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에는 시작과 마지막이 있습니다. 시작은 희망과 꿈을 갖게 합니다. 새로운 것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이 찾아올 때에는 두렵고, 아쉬운 것이 많게 됩니다. 마지막이 찾아온다는 것은 알 수 없는 또 하나의 세계가 우리는 기다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마지막이라고 하지만, 마지막이 아닐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세상의 모든 법칙은 원인과 결과 인과응보입니다. 현재의 모든 것이 마지막에 마지막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지막 다음에 결과를 치를 것이라고 합니다. 현재의 원인를 마지막 너머의 세계의 결과와 직결합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 마지막에 대한 경고입니다. 무서운 심판이 나타나고 환경적 변화가 나타납니다.
(v.1-2)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네 가운데에서 나누이리라 (v.2) 내가 이방 나라들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당하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우리는 은혜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은혜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파괴합니다. 은혜는 인과응보와 반대의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현재의 원인이 미래의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원인과 결과의 순환에서 벗어나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에게는 은혜의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불행은 종말을 인과응보로 해석합니다. 기독교를 불교로 해석합니다. 이상하게도 종말에는 은혜가 사라집니다. 한국의 수많은 이단은 종말론으로 교인들을 협박합니다. 요한계시록과 다니엘서를 사용합니다.
기독교를 불교로 해석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됩니다. 은혜는 끝까지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도 무서운 종말이지만 이렇게 은혜가 나타납니다.
(v.4-6)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 산은 그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v.5)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이를지라 너희가 그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 하리라. (v.6)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것들이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마지막에 우리들이 피신할 길을 만들어 내십니다. 5절에서 보듯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피신입니다.
(v.7-8)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v.8)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이스라엘을 가보시면 이 말씀이 얼마나 위로와 능력이 되는 줄 알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물이 부족한 고지대입니다. 높은 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곳의 물이 동쪽으로 흘러갑니다. 동쪽은 사해, 풀 하나 없는 메마른 사막입니다. 그리고 물이 서쪽으로 흘러 갑니다. 서쪽도 황량한 유대 광야입니다. 오늘 날의 브엘세바쪽으로 흐르게 됩니다.
죽음에서 생명의 부활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입니다. 우리의 마지막은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