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1장 – 하나님의 것은 세상을 관통한다.

오늘 부터 다니엘서를 시작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난해한 성경은 구약의 다니엘과 신약의 요한계시록입니다.  다니엘과 요한 계시록의 특징은 미래에 대한 예언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2천 년 역사에서 이단의 특징은 다니엘과 요한 계시록을 강조하여 잘못된 종말 사상을 강조합니다.

다니엘서는 정말로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성경입니다.  특히 다니엘서에서 미래를 예측하는 숫자 계산은 매우 구체적이고 정확한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 사상을 재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엄청난 오류로 계산하게 됩니다.  성경을 억지로 풀게 됩니다.  이렇게 억지로 계산하면, 가장 최근에는 다미 선교회와 Dr. Kemp와 같은 일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이러한 오해의 시작이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무서운 적개심으로 이해하고 성경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철저하게 미워하는 사고 방식입니다.  이 세상과 하나님을 철저히 분리시키는 사고방식입니다.  세상을 철저한 사탄의 지배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이원론적 사고 방식은 사탄의 잘못된 계략에 빠지는 성경적 이해입니다.

다니엘서는 이러한 잘못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깊어지게 되는 사람은 세상을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의 일환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시며 사랑하십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다니엘과 3 친구의 이름이 나타납니다.  (6-7절) 그들 가운데는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니 (7)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

다니엘과 3 친구의 이름을 풀면, 다니엘 : 하나님은 나의 심판관 // 하나냐 : 여호와의 은혜 // 미사엘 : 하나님은 강한 분 // 아사랴 : 여호와는 도움.  3 사람의 이름에 모두 하나님의 뜻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이 이렇게 변경합니다.  벨드사살 // 사드락 // 메삭 // 아벳느고 당시 바벨론의 우상의 이름들입니다.

다니엘과 3 친구의 이름의 변경은 철저한 바벨론의 문화와 풍습에 빠지게 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다니엘과 3 친구는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거절합니다.  채식과 물로 살겠다고 합니다.  철저한 세속주의에 있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겠다는 의지입니다.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왕의 음식을 먹는 사람보다 얼굴보다 더 좋게됩니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세상을 적대시합니다.  그러나 다음 구절을 봐야합니다.

(17)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하나님이 알게 하시는 학문은 바벨론의 학문입니다.  그 중에 다니엘에게만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게 하십니다.  환상과 꿈은 유대 종교에서 우상의 것으로 철저하게 배격하는 것입니다.  환상과 꿈은 바벨론 종교 해석, 우상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바벨론의 종교적 방법 까지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이 세상에 대해서 적개심을 갖거나 무지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의 학문과 이 세상의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세상적 지식에 무식하면 안 됩니다.  성경적 지식을 아는 것 만큼,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을 성찰하고, 세상의 문화와 정치에 대한 지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단의 특징은 세상을 떠나는 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앙촌과 같은 것들이 생깁니다.  신앙으로 세상을 떠나지만 가장 비신앙적 태도가 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무식하고 용감하면 자신도 죽이고 다른 사람을 죽입니다.  신앙은 무식하면 용감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 무식한 것을 자랑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다니엘과 3 친구를 세상 지식에서 절대로 무식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특히 하나님은 다니엘에게는 당시의 세상의 지식의 최고인 환상과 꿈을 알게 하십니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깊어진다는 것은 세상을 적대시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다니엘의 이해가 없으면 다니엘서는 잘못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을 관통합니다.  마치 배와 같습니다.  세상의 한 가운데 있지만 세상의 물이 들어오지 않게 합니다.  세상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절대로 떠나지 않습니다.  세상을 가장 현명하게 살아갑니다.  자신의 배를 세상의 바다에서 지혜롭게 항해합니다.

이러한 신자가 되길 바랍니다.

