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6장 9-15절 (현상과 본질에서 고민)

스가랴서에 두 명의 도비야가 나타납니다.  한명은 예루살렘 성전을 방해하는 도비야입니다.  하나님은 성전 공사를 훼방하는 도비야를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4개의 뿔로 도비야 산발랏 게셈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성전 공사를 철저하게 방해합니다.

또 하나의 도비야는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본문의 도비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헌신의 도비야입니다.

두 명의 도비야는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성전을 방해하는 도비야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이익과 고집과 생각으로 나타나는 우상의 하나님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의 자녀와 자신의 자녀들과 혼사관계를 맺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착각을 했고 유대의 제사장들은 그에게 성전의 방을 하나 내어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것을 반대합니다.

성전을 짓는 도비야의 하나님은 하나님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짓습니다.

오늘 날 하나님의 교회가 이  땅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몸을 성전을 훼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악한 도비야는 선한 도비야의 성전 공사를 방해합니다.  자신의 정당하다고 하면서 선한 도비야를 부당하게 만듭니다.  나는 정당하고 너는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몸, 예수 그리스도를  허물어 버립니다.

우리에게는 현상과 본질이 있습니다.  현상은 역사와 상황에 따라 변질됩니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 가장 첨예한 이슈는 여성의 낙태문제입니다.  보수 기독교, Catholic은 낙태 문제를 본질로 봅니다.  본질로 볼 때에 Hillary는 태아의 생명을 죽이는 살인마입니다.  그러기에 살인자가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술 취한 아저씨 Trumph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여성의 인권과 선택을 강조하는 Pro-choice와 많은 기독교 신자들은 이러한 문제를 사회적 현상으로 봅니다.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Hiliary을 지지합니다.  이것으로 기독교도 서로 갈등 합니다.  문제는 Hillary을 지지하는 기독교 신자들을 진보라고 하는데 이것은 진보와 보수조차 신학적으로 구별 못하는 무지의 무식의 표현입니다.

이렇게 현상과 본질에서 우리들이 갈등 할 때에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이 상황윤리입니다.  상황윤리는 매우 개인적인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릅니다.  상황윤리는 전쟁에 나간 군인은 적을 죽이는 살인을 해야합니다.  의사는 환자에게 희망을 주기 위하여 병명을 거짓으로 말 할 수 있습니다.  죽음에서 구해주려고 거짓을 말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적 윤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 할 수 없는 공백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전쟁에 나가 군인들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하면 우리의 가족의 생명과 재산을 적들에게 내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자녀들이 전쟁에 나가면 적을 죽이고 살아 돌아오길 바랄 뿐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미국의 신자들이 중동에서 적들을 죽이며 싸우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지 아니하려면 오늘 날의 Amish, Mennonite가 되어 세상과 떨어져 살아야 합니다.

교회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어떠한 현상이 신앙의 본질이 되면 그 현상은 Pedagogy가 됩니다.   Catholic에서 낙태는 중요한 교회의 교리로 교육을 시킵니다.  사회적 현상은 종교적 이념으로 교육이 됩니다.  이것이 Pedagogy입니다.  현상이 교육되면 교리가 됩니다.

교리는 우리의 신앙을 지켜주는 매우 중요한 역활을 합니다.   문제는 교리가 교조화 됩니다.  Dogma // 도그마가 됩니다.  도그마는 그드들의 신앙의 정체성이 됩니다.  도그마 // Dogma가 되면 우상이 됩니다.   도그마는 성경보다 강한 힘을 갖습니다.  교리가 철저하게 교육되면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사라집니다.  인간의 논리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중요해집니다.

교회 역사에서 교회는 도그마로 수많은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십자군의 도그마로 수천만을 죽였습니다.  도그마로 유대인 6백만을 학살햇습니다.  도그마로 미국의 노예제도는 성경적으로 정당화됩니다.  교황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권위가 있습니다.

