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8장 23-27 (기도하면서 책망을 듣는 경우)

한국 교회에서 기도는 모든 문제의 해결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도 예수님에게 책망을 듣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라고 책망을 듣습니다.

본문은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시고 호수를 건너다가 풍랑을 잠잠하게 하신 말씀입니다.  갈릴리 호수 이편에서 저편으로 배로 건너갑니다.  당시의 배로 호수를 건너려면 오랜 시간이 사용될 것입니다.  건너는 중에 주님은 잠이 드셨고 제자들은 풍랑을 만납니다.

갈릴리 호수에 서보면 제법 파도가 높을 때가 있습니다.  지형적으로도 아주 낮은 위치에 있기에 풍랑이 자주 일어 난다고 합니다.  또한 유대인들에게 물은 매우 익숙하지 않은 장소입니다.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고 부릅니다.  우리들은 호수를 바다라고 부르는 유대인들에게 과장이 심하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바다는 물이 모인 장소이고 죽음의 장소입니다.  계시록에서도 바다에는 음녀가 있습니다.  바다는 두려움과 죽음의 장소입니다.  바다는 이 세상을 의미합니다.  (계 21)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에서 내려 올 때에 바다가는 있지 않습니다.  바다는 죽음의 세상을 의미합니다.

제자들과 주님이 바다를 건너는 데 풍랑을 만납니다.

(v.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예수님은 배에서 주무십니다.  성경에서 잔다는 것은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탄 배에 물이 덮이고 죽겠다고 아우성이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죽은 시체와 같습니다. 제자들의 고난에서 주님은 주무십니다.

같은 배에 탔다는 말이 있습니다.  똑 같은 운명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과 같은 배를 타고 있습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때에 주님에게 기도합니다.  우리들이 죽게 되었으니 살려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에게 죽은 사람과 같습니다.  주님의 도움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위기가 있습니다.  그 위기에서 주님이 도와 주셔야 합니다.

(v.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제자들이 주님을 // 흔들어 깨웠습니다.  제자들은 풍랑을 보고 주님을 깨웠습니다.

제가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 배가 강풍에 뒤집힐까요? 아니 뒤집힐까요?  설령 배가 물에 뒤집어진다고 해도 제자들이 죽을까요? 살까요?

우리는 기도하기 전에 이런 생각을 해야합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 함께 하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바다의 풍랑만을 바라봅니다.  세상의 시련과 고난을 보고 주님을 깨웁니다. 신앙이 초보적 수준입니다.

오늘 날의 우리들은 무슨 문제만 생기면 기도 한다고 합니다.  문제를 보고 기도는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신앙에 생각이 없고, 염치도 없고 양심도 없습니다.  그 결과 신앙에 대한 판단도 없고 자생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모든 것을 기도로 해결하겠다고 합니다.

저는 아침마다 시편을 읽습니다.  잃을 때마다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이기적인를 생각하며 회개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고자질입니다.  나의 잘못과 책임의식은 전혀 없습니다.  매우 비인격적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선장이고, 우리들이 주님과 한 배에 탔다면 우리가 풍랑으로 죽고 망 할까요?

기도하고 매어 달리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진정한 신앙은 주무시는 주님을 보면서 나도 잠을 잘 줄 알아야합니다.  주님에게 맡기시고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담대하고 당당해야합니다.

그래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당황하면 문제가 해결 안 됩니다.  우리는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v.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주님을 깨웠더니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큰 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아무리 큰 풍랑이 일어도 예수님이 우리의 배에 함께 하십니다.

시편 6편을 보시고 기도하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 8장 18-22 ( 예수님의 귀신 추방)

성경에 예수님이 귀신을 추방하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이 영적으로 귀신보다 강하기에 귀신이 쫓겨나간다고 합니다.  틀리지는 않습니다.  그러기에 제자들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을 알려 줍니다.

(v.16-b)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주님이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쫓아내셨다는 Hella로 Ek-ballow입니다.  Ek는 영어에 From에 해당하고 Ballow는 던져내다 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으로부터 던져 내었다는 것입니다.  영어번역은 Cast out입니다.