에스겔 48장 – 새로운 예루살렘

에스겔의 마지막 장입니다.  이스라엘의 12 지파에 대한 땅의 분배입니다.  레위지파를 포함해서 땅의 분배를 받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40장 부터 48장은 아주 난해한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내용은 정리 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서에서 이스라엘의 지파들은 땅의 분배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이지만, 가나안 주민과 싸워서 그 땅을 차지해야 했습니다.  단 지파는 땅을 차지 하지 못하고 스스로 북쪽으로 올라갑니다.  어떤 지파는 적들과 함께 동거합니다.  어떤 지파는 주어진 땅을 제대로 차지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여호수아 13장 부터 잘 나와있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들은 신앙의 중심은 예루살렘에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땅의 분배는 끝까지 지켜지지 않습니다.  앗수르, 바벨론의 침입으로 모든 땅을 빼앗깁니다.  AD 70년 로마가 예루살렘을 파괴 할 때에는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한 명도 남아있지를 못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지역은 팔레스틴으로 변경이 됩니다.  그리고 지난 2천년 동안 그 땅은 이스라엘의 땅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2차 세계 대전이 끝이 나고, 영국의 지배를 벗어난 팔레스틴의 지역에 이스라엘의 자치지역이 생깁니다.  수차례의 전쟁을 통해서 오늘 날의 이스라엘에 다시 탄생합니다.  여호수와와 같이 그 지역의 주민들과 싸워서 오늘의 땅을 얻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땅을 또 빼앗길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여호수아서의 역사가 반복됩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이 중동의 강자이지만, 그 강한 것이 영원하다고 믿는 자는 없습니다.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입니다.  이러한 역사의 교훈을 통해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떠난 인류의 모습을 이해해야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역사의 교훈을 반대로 이해합니다.  그 땅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예루살렘입니다.  요한 계시록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예루살렘입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에 대한 땅의 분배는 영적 이스라엘에 대한 땅의 분배입니다.  하늘 나라를 소망하는 백성들에게 주어질 땅입니다.  우리는 그곳을 소망하며 기다릴 뿐입니다.

이 땅의 예루살렘은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이 아닙니다.  St. Augustine 하나님의 도성에서 말 한 거처럼, 인간의 죄악으로 얼마든지 무너지는 것이 이 땅의 예루살렘입니다.  진정한 예루살렘의 성전의 시작은 오늘날의 교회, 우리들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모신 성전입니다.  이 땅의 예루살렘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이 허락하실 예루살렘을 소망하시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에스겔 47장-영광의 예언

성전의 동쪽의 문지방 밑에서 약하게 물이 흐르기 시작을 합니다.  그러나, 그 물의 양이 넘치고 넘쳐서 헤엄을 할 정도에서 나중에는 건너가지 못할 정도가 됩니다.  이 물이 동방으로 흘러갑니다.  그리고 이 물은 죽음의 소금 밭을 적시어 생명의 장소로 만들어 버립니다.  모든 것을 살려내는 물이 됩니다.

그리고 이 물이 흐르고 지나간 자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줄 땅이됩니다.  심지어는 이방인들에게도 나누어질 땅이 됩니다.

이렇게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으로 주어진 생명과 진리의 물입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아주 미약하게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12명의 어부들에서 시작이 됩니다.  그 물은흐르고 흘러, 이 세상을 적시어, 우리 조국 대한민국에 까지 흘러왔습니다.  누구도 이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물을 거부 할 수 없습니다.  이 물은 이 세상을 차고 넘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걱정을 합니다.  교회가 이 시대의 문명과 문화 속에서 생존 할 것인가를 염려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타락으로 교회의 사회적으로 빛의 역활이 끝났다고 합니다.  교회가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법정이 교회를 구원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가르침이 시대에 너무나 동떨어졌기에 우리 후손들이 교회 출석이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지난 2천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는 항상 2 가지의 적을 가졌습니다.  하나는 교회의 안의 적이 있엇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가장한 적그리스도입니다.  교회는 항상 이러한 이단의 적들과 싸웠습니다.  지금도 이러한 사악한 적들은 교회안에 존재합니다.  이러한 사악한 적들의 공격의 목표는 바로 오늘 날의 교회입니다.  그들의 특징은, 가장 복음적이고, 가장 열정적인 것 같지만, 항상 교회를 비난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머리 예수 그리스도를 비난하는 결과를 갖고 옵니다.  사탄의 사악한 역사입니다.

