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14장 1-8 -마지막은 희망

모든 것에는 시작과 마지막이 있습니다.  시작은 희망과 꿈을 갖게 합니다.  새로운 것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이 찾아올 때에는 두렵고, 아쉬운 것이 많게 됩니다.  마지막이 찾아온다는 것은 알 수 없는 또 하나의 세계가 우리는 기다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마지막이라고 하지만, 마지막이 아닐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세상의 모든 법칙은 원인과 결과 인과응보입니다.  현재의 모든 것이 마지막에 마지막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지막 다음에 결과를 치를 것이라고 합니다.  현재의 원인를 마지막 너머의 세계의 결과와 직결합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 마지막에 대한 경고입니다.  무서운 심판이 나타나고 환경적 변화가 나타납니다.

(v.1-2)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네 가운데에서 나누이리라 (v.2) 내가 이방 나라들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당하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우리는 은혜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은혜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파괴합니다.  은혜는 인과응보와 반대의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현재의 원인이 미래의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원인과 결과의 순환에서 벗어나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에게는 은혜의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불행은 종말을 인과응보로 해석합니다.  기독교를 불교로 해석합니다.  이상하게도 종말에는 은혜가 사라집니다.  한국의 수많은 이단은 종말론으로 교인들을 협박합니다.  요한계시록과 다니엘서를 사용합니다.

기독교를 불교로 해석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됩니다.  은혜는 끝까지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도 무서운 종말이지만 이렇게 은혜가 나타납니다.

(v.4-6)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 산은 그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v.5)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이를지라 너희가 그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 하리라. (v.6)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것들이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마지막에 우리들이 피신할 길을 만들어 내십니다.  5절에서 보듯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피신입니다.

(v.7-8)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v.8)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이스라엘을 가보시면 이 말씀이 얼마나 위로와 능력이 되는 줄 알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물이 부족한 고지대입니다.  높은 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곳의 물이 동쪽으로 흘러갑니다.  동쪽은 사해, 풀 하나 없는 메마른 사막입니다.  그리고 물이 서쪽으로 흘러 갑니다.  서쪽도 황량한 유대 광야입니다.  오늘 날의 브엘세바쪽으로 흐르게 됩니다.

죽음에서 생명의 부활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입니다.  우리의 마지막은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삶입니다.

 

 

스가랴 13장 삼분의 이와 삼분의 일

본문은 유대의 죄악을 용서 하고 난 후에 거짓 종교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예언서의 중요한 내용의 하나는 거짓 종교인, 거짓 예언자와 선지자, 제사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들이 자신의 이익과 명예를 위하여 일한 싹군 목자인 것을 나타냅니다.

(슥13:5) 말하기를 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 내가 어려서부터 사람의 종이 되었노라 할 것이요

선지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실지로는  농부이고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사람의 종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은 사람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거짓 선지자에게 속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납니다.  삼분의 이는 멸망을 합니다.  삼분의 일은 살아 남습니다.

요한 계시록에도 하나님의 심판이 삼등분 됩니다.  우주만물, 자연계, 해와 달 별도 삼분의 이는 심판을 당합니다. 우주만물, 자연계, 해와 달 별 삼분의 일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도 삼분의 의와 심판과 삼분의 일의 구원으로 나누어 집니다.

(슥13:9)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우리는 이러한 심판에 대해 매우 절망스럽게 생각하고 두려워합니다.  많은 이단을 이것을 무기로 삼아 기독교를 공포의 종교, 하나님을 무서운 심판으로 하나님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삼분의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삼분의 일은 우리의 행위와 노력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실력과 능력으로 들어간다면 그것은 거짓 예언자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를 속이는 사악한 선지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삼분의 일에서 주어진 모습은 불 가운데서 연단을 받습니다.  이러한 미래의 모습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오늘부터 이러한 미래의 삶을 훈련하며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현실에 주어진 고난과 슬픔은 고난도 아니고 슬픔도 아닙니다.  미래를 준비하며 하나님의 은총으로 가는 길이 됩니다.