집에 강도가 들어 왔습니다.  제가 그 강도를 쫓아내려고 하면 제가 집에 들어가서 그를 쫓아 내야합니다.  이것을 Cast out이라고 합니다.  제가 만약에 집 바같에서 나가라고 강도에게 소리치면 이것은 Cast out이 아닙니다.  제가 집에 들어가서 도둑하고 싸워서 몰아내는 것이 Cast out입니다.

주님이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신 것은 그저 귀신에게 나가라고 단순히 명령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귀신을 쫓아내기 위하여 귀신 들린 자 안으로 들어가서 싸우셨습니다.  이것이 쫓아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시각에서는 예수님이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냈지만,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귀신 안에 들어가서, 귀신을 쫓아내심입니다.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말씀의 영어 번역은 His word입니다.  Hella로 Logos입니다.

로고스는 교회 철학 강의를 들으신 분은 잘 압니다.  너무 복잡해서 설명하지 못합니다.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Logos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어떤 사람은 병에 걸리면 귀신이 찾아 온 것이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신자인데 영적으로 더럽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는 예배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Logos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들이 각종 더러운 것의 시험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험에서 우리를 지켜주시는 것이 성령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이 싸우십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럼으로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에게는 성령의 열매, 인격적 변화가 반드시 나타납니다.  자비와 양선과 춘성과 온유와 사랑입니다.  성령으로 싸움을 이겼기에 죄악에서 벗어나는 인격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v.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병을 고치셨는데 그저 고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습니다.  주님은 기적을 베푸시려고 우리의 연약함을 빼앗아 가십니다.

우리에게 기적이 필요합니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내가 죄인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 안에 찾아오십니다.  내 안의 병든 것, 죄악된 것, 상처 받은 것, 분노, 열등감과 싸우십니다.  우리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싸우십니다.  이것을 확인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을 확인하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마태 8장 14-22 (시간이 만드는 기적)

우리에게 자식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 올 때마다 현관을 Knock하면서 제가 이 집에 들어가도 되느냐고 절대로 묻지 않습니다.  그저 인사 정도 하고 집에 들어옵니다.  아이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들어옵니다.  믿음과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우리 집에 들어 올 때에 허락을 받아야 합니까?  자식의 친구는 반드시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다른 집 자식은 우리와 믿음과 사랑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허락 없이 들어오면 불법입니다.  강도나 도적이 됩니다.

올바른 가정 교육 받은 자식들은 부모가 필요한 것을 채워주면 부모로 믿고 신뢰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매를 맺고 자신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지 아니 할 지라도 부모를 믿습니다.  사랑합니다.

부모 자식은 상대적 관계 아닙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으로 부모가 항상 채워주고 만족 시켜주어야 한다면 그 부모는 자식을 망치는 것이고 자식은 망나니가 됩니다.

부모 자식은 절대적 관계입니다.  천륜이라고 합니다.  조건에 따라 반응하지 않습니다.  절대적 관계, 절대적 믿음, 절대 사랑은 나의 필요와 부족을 채워주어야 한다는 조건이 없습니다.  나의 필요 보다 아버지, 부모 자체를 믿기 때문입니다.

절대 관계는, 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로 만족 할 뿐입니다.  전 날 밤에 죽도록 매를 맞아도 다음 날 아침에 공손히 인사하고 학교 가는 것이 절대 관계입니다.  이러한 자식들이 사회에 나아가 성공합니다.  죽도록 맞았다고 내 부모 아니라고 집을 나가는 자식은 스스로 절대 관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식은 절대로 사회에서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자녀와 부모가 절대 관계가 되기 위하여 부모는 희생하고, 수고해야 합니다.  다음과 같이 자식에게 수고해야 합니다.

(v.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시중들더라.

우리는 주님이 베드로 장모를 그저 손을 댄 것으로 이해합니다.  영어 번역도 Touched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나 더 정확히 번역을 한다면 Touched보다는 Handled 정확합니다. 우리들의 상상을 // 초월하는 만져주심입니다.