또 하나의 적은 세상의 집요한 박해입니다.  세상의 박해는 육체적 정신적 박해입니다.  로마와 같은 정권의 박해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정신적 박해입니다.  계몽주의 이래로, 하나님이 없다는 인간의 사상과 지식은 우리를 박해하고 있습니다.  다원의 진화론 이래로 수많은 사람들이 지식의 박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래로 우리 안에 영적 세계가 없어집니다.  이러한 정신적 지식적 박해를 이기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버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의 물은 점차로 차오르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 물이 이 세상에 차고 넘칠 때에, 예수 그리스는 다시 오십니다.  교회는 항상 이러한 핍박과 박해에서 성장을 했습니다.  우리에게 의심과 불안이 있지만, 성령 하나님은 교회를 이끌어 가십니다.

오늘도 우리에게는 세상의 물과 예수 그리스도의 물이 동시적으로 차오르고 있습니다.  영적인 시각을 가졌다면 어느 물이 우리를 죽이는 물이고, 어느 물이 우리를 살리는 물인지 구별해야합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오는 복음과 진리의 물을 마시면서 하루를 사시기 바랍니다.  아멘

 

에스겔 46장 우리의 특권과 권한

오늘 본문은 왕의 권한과 특권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왕의 특권은 종교적입니다.  왕의 특권은 제사장들이 사용하는 성전의 동쪽의 문만 사용합니다.  일반 백성들은 동쪽문을 사용 할 수 없습니다.  백성은 남쪽과 북쪽의 문을 사용합니다.  남쪽으로 들어오며 북쪽의 문으로 나가고 북쪽의 문으로 들어오면 남쪽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왕은 동쪽으로 들어와서 동쪽으로 나가야 합니다.  성전의 동쪽문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특권입니다.

또한 왕의 권한이 있습니다.  권한은 일반 백성들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백성들은 왕의 땅으로 농사를 짓는 희년이 되면 그들의 땅을 왕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일반 백성들도 똑같습니다.  희년이 되면 땅 주인에게 땅을 돌려 주어야 합니다.  또한 왕은 자신의 땅이 아닌 백성의 땅을 빼앗지 못합니다.  왕은 자식에게 자신의 땅만을 상속 할 수 있습니다.

왕의 직분을 수행하기 위한 특별한 권한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윤리적이고 도덕적 한계를 분명히 정하고 있습니다.  왕으로 주어진 현실을 정당하게, 깨끗하게 살아야 합니다.

본문에 아주 중요한 구별이 나타납니다.  왕의 특권은 하나님 앞에서 종교적이지만, 왕의 권한은 일반 백성들과 함께 살아가는 도덕적 윤리적 제한을 당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으 신분을 갖습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우리의 신분입니다.  우리도 성전의 동쪽문을 왕과 제사장 같이 사용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주어진 구원의 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특권입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세상적 권한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고귀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세상 사람에 비하여, 비 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면, 우리의 종교적 특권은 엄청난 모순을 갖게 됩니다.

오늘 날 많은 신자들은 특권을 강조하고 자랑합니다.  하나님에게 예배드리는 특권입니다.  이러한 특권은 우리에게 주어진 권한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버지로 권한, 자식으로 권한, 친구로의 권한, 사회인으로 권한이 있습니다.  나의 이웃과 가정과 주변 사람들에게, 윤리성과 도덕성을 나타내면, 우리의 특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인정 받을 수 있습니다.  예배드리는 자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나의 이웃을 무시하고, 사람을 무시하고, 일반 상식을 무시하고, 사회적 질서와 약속을 무시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특권을 강조하는 사람은 자신의 특권과 권한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사람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신앙의 특권을 유지하려면,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적 권한에서 윤리성과 도덕성을 갖추시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에스겔 45장 감사의 예물

오늘 부터 다시 새벽기도 보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에게 예물을 드리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교회에서 헌금을 합니다.  십일조, 주일헌금, 감사, 또는 소원을 담아서 헌금을 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부족함이 없으시기에 우리들의 물질이 필요 없으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우리의 예물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하면서, 하나님에게 제대로 드리지 못하는 것으로 죄책감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마음의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합니다.  교회 출석의 부담이 헌금에 대한 헌신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날 많은 교회가 헌금에 대한 새로운 형태를 갖습니다.  예배에 드리기 전에 헌금함을 놓고 헌금을  하고 예배를 드립니다.  이렇게 되면 헌금이 예배의 일부가 아닙니다.  또는 교인들에게 헌금을 부담을 줄이기 위하여, 헌금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또한 어떤 교회는 헌금과 십일조를 자니치게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교인들에게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왜 이렇게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까?  과연 어느 것이 정당한 것입니까?

