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3장 -가짜 목사

어제에 이어 계속해서 거짓 선지자, 거짓 목사에 대한 경고와 징게입니다.

(v.5)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들은 이에 물 것이 있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오늘 날의 표현으로 주의 종을 잘 섬기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주의 종을 무시하면, 하나님이 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종이니 목사를 잘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예언자 목사를 이렇게 징계하십니다.

(v.6-7)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어둠을 만나리니 점 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 (v.7) 선견자가 부끄러워하며 술객이 수치를 당하여 다 입술을 가릴 것은 하나님이 응답하지 아니하심이거니와.

하나님은 그가 예언하는 모든 것, 설교하는 모든 것은 거짓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과장해서 설교하면 그 설교는 거짓입니다.  자신의 개인적 명예를 위하여 교인들을 공갈 협박하는 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사기라고 합니다.

오늘 날 어떤 교인들을 목사를 두려워합니다.  기복신앙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축복과 저주를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올바른 성경적 입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 사람이 우상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목사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존경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어떤 교인들은 목사를 두려워하지만, 존경하지 않습니다.  그 증거는 교인, 자신들의 이익과 자존심에 목사가 도움이 되지 않을 때에는 바로 공격과 비난의 대상입니다.  세상의 인정과 의리만도 못하게 나타나는 곳이 오늘 날 교회입니다.

진짜 선지자, 목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v.8) 오직 나는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해져서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진짜 선지자는 목사는 백성들의 죄악을 고발합니다.  미가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 날 이렇게 나타납니다.  가짜 목사는 교회를 선교 사업, 전도 사업, 구제사업, 사회 정의를 실천하는 것으로 변질 시킵니다.

가짜는 일단 교인들에게 예배와 기도와 성경을 강조합니다.  지도자 교육도 시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보수진영은 선교 해야하고, 전도해야하고, 구제를 해야한다고 합니다.  진보진영은 사회정의를 실천하자고 합니다.  교인들이 일꾼이 됩니다.  교인들은 이렇게 일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태내고 자신들이 성숙한 신자가 되어간다고 착각합니다.

물론 우리의 도움과 손길이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을 들어야 하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난에서 구제되어야 하고, 악한 사회적 제도에서 벗어나게 해주어야 합니다.  또한 이러한 일로 하나님의 영광과 기적도 나타납니다.  신자로서 보람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구원의 계획은 하나님이 섭리와 통치입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을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구원하십니다.  그 사람의 죄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나타내십니다.  그 결과 우리의 달란트에 따라 우리 각자에게는 각자의 부르심 Calling // Vocation이 있습니다.  나의 직업, 직장, 가정 사회, 국가에서 신자답게 사는 것이 전도와 선교와 구제와 사역입니다.

이러한 삻이 나타나지 않으면 신자들이 속한 사회, 국가에서 교회는 멸시와 조롱의 대상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집단의 하나는 교회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교인들과 교회는 세계로, 외부로 나아갑니다.  미국이 당면한 세계 최고의 전도와 선교지는 미국 자체입니다.  한국의 최대 선교와 전도의 대상은 세계 만방이 아니라 대한민국 자체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곳에 전도와 선교 할 실력이 없습니다.  우리의 죄악에 대한 회개와 변화의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 사역을 위하여 특정한 선교사와 전도자를 부르십니다.  우리 모두를 부르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각 사람에게 부르심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 부르심을 인위적으로 강조하고 변경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나의 생업과 현실에서, 하나님의 죄인이라고 인식한다면, 그 삶이 하나님에게 영광이요, 다른 사람에게는 기쁨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미가서 2장 -가짜 목사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예언자끼리,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오늘 날로 표현하면, 교회 목사끼리 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너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목사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될까요?

미가의 예언이 틀렸다고 하는 가짜 예언자의 내용이 6-7절에 나옵니다.  가짜 예언자가 진짜 예언자를 이렇게 공격합니다.  오늘 날 표현으로 가짜 목사가 진짜 목사를 이렇게 공격합니다.

  (v.6)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거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 하는도다.

가짜 목사, 가짜 예언자들은 이렇게 설교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기에, 죄를 짓지만, 하나님이 다 용서하시기에, 죄에 대한 설교 그만하고, 너무나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축복, 위로, 능력을 설교하라고 합니다.  교회들에게 죄에 대해서 설교하면, 지겨워하니, 하나님의 축복하심을 설교 하라고 합니다.  저주를 설교하지 말라고 합니다.

