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장 1-12절 (이 시대의 서기관)

예수님이 중풍병자을 치유하십니다.  소자라고 하십니다.  소자는 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의미로 사용하십니다.

죄를 이기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일전에 유치부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기에 쵸콜렛을 주겠다니 그렇게 말을 잘 듣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사탕에 유혹되는 것 처럼 우리도 죄를 이기지 못하기에 아이가 됩니다.

우리들이 우리의 탐욕과 분노와 욕심을 이길 수 있을까요?  미움과 시기와 질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이것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죄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현대의 정신의학은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정신적 상처를 당한 질병이라고 합니다.  육체의 질병처럼 마음도 치유를 받으면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난다고 합니다.  이러한 마음의 치유를 말한 프로이드로 평생 아버지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4 사람이 중풍 병자를 침대에 뉘어서 예수님에게로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너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 당시에 질병에 걸리는 것은 죄의 결과로 보았습니다.그는 건강해졌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죄가 용서되면 건강해집니까?

육체적 질병이나 마음의 질병이나 죄의 현상으로 나타나는 현상의 하나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는 방법의 하나로 기적을 나타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으로 중풍병자가 자신의 침대를 갖고 스스로 걸어갑니다.  중풍병자가 죄의 용서를 받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러자 서기관들이 반발을 합니다.  죄의 용서는 하나님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죄를 용서하라는 말과 침대를 갖고 걸어가라고 하는 말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질문하십니다.

서기관은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입으로 죄를 사한다고 하면 자신의 말대로 자신이 하나님이 됩니다.  하나님을 모독했기에 돌에 맞아 죽게 됩니다.  또한 중풍병자를 일어나서 걸어가라고 할 기적의 능력도 없습니다.

우리도 이 시대의 서기관과 같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 할 능력도 없습니다.  매일 매일 똑같은 죄를 반복합니다.  또한 우리의 죄를 이겨낼 기적의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의 용서하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죽음에서 부활합니다. 우리는 오늘 최선을 다해서 죄와 싸우며 살아갑니다.  비록 죄의 싸움에서 패배하지만 주어질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승리가 있기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살아갑니다.

마가복음 1장 40-45절 (예수님과 사적인 관계)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기적으로 고치십니다.  문둥병자는 주님이 고쳐 주실 믿음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면 고치셨습니다.

이 부분에 예수님과 문둥병자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그는 믿음으로 주님에게 왔지만 주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많은 기적을 보면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는 것보다, 민망히 여기시거나 불쌍히 여기시고 기적을 베푸십니다. 저는 이러한 면에서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을 보게 됩니다. 상대방의 슬픔과 필요를 채우십니다. 그러나 결과는 기적입니다.  신비적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기적의 신비와 손길을 원합니다. 우리들은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나의 모습을 어떻게 보실까요? 불쌍히 보실까요?  불쌍하게 보지 않으실까요?  우리의 믿음을 보기전에 우리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봤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이 불쌍해지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서 나의 모습은 어떻게 비추어 질까요?

예수님에게 우리의 개인적인 것을 이야기 하면 할 수록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보실 것입니다. 하루의 삶에서 예수님과 깊은 사적인 대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과 사적인 관계를 깊이 가지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1장 35-39절 ( 찾아오시는 은혜)

예수님이 새벽에 기도하시는데 제자들이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다고 보고합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보고에 주님의 반응이 다음과 같습니다.

(마가복음 1: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예수님은 자신을 찾는 사람들을 버리고 다른 마을에서 전도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고 합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오셨다면 예수님을 찾아오시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쉽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찾지 않는 다른 마을로 가자고 합니다. 다른 마을은 예수님의 전도를 방해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비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한글번역은 전도라고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도를 Evangelism, 복음을 전해서 예수를 믿게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그러나 영어번역의 전도는 Preaching입니다. Hella로 케룻소입니다. 설교입니다. 보고 들은 것을 보고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케리그마입니다. 하나님의 대하여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고대에는 왕의 전령이 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거나 패배하면 왕은 자국의 국민들에게 전령을 보내서 전쟁의 결과를 알려줍니다. 왕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백성들은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적국의 포로를 노예를 얻습니다. 농사나, 모든 일에 추가 노동력을 얻습니다.

그러나 전쟁에 패배하면, 백성들은 적국의 노예가 됩니다. 식민지 백성이 되어 착취를 당하거나, 고향을 떠나야 합니다. 이러한 소식을 전하는 것을 게룻소입니다. 설교, 케리그마가 됩니다.