저는 헌금을 드린다는 언어적 표현에서 문제가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헌금을, 예물을 드린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표현을 사용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십일조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는데 열의 하나를 드린다고 합니다.  감사의 예물을 소원의 예물을 드린다고 합니다.  저는 이러한 언어적 표현에서 우리의 착각이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드린다는 것은 의무적이고, 강제적 표현이 강합니다.

그러나 헌금은, 예물은 엄밀한 의미에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입니다.  헌금과 예물은 감사입니다.  감사는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는 기쁨입니다.  감사는 드린 것에 대한 보상과 대가가 없습니다.  감사는 드릴 수 있는 것 자체가 좋은 것입니다.  감사는 나에게 주어진 은혜와 사랑에 대한 표현입니다.  감사는 드려도 항상 부족합니다.  감사는 할 수 있다는 것이 영광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표현입니다.

우리에게 감사가 없다면 헌금과 예물은 무거운 짐으로 전락합니다.

감사하십니까?  정말로 모든 것에 감사하십니까?  감사하시면 헌금과 예물을 드릴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액수와 크기가 문제가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과부의 동전 한 잎도 감사로 드릴 때에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오늘도 나에게 주어진 직장, 가정, 아내와 남편, 저 하늘의 태양, 흔들이는 꽃잎에서 감사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주일의 예물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되어야 하나님에게 드리는 헌금과 예물이 됩니다.

 

에스겔 43장 (성전의 주소는 우리 자신)

에스겔 43장은 하나님이 성전에 찾아오시는 내용입니다.  사람이 짓지 못 할 성전입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지어질 성전에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이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처럼, 사람이 하나님에게 부탁해서 찾아오시는 성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찾아오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스스로 찾아오시는 아유는 에스겔 8-11장에 아주 잘 나와 있습니다.  사람이 만든 예루살렘 성전은 각종 우상이 있는 성전입니다.  그러기에 11장22-23절에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가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겔 11:22-23) 그 때에 그룹들이 날개를 드는데 바퀴도 그 곁에 있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도 그 위에 덮였더니 (v.23)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가운데에서부터 올라가 성읍 동쪽 산에 머무르고.

사람이 만든 성전에서 하나님이 떠나가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계사는 성전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 성전의 주소는 어디입니까?

(엡 2:19-22)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v.20)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v.21)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v.22)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20절 부터 22절은 문법상 수동태 진행형입니다.  성전을 하나님이 지어가고 계십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이 성전의 설계도는 하나님이 설계하신 것입니다.  이 성전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성전이 됩니다.  이 성전은 두 번 다시 우상이 거주 할 수 없는 성전입니다.  이 성전은 하나님이 직법 지으시고, 통치하시는 성전입니다.

이 성전의 주소는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의 주소를 예루살렘에서 찾지 말고 내 안에서 찾으시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에스겔 42장 (성전의 주소?)

집을 지을 때에는 설계도면이 필요합니다.  설계도면은 집을 짓는 자의 의도가 담겨져있습니다.  성전에도 설계 도면이 사용되었습니다.  에스겔서의 성전 설계도는 하나님이 환상중에 에스겔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성전의 도면대로 성전을 지으면 어떠한 결과가 나타날까요?

에스겔의 설계도로 성전을 지으면, 현재의 예루살렘의 도시 보다 더 큰 성전이 지어질 것으로 학자들은 계산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이나, 스룹바벨의 성전이나, 헤롯의 성전과 비교 할 수 없는 큰 성전이 된다고 합니다.  사람이 짓기에 불가능 할 정도입니다.  그럼으로 성경 학자들은 과연 하나님은 왜 이렇게 큰 성전의 설계도를 에스겔에게 보여주셨을까를 질문합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추측합니다.  솔로몬의 성전과 스룹바벨의 성전, 헤롯의 성전은 설계도가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도 그 성전에 나타나셨습니다.  찾아오셨습니다.

