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에서 기도는 모든 문제의 해결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도 예수님에게 책망을 듣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라고 책망을 듣습니다.
본문은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시고 호수를 건너다가 풍랑을 잠잠하게 하신 말씀입니다. 갈릴리 호수 이편에서 저편으로 배로 건너갑니다. 당시의 배로 호수를 건너려면 오랜 시간이 사용될 것입니다. 건너는 중에 주님은 잠이 드셨고 제자들은 풍랑을 만납니다.
갈릴리 호수에 서보면 제법 파도가 높을 때가 있습니다. 지형적으로도 아주 낮은 위치에 있기에 풍랑이 자주 일어 난다고 합니다. 또한 유대인들에게 물은 매우 익숙하지 않은 장소입니다.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고 부릅니다. 우리들은 호수를 바다라고 부르는 유대인들에게 과장이 심하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바다는 물이 모인 장소이고 죽음의 장소입니다. 계시록에서도 바다에는 음녀가 있습니다. 바다는 두려움과 죽음의 장소입니다. 바다는 이 세상을 의미합니다. (계 21)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에서 내려 올 때에 바다가는 있지 않습니다. 바다는 죽음의 세상을 의미합니다.
제자들과 주님이 바다를 건너는 데 풍랑을 만납니다.
(v.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예수님은 배에서 주무십니다. 성경에서 잔다는 것은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탄 배에 물이 덮이고 죽겠다고 아우성이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죽은 시체와 같습니다. 제자들의 고난에서 주님은 주무십니다.
같은 배에 탔다는 말이 있습니다. 똑 같은 운명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과 같은 배를 타고 있습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때에 주님에게 기도합니다. 우리들이 죽게 되었으니 살려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에게 죽은 사람과 같습니다. 주님의 도움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위기가 있습니다. 그 위기에서 주님이 도와 주셔야 합니다.
(v.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제자들이 주님을 // 흔들어 깨웠습니다. 제자들은 풍랑을 보고 주님을 깨웠습니다.
제가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 배가 강풍에 뒤집힐까요? 아니 뒤집힐까요? 설령 배가 물에 뒤집어진다고 해도 제자들이 죽을까요? 살까요?
우리는 기도하기 전에 이런 생각을 해야합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 함께 하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바다의 풍랑만을 바라봅니다. 세상의 시련과 고난을 보고 주님을 깨웁니다. 신앙이 초보적 수준입니다.
오늘 날의 우리들은 무슨 문제만 생기면 기도 한다고 합니다. 문제를 보고 기도는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신앙에 생각이 없고, 염치도 없고 양심도 없습니다. 그 결과 신앙에 대한 판단도 없고 자생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모든 것을 기도로 해결하겠다고 합니다.
저는 아침마다 시편을 읽습니다. 잃을 때마다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이기적인를 생각하며 회개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고자질입니다. 나의 잘못과 책임의식은 전혀 없습니다. 매우 비인격적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선장이고, 우리들이 주님과 한 배에 탔다면 우리가 풍랑으로 죽고 망 할까요?
기도하고 매어 달리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진정한 신앙은 주무시는 주님을 보면서 나도 잠을 잘 줄 알아야합니다. 주님에게 맡기시고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담대하고 당당해야합니다.
그래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당황하면 문제가 해결 안 됩니다. 우리는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v.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주님을 깨웠더니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큰 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아무리 큰 풍랑이 일어도 예수님이 우리의 배에 함께 하십니다.
시편 6편을 보시고 기도하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