본문의 전도는 왕과 군대가 어떻게 전쟁을 했고, 그 결과를 보고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 내용에 따라 백성들이 미래가 결정됩니다.

왜 주님이 다른 마을로 가자고 하십니까? 일방적 선포입니다. 우리의 양해와 이해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미래를 알려주는 소식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죄의 승리의 소식을 듣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소식을 듣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와서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미래, 영원한 생명과 부활을 믿는 자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사라집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며,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오늘을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죄의 노예가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분을 갖고 있기에 다른 사람에게 자유와 기쁨을 주는 자리에서 살아야 합니다.

마가복음 1장 29-34절 (우리의 운명)

예수님이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십니다.  흥미로운 내용은 병이 떠너갔다고 합니다.  병을 인격체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베드로 장모를 고통스럽게 하던 병이 베드로 장모로 부터 떠나갔습니다.  문법적으로 능동태입니다.  예수님이 손을 대시자 스스로 떠나갑니다.  그 결과 베드로의 장모가 예수님에게 시중을 듭니다.  열병이 하나의 인격체입니다.  귀신을 의미합니다.

32절에서 34절까지 반복되는 내용이 귀신들을 쫓아내셨고 질병을 치유하셨습니다.

마가는 아주 중요한 표현을 세심하게합니다.  32절에서 34절은 질병과 귀신을 철저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귀신들린자들과 병에 걸린자들을 철저하게 구분합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3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귀신들린 자들이 있고, 둘째는 병에 걸린 자들이 있고, 셋째는 베드로의 장모와 같이 귀신과 질병에 함께 걸린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럼으로 병에 걸리는 것이 귀신에 들린 것으로 단정하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우리들은 과학의 시대에 살기에 합리성과 논리성을 갖지 아니하면 부인합니다.  세상의 많은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을 합니다.  어떠한 현상이 설명과 논리에 일치하면 진리라고 합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입니다.  그는 과학적 가설을 제시합니다.  이러한 상대성 원리는 실험과 검증을 통해서 사실과 내용을 증명합니다.  이것이 증명되면 과학적 진리가 됩니다.  이러한 내용은 우리에게 매우 유용합니다.

오늘 본문과 같이 예수님이 귀신을 내어 쫓았다는 내용은 학설이나 이론이 아닙니다.  2017년에 실험과 검증을 할 수 없는 과학적 대상이 됩니다.  그럼으로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지 아니하기에 사람들은 사실이 아니라고 합니다.  거짓이라고 합니다.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럼으로 질병은 약과 의사가 치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귀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정신적 착각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건국정신이 다음과 같습니다.  One country, One Constitution, One destiny 입니다.  미국은 건국할 때에 과학적 합리주의를 추구하는 이신론자(Deism)이 세운 국가입니다.  과학과 하나님을 동시적으로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13개 주가 하나로 통합되는 연방주의, One county 추구합니다.  이러한 13개의 연방을 하나로 묶을 One constitution, 하나의 절대적 헌법이 필요합니다.  인간이 이렇게 최선을 다하면 One destiny, 하나의 운명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Destiny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인간과 세계의 운명은 하나님이 정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과학적 진리의 한계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역을 남겨두었습니다.  이것이 과학적 진리를 추구하는 자세입니다.  과학자들은 절대적 진리가 없다고 믿습니다.  과학적 사실은 언제나 변경되기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도 양자역학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지난 시간 살아왔던 내용을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 할 수 있습니까?  수많은 사건과 만났던 사람들을 설명 할 수 있습니까?  우리들이 죽음 이후의 세계를 설명 할 수 있을까요?

귀신도 있습니다.  귀신도 이 시대에 맞게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별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안목으로 가능 할 뿐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영역을 남겨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운명 Destiny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매어 달려있습니다.

마가 1장 21-28절 (예수님의 말씀과 새 소리의 구별)

예수님이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지난 이스라엘 방문에서 최근에 가버나움에서 발굴된 회당으로 예수님 당시의 회당으로 인정받는 곳에 갔습니다. 학자들은 회당의 위치와 성경의 지명과 비교하면, 발굴된 가버나움 회당이 예수님이 사역을 선포한 곳이라고 합니다.

