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1장 18-21 두번째 환상

2번째의 환상은 4개의 뿔입니다.  4개의 뿔은 유대인의 성전 복구를 반대한 (느 6장) 산발랏, 도비야, 게셈과 사마리아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뿔은 힘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뿔들이 힘이 약한 유대인의 성전 공사를 방해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뿔들을 대항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4명의 사람을 보여주십니다.  4명은 성전 회복을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대장장이라고 합니다.  영어번역으로 보면 이들을 Carpenter, Craftsman, Blacksmith로 번역을 했습니다.  각종 기술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선지자, 예연자, 제사장들입니다.  4명의 이름은 스룹바벨, 여호수아, 에스라, 느헤미야입니다.

왜 하나님은 성전을 훼방하는 자들을 뿔이라고 하시고, 이러한 훼방에서 성전을 지키는 자들을 대장장이라고 하십니까?

성전을 훼방하는 자들은 세상의 힘입니다.  세상에서 우리를 공격하는 가장 강한 힘, 뿔의 힘이 있습니다.  오늘 날 기독교를 공격하는 가장 강함 힘은 무엇일까요?  무신론이라고 합니다.  불가지론을 말합니다.  진화론과 세상의 지식과 인간의 이성이라고 합니다.  물질주의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 날 교회의 가장 무서운 세상의 힘은 긍정적 사고방식입니다.  긍정적 사고 방식은 우리들이 금과 옥조로 여기는 믿음과 매우 유사합니다.  긍정적 사고 방식은 우리 자신과 하나님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 잘 될 수 있다고 긍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날 교회에 만연하는 것은 믿음을 긍정적 태도로 직결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는 것과 하나님을 긍정적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해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결코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정적이셨습니다.  예수님이 12 제자들과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부정적이셨습니까?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탄식하시고 계시기에 우리에게도 부정적이십니다.

한국교회는 미국의 일부 목사와 심리학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긍정적 체계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한국 교회는 이 일에 가장 앞선 교회입니다.  믿으면 다 된다는 단순논리로 신앙 생활합니다.

긍정은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로 세뇌시킵니다.  자신을 잘 될 것으로 스스로 교육하는 것입니다.  긍정은 어떠한 목표를 노력과 고통 없이 이루어 낼 수 있다는 사고방식입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사라집니다.

지나친 긍정적 사고 방식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무력화시킵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사라집니다.  그 결과 현대 심리학의 가장 큰 목표인 초월적 체계를 부정합니다.  심리학의 긍극의 목표는 진화론에 근거해서 인간은 고도의 정신적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초월의 영역, 하나님의 세계를 부정합니다.

특히 프로이드의 심리학은 초월의 영역을 부정합니다.  하나님을 부정합니다.  종교는 인간의 정신에 만들어낸 체계라고 합니다.  프로이드는 열등의식과 불안감으로 종교가 인간의 의하여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영향으로 19-20 세기 서구 유럽의 문화는 극단적 무신론에 빠집니다.  그리고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불교가 사상적 체계에 많은 영향을 줍니다.  이러한 잔재가 오늘 날 자신을 신격화하는 명상이 자리 잡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들이 짐승에서 정신적으로 진화한 존재라면, 왜 계속적인 불안과 열등감을 가져야합니까?  진화론자들의 주장은 진화는 종족보전을 위한 안전성과 완전성으로 진화입니다.  원숭이에서 사람으로 진화한 이유는 생존경쟁에서 안정적 존재가 되기 위하여, 인간은 기어다니다가, 걷게되고, 소리를 치다가 말을 하고, 불을 발견하고, 고기를 구워 먹으면서 단백질의 섭취로 뇌가 켜저서 무리, 집단을 형성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계속 불안정한 존재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은 불안과 만족이 없습니다.  우리를 불안에서 벗어나고, 만족시킬 근거와 방법을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돈으로, 권력으로, 사람으로, 명예로 절대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만족은 외부에서 유입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외부의 힘입니다.  이러한 외부는 인간의 이성과 논리가 적용 될 수 없는 외부의 힘입니다.  이러한 논리적 근거로 외부는 신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 초월의 영역입니다.  심리학자 융은 우리에게 마음에 이러한 갈망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초월적, 신적 존재의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내일 계속합니다.

