습을 갖게 됩니다.

신앙은 어떠한 선택이 정답이라는 것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내가 선택한 것에 최선을 다합니다. 하나님에게 책임을 미루지 않습니다. 비록 나의 선택이지만,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하면 나의 십자가가 나타납니다. 고민과 아픔이 나타납니다. 나의 책임과 의무가 나타납니다. 얼마나 정직하게 신실하게 살 것인가 나타납니다.

신앙은 피터지게 싸우는 것을 보고, Police에게 전화를 걸어도 나의 십자가 나타납니다. Police에게 전화를 걸지 아니해도 나의 십자가 나타납니다. 신앙의 종교와 같이 옮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무능과 죄악이 나타납니다.  신앙은 좋은 결과이든 나쁜 결과이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이중성을 갖고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렇게 신앙 생활하면 신학이 나타납니다. 기독교도 신학이 상실되면 미신화 됩니다. 신앙으로 살면 신앙고백을 만들어냅니다. 신앙 고백은 우리의 현실과 상황에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신학은 주어진 상황을 극복합니다.

신학적 신앙고백은 우리에게 위로와 힘을 제시합니다. 하나님 약속을 믿게 합니다. 신앙고백은 종교의 위험성에 벗어나게 하고 신앙으로 사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격려와 위로를 알게 합니다. 신앙 고백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종교에서 신앙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이렇게 신앙으로 살면 내 자신의 신학을 갖게 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나의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나의 신학을 갖는 사람은 자신의 현실에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 가를 알게 됩니다. 신학은 상대적 선과 악이 아닌 절대적 선과 악을 구분하고,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을 대치시키지 않습니다.

유감스러운 것은 한국교회는 신학이 없기에 신앙이 실종되고 종교적으로 행동합니다. 그 결과 교회와 목사와 교인들이 이 세상에서 짐스러운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종교에서 신앙으로 그리고 신학적 고백을 하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23장 1-12 ( 이 시대의 스타 – 모세의 자리)

본문에 모세의 자리가 나옵니다. 성지순례 가면 회당에 모세의 자리가 있습니다. 돌로 만든 것인데 모세의 자리입니다.

(v.2-10)을 보면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것은 행하고 지키지만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운다고 합니다.

그들은 거룩함을 나타내려고 이마에 말씀의 통을 부착하고 옷 술을 길게 하고 잔치에서는 상석에 앉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시장에서 사람들로부터 인사 받는 것과 랍비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모세의 자리에 앉는 것이 누구입니까? 바로 저 자신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설교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합니다. 제가 그렇게 살고 있는지 반성합니다. 저는 별로 일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처럼 고생하고 있지 않기에 회개합니다. 저는 교회에서 가운을 입고 설교단에 앉아서 설교하며, 식사 때마다 대접을 받습니다. 여러분에게 목사님으로 존칭을 받습니다. 저는 이 시대의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한 마디로 저에게 통고하십니다.

(v.11-12)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v.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만 모세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모세의 자리가 있습니다. 아버지로 어머니로 모세의 자리가 있습니다. 아내와 남편으로 모세의 자리 있습니다. 돈과 직책의 모세의 자리가 있습니다. 직장과 사업에서 모세의 자리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자녀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기를 원합니다. 모세의 자리는 명예와 힘과 권위의 상징입니다.

모세의 자리는 세상의 스타가 되는 것입니다. 밤하늘의 별과 같이 아름다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Star라고 합니다.

그러나 밤 하늘의 별들을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서 보면 추악한 행성들입니다. 다른 유성들에 의하여 맞은 수많은 흔적이 있고 스스로 폭발한 분화구들도 가득 차 있습니다.  아무런 생물도 살지 못합니다.

별이 아름다운 것은 별이 아름다워서 아닙니다. 별을 비추어 주는 태양과 같은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빛을 받아서 별은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별들은 착각을 합니다. 자신이 스스로 빛을 발산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빛이 나는 스타가 아닙니다. 저는 빛이 나는 별이 아닙니다. 그럼으로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이 맞습니다. 높이는 자가 낮아지고 낮추는 자가 높아지는 것도 맞습니다.