도그마가 잘못되면 우상입니다.  그 Dogma는  더 무서운 죄악을 만들어 버립니다.  현상으로 나타나는 죄악을 상대화시킵니다.  Trumph의 탈세, 여성문제는 Hillary의 낙태, e-mail문제보다 별것이 아닙니다.  도그마화된 기독교의 모습입니다.   죄악에도 작은 죄 큰 죄가 있습니다.  여성의 추행은 참아도 낙태는 참지 못합니다.  죄가 죄가 아닌 것이 됩니다.

우리는 현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본질,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따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황은 결코 본질과 현상을 구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것이 미국 대선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현상과 본질에서 고민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스가랴 6장 1-8 (일곱번째 환상-오늘의 환상)

스가랴는 7 번째의 환상을 봅니다.  4 마리의 말이 이끄는 전차가 나타납니다.  전차는 영어로 Chariot 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로 보면 재미 있습니다.  메르카바입니다.  오늘 날 이스라엘에 자랑하는 최고의 탱크입니다.

또한 말들이 이러한 전차를 이끌고 있습니다.  유대지역은 말을 사육하지 않습니다.  말은 애굽과 이방 나라의 수입품입니다.  성경은 말을 부정적으로 묘사합니다.  말을 키우려면 이방의 조련사들을 함께 데리고 와야 했으며 그들에 의하여 이방 종교가 유입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세상의 힘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방법의 하나가 세상의 많은 나라들을 이스라엘과 유대를 구하는 방법으로도 사용하시지만 동시에 이러한 나라들을 유대를 징계하시는 채찍과 몽둥이로 사용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4개의 병거로 세상의 나라들을 처벌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최종적 구원의 전 단계가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 결과 8절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채찍과 몽둥이로 사용되었던 나라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자신들이 사용된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도 자신들의 국력이 약했기에 이방 나라들에게 공격과 수난을 당했다고 똑같이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환상을 갖는 사람은 다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오늘의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의 선거, 한국의 정치와 경제, 중동에서 IS와의 전쟁은 우리 시각에는 한 국가의 정치와 경제이고 국가와 국가의 대립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러한 사건들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것이 이 시대의 환상이며 예언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현재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고 있습니까?  이 시대의 미국의 선거를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는가 입니다.  Hillary와 Trumph 중에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환상과 예언입니까?

우리들이 가장 크게 착각하는 것이 둘 중의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정치인이고 자신들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 할 뿐입니다.  그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광은 절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늘 날의 기독교인들은 이것에 속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야망을 실현 할 뿐입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유럽의 정치 역사는 하나님을 이용했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형태에서 벗어나려면 다음과 같이 행동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과 현실이 동질화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현실과 교회 생활의 구별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이 거룩하기에 우리들이 거룩해야합니다.

또한 이 시대가 하나님의 통치라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인내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현실에서 인내하고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 부분은 깊은 묵상이 요구됩니다.

이러한 말씀이 오늘의 양식이 되길 바랍니다.

스가랴 5장 5-11 (우리와 같으신 하나님)

어제에 이어 또 하나의 환상이 나타납니다.  1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두루마리가 양탄자가나타납니다.  이 두루마리는 십계명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선한것과 악한 것이 공존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선한 것이 좋다는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한 것대로 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상황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상황윤리가 나타납니다.  전쟁에 나간 군인은 상대방을 죽여야 자신이 삽니다.  의사는 환자의 안정을 위해서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적에게 거짓말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십계명이 대립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우리들이 상황에 따라 살 때에 십계명과 대치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을 우리들이 얼마든지 확대해석 할 수 있습니다.  상황이 확대되면 하나님의 말씀은 약화됩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주어진 상황에서 갈등하고 방황합니다.

오늘의 환상은 이러한 상황이 제게되는 것입니다.  악이 제거되는 것입니다.  6절에서 11절의 말씀은 그 악을 납으로 밀봉해서 두 명의 천사가  시날 땅으로 옮겨가야합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숭배하던 우상들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으로 핵석 할 수 있습니다.