 

 

스가랴 1장 7-17 (첫 번 환상)

스가랴는 다음과 같은 환상을 봅니다.

(v.8) 내가 밤에 보니 한 사람이 붉은 말을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붉은 말과 자줏빛 말과 백마가 있기로

붉은 말을 탄 사람이 앞에 있고 3명의 붉은 말, 자줏빛 말, 백마를 탄 사람과 같은 하나님의 천사들이 서있습니다.  말을 탔습니다.  그들은 유대의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 될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해방의 증거는 성전의 회복과 유대를 핍박한 나라들의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v.15-16) 안일한 여러 나라들 때문에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 (v.16)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불쌍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에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쳐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은 유대의 죄악에 약간 분노해서 이방 나라들을 유대의 작대기와 채찍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이방 나라들은 심하게 분노하여 유대를 학대하고 죽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방나라들을 심판하시겠다고 합니다.  또한 성전에 먹줄, 성전이 다시 지어 질 것이라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성전을 짓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방에 대한 심판과 유대에 대한구원이 동시적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이방의 심판과 유대의 구원은 바벨론 포로 70년의 결과입니다.  70년의 고난과 시련의 결과로 하나님의 구원과 이방의 심판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첫 째 환상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우리의 고난과 시련이 없으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늘 날의 바벨론 포로 70년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도 없습니다.

이번 주일 예방 주사 맞습니다.  주사를 맞을 때에 아픕니다.  아이들은 무서워 웁니다.  어른들은 얼굴을 찡그립니다.  조그마한 아픔입니다.  그러나 그 아픔은 독감이라는 질병을 이기는 방법의 하나입니다.  다가올 고통을 미리 예방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으로 얻어집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믿음을 믿는다면 우리에게도 동일한 과정이 적용됩니다. 우리에게도 고난, 시련, 바벨론 포로와 같은 삶은 예방주사와 같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의 원수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는 척도입니다.

이러한 환상을 갖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스가랴 1장 1-8 환상의 시작

스가랴는 바벨론 포로 해방이후에 대한 예언입니다.  7절 부터 8개의 환상이 나타나고, 마지막, 종말에 대한 예언이 나타납니다.  학개와 패턴이 유사합니다.  학개도 바벨론 포로 이후에 내용과 하나님이 주시는 환상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스가랴는 성전을 파괴된 성전을 재건합니다.  성전의 가장 중요한 직책은 종교 계급입니다.  그러나 스가랴는 이러한 종교 직분, 예언자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입니다.  굉장한 모순입니다.  성전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이 종교적 직책이지만 이러한 직책을 부정적으로 표현합니다.

(v.4) 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를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v.5) 너희 조상들이 어디 있느냐 또 선지자들이 영원히 살겠느냐 (v.6) 내가 나의 종 선지자들에게 명령한 내 말과 내 법도들이 어찌 너희 조상들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돌이켜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하신 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도다 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이러한 종교행위와 계급 아래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다가 벌을 받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성전이 파괴된 벌을 받고 하나님에게 돌아왔다고 합니다.  즉 새로운 종교적 체제의 등장입니다.  그럼으로 과거의 조상들이 행하던 종교적 방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은 8개의 새로운 환상으로 말씀하십니다.   내일 부터 하나씩 공부 하겠습니다.

학개 2장 20-23 (마지막 축복: 신학의 축복)

학개는 마지막 예언을 받습니다.  내용은 아주 짧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흔드시고, 세상의 나라들을 심판하시고, 학개를 구원하십니다.

(v.20-23) 그 달 이십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학개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v.21) 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말하여 이르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 (v.22) 여러 왕국들의 보좌를 엎을 것이요 여러 나라의 세력을 멸할 것이요 그 병거들과 그 탄 자를 엎드러뜨리리니 말과 그 탄 자가 각각 그의 동료의 칼에 엎드러지리라 (v.23)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세우고 너를 인장으로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은 종말,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오늘 날 교회는 예수 믿고 죽은 후에 천당 가는 것을 교회 자체가 희석화 시키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천당가는 것을 강조하는 것을 신앙의 본질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들은 나의 주변 사람들 중에 예수 믿지 아니했기에 그들이 지옥에 가야 한다는 사실에 거부 반응을 보입니다.  믿었기에 이러한 결과가 나오는 것이 너무나 불공평하다고 합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날까요?  신앙고백의 부제입니다.  한국교회의 치명적 약점은 신앙 고백이 없습니다.  신앙 고백은 내가 믿는 하나님, 삼위일체에 대한 신학적 고백입니다.