만지시니 Hella로 보면 Hapto입니다.  이 단어는 원래 불을 취급한다는 의미입니다. 성경 다른 곳에서는 // 등불을 켜는 것으로 사용합니다.  Hapto라는 단어는 매우 세심하게, 주의 깊게, 정성스럽게 만진다는 의미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불을 가장 신성한 것의 하나로 정화와 치료의 상징입니다.  추위를 지켜주는 수호신입니다. 한국에서도 아녀자가 부엌의 불씨를 꺼뜨리는 것이 아주 부끄러운 일에 해당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기적을 오해하는 것이 그저 예수님이 손을 대서 낫다고 생각합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주님이 베드로의 장모에게 손을 대실 때에, 주의 깊게, 정성스럽게 손을 대셨습니다.

우리 자식들에게 어떻게 사랑을 베풀고 있습니까?  최근에 아이들을 Pick up하는 부모들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아이들은 차를 타자 마자 자신들의 눈 앞에 있는 Video을 보고나 i-phone으로 game을 합니다.  부모들이 아이들의 마음에 정성스럽게 주의 깊게 들어가지 못합니다.

아이들의 마음은 불과 같습니다.  잘 다루면 이 세상의 빛이 되지만 잘못 다루면  부모의 마음을 태워버립니다.  아이들의 마음의 불을 보고 계십니까?  엄마는 아이들에게 학원과 공부을 강요합니다.  아버지는 너무나 바쁘기에 아이들의 마음의 불이 어떠한 상태인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믿음의 불과 사랑의 불을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아버지는 바쁜 아버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엄마는 자식에게 강요하는 엄마입니다.  아버지는 돈을 벌어야 하기에 바쁘고, 엄마는 자식에 대한 희망이 있기에 자식에게 강요하면 그 마음의 불을 꺼지는 중입니다.

많은 부모들은 이 시대의 문화와 정신의 핑계를 댑니다.  그 결과 우리 자녀들을 i-phone에게 빼앗기고, Video에 빼앗기면서 아이들 마음의 불을 꺼뜨리는 중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로 강제로 i-phone과 Video를 빼앗지 마세요.  가장 실력 없는 부모의 행동입니다.

엄마의 시간을 아빠의 시간을 십자가에 못 박으세요.  아이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입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입니다.  이 시대의 아이들은 Black Mirror (전화기나 컴퓨터 화면)에서 자신의 얼굴을 봅니다.  엄마와 어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합니다.  그 결과 매우 이기적인 아이들이 됩니다.

부모가 자식의 거울이 되어야 합니다.  자식들이 Black Mirror을 빼앗아야 합니다.  이것이 시간의 전쟁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이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들이 지금 시간을 주면, 아이들이 훌쩍 커서 어른이 되고 우리의 시간이 많을 때에 그 아이들이 우리에게 시간을 줄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 장모의 손을 만지시는 것처럼 우리 자녀의 마음을 만지는 일생이 되길 바랍니다.  이러한 시간의 기적을 경험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태 복음8장 5-15 (우리도 예수님에게 기적을 보여 줄 수 있다)

젊은 남녀 두 사람이 비가 오는데 우산을 쓰고 다정히 걸어갑니다.  그것을 바라보던 사람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름다운 연인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두 사람의 관계는 오누이 입니다.

우리에게는 선입관이 있습니다.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함께 다정히 걸어가는 것은 연인입니다.  오누이 관계는 아닙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모습을 연인으로 오해합니다.  선입관은 대부분의 주어진 정보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틀릴 때가 있습니다.

로마 백부장의 하인이 중풍으로 고생합니다.  백부장이 주님에게 종의 병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주님은 내가 너의 집에 가서 고쳐준다고 하자 백부장은 내 집에 오심을 감당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말씀만 하셔도 병이 낫겠다고 합니다.

이러한 말을 들으신 주님은 놀라시며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러한 믿음의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주님이 놀랬다는 것은 Hella로 // Thoaomai // 타오마이 입니다.  이것은 기적을 보고 놀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기적을 보셨기에 놀라십니다.

주님에게 나타나는 기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v.8)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우리들은 기적을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말씀만 하시면 낫겠다고 합니다.  이것이은 기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놀라는 기적은 예수님이 내 집에 들어오는 것을 감당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집은 백부장 자신입니다.  백부장의 집은 크고 좋습니다.  깨끗합니다.  자신이 집에 올 수 없다는 것은 자신이 죄인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집이 더러우면 손님 오는 것을 거절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죄인이니 주님이 오실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기적을 보고 계십니다.  병이 낫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이라고 합니다.