 

스가랴 12장 10-14 실수 하지 아니하는 손의 힘

사람들은 실수 하기전에는 자신이 잘못한다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수 후에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됩니다.  그럼으로 실수 하지 아니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실수라는 단어를 한문으로 보면 失手 놓칠 칠 // 손수입니다. 수에 손수를 씁니다.  손은 권한을 의미합니다.  힘을 의미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힘과 권한을 잘못 쓰면 실수합니다.  후회합니다.

본문은 유대인들의 통곡입니다.  회개입니다.  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이후에 유대인들이 당 할 회개의 통곡으로 해석을 합니다.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힘, 정치적인 힘, 사회적인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죽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아리마대 요셉이, 밤에 주님을 몰래 찾아온 니고데모가 주님의 장례를 치룹니다.  2 사람의 특징은 당시 유대 사회의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권한과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실수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힘과 권력을 잘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신들의 힘과 권력을 잘못 사용하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12-14절에 회개하는 족속이 나타납니다.  다윗 족속은 왕의 족속입니다.  레위 족속은 제사장 족속입니;다.  나단 족속은 선지자 족속입니다.  시므이 족속은 일반 지도자 족속입니다.  모두가 권력을 갖고 있습니다.  손의 힘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왕, 제사장, 바리세인, 서기관, 랍비들에게  죽임을 당하십니다.  이러한 직책들은 예수를 죽인 자들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통곡하며 회개 할 날을 의미합니다

미국의 대통령이 Trumph가 됐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손에 미국을 맡기십니다.  그가 실수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각자의 손에 맡기신 일과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수하지 아니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스가랴 11장 -우리의 미래와 희망

오늘이 투표하는 날입니다.  교회 오기전 새벽 6시에 이미 긴 줄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입니다.  그들을 유대인들을 다윗보다 귀한 인물로 다윗 족속은 유대인을 하나님과 같이 또는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만들어 주시겠다고 합니다.   아주 놀라운 말씀입니다.   적들의 노예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희망과 긍정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희망과 긍정을 가질 수 있을까요?  Trump가 대통령이 되면 미국은 위대한 국가가 될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을 줍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에 맞는 대통령을 세우십니다.  우리들이 기도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원하지 아니하시는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은 이 나라와  정치 지도자를 위하여 기도해야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로 하나님의 뜻과 일치 할 수 있는 대통령은 결코 탄생하지 아니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기에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막연한 긍정입니다.

대통령은 그가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움직입니다.  우리들이 종종 이러한 예를 Abraham Lincoln을 예로 듭니다.  그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경에 따라 나라를 다스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노예 해방은 정치적 목적에 따라 찬성과 반대로 나타납니다.  노예해방을 이루었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정치적 생존의 방법으로 노예 제도를 찬성과 반대합니다.  Lincoln이 독실한 신자로 그의 인생과 정치적 위기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당시 미국을 지배하던 이신론자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신론은 성경보다 자연이 우선입니다.  하나님이 우주만물, 자연을 창조하셨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의 부속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자연에서 찾았을 것입니다.  그의 노예 해방도 자연적 이신론의 근거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에 가장 합당한 정치인은 누구입니까?  대통령으로 선서 할 대에 성경에 손을 얹고 국가와 민족을 희생하겟다는 정치인입니다.   이러한 정치인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진 직책과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국가와 민족에 대한 사랑과 안타까움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기도를 원하십니다.

우리들이 미래에 대한 믿음과 기도로 하나님 안에서 희망과 긍정을 가져야합니다.  그러나 나의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하루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어느 누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중요합니ek.

스가랴 11장 건강식품 -불량식품

우리는 이런 말을종종 듣습니다.  불량식품이 맛이 있다고 합니다.   건강식품이 몸에 좋은 줄 알지만 대체적으로 맛이 없어 잘 먹지 않게 됩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 선한 것으로 우리에게 어려움과 인내를 요구합니다.  우리에게 해악스러운 것은 대체적으로 기쁨과 즐거움을 줍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 반드시 후회하게 됩니다.  눈 앞에 이익과 즐거움을 선택하다가 멀리보지 못해서 손해와 고통을 당합니다.

본몬에 선한 선지자와 악한 선지자가 나타납니다.  유대가 심판을 당하는 이유가 바로 악한 선지자들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악한 선지자를 좋아합니다.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한 선지자는 그들을 잡아 먹는 선지자들입니다.  그들을 죽이는 선지자들입니다.  사람들은 악한 선지자를 선택합니다.