신앙고백은 역사성을 갖습니다.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지금까지 교회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우리의 신앙고백을 해왔습니다.  신앙 고백은 우리의 신앙을 신학적으로 성찰하는 것입니다.

신학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입니다.  철학을 기반으로도 할 수 있고, 세상의 과학과 지식을 차용 할 수도 있습니다.  신학은 역사적 사건을 차용 할 수도 있습니다.  신학은 기독교를 사상적 체계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신학은 감정과 신앙의 행동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신학은 교인들을 이념화 시켜 메마르게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학은 우리에게 매우 필요합니다.  신학은 우리에게 신앙을 전체적으로 이해 하는 안목을 허용합니다.  신학은 우리의 신앙의 균형을 찾아줍니다.  신학은 우리들이 이 시대에 신자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제시합니다.  신학은 개인이 성경을 작위적으로, 체험적으로 이해해서 신앙이 변질되는 것을 막아줍니다.

한국 교회를 복음주의라고 합니다.  복음주의는 성령 체험을 강조합니다.  복음 전파를 위한 전도와 선교에 강조합니다.  회개를 강조합니다.  교회의 헌신과 충성을 강조합니다.  신자 각자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강조합니다.

성령 체험은 각자마다 다릅니다.  성령 체험을 하지 못하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강하게 성령체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이 주관적입니다.  공통성을 갖지 못합니다.  내가 만난 하나님이 하나님입니다.  당신이 만난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정말로 사용해서는 안 될 단어이지만 각 개인의 영적 파워가 강조됩니다.  이렇게 되면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이 없어집니다.  거의 이단수준으로 발달합니다.  오늘 날 한국교회의 실상입니다.

한국 교회의 자랑이 선교와 전도입니다.  반드시 해야 할 교회의 사명과 원칙입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이 없기에 교인들이 선교와 전도 외에는 할 것이 없습니다.  교인들의 신앙이 선교와 전도로 축소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나타나는 것이 성과주의입니다.  선교와 전도의 결과가 나타나야하고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되고 하나님의 축복이 됩니다.

그 결과 한국교인들의 치명적 약점이 나타납니다.  가정과 직장에서 신자답게 사는 거룩한 행위가 사라집니다.  아버지와 엄마가 교인이지, 자식의 아버지와 엄마가 아닙니다.  가정이 교회로 변질됩니다.  우리 자녀들이 교회 이탈이 가속화 됩니다.  자녀들에게 엄마와 아버지가 거룩함, 성실함, 진지함이 없는 신앙인으로 나타납니다.

선교와 전도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초법적인 행위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일부 목회자들의 교회 성장의 도구와 수단이 되면서 선교와 전도가 교인들에게 염증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신학의 부재로 나타나는 신앙고백이 없는 이유입니다.

신앙고백은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구원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사랑과 역사적 통치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오늘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심입니다.  구원의 주체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의 종말, 구원을 확신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신앙고백, 신학적 이해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2 천년 교회 역사에서 그때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신학적 성찰에 의한 신앙고백으로 교회를 지켜오셨습니다.

니카아 신조, 사도 신경, 하이델 베르크 신앙 고백, 제 2 스위스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바르멘 신앙고백, 1967년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은 우리들이 구원의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의 완성과 주체가 되심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천당, 구원, 하늘나라갑니다.

 

학개 2장 10-19 (2 번째 축복)

학개서는 1-2장의 짧은 말씀이지만 우리 신앙의 전체적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성전 건축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에서 종말까지 비유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전이 지어져 가는 과정에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손길이 나타납니다.  성전을 짓기 전, 유대인들의 실상이 이렇게 나타납니다.