6장의 환상은 우리에게 주어질 승리와 영광의 미래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첫 번 단계가 악의 제거입니다.  우리들이 상황에 빠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되는 예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미 주어진 상황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됐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죄인일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의인입니다.  죄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럼으로 우리의 상황에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의 태도가 결정됩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군인으로 전쟁에서 적을 죽이는 상황에 놓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은 군인이기에 전쟁을 해야 합니다.  적을 죽여야 우리의 가족의 생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적도 우리를 죽여야 자신의 가족과 생명을 지킵니다.  적도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 신자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적을 죽이지 아니하고 살 수 없습니까?

이러한 질문에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전쟁에서 적을 죽이려고 적을 만나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의 상황이 하나님이 계신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적을 죽일 것인지 내가 죽을 것인지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만난 예수,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고민하고 아파하고 고통을 당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수없는 상황에 빠집니다.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닙니다.

 

스가랴 5장 1-4절 (예수 없는 시대)

또 하나의 환상이 나타납니다.  1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두루마리가 양탄자와 같이 하늘에서 날아다닙니다.  당시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양가죽에 기록했기에 넓은 양탄자와 같습니다.  1절에서 Flying scroll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늘에 날아다니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말씀으로 심판이 나타납니다.

날아다니는 하나님의 말씀은 십계명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도적질하는 자들과 맹세하는 자를 심판하신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도적질하는 자들은 5-10 계명을 위반하는 자들입니다.  도적질을 했다는 의미도 되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도적질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자들입니다.

또한 맹세하는 자들은 1-4 계명을 위반한 자들입니다.  언약의 약속을 무시한 자들입니다.

  (v.4)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것을 보냈나니 도둑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의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나무와 돌과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자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십계명 앞에서 죄인입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심판에서 벗어나는 것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본문은 6장 마지막 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구약의 시대에 십계명의 심판에서 어떻게 벗어나는 가를 6장에서 설명합니다.  내일 계속합니다.

 

스가랴4장 1-14절 (머릿돌-철학적 하나님의 증명)

미국의 철학자의 약 1/3이 기독교 신자들입니다.  과거에는 많은 철학이 신의 존재를 인간의 이성으로 부정했지만 이제는 반대의 현상이 나타납니다.  철학이 기독교의 하나님을 증명합니다.  제가 한 가지 추측을 한다면 기독교도 고도의 지식과 이성이 필요해질 것입니다.  과거와 같이 믿는다는 단순 논리로 끝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철학적 변증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의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과거에는 우리들이 철학과 과학으로 하나님을 부정했지만 하나님은 이 시대에 철학으로 과학으로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이 시대에 고도의 기술과 인공지능의 발달로 3 차원의 프린터는 우리들이 꿈꾸던 물건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상상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영역은 우리 신체의 장애와 불구를 거의 정상인에 가깝게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될 수록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 인지하거나 행동하는 것에서 벗어나 우리는 고도의 기술과 인공지능의 영향과 지배에 놓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정신 세계는 어떻게 될까요?

많은 철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시대에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초월의 영역의 필요하다고 합니다.  신비와 기적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제가 이것을 기독교 용어로 변경하면 이 시대는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이러한 것을 철학적으로 가장 잘 나타낸 사람이  앨빈 플랜팅가 Alvin Plantinga 입니다.   앨빈 플랜팅가 Alvin Plantinga는 미국의 철학자로 하나님의 존재를 철학적으로 증명합니다.  그의 철학을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철학자들이 제대로 반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정상입니다.  상식입니다.  지극히 정신적으로 자연스러운 활동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영역을 알지 못하는 것은 비정상입니다.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v.1) 잠자는 스가랴를 깨우시며 (v.2) 무엇을 보느냐고 묻습니다.  잠자는 자를 깨웁니다.  잠을 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죽은 관계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바벨론 포로 70년 동안 유대인들은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죽은 관계였습니다.