왜 우리들이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수많은 상처와 아픔을 갖고 있는 별들입니다. 우리들이 아름다운 이유는 우리를 비추는 빛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그럼으로 목사인 제가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별이 아닙니다. 목사 이전에 진실한 인간이 되고 정직해야합니다. 우리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야만 빛 되신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빛을 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총의 빛이 필요합니다. 저도 이 러한 은혜의 빛에 빚진자 되지 않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2장 34-40 (히틀러의 타락한 눈물)

우리들이 타락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타락은 그 사람의 행동이 올바르지 못해서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마약으로 술로 타락하면 몸과 마음이 파괴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세상의 타락입니다.

그러나 종교적 타락은 세상의 타락과 반대입니다. 종교의 타락은 자신을 거룩한 것으로 위장합니다. 자신을 신적인 존재로 높입니다. 그리고 타인을 약하게 죄스럽게 만듭니다. 이러한 종교적 타락은 오늘 날의 IS에서 가장 잘 나타납니다. 종교적 타락은 원리주의자나 근본주의자들에게 나타납니다.

타락한 종교 집단,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종교적으로 타락하면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자신이 이미 신과 같은 존재이기에 사람을 사람 취급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되신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종교적으로 타락하는 자들은 이것을 모릅니다.

(v.37-39)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v.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하십니다. (v.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십니다.

종교적으로 타락하는 자들은 자신의 거룩함을 나타내려고 군중 앞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이것은 매우 심리적 눈물입니다.  자신의 죄악에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받아 눈물을 흘립니다.  또 하나는 군중이 자신의 눈물에 속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그 눈물은 거짓의 눈물입니다.

Hitler는 곧잘 울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예수를 가장 사랑한자입니다. 독일군의 군복에 철십자가를 달아줄 정도였습니다. 그 십자가를 달고 6백만의 유대인을 죽였습니다. 그는 울음으로 독일국민을 속였습니다. 그 울음으로 자국민 수천만을 죽음으로 몰아냈습니다.  인간이 울어도 그 인간의 눈물은 죄인의 눈물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아닙니다.

우매한 백성들은 눈물에 속습니다. 미련한 교인들은 그 눈물을 예수의 눈물이라고 합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것을 보지 않습니다. 독일국민들은 눈물에 속에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지금도 그 죄의 값을 치루고 있습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의 거룩한 종교적 행위가 있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의 금식, 십일조. 이웃 구제와 봉사, 항상 기도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날 교회에도 이러한 종교적 거룩이 있습니다. 이러한 가짜 눈물의 사람들은 이러한 종교적 행위로 자신의 거룩을 증명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거룩함과 비교해서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하면 죄인이라고 합니다. 성경의 구절을 인용해서 죄인이라고 합니다. 그럼으로 그들을 세리와 창기와 병든 자들을 죄인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이러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독사의 자식, 회칠한 무덤이라고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이러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입니다. 히틀러가 눈물을 흘리고 십자가를 사랑한다고 했지만 예수님을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사람들의 가슴에 십자가를 달아주고 그 십자가를 이용해서 수많은 목사들을 죽였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본 훼퍼 목사입니다.

오늘도 몇 개의 성경구절을 인용해서 우리의 이웃에게 돌을 던지고 정죄하는 거룩한 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천박하고, 낮고 무지하고, 연약한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셨기에 우리의 약함에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는 하늘에서 땅으로 오셨습니다. 그의 발걸음과 행동은 우리와 똑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인간의 죄를 덮고도 남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신 분입니다. 죄와 사랑은 동등한 것이 아니라 사랑은 죄를 덮고도 남습니다.

우리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종교적 거룩함에서 벗어나 세리와 창기가 되길 바랄 뿐입니다. 이때에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이 찾아옵니다.

우리에게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타락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는 모습이 있다면 우리의 신앙은 주님이 요구하시는 신앙이 됩니다.