(v.12-14)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음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니라 하는지라 (v.13) 학개가 이르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가운데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하니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부정하리라 하더라 (v.14)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들의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에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하나님에게 드리는 제물이 일반적 음식, 국, 포도주, 올리브 기름에 접촉하면 하나님의 제물은 부정합니다.  죽은 시체를 만지면 그 사람은 부정합니다.  이렇게 부정한 것을 하나님에게 드릴 수 없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러한 부정의 결과로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이 질병으로 생각했습니다.  국가적으로 는 전염병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피부병이나, 안질과 같은 질병으로 맹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라한 심판의 하나로, 경제적 가난으로도 그들의 죄악과 부정을 심판하십니다.

(v.16-17) 그 때에는 이십 고르 곡식 더미에 이른즉 십 고르뿐이었고 포도즙 틀에 오십 고르를 길으러 이른즉 이십 고르뿐이었었느니라 (v.17)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느니라.

고생을 하며 농사를 지었지만, 그 결과는 거의 없습니다.  각종 재앙으로 다 빼앗깁니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자연재앙은 하나님과 무관하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자연을 보호하고, 관리하면 이러한 재앙에서 벗어나고, 이러한 성경의 말씀은 신화적 구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끝없는 고난과 고통이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하나님의 존재 확인은 이러한 자연적 현상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과학과 문명과 우리의 이성과 지식이 발달을 해도 우리들이 해결 할 수 없는 것의 하나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고단함과 고통입니다.  현대인의 허망과 불안, 삶에 대한 무의미는 이 시대의 최고의 사회문제입니다.

오히려 고대 사회에는 이러한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으로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근본주의도 문제가 되지만, 성경의 사건을 현대의 지식의 진화적 입장에서 해석을 하는 이 시대의 지식과 이성도 큰 문제가 됩니다.

모든 인류의 신화나, 철학이나, 윤리와 도덕은 인간의 내면에서 시작합니다.

서양은 나의 내면에서 다른 사람과 인격적 관계에 중심을 둡니다.  이러한 인격성은 그리스 신학이나 서양 철학의 근본입니다.  그리스 신화는 인간이 신과 인격적 관계를 형성 할 수 있을 정도의 적극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은 인간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분노하고 배신하고, 슬퍼합니다.  결국 신이 아닙니다.

그러나 동양은 나의 내면에서 나를 중심으로 하는 관념의 세계로 치우칩니다.  장자와 공자가 대표적입니다.  장자는 자연적 흐름을 절대로 거스르지 않습니다.  자연과 나의 일치입니다.  매우 관념적입니다.  또한 공자도 나의 완성을 너와 사회와 국가를 봅니다.  나는 절제하고, 나를 희생하는 것이 도덕의 근본입니다.  그럼으로 타인의 잘못도 나의 잘못입니다.  자식의 잘못도, 왕의 실정도, 부모의 효도도 나의 부덕입니다.  그럼으로 나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은 계시의 하나님입니다.  계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십니다.  5천년전의 하나님 오늘의 하나님입니다.  그 계시성은 우리를 현실적 존재로 만들어갑니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고난과 시련과 질병을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도 해석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무관하게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손길로도 봅니다.  이것이 성경을 근거로 하는 하나님의 계시성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오늘 날 교회의 치명적 실수는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하나의 신비적 사건으로 해서 문제와 고난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사용을 합니다.  많은 교인들은 이러한 신비적 계시에 하나님의 존재를 이해합니다.  이것은 매우 기초적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실체를 가장 무지한 자들에게 나타내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완성은 내일 학개 마지막에 나타납니다.  죽음을 이기는 부활과 승리입니다.  최후의 영광입니다.  문제는 오늘 날의 교인들과 교회는 이것에 절대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 종교가 현세구복의 일반적 종교로 전락을 했습니다.  인생의 문제의 답을 기도와 성경으로 찾으라고 합니다.  맞는 말인 것 같지만, 이렇게 되면 기독교는 불교와 서양의 철학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인생의 문제를 기도와 성경으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기독교의 최종적 계시가 아닙니다.  최종 계시와 하나님의 영광은 종말이고, 그 종말을 준비하는 우리의 변화입니다.

    (v.19) 곡식 종자가 아직도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성전을 지으라고 합니다.  성전은 우리가 성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지어져가는 성전입니다.  (2장 첫 부분 참조)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거룩해져가는 존재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 하나님의 영광을 맞이하려면 현재에는 거룩해져가는 인격과 삶의 변화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요체입니다.