하나님이 7 가지의 순금 촛대을 보여주십니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나무 가지를 상징합니다.  Menorah 라고 합니다.  스가랴는 자신이 본 것을 정확하게 설명하지만, 무엇인지를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잊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스가랴에게 성전을 누가 짓고 있는가를 설명하십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제사장 여호수아, 학개, 스룹바벨등이 짓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6절에서 사람이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짓는다고 하십니다.

(v.6)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하나님이 성전을 완벽하게 세우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사람이 세우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을 빌리십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힘은 절대로 아닙니다.

(v.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스룹바벨이 성전 건축의 마지막, 머릿돌, Top Stone을 성전 꼭대기에 올려 놓을 때에 성전 공사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되었다고 찬양합니다.  그러나 머릿돌은 사람이 올려 놓습니다.   사람이 일하지만, 하나님의 허락으로 성전 공사를 합니다.

(v.14) 기름에 발리 운 두 사람이, 스룹바벨과 제사장 여호수아입니다.  이들 머리에 기름을 발랐습니다.  기름을 발랐다는 것은 구별해서 세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목동들은 제물로 쓸 양은 양의 머리에 기름을 발랐습니다.  구별을 합니다. 기름을 발랐다는 것은 구별 된 자 거룩한 자가 됐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여호수아와, 스룹바벨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의 교회를 세우는데 우리와 같이 구별된자를 사용하십니다.

우리들이 우리의 신앙을 변증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증명을 해야 이 시대를 살아 나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증과 증명의 시작은 회개입니다.  원래 기독교는 변증의 시작을 갖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철학적 변증서입니다.  Apologia 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누가복음과 요한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변증을 알려 주십니다.

(v.12) 금 기름이 흘러나와 금등대의 등불을 밝힙니다.  성전의 거룩한 기름은 감람나무 열매를 연자방아에 짓이겨 깨진 것으로 사용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알고 싶으면 철저하게 정신적으로 부숴져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나의 죄가 부서져야 회개의 기름이 나오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용서를 받는 기쁨의 기름이 나와야 하고 그 용서함 받은 자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인생을 새롭게 살겠다는 결단의 기름이 나와야 합니다.

성전의 기름이 되려면 빻아낸 감람유에서 찌꺼기가 가라앉아야 합니다.  찌꺼기가 있는 기름은 태울 때에 소리가 나며 그을림이 생깁니다. 금 등대에서 사용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나의 마음과 정신을 정리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신학적 정리, 철학적 정리를 요구합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을 변명, 변증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신비하십니다.  하나님은 철학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이 시대의 하나님의 통치와 역사를 인정하고 우리들이 회개해서, 우리 자신을 변명해서 하나님을 이해하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스가랴 3장 6-10 (하나님의 가면)

본문은 해석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 내용입니다.  8절의 종과 순 때문입니다.  영어번역을 보면 My servant, the Branch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라고 합니다.  또한 9절의 There are seven eyes on that one stone.  한 돌에 일곱 개의 눈이 있는 것이 문장의 내용으로 볼 때에 메시야 라고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문장 내용으로 보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만 너무나 신적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우리들이 평소에 성경을 보면서 이해 할 수 없었던 내용이 또 하나 나타납니다.  6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여호수아에게 말을 합니다.  The angel of the Lord입니다.  천사입니다.  Hebrew로 Malak입니다.  천사라는 의미도 있지만 왕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런데 9절과 10절에서 천사가 하나님으로 변합니다.  says the Lord Almighty 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창세기 18장에도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장막 앞을 지나가는 3 사람을 만납니다.  그 사람들을 잘 대접하는데 19장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천사였습니다.  그리고 그 천사는 18장에서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에게 사람-천사-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독일 루터교 신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실천 교리가 있습니다.  Martin Luther에 의해 주장 된 하나님의 가면입니다.  하나님은 가면을 쓰시고,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창세기 19장에서 천사가 롯에게 나타나지만 18장과 다릅니다.  롯에게 천사로만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천사로 나타나지, 하나님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롯과 아브라함의 차이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가면을 가장 잘 설명한 사람이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입니다.  그의 많은 예화는 하나님의 가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어떻게 대접 하는가에 따라 하나님이 나타나거나 나타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천사가 하나님이 되시는 이유는 유대적 배경입니다.  십계명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을 처음부터 경솔하게 부를 수 없기에 천사로 호칭하지만 하나님입니다.  그러기에 Malak이 천사도 되지만 왕도 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가면의 하나님입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하나님의 천사가 되고, 하나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사람으로 끝이 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천사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사람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아마 제가 이번 주일에 하나님의 가면을 설교 할 것입니다.  좋은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스가랴 3장 1-5절 (5 번째 환상- 하나님이 주실 옷과 면류관)