백부장이 예수님을 병을 고치는 해결사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용서 하시는 구세주로 봅니다.  그러기에 나는 당신을 감당 할 수 없다고 합니다. I am not worthy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이러한 기적으로 병이 낫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기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놀라게 하는 기적의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마태 8장 1-5 (오늘 날의 문둥병)

오늘은 Valentine day입니다.  서로의 사랑을 표현하는 날입니다.

문둥병을 나병이라고 합니다.  신경 계통의 질병으로 자신의 몸의 일부분이 잘려져 나가는 현상입니다.  우리 말에 문둥 문둥이라는 말은 어떤 물체가 약간의 크기로 잘려 나간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래서 문둥이라고 한다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나병의 특징은 자신이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신경 감각이 죽어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상처가 나고 다치고 몸이 썩어도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늘 날의 현대인들은 나병환자입니다.  죄의 고통과 두려움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감각이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할 때에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죄 의식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입니다.  우리들의 죄 의식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으로 죄 의식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죄 의식이 없습니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죄는 사람도 용서합니다.  그러나 인간으로 하나님을 배신한 죄는 사람이 용서하지 못합니다.  하나님만이 용서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문둥병 환자를 고쳐 주시고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에게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문둥이가 정상인이 됐습니다.

나병이 치유되면 신경감각이 살아납니다.  고통과 감각이 회복됩니다.  자신의 질병에서 아픔을 느낍니다.

우리들은 문둥병에서 치유 받은 자들입니다.  죄에 대한 고통과 감각이 있습니다.  이렇게 치유 받은 자들은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합니다.  당시의 제사장은 의사의 역활도 했기에 나병 환자의 몸을 보고 치유를 판단 결정한 것 같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에게 제사, 예배를 드리는 것을 주관합니다.

나병에서 치유된자, 회복된자는 제사장에게 찾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치유와 병든 것을 확인하는 곳이 오늘 날의 교회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우리의 구원을 확인하고 교회를 통해서 우리의 죄로 병든 것을 회복하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죄의 고통과 감각을 갖고 있기에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의 자신이 누구이며 우리의 구원을 확인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 7장 6-29 (선교와 전도 누구의 책임인가?)

교회 역사를 공부해보면 매우 재미 있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교회의 선교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 교회에서 박해가 나타나자 교회가 이방지역으로 흩어지면서 복음이 전파됩니다.  아리우스가 삼위일체로 이단성의 지적을 받자 그들은 오늘 날의 유럽, 바바리안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 바바리안들이 나중에 로마를 망하게 하는 주축 세력이 됩니다.  그러나 바바리안들은 이미 기독교적 문화와 전통에 익숙한 관계로 쉽게 기독교에 포용이 됩니다.

로마 Catholic은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에 대한 스스로의 종교 개혁을 합니다.  소위 역 종교 개혁이라고 합니다.  Counter Reformation입니다.  로마에서 활동의 근거를 상실한 로마 카톨릭은 남미와 아시아 이방 선교를 시작합니다.

그럼으로 선교를 역사적으로 보면 박해나 또는 교회의 약화 둘중의 하나의 원인으로 선교가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와 아리우스는 박해로 선교가 시작된 것입니다.  Roman Catholic은 근거지를 상실하자 교회의 자구책으로 선교가 시작된 것입니다.

현재 미국은 세계 최대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습니다.  한국도 2 순위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습니다.  두 나라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예를 들어 드린 것 처럼, 자국에서 박해는 아닙니다.  특히 한국의 교회는 자국에서 기독교적 영향력이 약화되어가는 중에 선교가 확장되는 것을 주시해야합니다.  선교의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교회가 교회의 생존 방법으로 선교를 택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선교라는 사명도 있겠지만 선교로 전도로 교회의 정체성으로 삼은 것입니다.

교회의 정체성은 선교와 전도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미국은 선교사의 증가의 시작은 영적 대각성운동 이후에 급증합니다.  자국의 교회가 부흥 할 때에 선교적 부흥이 일어납니다.  그럼으로 미국의 선교는 교단적입니다.  개교회가 선교하는 것이 아니라 교단의 정책과 훈련에 따라 선교합니다.  그 결과 지속적입니다.  장기적 안목으로 시작합니다.  선교의 열매는 1-2 세대를 지나야 열매가 맺혀집니다.