10-20년 전에는 이러한 설교가 먹혀 들었지만, 이제는 잘 먹히지 않으니 오늘 날 가짜 목사들은 이렇게 살짝 변형 시킵니다.

우리들이 영원한 하늘나라에도 갈 것이지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수고를 하자고 합니다.  우리의 수고를 보고, 하나님이 우리의 가문을 가족을 축복해주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충성하면, 하나님이 갚아주신다고 합니다.  이러한 설교를 들은 교인들은 아멘을 합창합니다.  그러니 선교가고, 전도하고, 교회를 키우는 것이 하나님에게 축복을 받는 일로 착각을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하나님이 됩니다.  이러한 것은 신앙의 비본질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의 깊이에서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의 죄의 용서입니다.  나의 죄가 인식되지 않는 하나님의 축복과 위로와 기적은 모두 거짓입니다.  나의 죄악에 대한 뼈저린 고통이 있어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영광이 진정한 축복임을 알게 됩니다.  가짜는 이러한 뼈저린 죄악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또 가짜들은 이렇게 말 합니다.

  (v.7) 너희 야곱의 족속아 어찌 이르기를 여호와의 영이 성급하시다 하겠느냐 그의 행위가 이러하시다 하겠느냐 나의 말이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유익하지 아니하냐.

가짜들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인내와 자비의 하나님이기에, 우리의 죄악에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나지 않으며, 회개 할 때까지 참고 기다리신다고 합니다.  지금이라도 정직하게 살면, 하나님이 용서하신다고 합니다.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에는 무서운 함정이 있습니다.  과거의 죄악에 대한 회개가 없습니다.

가짜들은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기억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과거의 죄에 대한 회개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지금 정직하고, 하나님에게 충성하고, 물질적으로 헌신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나님이 과거의 죄를 책망하시기 보다 현재의 삶을 보시고, 축복을 주신다고 합니다.

가짜들은 회개로 인한 삶의 변화, 인격의 변화, 행동의 변화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가짜의 특징은 교회와 교인을 신비주의로 몰고 갑니다.  방언, 예언, 환상, 치유, 기적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귀신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귀신도 예언하고 귀신도 방언합니다.

진정한 성령의 임재는 나의 죄악성을 버리고, 인간성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성이 달라지는 것은 방언보다, 예언보다, 환상보다 어렵습니다.  자신의 십자가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가짜는 이것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성령의 임재는 나의 인격의 부족과 철저한 죄악성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 할 뿐입니다.

가짜의 특징은 하나님의 일반적 은총을 부정합니다.  모든 것을 교회 중심으로 하라고 합니다.  맞는 말인 것 같지만, 조심해야 합니다.  머릿돌 교회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나의 가정이 교회입니다.  나의 직장이 교회입니다.  이러한 곳들이 교회가 되지 아니하고 일주일에 한 번 머릿돌 교회가 교회라고 착각하는 것은 무서운 죄악입니다.

진짜 미가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지금 부터는 여러분 자신들 부터 듣기 싫을 것입니다.

(v.8-10) 근래에 내 백성이 원수 같이 일어나서 전쟁을 피하여 평안히 지나가는 자들의 의복에서 겉옷을 벗기며 (v.9)내 백성의 부녀들을 그들의 즐거운 집에서 쫓아내고 그들의 어린 자녀에게서 나의 영광을 영원히 빼앗는도다 (v.10)이것은 너희가 쉴 곳이 아니니 일어나 떠날지어다 이는 그것이 이미 더러워졌음이니라 그런즉 반드시 멸하리니 그 멸망이 크리라.

우리들이 남의 것을 착취하고 빼앗습니다.  겉옷, 없어서는 안 될 것을 나의 이익을 위하여 갈취합니다.  연악한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신자들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의 죄악에 대해서 100% 심판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죄악에서 회개하고 떠나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의 죄성을 부정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가짜를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의 죄는 알아도 나의 죄는 모릅니다.  신앙은 내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알고 있습니까?  이것을 모르면 가짜 목사를 좋아합니다.

미가가 가짜 목사는 좋아하는 교인들에게 이렇게 조롱을 합니다.