(골 3:3-10)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v.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v.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v.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v.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v.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v.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v.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이것이 신앙의 요체입니다.  4절에 하나님의 영광중에 나타날 때에 우리의 모습을 변화시키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나 오늘 날 교회와 교인들은 이것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럼으로 기독교는 종교화되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길로 가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학개 2장- 3개의 예언, (첫째 축복)

유대인들에게 성전 자체가 하나님입니다.  그들에게 성전이 하나님과 같습니다.  그럼으로 성전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럼으로 어제는 학개서의 중요한 내용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자에 대한 복을 언급했습니다.  1장에서는 의인의 자손은 걸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예배 드리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2장에는 또 다른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납니다.  1장과 다릅니다.  2장에는 3개의 예언이 나타납니다.  2장 1절에서 9절이 첫 번 내용입니다.  2 장은 또 다른 차원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나타납니다.

2장 1-9절은 Sandwich Style의 문장입니다.   3절과 9절을 영광으로 나타냅니다.  샌드위치의 양쪽의 빵과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용물입니다.  그 내용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v3)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

과거의 성전은 매우 화려했지만, 현재의 성전은 너무나 초라하다고 합니다.  파괴되고, 과거의 영광의 흔적도 없습니다.  우상이 있던 자리였고,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곳과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9절에 다음과 같이 나타납니다.

(v.9)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새로운 성전의 영광은 과거, 파괴되기 이전의 성전과 비교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솔로몬의 성전이 새롭게 지을 성전과 비교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러한 성전으로 지어 질 수 있습니까?  학개와 유대인들이 수고한 스룹바벨의 성전은 또 한 번 파괴되고, 우상의 신전이 되고, 우상의 제물이 드려집니다.  또한 이렇게 파괴된 성전을 헤롯 대왕이 다시 80년 동안 세우지만 로마에 의하여 AD 70년에 완전히 파괴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성전을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이것이 Sandwich의 내용물입니다.

(v.5-8)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v.6)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v.7) 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v.8)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5절에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신이 성전에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하나님이 우리에에 찾아오시고, 우리들이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이 계실 만한 곳으로 지어져 가는 중입니다.  우리가 성전입니다.

에베소서 2장 22절을 이렇게 의역 할 수 있습니다.  We are being built together to become a dwelling in which God lives by his Spirit.  우리들이 성전으로 지어져가는 (Is being built) 주도권은 성령 하나님입니다.  그 성령 하나님에 의하여 하나님이 거하실만한 곳으로 우리들이 지어져갑니다.  우리들이 성전을 짓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신 성령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는데 그 역활은 성령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학개 2장의 첫번 축복은 하나님의 영,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하나님의 성전답게 우리를 지어가십니다.

학개 1장- 하나님의 축복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며, 하나님이 계시는 실질적 장소였습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는 바벨론 포로 70년에서 해방을 주어 유대인들을 조국으로 귀환을 시킵니다.  고레스 식민지 통치 방법의 하나는 자국민에 의한 식민지 통치가 됩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다리오 왕이 나타납니다.  다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성전 공사와 포로 해방을 선언합니다.  다리오와 고레스의 역활이 겹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다리오와 고레스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러한 내용을 정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다만 어떤 학자들은 다리오와 고레스를 아주 가까운 친척 또는 동일한 인물로도 봅니다.  그러나 확실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성전 공사 재개에 대한 유대인의 태도을 공박하는 것입니다.  성전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바벨론 포로 70년으로 성전 제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성전에 우상이 있기도 했습니다.  성전 제사를 드리려면 각종 도구와 그릇들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모든 성전 기명을 바벨론에게 빼앗겼기에 성전 제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정상적 관계를 갖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성전을 다시 지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은 유대인들의 무관심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v.6)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v.10-11) 그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v.11) 내가 이 땅과 산과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땅의 모든 소산과 사람과 가축과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한재를 들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와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더욱더 가난해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한국 교회는 성전에 대한 애착이 강합니다.  아마도 이러한 구절이 성경 구입과 건축에 많이 사용 됐을 것입니다.  그 결과 성전 구입과 건축에 많은 부작용도 있었을 것입니다.