이렇게 장기적 시간이 요구되는 이유는 선교는 문화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복음적이지만 선교와 전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문화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럼으로 한국에서 선교하는 많은 외국인 선교사 가족들이 몇 대에 걸쳐 선교사로 봉사는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선교는 어떠 할 까요?  매우 개인적입니다.  담임 목사와 친분 관계가 강하게 작용됩니다.  수많은 선교가 이러한 인간관계로 좌지우지됩니다.  담임 목사 바뀌면 선교지도 바뀝니다.  선교부장 장로님만 바뀌어도 선교지가 바뀝니다.

더 큰 문제는 개 교회적입니다.  각 교회가 선교합니다.  그 결과 우리의 선교는 복음적입니다.  문화적이지 않습니다.  선교에 대한 신학적 지식이 매우 낮습니다.  열정은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지식이 없습니다.  지식이 없는 열정은 무서운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열매가 있는 것 같지만 매우 단기적입니다.  성공적 선교를 한 선교사가 죽거나 병들거나 그 자리를 떠나면 그 누구도 책임지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문제는 대한민국의 교회 자체가 약화 되어지는 상태에서 선교가 급증했습니다.  자국의 근거를 상실 할 때에 교회의 선교가 급증했습니다.  미래의 원동력이 선교지 자체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것은 1-200년 걸리는 사업입니다.  현재 선교지에서 스스로 생존 할 수 있는 선교가 몇 개 될 수 있는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IMF 때에 수많은 선교사님들이 고생하고 어려움 당한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면에서 미국 장로교 선교는 아주 성공적입니다.  문화적이고 몇 대에 걸쳐서 지금도 계속중입니다.

(마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거룩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진주는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거룩한 것과 진주를 나누어주는 우리에게 문제가 있음을 말씀합니다.  개나 돼지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들이 잘못 주면 개나 돼지가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우리들이 비싸서 잘 먹을 수 없는 T-bone Stake을 개에게 줍니까?  우리들이 고기를 먹고 개에게는 뼈다귀를 주는 것이 정상입니다.  주인이 뼈다귀 먹고 개에게 고기를 주는 것은 비정상입니다.  돼지에게 콩을 주는 것이 정상이지, 콩과 유사한 진주를 주는 것은 비정상입니다.  이것은 주는 자의 책임입니다.

제가 목회자로, 선교를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날 교회는 교인들에게 뼈다귀를 주고 선교지에는 고기를 줍니다.  오늘 날 한국 교회는 교인들에게 콩을 주고 선교지에는 진주를 줍니다.  선교와 전도가 교회의 정체성과 생존을 Program으로 전락했습니다.  선교 전도하지 아니하는 목사와 교회는 목사도 아니고 교회도 아닙니다.  교회의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들 자신이 하나님의 귀하신 선교적 전도적 명령을 천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회개 할 문제입니다.

선교는 장기적입니다.  처음에는 문화적입니다.  목사에 따라, 교회에 따라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신학적 성찰과 재정적 계획으로 헌신된 사람을 발굴 해서 장기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선교가 나타나야 합니다.

 

마태 7장 1-5 ( 나의 감기약으로 상대방을 비판하지 말라)

감기에 걸리면 타이레놀을 먹습니다.  A라는 사람은 타이레놀을 먹으면 감기가 낫습니다.   A는 감기에 걸리면 타이레놀을 먹어야 몸이 낫는다는 것은 진실이 됩니다. 그런데 B는 타이레놀을 먹어도 감기가 낫지 않습니다.  B의 진실은 타이레놀이 엉터리라는 것입니다.  A에게 진실은 B에게 거짓입니다.  B의 진실은 A에게 거짓입니다.

A와 B는 타이레놀 때문에 만나면 싸울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진실이 자신에게 맞지 아니하기에 서로 비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v.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우리에게는 진실이 있지만 진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험과 진실을 절대화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만약에 우리의 진실과 경험을 맞다고 주장하면서 상대방을 틀렸다고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비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경험으로 나는 이렇게 성공도 하고,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면, 나의 경험과 진실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진실은 우리를 오늘 까지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우리 각자의 진실은 우리 자신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살아가는 방법과 지침을 제공합니다.