(v.11)사람이 만일 허망하게 행하며 거짓말로 이르기를 내가 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 네게 예언하리라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이 백성의 선지자가 되리로다.

당시의 포도주와 독주, 술은 풍성한 삶의 결과입니다.  부자들이 마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건강을 주고, 매사를 잘되게 하고, 물질의 축복을 주시면 너희들은 그 사람을 진짜 선지자로 믿을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날의 목사들은 무당이 된 것 같습니다.  교인들의 요구에 춤을 추어야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굿을 많이 봤습니다.  굿하는 사람들이 돈 다발을 쥐고 무당 옆에 서있습니다.  돈을 주면 무당이 신명이 나서 춤을 춥니다.  정성이 갸륵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돈을 주지 않으면 무당이 굿을 하지 않습니다.  정성이 없다는 이유입니다.

저도 목사입니다.   미가서를 이렇게 해석하면서 참으로 마음이 괴롭습니다.

 

미가서 1장- 끝없는 말씀이지만,

이사야서에서 시작한 예언서는 미가서로 넘어왔습니다.  오랜 동안 예언서를 다루면서 미가서의 내용은 다른 예언서의 내용과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본문은 북 이스라엘과 남쪽 유대에 대한 죄악, 우상숭배에 대한 질책입니다.

저에게 이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데, 좀 더 다른 내용으로, 이스라엘의 죄악을 질책 할 수 없는가 입니다.  오늘 본문을 잘 읽어보시면 어디에서 봤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질책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같은 내용을 듣는 우리도 지치고, 말씀하시는 하나님도 힘드시겠다고 생각합니다.  유사한 내용으로 반복하며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진보적 성경학자들은 이러한 예언서의 내용이 서로 다른 예언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무시합니다.  죄를 나와 상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은 똑같은 말씀을 끝없이 반복해야합니다.

우리에게 끝없이 똑같이 잔소리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부모님들의 자식에 대한 잔소리입니다.  아이들의 공부하는 것, 옷 입는 것, 인터넷 사용하는 것, 말하는 태도, 밥 먹는 태도,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 학교 지각, 끝임 없이 말을 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지겹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이러한 잔소리가 지겨워서 가출도 합니다.  부모를 미워합니다.

부모님들은 자식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잔소리하는 것은 나 잘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너 잘되라고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식들은 이러한 부모의 말을 반대로 듣습니다.  이렇게 잔소리하는 것은 부모의 욕심이라고 합니다.  부모의 만족을 채우려고 나를 이용한다고 생각하는 자식도 있습니다.  부모가 능력이 없어서 잔소리만 한다고 합니다.  만나보면 별의 별 자식들이 있습니다.

우리들도 이러한 자식들과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끝임 없이 말씀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상 숭배하지 말라고 하시고, 우리는 죄 짓게해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면 우리는 우상숭배 할 이유가 없다고 합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시대의 우상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자식을, 사업을, 인간관계를 심지어는 신앙 생활도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어려운 문제와 시련은 돈이 아닌 것으로 얼마든지 해결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양심에 호소해서 해결 할 수 있습니다.  주고 받는 말과 이해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습니다.  신앙으로 믿음으로 해결 할 수 있습니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서 해결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힘든 방법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돈으로 해결하면, 반드시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타납니다.  문제는 끝없이 반복됩니다.  자식을 돈으로 키우려고 하면 반드시 그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사업도 돈으로 하는 것 같지만 돈이 아닙니다.  우상은 문제 해결을 약속하지만, 100%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문제 해결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그 문제에서 죄짓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문제로 우상숭배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잔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악을 보고, 우리를 지배하는 어두움의 세력을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내 자신과 그 문제와 어려움을 비추어 봐야 합니다.  그리고 우상이 아닌, 돈이 아닌 방법으로 깊은 생각을 해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지혜와 길을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양심과 마음과 신앙과 감정, 이성을 주셨습니다.  이 시대의 우상 돈에서 벗어나라는 하나님의 끝없는 잔소리를 들으시고, 하루를 사시길 바랍니다.

요나서 4장 – 0.01%와 100%는 같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이스라엘의 원수 니느웨에 가서 그들의 죄악을 책망하라고 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을 갑니다.  풍랑을 만나서 바다에 던져 집니다.  바다의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간 요나는 하나님게 회개를 하며 살려주시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니느웨로 가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물고기 입에서 토해 냅니다.