회당은 갈릴리 호수 바로 옆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역사적 실체가 증명됩니다. 그동안 갈릴리에서 여러 개의 회당이 발굴됐지만, 시기적으로 예수님 당시의 회당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발굴된 회당은 예수님 당시로 학자들은 확신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이 권세가 있고 서기관들과 달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회당 안에 더러운 귀신들린 자가 있어 소리를 치며 당신이 우리를 멸하려 왔느냐고 합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꾸짖어 귀신을 쫓아내십니다. 예수님 말씀에 표적,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두 가지 사건이 나타납니다. 말씀과 기적이 동시적으로 나타납니다.

22절에서 예수님은 말씀으로 “권세 있는 자가” 됩니다. 권세는 힘과 능력이 있는자입니다. Authority입니다.

23절에서 예수님이 기적을 나타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말씀은 “권세 있는 새로운 교훈”이 됩니다. 권세는 힘과 능력이 있지만, 교훈 // 디다케입니다. 교훈은 Teaching 또는 Doctrine 됩니다. 지금까지 들어왔던 Teaching이나 Doctrine 아닙니다. 새로운 교훈입니다.

저의 집에, 매 시간마다 서로 다른 새들이 노래하는 시계가 있는데 하루에 12번 새들이 노래합니다. 그런데 저희들은 어느 새가 어느 시간에 노래하는 줄 모릅니다. American Robin은 오후 1시에 노래합니다. (저는 새 이름을 한국어로 모릅니다.) 그러나 새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막내는 새가 오후 3시에 울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시계를 잘못 작동한 결과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새가 어떻게 노래하는지 모릅니다.  저희는 매 시간 마다 틀린 새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막내는 새에 대해서 “권세 있는 자”입니다. 우리는 12마리의 새가 노래하는 것을 듣지만, 다 틀리게 듣고 있습니다. 그것을 제대로 듣는 사람은 새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막내뿐입니다. 그는 새 소리를 듣고 새를 구분합니다.  막내는 한 동안 새가 좋아서 National Audubon Society에서 자원봉사를 했습니다.

또한 막내는 우리에게 “권세 있는 새로운 교훈”을 말합니다. 막내가 암컷과 수컷의 구별, 새의 행태, 색깔, 계절, 먹이, 습성을 말 할 때에 그의 말은 우리에게 “권세 있는 새로운 교훈”이 됩니다. 그는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신비한 것들이 많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해서 권위가 있으십니다. 그러기에 말씀으로 귀신을 내어 쫓습니다.

막내가 새에 대해서 말 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들이 예수님을 조금 더 깊이 안다면 우리도 세상에 “권세 있는 자가” 됩니다. “권세 있는 새로운 교훈”을 말하게 됩니다.

마가복음 1장 14-20절 (쌍놈에서 의인으로)

이스라엘에 가보면 농사지을 곳도 많고, 목축도 가능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농업이 이스라엘의 주요 산업이었을 것입니다. 갈릴리도 농사짓는 지역이기에 농부들이 많습니다. 주님은 농부보다 어부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을 어부로 구성을 했습니까? 당시의 어부는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한 직업이 됩니다.

(v.16-17)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v.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하시니.

갈릴리 지역은 비옥한 땅이지만 갈릴리 사람들은 대부분 소작농들입니다. 지주들은 남쪽 유대 사람들입니다. 농부들은 지주들에게 소작료와 로마정부에 세금을 지불해야했습니다. 그러기에 갈릴리 사람들은 여러 차례 지주의 횡포와 로마의 세금에 맞서 싸워왔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을 Am-Ha-Aretz (암하 하레츠) 땅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나중에 욕이 됩니다. 쌍놈이라는 말로 전락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거칠기에 쌍놈이 됩니다.

쌍놈보다 더 거친 쌍놈들이 있습니다. 어부들입니다. 어부는 땅을 빼앗긴 농부들의 최후의 직업 이였습니다. 땅은 임자가 있지만 물고기는 임자가 없습니다.

당시에 노동자는 1 데나리온으로 하루를 먹고 살았습니다. 어부들의 1년 평균 수입은 200 데나리온입니다. 수학적으로 그들은 일 년에 150일을 배고프게 지내야했습니다. 어부들은 거칠고 폐쇄적이고 반항적이고 폭력적이였습니다. 그럼으로 갈릴리의 농부들이 쌍놈이라면 어부들은 쌍놈중의 쌍놈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쌍놈들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즉시로 응답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쌍놈들을 데리고 이 땅에 메시야 왕국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의도는 불순했습니다. 자신들의 가난과 어려움에서 벗어나려고 예수를 선택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전까지 누가 영의정 좌의정 할 것인가를 갖고 다투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에 대한 통찰력을 갖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강 할 때에, 높을 때에, 영광의 존재가 되면 예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무능력하고, 낮아지고, 가난하고, 병들고 , 깨어지면 하나님의 힘을 간구 합니다. 우리에게 힘이 없을 때에 또 다른 힘을 간구합니다.