(대하 7:1-3)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성전에 가득하니 (2)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므로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능히 들어가지 못하였고 (3)이스라엘 모든 자손은 불이 내리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위에 있는 것을 보고 돌을 깐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선하시도다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니라

그러나 이러한 성전들은 사람이 지은 성전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 솔로몬의 성전은 바벨론에게, 헤롯의 성전은 로마에 의하여 철저하게 무너집니다.  사람이 지었기에 사람에 의하여 허물어집니다.

또한 사람이 지은 성전이기에 사람들의 교만과 자랑이 함께 나타납니다.  어제도 말씀드린 것처럼,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계시는 집이기에 성전을 사랑합니다.  성전을 사랑하는 것은 좋습니다.  우리들이 우리들이 사는 집을 사랑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 집에서 아이들이 뛰어 놀지 못하고, 모든 것이 엄격하다면, 그 집은 집이 아니라 감옥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성전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 사랑으로 착각했습니다.  성전이 우상이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분노하신 이유입니다.

그러기에 에스겔 8장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우상의 집으로 변질된 것을 보여줍니다.  성전이 우상을 섬기는 곳이 됩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경고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8장 9장 계속됩니다.  에스겔 8장이하에 성전이 우상의 집이 된 것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성전에 거주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우상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성전을 떠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있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기에 사람들의 손으로 파괴 된다면 그 성전은 진정한 성전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주 이상한 유대인들과 아주 성경을 잘못해석하는 한국의 일부 교인들은 예루살렘에 사람들의 손으로 지을 새로운 성전이 나타야 한다고 합니다.  그 성전이 지어져야 예수님이 오신다고 사기를 칩니다.  성전에 사용될 각종 기구들을 준비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성전을 사람의 손으로 지으면 그 성전은 또 한 번 사람의 손으로 파괴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상의 집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사는 곳이 아닙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에스겔의 설계도입니다.  설계도 자체가 사람의 손으로 지을 수 없는 설계도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실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시면, 사람의 손으로 무너질 성전이 아닙니다.  우상의 성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으시고, 하나님이 계실 성전입니다.  그 성전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루살렘에 있습니까?  서울에 있습니까?

내일 이 성전의 주소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에스겔 41장 성전

성전은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한 고정 건축물입니다.  성전 이전의 모형은 장막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서 성전은 하나님이 거주의 의미가 강합니다.  그러나 장막은 하나님이 임재가 더 강합니다.  거주와 임재는 다릅니다.

장막은 Tabernacle입니다.  성전은 Temple입니다.  장막에는 언약궤가 있으며 그 언약궤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이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성전에서는 언약궤가 지성소에 보관됩니다.  그 장소는 가장 거룩한 곳이기에 일년에 한 번 대제사장만이 접근 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후에, 하나님이 성전에 거하심에 대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하늘도 하나님을 용납 할 수 없는데, 성전에 하나님이 거할 수 있는까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거주를 간접적으로 나타나냅니다.  그러나 왕상 8장은 성전에 거주하시는 하나님으로 믿고 간구하는 귀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만들면서,  대략 2 가지를 실수하게 됩니다.  성전의 제사가 몇 몇의 제사장직에 의해서 제한 됩니다.  그러면서, 제사장직이 정치적 중요한 역활을 합니다.  제사가 정치화합니다.  이 내용은 다윗과 사울, 그리고 솔로몬의 왕권 계승에서 아주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사보다 젯밥에 눈이 멀어가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현상으로 사울이 다윗을 도와 준 제사장을 죽이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성전 건물의 절대화, 우상화가 나타납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결정됩니다.  유월절에 반드시 성전에서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합니다.  이로 인한 일반 백성의 경제적 문제와 예루살렘의 특권층에 대한 부의 집중이 심화됩니다.  그것이 바로 제물에 대한 선별과 구매 시장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장이 바로 이방인의 뜰에서 열립니다.  이방인의 성전 출입이 원천 봉쇄됩니다.