마태복음 22장 23-32 (죽은 자는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이 부활을 믿지 않는 이유는 모세오경만을 믿습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는 부활의 사건이 없습니다.

그럼으로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이 도전합니다. 모세의 율법에 형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의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아들을 낳도록 했다고 합니다.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첫째 형님이 장가들었다가 자식이 없이 죽었습니다. 그러자 // 큰 형수가 둘째 동생과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둘째도 죽고 셋째도 죽고 일곱 형제가 다 죽었습니다. 큰 형수는 일곱 형제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면 부활할 때에 큰 형수는 7 형제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는 가 묻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을 하십니다.

(v.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장가와 시집은 인류의 생존의 법칙입니다. 결혼은 인류의 문화와 정신의 모태입니다. 만약에 결혼이 존재하지 아니했다면,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인간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활 이후에 결혼, 시집과 장가가 사라진다는 것은 부활은 우리에게 새로운 존재 방법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 관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v.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하나님이 사두개인들이 믿는 모세오경에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시간적으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모세보다 약 450년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450년 전에 죽은 과거의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시체는 썩어있습니다. 그들은 흙이 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현재형으로 말씀을 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죽지 않고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살아있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 산자의 하나님이시라 합니다.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모순을 자신들이 읽는 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자의 하나님, 우리들의 하나님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자들의 하나님도 됩니다.  우리들이 볼때에는 죽은 자이지만, 그들은 살아있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 죽었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죽지 않았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시각을 갖는 우리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22장 15-22절 (일반은총과 특별은총)

본문은 예수님을 시험에 빠지게 하려고 세금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당시의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정당성을 질문합니다.

당시 열심당이나, 바리세인들은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을 하나님에 대한 배신으로 이해했습니다. 반대로 사두개인, 헤롯당원들은 로마에 세금 내는 것을 정당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세금을 내지 않겠다고 하시거나 내겠다고 하시면 어느 한 쪽에서 비난과 공격을 당합니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십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중요한 신학적 변경은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에 대한 이해입니다. 종교 개혁이전에는 스콜라 철학의 영향으로 일반은총은 특별은총에 비해서 하등하거나 열등한 것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으로 특별은총과 일반은총은 동등하게 취급을 합니다. 우리는 특별은총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에서 많은 오해를 합니다. 특별과 일반은 동등한 내용입니다. 다만 특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의 입장에서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특별한 은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전혀 특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반적 은총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도 일반적 은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일반적 은총은 자연의 질서와, 군대와 경찰, 정치, 지식과 과학과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것을 하나님의 일반적 은혜로 이용하고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자연보호, 환경을 보호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일반적 은혜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반적 은총이 없으면 생존하지 못합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천하게 여기고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은총을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많은 한국교회는 아직도 종교개혁이전의 신학에 젖어있습니다. 이것은 카톨릭적 사상에 젖어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은총이 더 높고 일반은총은 낮은 것으로 계급적 판단을 합니다.

종교개혁은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의 동등화를 이루어 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입니다.  이러한 신학을 근거하여 만인제사장이 나타납니다. 목사와 같은 성직이나 우리들이 생업을 위하여 갖고 있는 직업이 동일한 하나님의 부르심, Calling from God입니다. 즉 Vocation 소명과 사명이 됩니다.  차이가 없습니다.

그럼으로 예수님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는 일반은총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는 특별은총입니다.  당시에 로마는 인두세를 바치지 않으면 로마는 그 사람을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너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십니다.  일반적 은총에 최선을 다하며 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일반적 은총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귀하게 여기는 방법은 일반적 은총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 때에 귀하게 나타납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이 하나님의 일반적 은총이지만 동일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라는 것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2장 1-14 (우리의 옷)

본문에서 왕이 왕자의 결혼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기쁨의 초대입니다. 그러나 초대 받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참석을 거부합니다. 심지어는 초대장을 들고 찾아간 종들도 죽입니다. 그러자 왕이 군대를 보내어 초대를 거절한 사람들을 죽입니다. 매우 살벌합니다.