그러나 선한 선지자는 배척을 받습니다.  조롱을 받습니다.  그들이 선지자 노릇 한 대가로 성전에서 은 삼십을 받지만, 하나님은 그 돈을 토기장이 밭에 던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가로 유다에게 배신 당하고 유다가 제사장들에게 받은 돈의 액수입니다.  하나님이 은 삼십을 버리라고 하시는 이유는 유대인들과 은총과 연합의 관계를 끓으십니다.  그리고 유대를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선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고 십자가로 연합을 하십니다.  은총과 연합의 작대기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 작대기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불량식품을 좋아하고 건강식품을 싫어합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지만 우리는 악한 선지자의 말을 듣습니다.  선한 선지자의 말을 거부합니다.  나의 십자가를 지는 대신에 하나님의 축복을 말하는 악한 선지자의 말을 듣습니다.  우리를 불량식품을 먹습니다.

어제 한국의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최순실과의 관계를 인정했습니다.  어려웠을 때에 최순실에게 위로와 도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자세한 것은 알수 없지만 신문의 내용을 보니 장차 대한민국의 여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고 합니다.

여왕이 되는 것은 듣기 좋은 말입니다.  이러한 말을 싫어 할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선한 선지자는 여왕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왕의 자질과 태도을 말합니다.  백성을 위하여 여왕이 되려면 백성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을 두려워하라고 말을 하는 것이 선한 선지자입니다.

선한 선지자는 항상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고통스럽게 합니다.  건강식품을 주기 때문입니다.  귀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오늘도 좋은 식사하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스가랴 10장 하나님의 음성 듣기

본문은 미래에 유대에게 주어질 승리와 영광의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그들의 현실은 참담합니다.  어떻게 현실은 비극인데, 미래를 희망으로 볼 수 있습니까?  현실은 고통인데, 현재에 감사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은 2 가지로 구분 할 수 있습니다.  보는 것을 보는 것과 듣는 것을 듣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의 사람은 보는 것을 보지 아니하고 듣는 것을 듣지 않는 사람입니다.  누가 진정한 사람이 될까요?  누가 행복한 사람이 될까요?

우리들이 듣는 것을 듣고 보는 것을 보면 우리는 환경의 지배를 받습니다.  깊이 생각 할 이유가 없습니다.  고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정답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이 너무나 중요해집니다.

그러나 보는 것을 보지 아니하고, 듣는 것을 듣지 아니한다는 것은 현실을 무시하거나 회피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지금 나에게 엄청난 고민과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현실과 상황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현실과 상황과 싸우려고 합니다.   우리는 사람과 싸우고 자식과 싸우고, 돈과 싸우고, 나의 당면한 문제와 싸웁니다.

그러나 이 순간에는 나와 나의 싸움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과 싸우셨습니다.  이세벨에게 쫓기는 엘리야는 동굴에서 자신과 싸웠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치기로 자신과 싸웠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자식들의 골육상쟁과 심지어는 자신을 죽이고 왕이되려는 아들을 보면서 자신과 싸웠습니다.

이렇게 싸울 때에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과 멀어지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아주 가까워지는 순간입니다.  이러한 순간을 포착하고 듣고, 보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 순간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보는 것을 보지 아니하고 듣는 것을 듣지 않습니다.  상황과 현실에 속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사람과 세상의 것이 나타나지 아니 할 때에 들려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를 선택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들리지 아니하는 음성을 듣고, 이세벨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광야의 고독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에 출애굽의 지도자가 됩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자식들의 골육상쟁과 자식의 배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에게 들려집니다.   그러나 들을 것을 듣고, 볼 것을 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들을 것을 듣지 아니하고 볼 것을 보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오늘도 우리 자신에게 주어지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스가랴 9장 9-17절 새로운 희망의 시대를 기다리며

오늘 본문은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나타냅니다.

(v.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이 내용은 사 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베풀어줄 영광과 승리가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음의 내용입니다.

(v.6-7) 아스돗에는 잡족이 거주하리라 내가 블레셋 사람의 교만을 끊고 (슥7)그의 입에서 그의 피를, 그의 잇사이에서 그 가증한 것을 제거하리니 그들도 남아서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유다의 한 지도자 같이 되겠고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 같이 되리라.