며칠 전 어느 목사님과 식사를 했습니다.  그와 나의 공통점은 35년 전에 미국 땅에서 교회 친구로 만났고, 늦은 나이에 목회자가 됐습니다.  목회적 공통점은, 교인들을 특정한 목적과 방향으로 Drive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오랜 사회 생활의 경험으로 주어진 것일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매우 조심스러워합니다.  그 이유는 성도로서 고난과 시련에서 신앙 생활을 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에 축복을 건강과 잘사는 것과 높은 명예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날 식사하면서 두 사람이 일치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의인의 자식은 걸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자녀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서로 주변의 예를 들면서 의견이 일치 했습니다.  특히 기도 많이 하시면서 교회를 사랑하시는 분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은 분명하게 있었습니다.

또한 며칠전 어느 장로님이 말씀합니다.  자신의 평생의 신앙 생활하면서 한 가지는 확실하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아파도 주일을 지켰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매우 건강하게 자랐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니 아플 시간도 없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러한 내용에 반박 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너무나 남용이 되어 이렇게 언급하는 것조차 쑥스러운 우리들이 됐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오해하고 악용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피해를 본 분들도 있습니다.이러한 신앙을 미신, 기복 신앙으로 취급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면서 복을 받겠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 할 때에, 하나님은 그 사람과 그의 자손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스바냐 3장 -인간과 하나님의 역사관

스바냐 2장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채찍으로 사용하신 나라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유대는 다음과 같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14절에서 20절에서 하나님이 유대를 승리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14-15절만 소개합니다.

  (v.14-15)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v.15)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은 유대를 승리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만들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관입니다.

인류의 역사관은 원인과 결과입니다.  임진왜란과 같은 전쟁의 역사를 원인과 결과로 해석합니다.  한 개인의 역사도 원인과 결과입니다.  오늘 날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내가 이렇게 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노력하고, 공부하고, 좋은 씨앗을 뿌려야 좋은 열매를 얻는다고 합니다.  사실입니다.  모든 정치와 경제의 논리는 원인과 결과입니다.  한국의 한진해운 사태도 원인과 결과입니다.

그러나 원인과 결과로 해석되지 않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노력하고, 정직하고, 공부하고, 좋은 씨앗을 뿌렸지만, 그 열매와 결과가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때로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아무것도 얻지 못 할 때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유 없는 질병과 고난을 당합니다.  평생을 고통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국가적 자연재해도 있습니다.  Hurricane 지진과 쓰나미와 같은 일들입니다.

때로는 나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지만 엄청난 성공과 행복을 맛봅니다.  매사가 잘 됩니다.  나의 노력과 의지에 비해서 나는 얻는 것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에게는 2 가지의 역사가 공존합니다.  인간에 의하여 진행되는 원인과 결과의 역사입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역사적 내용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인과 결과가 적용되지 아니기에 우리들이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스바냐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줍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들이 지금을 이유 없이 이방인들에게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지만, 너희들의 우상숭배라고 하십니다.  우상숭배가 원인이고 결과는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동시에 너희들을 채찍과 몽둥이로 사용하는 이방국가들은 하나님이 심판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최후의 승리와 영광을 하나님이 보장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원인과 결과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우상 숭배로 이러한 영광과 자격에 없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다고 합니다.  은혜적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원인과 결과의 역사에서 은혜의 역사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에게는 고난과 시련, 인생의 어려움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종말적 승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요한 계시록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종말적 승리를 향해 가지만, 오늘의 승리와 영광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래에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역사관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입니다.  우리들이 최선을 다하며 살아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적 종말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회가 중요해집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손길과 체험을 경험하는 장소가 교회입니다.  예배입니다.  기도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럼으로 교회는 구원의 선물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에서 우리의 책임과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이해해야 하며 동시에 교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스바냐 2장 – 인간과 하나님의 역사관

스바냐 2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죄악을 징계 하실 때에, 이방의 나라들을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 채찍과 몽둥이로 사용하십니다.  이집트, 구스, 블레렛, 앗수르, 바벨론, 모압, 암몬등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입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매와 채찍을 맞는 이스라엘과 유다는 강대국들이, 공격합니다.  전쟁에서 패배를 당하면 포로로 끌려가고, 지배를 당합니다.  공격을 하는 나라들은 약한 나라를 지배하려고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공격을 당하는 이스라엘은 국력이 약해서 적에게 지배를 당합니다.