우리의 믿음과 신앙은 제자들과 같이 악하고 불순한 의도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과정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문제와 아픔을 해결해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끌고 가시는 신앙의 목표는, 쌍놈을 의인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쌍놈을 건강한자로 부유한자로, 출세하는 자로 만드시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들이 최선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변화시켜 쌍놈에서 사도로 만든 것 같이 예수님은 우리를 죄인에서 의인으로 만드십니다.  쌍놈에서 의인되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합니다.

추신: 아침 부터 쌍놈이라고 해서 기분 나빠 할 것이 없습니다. 깊이 생각하면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1장 9-13절 (혼란스러운 하나님)

어린 아이들이 가장 혼란스러운 것이 부모님의 손입니다. 그 손으로 사랑한다고 밥도 먹여주고, 쓰다듬어 줍니다. 그 손으로 아이의 손을 꼭 잡아줍니다. 그러나 그 손으로 아이를 야단칩니다. 때립니다. 그 손으로 아이에게 응징을 합니다. 그러면 그 손은 아이의 입장에서 매우 혼란스러운 손이 됩니다.

본문의 하나님의 손이 똑같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라고 합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세례를 받을 때에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나타납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한다고 하십니다.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됐습니다.

가난한 목수 예수가 세상의 구세주가 됐습니다. 나사렛 예수에게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극대화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v.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하나님의 영,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었습니다. 사탄의 시험을 받게 합니다. 들짐승과 함께 있게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때립니다. 참으로 이해 할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은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몰아내었다 영어번역은 Immediately The Spirit impelled Him입니다. 세례를 받자마자 성령님이 예수님을 광야로 집어던졌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의 좋은 시간을, 행복한 순간을, 기쁨의 날을 한 순간에 박살을 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도 주시지만 오래 가지 않게 하십니다. 끝없는 고민과 어려움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로 내몰아 버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인지 분노의 하나님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혼란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광야 40일은 우리의 일상의 삶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하나님은 매우 혼란스럽게 나타납니다. 너무 당연합니다. 그 증거가 다음과 같습니다.

(v.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3가지의 사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둘째는 들짐승과 함께 계시고 셋째는 천사들이 수종을 들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우리도 광야 같은 인생에서 수많은 사탄의 시험을 받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환경의 어려움입니다. 둘째는 우리에게는 짐승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려운 인간관계입니다. 그러나 셋째는 우리에게는 천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손길을 보냅니다. 어려움을 당하지만 해결을 해주십니다. 악한 것을 이기게 하십니다.

우리의 현실은 이러한 것이 혼란스럽게 나타납니다. 끝임 없이 반복됩니다. 우리들이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의 최후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죽음에서 부활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승리입니다.

이라한 승리를 믿지 못하면 하나님은 변덕쟁이이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매우 피곤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십자가의 최후의 승리를 믿으면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천사의 도움으로 이기며 살아가게 됩니다.

마가복음 1장 1-8절 (역사를 이기신 예수님)

우리는 역사라는 시간을 살아갑니다.  예수님도 역사적 인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역사를 이기십니다.  예수님은 역사 (Chronicle)을 또 다른 역사 (Hella로 Karios ) 은혜의 시간으로 이기십니다.

마가복음은 사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쓰였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바울의 데살로니가서 보다 훨씬 늦게 기록된 성경입니다.

저는 이러한 과정에서 묘한 긴장을 느낍니다. 초대 교회에서 예수님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교회의 성장이 예수님의 제자들보다는 바울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 이유의 하나는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는 바울과 함께 1차 선교에 동역한 적이 있기에 바울의 교회 확장하는 태도를 보면서 예루살렘 교회,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적지 않은 도전(Challenge)을 주었을 것입니다.

어떤 학자는 마가가 바나바의 친척이지만 바울의 1 차전도 여행에서 빠진 이유의 하나가 바울의 급진적 전도 방식이라고 봅니다. 저는 이 학설에 동의합니다.

마가는 복음은 유대인의 것이지 이방인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역사적으로 예수님은 유대교의 분파적 존재였으며 기독교의 존재가 부각되기 직전입니다. 마가와 예수님의 12제자들은 할례의 문제와 함께 이러한 생각에 오랜 동안 묶여 있었습니다.