유대인의 평생 원수 블레셋이 유대인인과 같이 되고 유대인의 지도자가 됩니다.  에그론도 블레셋 민족의 하나이지만 여부스와 같이 대접한다는 것입니다.  여부스는 이방인이지만 유대인의 일부로 인정 받던 종족입니다.  블레셋을 유대인과 같이 받아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내용입니다.  유대의 철천지 원수들이 유대인과 같이 됩니다.

(v.13) 내가 유다를 당긴 활로 삼고 에브라임을 끼운 화살로 삼았으니 시온아 내가 네 자식들을 일으켜 헬라 자식들을 치게 하며 너를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이 예언은 더욱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아니하는 헬라를 사용합니다.  다니엘도 헬라를 사용합니다.  다니엘의 헬라는 그리스의 Alexander 대왕의 페르시아의 전쟁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은 스가랴입니다.  유대 말기의 예언입니다.  바벨론에게 유대가 망하면서 성전은 파괴되었기에 성전에 있던 성경들도 파괴 되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리고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멸망 시킵니다.  페르시아가 전쟁에 승리하면서 페르시아의 고레스에 의하여 바벨론 포로들은 70년 후에 해방이 됩니다.  이번에는 그리스 // Hella의 Alexander와 페르시아가 전쟁을 합니다.  그리고 Alexander는 유대와 이집트, 인도까지 정복을 하게 됩니다.

이때에 바벨론 포로 이후 유대인들은 성경 복사와 성경 재건 작업을 시작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들은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적 시각을 갖게 됩니다.  성경을 복사하는 작업을 할 때에는 그들은 아마도 헬라의 식민지로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같이 블레셋이 유대인의 지도자가 되고 헬라가 자신들에 의하여 망한다는 내용을 결코 현실적으로 이해 할 수 내용을 수용합니다.  Alexander의 종교적 관용 정책에 따라 지역마다 회당 예배는 드렸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로 히브리 성경 원본도 같이 파괴 되었기에 성경 복사의 원본은 바벨론 포로들이 갖고 온 것을 사용 했을 것입니다.

회당 마다 성경을 복사합니다.  유대인의 회당에서는 반드시 성경을 배치해야 합니다.  그들은 예배를 드릴 때에 성경을 제단 중앙에서 꺼내어 성경이 앉을 수 있는 자리에 두고 예배를 드립니다.  성경 자체를 하나님의 임재로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성경 Torah을 의자에 놓을 수 있도록 만들어 논 의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식민지로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Messiah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던 세상과 100% 다른 세상을 알려주십니다.  헬라가 그들에 의하여 정복 당하고, 블레셋이 유대인과 같이 됩니다.

스가랴도 모든 예언서의 전형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류의 죄에서 구원을 위하여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동시에 모든 민족을 구원하십니다.

이미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 2천년 전에 오셨습니다.  블레셋과 헬라는 이방인의 상징입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됐고, 하나님은 그들의 주인이시며 역사의 통치자로 나타나셨습니다.

우리의 암담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선거나 한국의 정치는 우리들이 세상의 식민지로 살아가게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예언자들의 예언과 같이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 할 것을 믿기에 우리는 우리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인내하며,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실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미래는 막연하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 미래를 성경을 복사하던 서기관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며 우리들이 살아야 합니다.

성경의 복사는 율법에 따라 정결한 동물의 가죽만 사용했습니다.

글자의 숫자를 문단에 따라 제한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글짜가 나오면 다른 펜으로 쓰거나 다시 목욕을 하고 와서 써야 합니다.

성경 복사에 참여하는 자는 항상 정결 예식을 거쳐야 합니다.  항상 같은 옷을 입어야 합니다.

복사를 할 때마다 큰 소리로 원본을 읽고 써야 합니다.  만일 글자라도 잘못 되었거나 그 가죽 전체를 버려야 합니다.

성경의 내용을 검사하다가 잘못된 곳이 3군데 나오면 그 성경 전체를 파기했습니다.

성경을 복사 할 때에는 왕이 들어와도, 적이 죽이려고 해도 성경을 바라보지 사람을 바라보지 말라고 합니다.

수많은 규정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대는 희망의 시대임을 확신합니다.