이러한 부정적 현상애 대해서 예수님이 성전의 제사장, 바리세인, 서기관의 다툼에서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에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이유의 하나가 성전 모독죄입니다.

이러한 2가지의 부정적 현상을 감추려는 시도가 성전을 우상화합니다.  성전을 절대적으로 거룩하게 만듭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얼마든지 우상화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신앙이 정치와 교조화, 이익 집단으로 변질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변질되는 가장 큰 이유는 외형적 거룩을 강조 할 때입니다.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거룩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거룩함이 지나치면 신앙은 종교화되고 종교화되면 우상화가 됩니다,  성전은 극도록 거룩함을 강조했습니다.  그 예로 성전의 제사장들의 거룩함을 강조하려고 그들은 성전에 출입 할 때에 구름다리를 만들어서 출입했습니다.  오늘 날의 육교을 만들어 출입을 했습니다.   성전의 우상화에서 자신들을 우상화합니다.

계속해서 성전에 대해서 보내겠습니다.

우리의 거룩은 성령에 의한 거룩으로 나타나야합니다.  이렇게 거룩해진자가 성전이 되고, 하나님을 모시는 사람이 됩니다.

 

에스겔 40

사순절에 마태복음을 하면서 잠시 쉬었던 에스겔을 다시 시작합니다.

에스겔 40장에서 48장은 성경에서 가장 난해한 부분의 하나가 됩니다.  바벨론 포로들에게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환상을 보여줍니다.  40장에서 48장은 건축 설계 도면과 같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모든 부분에 대한 구체적이고 자세한 내용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스겔 40장에서 48장에 나타난 성전대로 건물이 지어져본적이 없습니다.  그럼으로 40장에서 48장의 성전에 대하여 매우 다양한 해석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해석에 따라 교회와 신자들은 엄청난 착오와 혼란을 겪어 왔습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 성전은 우리의 종말 신앙과 매우 깊은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40장에서 48장은 매 장마다, 예루살렘 성전의 역사적 과정을 알려 드릴 것입니다.

먼저 이스라엘의 기후, 날씨와 성전의 관계를 살펴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지리적 위치입니다.  서울의 남산이 약 270M입니다.  예루살렘은 740M 입니다.  제가, 새벽에 비행기를 타려고 예루살렘에서 욥바 평지로 내려오는데 차로 거의 한 시간을 걸렸던 것이 기억납니다.  매우 높은 산입니다.  예루살렘 보다 높은 곳이 감람산인데, 그곳에서 여리고가 내려다 보입니다 .  감람산에서 비가 내리는 데, 여리고 쪽에는 구름 한점도 없습니다.  감람산의 높이는 800M입니다.  밤이되면 이슬이 비와 같이 내립니다.  매우 추우며 옷이 젖을 정도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주 작은 나라이지만, 세상의 모든 기후가 공존합니다.  북쪽의 헐몬산으로 가면 만년설이 있습니다.  항상 눈이 있습니다.  겨울입니다.  그 만년설이 녹아 내리는 단 지역은 물이 풍부하여 밀림과 같은 지역입니다.  갈릴리 수원의 근거가 되는 샘이 지면에서 셀수 없는 샘들이 솟아 흐릅니다.  이스라엘에도 밀림과 같은 지역이 있습니다.