우리의 경험과 진실은 A truth입니다.   타이레놀은 나에게는 약이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약이 아닙니다.   타이레놀만 먹어야 한다고 절대화하면 타이레놀 그 사람에게 감기약의 우상이 됩니다.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에게는 타이레놀이 진실이 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타이레놀이 진실이 아닙니다.  그럼으로 사람들은 수많은 감기약을 만들어냅니다.  약방에게 가면 수십가지의 감기약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증상마다, 시간에 따라 감기약을 사용하게 합니다.  타이레놀이 나에게는 진실과 경험이 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적 가치가 아닙니다.

문제는 이러한 약이 끝없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감기약이 달라져야 합니다.

(v.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공동번역은 이렇게 했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 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나의  경험과 진실을 절대화 시킨 결과라는 것입니다.  A truth가 The truth가 되는 것입니다.  즉 나의 경험과 진실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절대적 진리를 가졌기에 다른 사람의 진리와 경험은 사실이 아닙니다.  틀린 것이 됩니다.  이것이 매우 무서운 것입니다.  교조화됩니다.  종교적 신념으로 변질합니다.

(v.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우리의 진실, 경험은 티와 들보입니다.  A truth입니다.  The truth는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마다 다른 감기약이 있어야 합니다.  진리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입니다.  나를 절대화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봐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우리 자신을 얼마나 우상화하는 지 알게 됩니다.

(v.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오늘도 나의 경험 지식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하나님 진리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모든 것을 확인해봐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눈에 들보가 보입니다.  상대방의 눈에는 티가 보입니다.

마태 6장 25-34절 (이발사 아저씨)

우리에게는 날마다 규칙적으로 정신적 육체적 노동을 합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규칙적으로 일을 해야하는 것은 먹고 사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노동은 지겹고 힘이 듭니다.  성공과 실패가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일입니다.  오랜 동안 저에게 이발해주시는 아저씨가 계셨습니다.  그는 제가 목회자인줄 모릅니다.  어느 날 그가 이런 말을 하십니다. 과거에는 남의 머리 이발해주는 것이 힘이 들었지만 이제는 남의 머리 이발해주는 것이 즐겁고 감사하다고 합니다.  그 아저씨는 그때에 암으로 투병을 시작 할 때입니다.

그는 말하길 사람은 언젠가는 죽을 것이고 그 죽음을 앞두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기쁘다고 합니다.  아프기전에는 이것을 몰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목숨이 멈출 때를 생각하니 이렇게 일을 하는 것이 감사하다고 합니다.  죽음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놨습니다.  그 아저씨가 그때에 이발사가 아니라 예수님과 같았습니다.

우리들이 하루를 다음과 같이 살아갑니다.  깊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마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마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마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저는 그 이발소를 가지 않습니다.  그 아저씨가 그 이발소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 이후 그분의 소식을 알지 못합니다.  하늘 나라 갔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들이 한 번의 인생을 일하며 살아갑니다.  노동은 단순히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우리들이 일 하는  것에 대한 뜨거운 마음의 눈물이 흘러서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노동을 새롭게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마태 6장 20-24 (돈이 주는 시력-마지막 )

HBO에서 이 세상에서 최고 부자의 한 사람, Warren Buffett의 Documentary을 봤습니다.  그의 일생은 어릴 때부터 돈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도서관에 있는 투자에 대한 책을 거의 다 읽었을 정도입니다.  그는 그가 예언한 대로 나이 30에 이미 백만장자가 됩니다.  (오늘 날로 계산하면 천만장자)  그는 엄청난 독서를 합니다.

Documentary에서 보수적 공화당 하원의원의 아들로 태어난 버펫은 돈에 대한 시각은 출중했지만, 세상에 대한 시각은 맹인 수준이 됩니다.  이웃과 가난한 세상에 대한 시각이 없었습니다.  돈을 버는 기계에 불과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의 성격이 돈을 버는데 아주 중요한 역활을 한 것 같습니다.