니느웨가 철저한 회개를 합니다.  니느웨는 요나에게 이스라엘의 원수가 되기에 처벌의 대상이지, 용서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에게 요나는 이렇게 반응합니다.  

(v.3)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나의 원수를 용서 할 바에는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고 합니다.  우리는 원수 때문에 이렇게 고생하며 억울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 원수 때문에 마음을 달래려고 하나님을 믿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그 원수는 하나님에게 벌도 받지 않고 너무나 잘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나의 원수에게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원수 때문에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나의 원수가 저렇게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차라리 내가 죽는 것이 낫습니다.  나의 원수는 나를 무능하게, 나의 시간과 마음과 물질을 지금도 빼앗아 갑니다.  한 번 원수는 평생 원수가 됩니다.  나의 원수는 누가 갚아줍니까?  

그러나 나의 원수는 나에게 100% 잘못했지만, 나는 나의 원수에게 100% 잘했습니까?  나도 나의 원수에게 어느 정도 잘못했지만 나의 원수가 나에게 잘못한 것과 비교 할 것이 못 된다고 합니다.  그는 나에게 100% 잘못했지만 나는 1%, 잘못했다고 합니다.    

순금의 정도를 표시를 99.9%라고 합니다.  순금은 100%라고 표시를 할 수 없습니다.  과학적으로 100%의 순금을 만들어낼 기술이 없습니다. 0.01%의 이물질은 항상 존재합니다.  이것이 죄가 됩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0.01%도 죄인이고, 100% 죄도 죄인입니다.  너와 나의 죄를 비교하면 나는 죄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0.01%든지 1% 이든지 죄인입니다.  죄는 죄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까마귀가 노는 곳에 백로가 가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백로는 의인이고 까마귀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틀린 것입니다.  백로의 깃털에서도 하나 정도는 까만 색갈입니다.  우리 눈에는 백로이지만, 하나님에게는 까마귀와 같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수를 용서하라고 명령 하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죄가 하나님에게 용서 됩니다.  나는 백로고 나의 원수는 까마귀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 까마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까마귀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백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주는 것에는 감사합니다.  마치 요나에게 더위를 피해 박 넝쿨을 준비해주십니다.  그러나 이 박넝쿨이 시들어 죽자 요나는 또 한 번 하나님에게 사는 것 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하룻밤에 피고 지는 박 넝쿨을 그렇게 아낀다면 내가 니느웨의 사람들을 아끼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요나에게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원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로 사랑과 용서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는 원수는 미움과 증오의 대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선택입니다.  그 선택에 따라 행복과 불행, 자유와 노예로 갈라집니다.  선택은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입니다.  나를 이겨내는 선택은 행복과 자유입니다.  나를 이겨내지 못하는 선택은 불행과 노예입니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법칙입니다.  이 선택을 하지 못하는 인간은 불행과 노예로 살아갈 자격을 얻습니다.

까마귀에서 백로가 되는 선택은 어렵습니다.  까마귀에서 까마귀로 사는 것은 쉽습니다.  오늘도 원수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면,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시고, 나의 선택을 원망하시기 바랍니다.  0.01%나 100%는 똑같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미련함을 스스로 책망하시기 바랍니다.

 

요나서 3장- 하나님 계시의 흐름

구약에서 하나님의 예언은 2가지의 형태를 갖습니다.  첫째는 너희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너희의 죄로 하나님이 이렇게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예언서에서 첫째는 회개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통지합니다.  우상 숭배에서 벗어나라고 합니다.  우상숭배를 벗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통지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 숭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 결과 두 번째의 예언이 나타납니다.   너의 죄로 너희들이 이방의 포로로 끌려 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공격으로 나라가 망하고, 남쪽 유대는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갑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예언은 2가지의 과정을 거치면서 나타나게 됩니다.

문제는 오늘 본문은 이러한 예언의 내용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v.3-4)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v.4)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검사가 재판정에서 피고의 죄를 지적해야 재판장이 심판을 합니다.  본문을 잘 읽어보면, 그저 40일이 지나면 성이 무너진다고 할 뿐입니다.  니느웨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죄의 지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니느웨 성의 백성과 왕과 신하와 심지어는 짐승들도 금식하며 회개합니다.  그들의 죄를 스스로 고백합니다.