이러한 물이 지중해쪽으로 흐르지 아니하고 갈릴리 호수쪽으로 흘러 내려갑니다.  해수면보다 200M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만년설의 산의 물이 차로 직선거리로 한 시간도 정도 거리에 해수면보다 낮은 곳에 흘러 내립니다.  얼마나 평야가 없는 가를 상상 할 수 있습니다.  물을 사용 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또한 갈릴리 호수는 헐몬산의 찬 바람과 남쪽, 서쪽, 동쪽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으로 자주 풍랑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물이 갈릴리 호수에서 사해로 흘러갑니다  사해는 해발 보다 약 400 M 낮은 위치에 있습니다.  그 물은 더 이상 빠져 나가지 못하고 증발됩니다.  그 사해의 시작이, 여리고에서 매우 가깝습니다.  이 지역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기후입니다.  베두인들도 사해를 경계로 그 밑으로 내려가서 양을 치지 않습니다.  거의 풀이 없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나 풀과 나무 하나 없는, 수많은 산들을 바라보면 신비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더 밑으로 내려가면 유대인들이 로마에게 최후의 항쟁했던 마사다가 있습니다.  서쪽으로는 유대광야 입니다.  유대광야는 과거에는 사람이 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 수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서쪽으로 가면 지중해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바다는 저주와 죽음의 장소입니다.  수심이 깊지 아니해서 항구가 거의 없습니다.  지중해 해변 지역은 블레셋과 페니키아인들이 차지를 했기에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다와 거의 관계가 없습니다.  바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 할 뿐입니다.

기후는 인간의 흥망성쇠에 가장 큰 영향을 줍니다.  날씨는 인종을 구별시켰고, 문화의 발전을 다양하게 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기후는 신의 간섭을 가장 많이 나타내는 요인이 됩니다.  사람이 사는 지역의 온도 차이에 따라 사람들의 성품을 다르게 만들어냅니다.  기후의 변화는 사람들의 적응력을 발전시켜왔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기후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에 모여 유월절에는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높은 산에 올라 와서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릴 때에 사람들은 다양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기후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럼으로 성경을 보면 수많은 날씨와 기후에 하나님이 나타납니다.

본문은 성전의 설계도입니다.  하늘의 하나님, 변화 무쌍한 날씨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주신 성전의 설계도입니다.  이스라엘의 12 부족이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에서 성전은 절대적 권위의 상징으로 나타납니다.  성전은 하늘의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있는 곳에 날씨 이상의 하나님, 하늘의 하나님의 집이 성전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다양한 날씨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후를 초월하시는 절대적 하나님으로 찾아오십니다.

오늘도 하루의 날씨에서 나의 마음의 성전의 하나님을 찾아보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 26장 1-16 사랑의 사람

고난 주간입니다.

새벽기도 들어가기전에 이 글을 씁니다.  아마도 새벽 기도가 끝이 난 후에 글을 보낼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고난 당하시고, 죽기전에 예수님 주변의 사람들에게 다양한 반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예수님의 기적과 능력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백성들이 예수님을 인정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세레가 하늘에서 온 것과 같이 예수님의 기적관 능력도 하늘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지만, 매우 두려워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향유를 낭비하는 것에 분노합니다 그들은 배와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쫓았지만 그들에게는, 주님은 정치적 경제적 메시야가 되는 갓입니다.  그러기에 5만 불 되는 옥합을 깨어뜨리는 것에 분노합니다.  에수님의 모습이 백성들에게 부유한 자로 인식되어 자신들의 목적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롯 유다는 주님을 배신합니다.  은 삼십에 예수님을 넘겨 줄 것을  결정합니다.  그는 배와 그물을 버릴수 없는 유대출신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철저하게 이용해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여는 동기를 갖고 있습니다.  그 목적이 불가능해지는 것 같자 주님을 은 삼십에 팔게 됩니다.

그러나 마리아만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장례를 준비합니다.  주님에게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우리의 질문은 왜 예수님이 죽으실 것을 마리아만 알았을까요?  아무도 주님의 장례를 준바히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를 사랑하면, 그와 가까워집니다.  사랑하면 그를 항상 기억합니다.  사랑하면 그의 말에 의미를 찾습니다.  사랑하면 그의 행동에서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사랑하면 나를 낮춥니다.  사랑하면 나는 사라지고, 그가 나의 마음에 찾아옵니다,

사랑하면 그를 볼 수 없지만, 그가 나에게 말을 합니다.  사랑하면, 그의 소원을 알게 됩니다.  내가 그를 사랑하면 나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줄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눈물이 나지만, 그를 사랑 할 수 있다는 기쁨과 감사의 눈물입니다.

그리고 알게 됩니다.  내가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위에와 같은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 날 것입니다.

고난 주간에, 하나님을 사랑하기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