동시에 그렇게 많은 돈에서 벗어나려는 첫 번 아내의 내용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아내의 진보적 성격과 이웃에 대한 관심은 아이들을 어느 정도 키운 후에 1977년에 그와 별거 합니다.  아내는 가난한 이웃에 대한 관심이 커짐에 따라 보수적 공화당원에 대한 분위기를 이기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의 아내가 구강암으로 죽게됩니다.  그는 아내의 죽음을 보고 난 후에 약 370억불을 Bill Gates 재단에 기부합니다.  아내의 죽음이 아마 그에게 새로운 세상의 시각을 갖게 한 것 같습니다.

돈은 우리에게 시각을 줍니다.  돈으로 바라보는 인생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보람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가정을 지키고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합니다.  경제적으로 너무나 가난하고 힘든 것은 우리의 삶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의 삶의 수준을 유지하는 것에 열정적 시각과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시각만이 최선의 삶은 아닙니다.  본문은 다음과 같은 시각을 알려주십니다.

(마 6:20-24)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v.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v.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v.23)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v.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오늘 말씀에 아주 이상한 내용이 있습니다.  (v.22-23)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v.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나의 돈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우리의 시력이 달라집니다.   돈을 하늘에 두라고 합니다.  이 내용은 어제 설명했습니다.  하늘에 두라는 또 다른 의미는 돈과 하나님 사이에서 하나님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택의 대부분은 돈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 선택을 할 때에 하나님을 선택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시각이 달라집니다.  내용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Warren Buffett는 아내의 죽음을 보고 자신의 재산을 자선단체에 기부합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고 매일 우리의 돈을 어떻게 사용 할 것인가를 선택해야합니다.

마태 6장 19-21 (돈에 대한 이야기 -3)

돈에 대한 3번째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는 돈의 중요성을 말씀드렸습니다.  두 번째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돈을 보고 사람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을 보고 돈을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세번째는 우리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공간을 보고 돈을 봐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공간을 보지 않고 돈을 보면 그 돈은 돈이 아닙니다.  돈은 너와 나 사이에 공간에 존재 하기 때문입니다.

갑과 을이 존재합니다.  갑과 을 사이에서 돈만 있으면 요사이 말로 돈이 많은 사람이 갑질을 합니다.  그러나 갑과 을 사이에 인격이 존재하면 갑질을 하지 않습니다.

돈의 힘은 이러한 공간을 없애 버립니다.  돈은 갑과 을의 인격을 사라지게 합니다.  돈이 많은 갑이 돈이 없은 운전사 을의 머리를 발로 때릴 수 있습니다.  갑과 을 사이에 인격과 사랑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갑은 돈의 힘을 믿고 때리고 을은 돈의 힘이 약하기에 자신의 인격과 자존심을 버립니다.

이것이 타락한 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졸부근성과 천민자본주의입니다.

신자 우리에게는 이러한 공간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9-a)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v.20-a)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둘 다 명령형입니다.  땅이라는 공간을 돈으로 채우지 말라고 합니다.  하늘이라는 공간을 의식하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수입이 생기는 데로 교회에 헌금하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이단은 돈을 땅에 쌓아두면 안 되니 자신들에게 갖다 바치라고 합니다.  이것 이단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기 위하여 교회에 헌금하라고 하면 그것은 이단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천국에 가려고 돈을 주고 Ticket을 사는 것과 같습니다.

(눅 12:33-34)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v.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나와 너 사이에 있는 공간에 있는 가난하고 불쌍한 자를 구제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늘의 보화를 두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것을 담을 주머니를 만들라고 합니다.

주님을 쫓고 져 하는 부자청년에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 18:22-23)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v.23) 그 사람이 큰 부자인 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너의 것을 팔아 가난한자들에게 주는 것이 하늘의 보화라고 말씀합니다.  너와 나 사이에서 하늘은 가난하고 연약한자들 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쌓아두라는 것은 나보다 가난하고 연약한 이웃에게 쌓으라고 말씀합니다.  나의 이웃이 하늘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공간에 계십니다.  나보다 약하고 가난한자에게 계십니다.

(v.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v.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자 이웃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돈에 끌려가는 노예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공간에 나타나는 하늘나라를 보고 보물을 쌓아둡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살아갈 때에 돈으로 갑질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격이 돈을 지배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채우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