구약의 전통적 예언서의 첫째와 두 번째 예언과 심판의 과정이 무시됩니다.  또 하나는 사흘, 3일 동안 요나가 외쳐야 사람들이 듣는 큰 도시입니다.  그러나 단 하루 만에 사람들이 회개를 합니다.  회개를 기다렸다는 듯이 회개합니다.  자신의 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회개는 하나님의 주권적 회개입니다.  은혜적 회개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이 계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서를 통해서 새로운 하나님의 계시, 통치 방법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율법, 계명을 통한 계약적 관계, 율법적 Covenant을 맺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계약의 관계가 은혜적 Covenant로 변경이 됩니다.  Covenant는 계약, 언약으로 번역되지만 성경적 의미는 양 당사자가 동등한 관계의 계약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손해 보시는 계약입니다.

사무엘하 7장에 하나님과 다윗의 은혜적 Covenant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과 다윗, 유대 지파와의 계약입니다.  이러한 계약이 모든 인류, 이방인, 이스라엘의 원수, 앗수르, 니느웨에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점진적 계시, Progressive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지역적 이스라엘에서 모든 인류와 민족으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약의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루어집니다.

4장에 가면 요나가 이러한 하나님에게 불평하는 내용이 나타납니다.  요나는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점진적 계시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 날도 똑같은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제가 수없이 반복하지만,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근본주의, 문자주의는 자유주의 신앙에 반대해서 나타난 성경적 해석입니다.  그러나 복음주의는 지나친 문자적 성경해석과 그로 인한 경직성, 시대의 흐름을 따르지 못하는 사상에 반대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복음주의는 문자주의를 탈피한 흐름입니다.

그러나 오늘 날 한국교회, 이민교회는 근본주의, 문자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주의라는 가면을 쓰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 하시는 계시를 완고하게 반대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신학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신학을 죄악시합니다.  신학이 없는 종교는 무속신앙입니다.  한국 교회는 기복신앙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사회와 민족과 국가 앞에서 책임지는 모습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에 대한 책임과 인식이 부재합니다.

구약의 예언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예언의 내용이 국가와 사회와 유대교에 대한 죄악의 지적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끼리 세상에서 잘 먹고 복 받고 사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신앙의 약점을 감추려고, 보수도 아니면서 보수 신앙이라고 강조합니다.  한국 교회는 자신이 누구인지 정체성과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요나서를 통해서 하나님을 새롭게 이해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요나서 2장 -하나님 앞에서 정직

우리들이 가장 솔직해질 수 있다면 언제 솔직해질 수 있을까요?

심리학자들은 사람에게는 거짓이 본능적이라고 합니다.  모든 행동과 말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거짓이 있다고 합니다.  거짓은 부정적인 것이지만, 거짓에는 정당한 합리성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아파서 약을 먹지 않는 아이에게, 약이 쓰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짓은 상대방을 속이지만, 긍정적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적에게 자신의 생명이 위험을 당하는 상황에서는 거짓을 말합니다.  상대방을 속여서, 그 위험을 벗어나기도 합니다.  그럼으로 거짓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은 거짓입니다.  우리의 환경과 삶이 악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정말로 무섭고, 두려운 것을 당한다면, 거짓을 말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가장 두려운, 가장 무서운 순간은 죽음의 직전입니다.  죽음의 문턱입니다.  저는 이때에 모든 사람이 가장 정직해져가는 순간이라고 봅니다.  가장 두려운 자리가 되는 이유는 우리의 인생이 모든 것, 고통과 아픔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를 두고 떠나기에 거짓도 두고 떠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죽음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거짓과 함께 갈 수 없는 곳이 죽음입니다.

요나는 스올에서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합니다.  음부 // 스올은 죽음의 세계입니다.  그의 기도가 나타납니다.  기도의 내용이 매우 정직합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죽음은 너무나 무섭고 두렵기에 우리를 정직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v.8-9)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v.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다시스로 도망을 갑니다.  죽음에서 그는 니느웨 성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살려 주신다면 그는 니느웨 성으로 돌아가서, 회개를 요구하고,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으로 살겠다고 합니다.

