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6장 19-21 (돈에 대한 이야기 -2)

우리는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돈을 어떠한 태도로 이해 할 것 인지를 말씀드립니다.

3명의 사람이 우리 앞에 돈을 들고 서 있습니다.  A라는 사람이 10불 짜리 돈을 들고 있습니다.  B 라는 사람은 만불 짜리 돈을 들고 있습니다.  C라는 사람은 천만불 짜리 돈을 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3명의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다시 이렇게 표현합니다.  A라는 사람은 시간당 10불 짜리 직업을 갖고 있습니다.  막 노동을 하며 살아갑니다.  B 라는 사람은 시간당 20 불 짜리 어느 직장의 직원입니다.  C라는 사람은 일년에 몇 천만불을 벌어들이는 사업체의 주인공입니다.  이렇게 3명의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우리들이 사람을 바라 봅니까?  돈을 보고 사람을 봅니까?  우리는 돈을 보고 사람을 봅니다.  이것을 사회적 익명성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을 그 사람의 직업, 수입, 환경에 따라 평가하는 우리의 시각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그 사람을 알지 못합니다.  이름도, 그의 성격도, 그의 환경도, 그의 삶에 대한 태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의 정직, 성실, 의도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의 내면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의 수입과 직업, 외형적인 것으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불행입니다.

사람은 돈으로 평가합니다.  더 불행한 것은 자신 스스로를 돈으로 평가합니다.  돈으로 죽고 삽니다.  돈으로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비교에 의한 열등의식에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람은 수천만불을 벌고 높은 지위에 있어도 불안과 열등감에 빠져 살아갑니다.

반대로 돈이 아닌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에서 벗어난 상태입니다.  돈으로 자신을 평가하거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당당합니다.  떳떳합니다.  사람의 행복이 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격과 삶의 내용에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렇게 돈을 이해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다시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 앞에 3 명의 사람의 돈을 들고 서 있습니다.  A라는 사람이 10불 짜리 돈을 들고 있습니다.  B 라는 사람은 만불 짜리 돈을 들고 있습니다.  C라는 사람은 천만불 짜리 돈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돈을 바라보고 사람을 봅니다.  돈으로 사람을 평가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돈을 들고 있는 3 명의 사람과 우리 사이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미학적으로 공간이라고 합니다.  물리적으로 공기가 있습니다.  수학적으로 거리가 있습니다.

오늘 하루 동안 3명의 사람과 나 사이의 공간에 무엇이 있는 가를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돈도 있고 사람도 있지만 그 사이에 무엇이 있습니까?  내일 말씀을 드립니다.

마태 6장 19-21 (돈에 대한 이야기 -1)

돈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돈이 부족하면 우리는 모든 면에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우리들은 돈을 절대로 무시 할 수 없습니다.  돈은 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으로 죽고 삽니다.  어떤 사람은 돈 때문에 다른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 도 있습니다.

성경은 돈의 유익함을 인정합니다.

  (전 7:12) 지혜의 그늘 아래에 있음은 돈의 그늘 아래에 있음과 같으나, 지혜에 관한 지식이 더 유익함은 지혜가 그 지혜 있는 자를 살리기 때문이니라

지혜로운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잘 지키듯이 돈도 사람의 지혜처럼 우리의 가정과 인생을 보호합니다.

  (전 10:19) 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나 돈은 범사에 이용되느니라

전도서에서 지혜와 돈을 동등하게 봅니다.  잔치는 즐기는 것이고 포도주는 흥을 돋우는 것이지만 돈은 만사를 해결해준다고 합니다.  돈은 이 세상의 많은 문제를 해결해줍니다.

(딤 6:17-19)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v.18)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v.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바울은 부유한 자들에게 돈 보다 하나님에게 희망을 갖지만 네가 갖고 있는 부유함을 잘 즐기라고 합니다.

Max Weber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신약의 청지기 정신이 오늘 날의 자본주의를 형성했다고 봅니다.  성경은 돈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죄인과 가난한자의 친구이지만, 예수님에게는 부자 친구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부자 나사로입니다.  또한 아리마대 부자 요셉입니다.  성경은 이 사람들의 이름 앞에 부자라는 명칭을 사용합니다.  주님을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도 부자입니다. 예수님의 장레를 부자들이 치루어 주었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라고 소리 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무리라고 합니다.  부자는 예수님의 장레를 치루지만, 무리들은 예수님을 죽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는 이유가 예수님이 세리, 삭개오을 만나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자 삭개오을 용서하시고, 그의 에 집에 머무실 때에 사람들이 배신감을 느낍니다.  이 때부터 무리들의 마음이 예수님에 대한 기대를 버리기 시작랍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에 위기가 올 것을 알면서도 부자 삭개오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를 헬라어로 Oaklos라고 합니다.  아주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법적 신분이 없는 거지들입니다.  돈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자신을 따르던 무리를 뒤에 두고 부자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신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결정적 이유의 하나라고 판단합니다.