제사장 여호수아는 성전을 세우는 4명 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성전을 세우면서 많은 사람과 다툼과 불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사장 답지 못했고, 자신의 이익과 명예에 집착 했을 수도 있고 인내와 용기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쓰는 이유는 그가 죽어서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검사 사탄이 그의 죄를 지적합니다.  사탄은 여호수아의 옷이 더럽다고 비난을 하고 있습니다.  옷은 그의 삶을 나타냅니다.  죄가 많다고 지적을 합니다.

우리도 제사장 여호수아와 같은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섭니다.  신자의 옷 , 집사의 옷, 아버지의 옷, 어머니의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서게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입은 옷의 상표는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주어진 은혜의 옷입니다.  우리 옷의 상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한 옷에 보면 옷의 품질 관리표가 있습니다.  우리의 옷의 관리는 거룩입니다.  성화입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았기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거룩해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옷도 더러움을 탑니다.  우리의 옷은 더러우면 세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옷은 이 세상에서 세탁이 되지 않습니다.  계속 더러워집니다.  우리도 제사장 여호수아도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옷을 입었지만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옷이 더럽기에 사탄이 우리를 조롱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옷이 더럽기에 너는 죄인이라고 합니다.  하늘나라에 올 수 없다고 합니다.  너와 같이 더러운 죄인은 이곳에서 쫓겨나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거룩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았습니다.  우리들끼리는 서로의 죄를 비교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보다 깨끗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조롱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조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탄을 이렇게 야단을 치십니다.

(v.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이 사람은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토막이다.  불에 타다 남은 나무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집의 목재로 쓸 수 없다. 죄가 크다, 버려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에 타다 나무와 같은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를 질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더러운 옷을 벗기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했으니 네가 너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혀주시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승리의 면류관을 씌웁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이, 선배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승리와 영광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질 영광과 승리입니다.  감사하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스가랴 2장 6-13 (4 번째 환상-기준점)

모든 일에는 기준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사는 도시도 기준점에 근거하여 도시가 측량되고 형성됩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의 노예 해방으로 일어난 남북 전쟁은 미국의 정치와 경제와 문화를 변혁 시켰습니다.  인도의 간디의 비 폭력 운동은 힘으로 지배하는 역사에서 힘이 아닌 것으로 역사를 변화 시키는 기준점이 됩니다.

이러한 기준이 없으면 다극화됩니다.  내가 기준이 됩니다.  모든 것이 기준이 됩니다.  전통과 문화가 무너지게 됩니다.  각자의 개성은 인정되지만 극도의 혼란이 찾아옵니다.

오늘 본문은 유대인들의 바벨론 해방입니다.  유대인들의 기준점은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입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에 유대인들의 신앙은 매우 경직됩니다.  70년 포로는 그들을 더욱 더 고립화시킵니다.  유대적 가치와 문화에 집중합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특히 우상 숭배를 거절하면서 이방인에 대한 부정적 경향이 강해집니다.  유대인의 기준점은 유대인의 하나님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에서 세계 인류의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한 민족의 하나님에서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시각을 넓게, 깊게 교정 변혁시킵니다.