그는 죽음에서 살고 싶은 열망을 나타냅니다.  그는 죽음에서 // 음부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는 1장에서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큰 소리를 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막상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사는 것이 최고의 희망과 소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살았습니다.   우리는 가장 무섭고, 두려운 죽음의 자리에 가지 않습니다.  그 자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갔다 오셨습니다.  요나가 스올에서 물고기 뱃속에서 토함을 받는 것처럼, 우리도 죽음의 자리에서 떠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광이며, 기쁨이며, 감사와 승리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야합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고, 환경을 비난 할 수 있고, 나의 부족으로 거짓을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리는 죽음과 생명이 교차하기 때문입니다.  죽음과 부활이 나타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요나서 1장-갈등에서 우리의 태도

하나님은 요나에게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원수 앗수르를 회개시키라고 합니다.  요나는 민족주의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백성에게 고통을 준 앗수르를 구원하시려고 합니다.  그러나 요나서의 전체적 내용은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에 불만을 갖고 있는 요나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요나서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지만, 앗수르의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예언서의 중요한 흐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서 만민의 하나님, 앗수르의 하나님, 우주적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오늘 날 우리들이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미국의 대선에게 가장 중요한 Issue의 하나는 기독교에 무슬림의 종교적 갈등입니다.  어제도 언론에서 하루 종일 다룬 것은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중동계 미국인으로 전사한 Kahn 부모를 비난한 Trumph에 대한 내용이 됩니다.  미국 대선에서 이렇게 종교가 중요한 내용이 된적이 없습니다.

Kahn의 부모는 Trumph의 무슬림과 남미계에 대한 비난과 공격은 미국의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와 모든 인종에 대한 권리를 무시하는 것이고 헌법에 대한 모독하는 행위라고 비난을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Trumph가 반발을 했지만 그의 반발이 오히려 심하게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2 가지 세계관이 있습니다.  종교적 세계관과 일반적 세계관입니다.  제가 일반적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과 함께 공유하는 세계관입니다.  우리는 2 개의 세계관에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세계관은 무슬림, 불교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은 2개의 세계관에서 살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법의 지배를 받고 동시에 하나님 말씀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2 개의 세계관은 일치 할 수 없고 충돌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과거에는 하나의 세계관을 가졌습니다.  왕이 어느 나라와 전쟁을 해서 승리하고 그 백성들을 강물로 끌고가서 자신이 믿는 종교를 강요했습니다.  만약에 그 강물에 들어가지 않는 자는 그 자리에서 죽였습니다.  그 강물에서 집단적으로 세례를 받고 그 왕이 믿는 종교를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그 지역에서 태어나면 그 지역을 통치하는 왕의 종교를 믿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였습니다.  종교의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결과 기독교 문화, 불교문화 이슬람 문화권이 생겨나게 됩니다.

종교가 그 백성의 삶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는 종교법이 세속적 법보다 우위입니다.  종교가 그 민족을 통치하는 기반, 근본이 됩니다.  이러한 국가를 종교국가라고 합니다.  오늘 날의 중동의 Iran, Saudi Arabia가 됩니다.  미국, 한국은 종교 국가가 아닌 세속국가입니다.  종교가 국가의 근본이 아니라 헌법이 국가의 기반을 이루어 갑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속법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 받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자로 기독교적 세계관을 갖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의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과 일치하지 아니하기에 많은 혼란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뿐만 아니라 타종교 신자도 동일합니다.

오늘 날 기독교는 타종교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종교로 인정 할 것인지, 아니면 우리들이 구원해야 할 대상으로 인정해야하는지 혼란중에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와 같은 종교로 인정한다면 종교 다원주의가 됩니다.   그들이 믿는 신과 우리 하나님이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성을 상실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효화 됩니다.  우리 구원의 가치가 상실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타종교를 구원해야 할 대상이 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공격적이고, 그들은 우리에게 방어적이기에 사회적 갈등과 분열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 세상의 헌법은 종교적 갈등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선택은 아주 좁습니다.  이것이 Post-modernism, 다극화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Catholic은 1962년 바티칸 공회에서 타종교를 잊혀진 형제, 갈라진 형제라고 합니다.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자식, 이스마엘의 후손입니다.  동방정교와 개신교는 로마 Catholic에서 벗어났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잊혀진 형제이기에,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기에 관용과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티칸 공회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세상의 모든 종교를 포용하려는 시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절대성이 약화되고 있습니다.  이슬람을 포용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이슬람에게, 예수님은 예언자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절대로 수용 할 수 없는 내용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저는 다음과 같이 선택을 합니다.  로마서 13장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핍박과 고난을 당 할 때에 바울은 다음과 같이 우리의 태도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이러한 복음의 정신과 가치를 우리의 현실에서 만들어내야 합니다.  갈등과 분열과 나의 주장을 앞세우기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태도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v.1)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v.2)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v.3)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v.4)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v.5)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v.6)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v.7)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v.8)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v.9)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v.10)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v.11)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v.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v.13)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v.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요나서 개요 – 비둘기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 성으로 가서 회개을 요구하며 외치라고 합니다.  니느웨는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의 수도입니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10 부족을 사라지게 한 장본인들입니다.  오늘 날 사마리아 지방을 정복한 민족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원수 앗수르를 회개시키라고 합니다.