그럼으로 바울의 급진적 태도에 반발하는 마가가 1차 전도여행에서 자진해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이러한 일로 2 차전도 여행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의 문제로 심하게 타툽니다.

마가복음은 이러한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사복음서 자체도 변증입니다. Apologia입니다. 변증은 Apologia는 당시의 문화와 사상에 입각해서 예수님을 설명하게 됩니다. 마가복음은 로마인들을 위하여 쓰였습니다. 로마 사람들이 이해하는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로마인들은 힘으로 세상을 정복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철학적으로 그리스 철학에 의존합니다. 마가는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님을 변증합니다. 설명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배경으로 마가복음을 이해해야합니다.

그럼으로 마가복음 1장 1-8절은 예수님을 왕으로 나타냅니다. 세례 요한은 왕이 오심을 준비하는 전령입니다. 그의 길을 평탄케하는 자입니다. 로마의 황제가 길을 가기 전에 황제의 사신이 앞서 왕의 길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로마 황제는 힘으로 세상을 정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왕이지만 힘이 아닌 것으로 세상을 정복합니다.

(마가 1:7-8)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v.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예수님은 죄의 용서로 세상을 정복합니다.  예수님은 약 300년이 지난 후에 로마의 황제를 무너뜨립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공인 종교가 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지금도 정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변화를 제자들이, 바울이, 로마의 황제가 알았을까요?

우리들이 예수님을 역사적으로 이해야하지만 (Chronology understand)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로 (Karios  // Grace by God)으로 이해해야합니다.

마태복음의 정리 (불신에서 의심으로 그리고 믿음으로)

마태복음의 마지막은 제자들의 의심으로 끝이 납니다. 이것이 4 복음서의 공통입니다.

왜 의심을 합니까?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의심 할 때에 의심은 Distazo, 두 번 생각, 또는 두 개의 길이라는 의미입니다. 의심은 한 번 생각 할 것을 두 번 생각합니다. 두 개의 길을 놓고 어느 길을 가야 할지 몰라 주저합니다.

심리학에서 부모들은 자식을 사랑하지만, 자신을 닮은 자신을 더 사랑합니다. 자신을 닮지 않은 자식에 대해서는 자신의 자식인지 아닌지를 의심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자식은 자신의 자식입니다. 진실이기에 사실이기에 의심합니다.  우리는 생각하기에 의심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과 능력은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나타냅니다. 부활은 하나님 되심을 증명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지만 다릅니다. 그러기에 의심합니다.  마치 아버지가 자식을 의심하는 것과 같습니다.

의심은 우리의 믿음에 매우 유익합니다. 제자들도 의심했지만, 성령이 역사하심은 예수님을 믿습니다. 우리의 의심은 부정하는 의심이 아니라 제자들과 같이 고민하는 의심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의 의심하며 신앙 생활합니다. 의심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언어의 존재입니다. 의심하면 말을 합니다. 의심은 두 개의 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성령의 도우심이 나타납니다. 만약에 의심하지 않는다면 성령이 굳이 도우실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끝없이 의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믿음의 길로, 은혜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믿음에 대한 강박증을 갖고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의심이 있기에 갈등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심하는 갈등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도우심이 나타납니다. 우리들이 의심하자고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심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사 복음서 이후에 사도행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의심하는 제자들이, 의심하는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알려줍니다.

마태복음 28장 16-20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믿어주시는가?

예수님의 부활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의심하고 있습니다.

(v. 17)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이 말씀을 정확히 보면 3 개의 동사로 쓰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1). 뵈옵고 2). 경배하고 3). 의심합니다. 제자들이 경배하면서 동시에 의심합니다.

유대인의 경배는 상대방의 발 앞에 엎드리어 발에 Kiss를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발에 못 자국을 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 못 자국을 보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합니다.

우리도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합니다. 기도하면서 확신이 없습니다. 찬송하면서 마음은 허전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을 신뢰합니다. 믿어줍니다.

(v.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착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들이 믿는 것 같지만 우리는 의심하는 존재입니다. 어느 철학자의 말대로 우리는 생각하기에 의심하고 의심하기에 우리는 존재 합니다. 사람은 의심의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믿으십니다. 우리는 믿는 근거를 이렇게 제시합니다.

(v.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이러한 하나님이 우리를 믿으시기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v.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v.20-a)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만 우리는 의심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믿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우리들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믿음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깊이 묵상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