(슥 2:10-11)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에 머물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하나님이 유대인들의 한 가운데에 찾아오십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많은 나라들,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고,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의 하나가 되며, 이렇게 하나님이 세계 모든 민족의 주인이 될 때에, 유대인들을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구세주로 오십니다.  유대인의 하나님이 만민의 하나님, 이방인의 하나님으로 오십니다.  이때가 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은 세계 모든 민족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돌아올 때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점이 달라집니다.  유대인에서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지난 주에 교회에 일하는 사람들에게 점심을 대접하려고 중국집 To-go 주문을 했습니다.  배달하는 사람들이 백인 50대 남자가 중국음식 배달을 왔습니다.  항상 중국남자가 배달 하던 것을 백인 남자가 배달을 했습니다.  배달하는 그의 말과 행동에서 자존심이 상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미국이 과도한 신자유주의 경제로 미국의 1차 산업 농업과 2차 산업, 철강과 굴뚝 산업은 쇠락합니다.  3차 산업, 금융, 보험, IT 산업에 밀려나게 됩니다.  이러한 산업구조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이 백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중부 남부 지역입니다.  그들의 부와 경제는 상대적으로 약화됩니다.  그 결과 수많은 실업자의 발생하고 오늘 날 Trumph와 같은 대통령 후보를 만들어 냅니다.

미국의 백인들은 다시 한번 과거의 영광을 되찾자고 합니다.  Trumph의  Make America Great Again은 잘 먹혀 들었습니다.  어제 Trumph의 Florida 선거 유세는 기존 정치와 제도에 대한 철저한 부정입니다.  Obama Health Care와 이민 문제등 모든 것을 부정합니다.  그리고 미국의 산업을 부흥시켜 군중들에게 Job을 돌려 주겠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에 가장 앞장서는 것이 Bible Belt의 백인 보수 기독교인들입니다.  Trumph의 가장 확실한 지지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적 보수가 아닙니다.  그들은 정치적 보수입니다.  그들은 경제적 보수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에서 만민의 하나님으로 기준점이 변화합니다.  그럼으로 우리의 태도가 나의 하나님에서 우리의 하나님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의 모든 민족을 사랑하시며 구원 하고자 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의 문을 모든 사람에게 열고 우리의 말과 행동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야 합니다.  신앙적 보수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경제적 보수, 정치적 보수는 하나님의 기준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기준이 아닙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기준되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스가랴 2장 1-5절 3번째 환상 (시간의 개념)

예루살렘을 척량줄로 측량하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러나 5절에 하나님이 직접 불의 성벽이 되시고, 그 성을 영원히 지키시는 영광, 승리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합니다.   사람이 예루살렘 성을 설계하며, 측량하지만, 하나님은 그 성을 지키시고 보존하시겠다고 합니다.

이 말씀에는 측량줄을 잡은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될 수 있고, 성전을 수축하는 4명 중의 하나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불의 성벽이 되고 성의 영광이 되신다고 합니다.

성은 외부의 침입에서 보호의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오늘 하루도 성을 쌓습니다.  외부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성을 쌓습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그 성이 단 숨에 무너지는 것을 많이 봅니다.  작은 일로 성이 무너지기도 하고, 생각하지 아니햇던 큰 일로 성이 무너집니다.

우리들이 피 할 수 없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육체와 정신의 성이 무너져간다는 것입니다.  어느 사람의 성이라고 할지라고 시간의 흐름에서 우리의 성은 철저하게 무너집니다.  영원한 육체와 정신의 성이 없습니다.

이러한 시간을 가장 잘 설명한 것이 St. Augustine입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크로노스는 늙은 존재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병들어 늙어 죽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카이로스는 젊은 신입니다.  그러나 그의 앞 머리에는 많은 머리카락이 있지만 뒷 머리는 대머리입니다.  카이로스, 때, 기회를 의미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때를, 카이로스를 우리의 책임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이 기회, 때를 잘 포착해야합니다.  그러면 머리의 털을 잡습니다.  좋은 찬스가 됩니다.  그러나 때를 놓치면 대머리를 만지게 됩니다.  카이로스를 잡을 수 없습니다.  때를 놓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때는 우리의 책임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카이로스와 크로노스를 번갈아 사용합니다.  우리의 크로노스 시간에, 시작과 끝이 있는 수평의 시간에 카이로스 (은혜의 시간) 하나님의 시간이 위에서 밑으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시간은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시간입니다.  은혜의 시간이기에 우리의 책임과 노력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시간이 있습니다.  예배와 기도와 묵상의 시간들입니다.  그 시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불의 성벽이 확인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우리의 성을 쌓는냐고 바쁘지만, 이러한 시간을 발견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2개의 시간이 있음을 축복으로 여기시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스가랴 1장 18-21 두번째 환상-2nd