왕은 왜 이러한 일을 만들어 냅니까? 왕자는 왕의 아들입니다. 왕자는 왕의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초대 받은 사람들이 왕자의 결혼에 참석을 거부하는 이유는 왕자가 싫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왕을 거부합니다. 왕을 좋아하는 것 같지만 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을 거부하는 것이고 아버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기에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또한 당시 왕자가 결혼을 하면 왕이 결혼초대 받은 사람들에게 결혼 예복을 제공합니다. 당시의 옷은 매우 비쌌습니다. 오늘 날의 집 한 채의 가격과도 같습니다. 왕이 많은 옷을 보내면 보낼수록 왕의 권위와 능력이 나타납니다. 역사의 기록을 보면 어떤 왕은 3천 벌의 옷을 보냈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왕은 누구라도 결혼에 참석시키라고 합니다.

참석하는 사람들은 왕이 보낸 예복을 입고 결혼식에 참석하게 됩니다. 예복을 입는 것은 왕의 신하라는 표현입니다. 왕의 백성으로 충성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왕의 종들은 만나는 사람마다 혼인 잔치에 청합니다. 결혼예식에 참석하겠다는 사람마다 예복을 줍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복을 입지 아니하고 참석을 합니다. 그는 초대를 응낙하면서 왕의 예복도 함께 받았습니다. 그러나 결혼 예식에는 예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왕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초대를 받았지만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은 예수 믿는 우리들을 의미합니다. 유대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초대에 수락을 했고 옷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왕이 보내준 옷을 입지 않습니다.

옷은 우리의 신분과 행실을 상징합니다. 우리들이 옷을 깨끗하게 입어야 합니다.  옷은 우리의 삶의 열매입니다. 포도나무에서 포도 열매가 열리고 가시나무에서 가시가 나타납니다. 우리 옷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들이 나타내는 열매로 우리는 구원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러한 예를 드시는 이유는 마태복음은 배경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은 율법의 유대인들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으로 구원을 받는 것을 확신한다면 신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 받지만 믿음의 옷을 입은 사람답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 바울의 표현으로 성령의 열매, 인격의 열매가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옷입니다.

마태복음 21장 42-46 (두 개의 돌)

동전은 양면을 갖고 있습니다.  Dime의 한 면은 초상화입니다.  다른 한면은 Dime 10전이라고 쓰여있습니다.  양면은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동전의 가치는 앞면과 뒷면이 동시적으로 나타날 때에 10전의 가치를 갖습니다.

하나님도 양면성을 갖고 있습니다.  죄인을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죄인을 미워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시지만 심판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인내하시지만 분노하십니다.

우리들이 동전을 앞면을 보면서 뒷면을 동시적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3차원의 세계에 살기 때문입니다.  동전을 앞을 보면 뒤를 볼 수없고, 뒤를 보면 앞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4차원 이상에서는 논리적으로 동전의 앞과 뒤를 동시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동전의 앞을 보면서 동전의 뒷면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동전의 뒷면은 분명하게 존재합니다.  우리는 3차원에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습니다.

42절에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머릿돌로 나타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머릿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43절에서 심판의 돌입니다.  사람들이 그 위에 떨어지면 가루가 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3차원으로 바라봅니다.  나사렛 예수, 목수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심판의 돌이 되십니다.  머릿돌이 되십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것을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양면성을 가졌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한계, 차원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3차원의 세계를 넘어서는 행동입니다.

우리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알 수 없는 것을 알고,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대한 이해가 깊어지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21장 33-42 (우리는 무엇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가?)