예수님에게는 돈 있는 부자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오늘도 돈을 많이 버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내일 계속합니다.

 

마태 6장 16-18 (육체적 금식과 영적 금식)

사람은 먹는 재미로 산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먹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본능이고, 생존의 방법입니다.  그럼으로 금식은 인간의 본능과 생존 수단의 포기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음식물을 의도적으로 중단하기 때문입니다.  금식은 나의 생명을 주님에게 맡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를 밥을 먹으면서도 얼마든지 금식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수단과 방법을 포기하며 사는 것이 금식입니다.  그러기에 모세도 다윗도 금식했습니다.  금식으로 하나님의 도움과 응답을 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금식을 해보면 우리 영혼의 금식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금식은 육체의 금식과 영혼의 금식이 있습니다.  영혼의 금식은 나의 육체의 배고픔을 통해서 나의 영혼의 배고픔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v.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금식하는 자는 // 이미 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배가 고픈 것은 밥을 먹으면 해결되지만 나의 영혼의 핍절함 배고픔은 밥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미 상을 받은 자의 증거입니다.

금식을 해보면 문제의 해결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적 배부름을 주셔여 합니다.  금식은 우리의 영혼을 괴롭힙니다.

돌아온 탕자에서 배가 고프니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우리가 배가 부르면 하나님 아버지 절대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배가 고프면 하나님 아버지 생각합니다.  금식의 목적은 기도의 응답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금식의 가장 중요한 원칙입니다.

지금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면 강제로 금식하게 하십니다.  매를 맞기 전에 금식해야합니다.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강제로 금식하게 하면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매 맞기전에 알아서 금식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알아서 금식하면 상급이 있습니다.  나의 수단과 방법을 포기하고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가 있습니다.  금식의 최고의 응답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감사의 눈물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확인하게 됩니다.

육체적 금식하고 싶으면 밥을 굶으시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영적 금식하고 싶으면 밥을 먹으면서도 나의 수단과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마태 6장 9-15 (주기도문은 주문이 아니라 고백이다 )

늑대가 양을 잡아먹으려고 좇아가다가 양이 양을 제물로 사용하는 신전으로 숨었습니다.  늑대가 양을 향해 이렇게 큰 소리를 칩니다.  만약에 저 신전의 사람들이 너를 보면 너를 잡아 제사의 제물로 쓸 것이니 빨리 나오라고 합니다.  늑대는 그 곳은 죽을 장소이니 죽지 않을 곳으로 나오라고 합니다.

늑대의 말이 맞습니다.  양은 그 신전에 있으면 제물이 됩니다.  그러면 늑대의 말대로 그 신전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최고의 선탣입니까?  양이 그곳에서 탈출하는 순간 양은 늑대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양은 신전의 제물이 되던 늑대에게 잡혀먹든 양은 어차피 죽습니다.

그러나 양은 다음과 같이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양이 늑대에게 잡혀먹으면 양은 늑대의 배를 불리는 먹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양이 제물이 되면 양은 신을 기쁘게 하는 제물이 됩니다. 양의 가치는 늑대의 먹이에서 신을 기쁘게 하는 제물이 됩니다.  양은 신의 세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가 이 시대의 양입니다.  세상은 늑대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하늘나라가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죽지 말라고 합니다.  나와 함께 재미 있는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자고 합니다.  교회는 피곤한 곳이라고 합니다.  목사는 우리의 시간과 돈을 빼앗는다 고합니다.  신자는 위선자들이라고 합니다.  천국, 부활 없다고 합니다.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시험을 광야에서 3번 사탄에게 당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로 세상을 이깁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기도로 늑대를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양이 되어, 주기도문을 하나님에게 고백해야합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늑대의 먹이로 전락하지 않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늑대에게 여러번 당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주님의 기도를 암송했습니다.  그때마다, 힘이 났고, 지혜가 찾아 왔고, 어려움에서 여러차례 벗어난 적이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주문이 아닙니다.  주기도문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도 도구입니다.