어제에 이어 계속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4명의 사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느 6장) 산발랏, 도비야, 게셈과 사마리아 사람과 대항하는 스룹바벨, 여호수아, 에스라, 느헤미야입니다.  그들은 선지자, 예연자, 제사장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을 대장장이라고 합니다.  영어번역으로, Carpenter, Craftsman, Blacksmith로 번역했습니다.  각종 기술자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직업은 성전을 세우는데 필요한 기능적 직업입니다.  성전의 제사나,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는 기능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직업으로 성전 공사를 방해하는 사람들을 물리칩니다.

오늘 날의 우리의 신앙의 체계는 2 가지의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첫 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현대사회의 특징의 하나인 다극화는 절대 가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절대 초월과 절대 신의 개념이 없습니다.  모든것이 상대화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모든 종교는 동등하고 그 종교에 속한 신도 동등하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믿는 하나님의 절대성을 세상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구약 성경의 내용은 다른 종교의 문헌과 비교하여 신화적 이나 문학적으로로 다루게 됩니다.  그 결과 오늘 날의 지성인과 일반인들에게 기독교의 절대성은 받아 들일 수 없는 영역이 됩니다.  만약에 이러한 절대성을 용납하면 다극화된 세상에서 고립됩니다.

두 번째는 신앙의 고도화된 윤리성과 도덕성으로 발전입니다.  이렇게 종교가 동질화되면 종교의 특징은 윤리성과 도덕성으로 각 종교의 자웅을 겨루게 됩니다.  인간과 인간의 영역에서 최고의 가치는 고상한 인격입니다.  이제는 종교가 한 인간의 인격의 형성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가에 따라 해당 종교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오늘 날 달라이 라마가 아주 좋은 예가 됩니다.

티벳 불교나, 중국의 장자 사상은 서구 기독교가 줄 수 없는 인간 내면의 울림과 감동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연과의 일치는 인공지능과 각종 IT의 발전으로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현대인들에게 정신적 피난처가 됩니다.  종교가 인간의 정신적 해소 역활의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이러한 종교적 행위의 공통점은 인간의 종교적 심성의 극대화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와 반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어 우리를 찾아오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되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공감 (Compassion) 하십니다.  초월의 영역이 인간의 체계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때에 우리에게 찾아오는 증거는 인격의 변화입니다.  지난 주에 설교드린 하늘의 지혜와 땅의 지혜의 차이입니다.

오늘 날 현대인들은 자신의 변화, 인격적 변화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인격적 변화는 나에 대한 질문과 싸움입니다.  사람이 도덕적 윤리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초월의 영역이 들어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관조합니다.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와 목적을 발견합니다.  그 결과 인격의 변화가 나타납니다.  나의 삶의 영역이 땅의 영역에서 하늘의 영역으로 확장되기에 내가 오늘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4명의 대장장이를 보여주십니까?  성전을 짓는데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의 직업과 삶으로 짓는 것입니다.  흙에서 흙으로 갈 것이라면 성전을 지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흙에서 하늘로 갑니다.  그러기에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는 생각과 행동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직업과 가정과 사업을 땅의 생계의 유지가 되지만, 하나님의 세계를 이 세상에 나타내는 도구입니다.  나의 직업과 사업으로 나에게 주어질 미래의 모습을 지금부터 연습하는 것입니다.

오늘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다극화되고, 절대적인 것이 인정 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절대적 영역, 초월의 영역,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면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