요나는 유대민족주의자입니다.  당연히 자신의 민족을 멸망시킨 앗수르에 반감을 갖습니다.  그들의 회개를 요구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배를 타고 다시스로 도망을 갑니다.

어제 우리는 오바댜를 공부했습니다.  오바댜는 에돔에 대한 심판입니다.  일부 신학자들은 오바댜는 철저한 유대적 입장에서 쓴 예언서라고 합니다.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예언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요나서는 반대입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을 도말한 앗수르를 하나님이 구원하시려고 합니다.  또한 요나의 회개 요구를 듣고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를 합니다.  하나님이 니느웨에 심판을 중단하십니다.  요나서 4장을 보면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에 불만을 갖고 있는 요나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유대민족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서를 통해서 유대 민족주의을 벗어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민족을 사라지게한 앗수르도 사랑하십니다.  그럼으로 오바댜와 요나는 서로 반대 입장에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예언서를 계속 공부했지만, 예언서의 중요한 흐름의 하나는 바벨론 포로 이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우주만물의 하나님, 모든 인류의 하나님으로 계시되어집니다.  그럼으로 예수님도 요나서의 내용 인용하십니다.

요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이해하야합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선민 사상, 유대 민족 주의적 개념을 벗어나게하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니느웨가 예루살렘입니다.  하나님이 이방인을 유대인만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하나님이지만 니느웨의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지만 앗수르의 하나님입니다.  유대인의 하나님이지만 한국인의 하나님입니다.

또한 요나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비둘기입니다.  성경에서 비둘기는 노아의 방주에서 벗어나는 신호의 역활을 합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에 성령을 상징합니다  비둘기는 방주와 같이 갇혀진 사고방식, 민족주의, 굳어진 종교 행태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오늘 날 일부 교회와 신자들의 태도는 반성해야합니다.  일부 개신교는 교회 지상주의을 주장합니다.  교회가 최고라고 합니다.  이것은 Catholic의 개념을 그대로 차용합니다.  하나님은 교회 이전에 가정을 세우셨다는 것을 무시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복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오늘 날 교회의 굳어진 종교행태입니다.  목사는 교인을 속이고 목사는 자신의 신앙 양심을 속입니다.

또한 세상에 대한 안하무인 태도로 행동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정말로 무식합니다.  예의도 없습니다.  때로는 이러한 부도덕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축복이라고 떠들어 댑니다.  그 결과 교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예절도 없고 무식한 행동을 남발합니다.  오늘 날의 설교단은 너무나 비루해지고 있습니다.  오늘 날의 교회는 독불장군입니다.  이웃과 함께 사는 것을 거부합니다.

요나는 비둘기입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정말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 할 것입니다.

그럼으로 요나서를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해야합니다.

오바다 1장-선택은 자유, 그러나 결과는 자유가 아니다.

오바다는 구약에서 한장으로 된 가장 짧은 내용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경 중에서 가장 난해합니다.  작자, 시기등 알 수 없는 내용이 너무나 많습니다.  또한 예언서의 일반적 흐름과 일치 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바벨론 포로에 대한 내용이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메시야를 통해서 만민을 구원하신다는 내용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오바다서를 너무나 유대인 중심이라고 비난도 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바다서는 에돔, 에서의 후손들에 대한 징계와 심판만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에돔은 야곱형 에서의 후손입니다.  하나님이 에돔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유대, 이스라엘에 대한 모함과 시기 때문입니다.