날이 매우 덥습니다. 시원한 음식들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시원한 음식들은 몸에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중국음식에는 찬 음식이 별로 없다고 합니다. 찬물을 마구 마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우면 시원하고 찬 것을 좋아합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마태복음은 10장 이전에는 우리에게 매우 시원한 내용들입니다. 기적과 능력과 예수님의 도우심이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12장부터는 하나님의 심판과 질책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시원하게 한 것이 아니라 답답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지만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양면성을 상실하면 우리의 신앙은 아주 잘못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면 하나님은 이 세상의 우상과 차이가 없습니다. 그저 축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하면 기독교는 이 세상과 분리되는 극단적 행동을 합니다. 이 세상을 죄악시하고 저주합니다. 극도의 도덕적 신앙을 요구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양면성을 우리는 나타낼 수 없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칩니다. 또한 우리자신이 이러한 양면성을 지니고 신앙생활하면 우리 자신도 많은 혼란에 빠집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양면성으로 인한 혼란이 나타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납니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울타리를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갔습니다. 열매 거둘 때에 종들을 보내어 세를 받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종들을 심히 때리거나 죽이고, 또는 돌로 쳐서 죽입니다. 농부들은 똑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결국에는 포도원 주인의 아들도 죽입니다.

농부들이 이러한 행동하는 이유는 당시 포도원 주인들은 로마의 장군이나 귀족입니다. 그들은 항상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타국에 갔다는 것이 전쟁터를 의미합니다. 많은 경우에 주인이 전쟁터에서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 포도원을 상속 받을 아들이나 종들이 없으면 그 포도원은 농부들의 것이 됩니다.

우리에게는 2 가지의 신앙의 태도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을 믿는 자들과 예수님이 재림하지 않을 것이라는 태도입니다. 예수님이 곧 오실 것이라고 하는 자들은 항상 신앙의 공포분위기를 조성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수많은 거짓 예언자들입니다. 다미 선교회와 Dr. Camping처럼 특정한 때를 정해서 말합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이 오시지 아니할 것처럼 삽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오시지 아니했기에 오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에 경각심과 두려움이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이러한 양면성을 동시적으로 나타낼 수 없습니다. 자치 잘못하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칩니다. 그 결과 오늘 날 많은 성도들이 신앙에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정상적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을 얼마나 고백하며 사는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러한 고백은 하루 이틀의 신앙으로 되지 않습니다. 지루하고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더운데 시원한 것을 좋아하는 우리의 모습과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지루하고 답이 없는 것 같고 많은 고민을 동반하는 것이 정상적 신앙입니다.

마태복음 21장 23-32 (권위의 근거)

이 시대를 표현하는 방법의 하나는 다원화시대라고 합니다. 다원화라는 것은 힘의 분산을 의미합니다. 힘이 분산되고, 다각화되면 권위는 부정되거나 약화 됩니다.

이렇게 다원화되는 근본적 이유는 절대가치의 약화입니다. 모든 것이 상대화되면서 자연적으로 권위는 약화됩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질문입니다. 무슨 권위로 성전을 정결하게 하느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를 설명하기 위하여, 세례 요한과 포도원의 두 아들을 예를 듭니다.

세례요한의 권위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습니다. 백성들은 그를 선지자라고 합니다. 백성들은 세례요한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권위라고 믿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세례요한의 행동과 언행을 보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권위로 인정합니다.

세례요한의 권위는 상대적입니다. 그 이유는 세례요한은 분봉왕 헤롯에 의하여 참수형을 당합니다. 백성들은 그가 죽는 것을 보고, 반발하지 않습니다. 죽음 이후에도 아무런 사건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상대적 권위입니다. 사람에 의하여 인정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포도원의 두 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입니다. 두 아들의 행동에 의하여 아버지의 권위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포도원에 가는 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갑니다. 그 명령을 거부하는 아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권위는 절대적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권위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우리들의 행동에 따라 인정을 받지 않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권위자이십니다. 우리는 그 권위를 믿는 자들입니다.

예수님도 세례요한과 같이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위가 절대적이라는 것은 그의 죽음 이후에 일어나는 부활과 성령의 임재입니다. 이것이 세례요한과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등하십니다.

권위는 보호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 보호아래에서, 권위에 있습니다. 이러한 절대적 권위와 보호로 우리는 구원과 생명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보전하십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시어, 우리의 모든 순간마다 함께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권위에 감사하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