 

스가랴 9장 1-9 ( 최순실)

오늘 본문은 유대를 괴롭힌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며서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교회에 고통을 준자들 이방나다들 같습니다.  우리에게 나타날 하나님의 심판이 두렵습니다.

지난 몇 주간 조국이 격은 수치와 참담함은 말로 못합니다.  우리의 실망과 분노는 표현 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더 답답한 것은 종교계는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특히 기독교는 아주 조용합니다.  물론 몇 사람이 모여서 뭐라고 발표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교회의 소리에 전혀 무게를 두지 않습니다.  듣지 않습니다.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우리들이 말을 하지만 세상은 듣지 않습니다.

종교는 2가지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개인적 기능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예배와 기도의 생활입니다.  이러한 개인들이 함께 모여 교회를 이룹니다.   개인적 신앙은 한 개인의 인격과 주변에 많은 영향을 줍니다.  그럼으로 교회라는 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는 예배와 삶이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근거하지 아니하면 교회가 아닙니다.

둘째는 종교는 사회적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교인들의 모임인 교회와 교계는 사회성과 정치성을 갖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윤리성과 도덕성도 나타납니다.  이러한 정치성과 사회성과 윤리성이 세상의 가치와 판단보다 우위를 가질 때에 종교는 순기능을 합니다.  세상의 윤리성과 정치성에 미치지 못하는 저급이면 종교는 역기능을 갖게 되고 그 결과 그 종교는 사회의 해악스러운 존재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사회적 처벌과 처단을 받습니다.

이러한 역기능의 예가 러시아의 공산혁명입니다.  스탈린은 러시아의 모든 교회당을 러시아 알파벳 순으로 파괴합니다.  죵교가 사회적 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세상에서도 버림을 받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의 영광은 가리워집니다.

그러나 종교가 순기능의 역활도 합니다.  Martin Luther의 종교개혁입니다.  Catholic이 사회적 역기능을 나타날 때에 종교 개혁은 유럽을 변화시킵니다.  사실 오늘 날의 유럽의 정신과 문화의 중심에는 종교 개혁이 있습니다.  또한 Catholic도 Counter Reformation을 합니다.  Catholic도자체 종교 개혁을 합니다.  순기능은 또 하나의 순기능을 만들어냅니다.

문제는 우리들의 실력이 이러한 개혁을 만들어 낼 정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대한민국과 우리들의 종교적 기능은 매우 개인적입니다.  종교가 갖는 사회성에 대해서는 거의 무책임합니다.  우리의 정치성, 도덕성 윤리성은 이미 바닥입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의 개인적 신앙을 세상에 설명 할 실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믿는 하나님을 세상에 설명 한다는 것은 나에게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모습은 우리끼리 교회 안에서, 또는 우리를 알지 못하는 선교지에서 나타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력을 잘 알고 있는 나의 직장에서 친구에게, 세상에는 나타내지 못합니다.  그 결과 세상은 우리의 목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을 마귀의 세상, 또는 세상이 우리를 탄압한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잘못된 이유는 청와대와 똑같습니다.  종교적 세뇌입니다.  이유는 우리끼리, 우리 교회만 잘되면 된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죽든 망하든 상관 없습니다.  성경의 몇 구절을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데 악용합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약자와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은 없습니다.  공공성, 윤리성이 없습니다.

우리는 청와대에 돌을 던지기 전에 우리안에 최순실과 같은 종교적 마력에 세뇌되고 놀아 났다는 것을 인정해야합니다.

스가랴 8장 (종교가 아닌 인격의 하나님)

스가랴 8장은 모든 예언서의 내용과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유대를 포로에서 해방 시킨 이후에 일어날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예루살렘이 회복되고,  유대의 백성들이 돌아오고,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일어날 미래적 예언입니다.  타종교에는 이러한 내용이 없습니다.

불교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한 종교입니다.  우리의 문화와 정신에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 뿐 만 아니라 일본도 불교가 일본 자체의 종교로 발달했습니다.  불교는 오랜 시간동안 각 민족과 국가별로 다르게 나타납니다.  인도의 불교와 우리의 불교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러한 질문을 합니다.  기독교가 우리 민족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가 입니다.  기독교의 국가들이 전쟁과 역사적 사건으로 기독교에서 이슬람으로 종교가 바뀐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럽이 과거에 기독교 국가였지만 점차로 기독교 국가의 정신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국가들은 더 이상 기독교 국가라고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보고 기독교의 종교성이 타 종교, 불교나 이슬람에 비해서 낮다고 말 합니다.