유대도 죄악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지만, 하나님은 유대를 심판에서 회복시킵니다.  그러나 에돔은 죄악으로 심판을 당하지만, 하나님은 에돔을 심판에서 회복시켜주지 않으십니다.  둘 다 잘못해서 매를 맞지만, 하나는 매 맞고 용서를 받고, 하나는 매를 맞지만 용서를 받지 못합니다.

에돔이 무엇을 잘못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매를 때리고 용서하지 않으십니까?  이유는 에서와 야곱은 형제입니다.  형 에서의 후손 에돔은 동생 야곱의 이스라엘에 항상 열등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성경의 많은 사건을 보면 에돔은 항상 이스리엘을 방해하고,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형제지만, 미워하고, 시기하고 심지어는 공격도 합니다.

모세가 출애굽해서 에돔 땅을 통과해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지만, 에돔은 이를 거부하고 군대를 동원합니다.  모세는 자신의 형제와 같은 에돔과 전쟁을 피하고 다른 길을 택하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에돔을 미워하지 않게합니다.  다만 자신들의 길을 막은 에돔의 자손, 3대째에는 이스라엘과 함께 하나님에게 제사드릴 수 있도록 율법으로 정합니다. 1-2 대에는 함께 하지 않습니다.   미움도 사라지고, 용서 할 수 있는 시간을 3대로 본 것 같습니다.

모세는 에돔을 끝까지 형제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의 죄를 3대 후에 용서합니다.  그러나 에돔은 끝까지 이스라엘에게 고통을 줍니다.  형제의 악연은 성경 곳곳에 나타납니다.  그 결과 오늘 본문입니다.

하나님에게 용서 받지 못할 죄가 있다면 형제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기에,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용서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형제를 용서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기도로 가르쳐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3 대가 지난 후에 에돔을 용서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을 용서하십니다.   똑같이 매를 맞지만, 매를 맞은 후에 용서를 받습니다.  그러나 에돔은 이스라엘의 용서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합니다.

오늘 에돔과 이스라엘에서 어떠한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나의 자유가 아닙니다.

 

아모스 9장-성육신과 우리의 달라짐

모든 성경의 예언서의 공통점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으로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는 것이고 70년 이후에 포로에서 해방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 70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중요한 전기가 됩니다.  성전 제사의 약화가 나타나고, 회당 중심이 강화됩니다.  예루살렘의 중앙집권적 형태에서 분권적 형태가 나타납니다.  그 결과 새로운 지도층이 등장합니다.  서기관 제사장 율법사들이 등장합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에서 인류의 하나님, 만유, 우주적 하나님으로 변화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에서 모든 인류의 하나님이 됩니다.

  (v.11-12)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v.12)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도 구원하시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지역적 하나님에세 우주적 하나님으로 변화되십니다.

이러한 우주적 하나님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세주입니다.  성경은 이 사건은 이미 2천 5백년 전에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아직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예수는 성인중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에수는 인류의 구세주입니다.  그 증거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에는 경전이 있습니다.  경전은 그들의 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또는 자신들이 본받는 대상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러한 모든 경전의 특징은 사람이 신적 존재로 변화입니다.  불교는 사람들이 부처와 같은 수준이 되는 것입니다.  이슬람은 알라와 같이 천국에 들어가는 행동과 변화를 요구합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종교들의 공통점은 인간 자체의 변화, 인격적 변회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신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신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변화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살아계신 하나님 성령이 오늘도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은 경전, 성경의 하나님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이렇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증거는 인격의 변화입니다.  성숙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에서 사람이 되는 것처럼 우리의 언어와 행동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 날 교회와 신자는 이러한 달라짐을 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사건이 사라졌습니다.  감정적 체험과 신비주의에 빠졌습니다.  이러한 것으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의 삶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삶은 우리에게 너무나 고통스러운 십자가이기에 버렸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성육신의 사건이 없습니다.  우리의 달라짐이 없습니다.  이렇게 달라짐이 없는 사람의 특징은 감정과 체험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종교의 수준이 불교, 이슬람, 유대교의 수준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십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은 오늘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성화, 거룩해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와 신비와 인격의 이중성을 아주 잘 지켜 나갑니다.  또한 이렇게 달리지고 있을 때에, 하나님의 위로와 능력과 충만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또 다른 세계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 세계는 은헤와 감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