인간의 전쟁이고, 인간의 역사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개입하는 것이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마치 임진왜란과 같습니다.  일본이 조선과 전쟁을 합니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겠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전쟁입니다.  우리들이 임진왜란을 하나님의 우리 나라를 우상숭배로 일본을 사용하셨기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고 역사를 해석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러한 전쟁을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전쟁으로 나타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인간의 전쟁 역사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역사관은 각 개인의 삶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역사관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실패와 성공의 주인이 하나님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실패와 성공의 주인입니다.  사람이 역사의 주인입니다.  엄청난 역사관의 차이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Post-modernism에서 사람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개념이 역사적 개념의 주류입니다.  계몽주의 영향으로 상황적 가치가 중요하고, 논리적이고, 이성적 판단이 중요해집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는 개인이 역사적 주체가 됩니다.  그럼으로 성경은 허구적 사실로, Fiction, 이야기로 전락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체라는 것은 인정 받을 수 없는 시대적 요구가 됩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의 역사관은 사람의 역사관과 하나님의 역사관을 대립적 시각으로 바라봅니다.

내일 계속합니다.

추신: 김 장로님의 모든 장례 순서를 잘 마쳤습니다.

모든 교우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스바냐 1장- 여호와의 날 -헤렘

스바냐의 특징은 하나님의 날에 대한 자세한 내용입니다.  구약의 예언서을 공부하면서 자주 듣게 되는 단어가 여호와의 날입니다.  이사야, 에스겔, 예레미야, 요엘등, 모든 예언서에 여호와의 날이 새롭게 이해됩니다.

예언서 이전의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그러나 예언서에 들어와서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심판과 분노의 날로 나타납니다.

제사가 심판으로 변경되는 것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구원이, 찬양이, 감사의 여호와의 날이 , 죽음과 고난과 시련으로 변경됩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날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죄의 용서입니다.  그러나 예언서의 여호와의 날은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것을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달라졌지만, 하나님에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여호와의 날입니다.

히브리어로 헤렘 // Herem이 있습니다.  완전히 박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드리는 제사입니다.  제사는 성전에서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통해서도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립니다.

유대인들이 전쟁에 언약궤를 끌고 나가는 이유의 하나는 전쟁에서 이기려고 끌고 가는 것이지만 근본적 의미는 제사입니다.  적들을 하나님에게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쟁을 통한 제사는 고대 전쟁사에 자주 등장합니다.

여호수아서에서 여리고 성의 전쟁에서 아간이 하나님의 제물을 탈취합니다.  그 결과 아이성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크게 패배합니다.  여리고의 전쟁은 전쟁이 아니라 제사입니다.  헤렘입니다.  모든 것을 죽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에게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제물로 드리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우상숭배에 오염되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가나안 정벌 전쟁도 헤렘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부족을 살려 두었을 때에 우상숭배로 하나님의 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헤렘의 제사와 제물을 훔친 유대와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시는것이 이방국가입니다.  이사야가 이러한 헤렘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앗수르, 바벨론이 하나님의 채찍과 몽둥이로 헤렘의 제사를 거역한 유대와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지배자가 되십니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예언서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적들에 의하여 유대와 이스라엘이 망하게 되는 것을 하나님이 변명하시는 것 같습니다.  또 그렇게 이해하는 멍청한 학자들도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을 이해하면 우리의 모든 날들이 하나님의 날입니다.  하나님은 제사 // 예배를 훔치는 자는 징벌하십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그러나 모든 날을 하나님의 날로 하나님의 것으로 만드는 자는 하나님이 여호와의 날에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제사, 제물을 훔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구원입니다.  구원의 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제사 // 헤렘을 훔친자는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에게 심판을 당합니다.

오늘 날 잘못된 종말론을 가르치는 자들이 있습니다.  특히 요한 계시록과 다니엘서로 종말의 날에, 여호와의 날에 믿는자들도 고난과 시련을 당한다고 합니다. 스바냐 3장에서 이것을 철저하게 부정합니다.  

우리에게 오늘이 여호와의 날이기에 감사와 은혜의 하루입니다.  좋은 날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