맞습니다.  종교성은 낮습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는 인격적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인격의 하나님입니다.  신앙의 하나님입니다.  믿음, 신뢰의 하나님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관념적입니다.  자연적입니다.  즉 나의 정신적 개념에 머무는 종교입니다.  개념과 관념과 묵상과 수련의 종교입니다.  문제는 오늘 날 많은 교회가 하나님을 이렇게 이해하고 종교 생활합니다.  기독교가 신앙 이 아닌 종교가 됐습니다.  종교적으로 신앙 생활하는 증거는 자신의 인격에서 하나님의 인격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즉 바리세인 사두개인 제사장과 같은 사람들이 됩니다.  자신의 종교적 행위의 가능성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착각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인격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과 같이 벌주시고, 상주시고, 회복시키는 하나님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한 국가와 민족을 선택 할 수 있고, 버릴 수 있고, 회복시키십니다.  그 결과 우리의 인격으로 하나님의 영광, 에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종교성의 하나님, 우리들이 찾아가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인격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스가랴 7장 (용서 할 수 없다면)

우리에게 어려운 것이 있다면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라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잘못이지만 용서할 수 없기에 내 자신이 고통을 당 합니다.  또한 내가 용서를 받아야 하지만 용서 받지 못한 상태에서 지낸다는 것도 지독한 고통이 됩니다.  그럼으로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잘못을 했다고 시인하지 아니했는데 용서 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이 잘못 했다고 하지만 나에게 용서의 준비가 없을 때도 고통스럽습니다.  상대방이 잘못 했다고 하지만 그 진의를 알 수 없을 때에도 오히려 내가 농락 당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밧세바와 간음과 우리아 장군의 살인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사건으로 자식들이 죽어가는 골육상쟁을 죄의 대가로 치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 하셨지만 그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죄악은 오늘도 성경을 통해서 분명하게 들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용서하시지만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야 합니다.  이러한 죄의 용서를 믿는 자는 용서를 받습니다.  예수님의 죄의 용서를 믿지 아니하면 결코 용서 받지 못합니다.

그럼으로 우리들이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에는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용서 하는 것은 신자의 덕목이지만,  우리 자신이 용서 할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용서 할 수 있고 용서 받을 상대방은 용서 받을 자격도 갖추어야 합니다.

본문의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로 그들의 죄를 용서 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다리오 왕입니다.  바벨론의 포로에 해당하는 시기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성전 파괴로 그들의 죄가 용서 되는 길이 없어졌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죄가 용서되는 길은 선행입니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에 대한 선행입니다.  선행으로 그들의 죄가 용서 될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죄의 용서의 제사가 막힌 유대인의 죄가 용서 되는 길은 선행과 구제와 이웃에 대한 돌봄입니다.  구약의 예언서에서 사회정의를 강조하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물론 사회 정의, 공평한 재판과 빈부의 격차가 해소되어야 하지만 그 배경은 죄의 용서 받을 수 없는 유대인들이 택하는 방법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죄의 용서를 받지 못하기에 선행과 구제로 그들의 죄의 용서를 간구합니다.  10월과 11월은 유대인들의 회개와 죄의 용서의 절기이지만 실제로 그들에게 제사장과 성전이 없기에 실질적 용서는 막혀있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선행과 구제를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금강석 같다고 합니다.  위선의 행동입니다.  용서를 빈다고 금식하지만 금식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로하는 금식이라고 합니다.

용서를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상대방을 용서 할 수 없다면, 최소한 나의 마음의 분노는 가라 앉힐 수 있습니다.  내가 먼저 나를 용서해야 합니다.  나의 용서가 없다면 그 누구도 용서하지 못합니다.  나의 마음을 정리하고 가라 앉힐 때에 타인에 대한 용서가 시작됩니다.   나의 마음의 불길을 잡아야 합니다.  그 불이 나를 태워 죽일 수 있습니다.

나를 용서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