오늘 날 많은 신자들은 주기도문을 예배나 모임의 순서가 끝이 날 때에 사용하는 순서로 착각합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기도 할 때마다, 한 마디, 한 마디에서 하나님의 위로와 능력이 찾아옵니다.

이제부터 주님의 기도문을 주문처럼, 예배가 끝나는 시간에 외우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의 삶의 순간마다 믿음의 고백이 되길 바랍니다.

마태 6장 5-8 (기도의 자세)

우리는 기도를 하나님과 대화라고 합니다.  대화라는 것은 양쪽의 의견 교환을 의미합니다.  기도를  상대적 대화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아닙니다.  기도는 일방적 대화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뿐입니다.

이러한 관계가 우리의 기도의 자세에서 나타납니다.

첫 번째는 기도 할 때에 무릎을 꿇습니다.  하나님에게 무릎을 꿇는 것은 내가 나의 인생의 문제의 답을 내가 갖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갖고 계신 것을 고백하는 자세입니다.  그럼으로 무릎을 꿇습니다.  하나님에게 항복하며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두 번째는 서서 기도합니다.  우리들이 존경하는 어른이 방에 들어오면 반드시 일어섭니다.  이렇게 일어나는 이유는 그에 대한 존경과 신뢰를 의미합니다.  그의 의견을 수용한다는 태도입니다.

(v.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주님이 이미 상을 받았다고 하시는 이유는 너희들이 정해진 시간에 따라 하루 3 차례 기도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은 인정은 받는다고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이미 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으로 기도하면서 그들의 인격과 삶은 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기도 하는 것으로 자랑 할 수 있지만 너희의 인간성은 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기도했지만 사람이 변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외식하는 자라고 합니다.

우리들은 기도했으면 기도하는 내용만큼 변해야합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얻어내는 도구가 아니라 기도하고 난 후에는 내가 기도하는 것을 믿고 변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음성은 우리의 필요가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신자답게 변화하는 것입니다.

 

마태 6장 2-4 (주는 자와 받는 자의 태도)

구제 할 때에 오른 손이 하는 것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합니다.   구제의 원문의 의미는 동정과 자비를 의미합니다.  내가 무엇을 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마음으로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불쌍해서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불쌍한 사람이 되어 상대방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그가 가난해서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난한 사람이 되어 도와 주는 것이 구제입니다.  구제는 내가 그와 같은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와 같이 된다면 나의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와 같지 아니하면 나의 물질, 시간을 주는 것 뿐입니다.  물질은 가지만 마음은 가지 않습니다.  돈을 주지만 사랑을 주지 않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상대방에게  굴욕감을 갖게 합니다.  불평과 불만을 갖게 합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어려습니다.  베풀지만 종종 곤혹을 치루게 됩니다.

(v.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합니다.

사람은 왼손과 오른 손을 자연스럽게 움직입니다.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은 나의 구제를 기억하지 말라 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줍니다.  주는 자는 받는 자의 자존심을 존중한다면 베풀고 난 후 모든 것을 잊어야합니다.  베풀었기에 보상이나 대가를 원한다면 서로에게 상처가 됩니다.  주고 난 후에는 모든 것을 잊어야합니다.  나의 기대를 채울 사람은 없습니다.  이러할 실력이 없다면 주기전에 반드시 받은 자가 약속하고  행동 할 조건을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도 지혜입니다.

(v.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하나님은 주는 자에게 보상하십니다.  하나님이 베푸는 자에게 상을 주십니다.  그럼으로 받은 자도 다음과 같은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또한 받은 자는 하나님께서 주진 것을 사람을 통해서 받은 것입니다.  받은 자에게 감사해야합니다.  정중해야합니다.  그러나 주는 자에게 비굴해서는 안 됩니다.  주는 자의 사랑과 은헤를 갚도록 노력해야합니다.  그러나 받은 것이 마음이 짐이 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주셨습니다.

그럼으로 잊는 것도 좋습니다.  그 사람의 은혜와 사랑을 잊으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부담, 자신에 대한 비루함을 잊어야 합니다.  그리고 당당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는 자도 부담이 없습니다.  하나님도 기뻐 하실 것입니다.

마태 6장 1절 (우리의 신분과 하나님의 의)

우리 각 사람은 다양한 신분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집에서는 가장이고, 교회에서는 목사이고, 가까운 친구들에게는 친구입니다.  심리학에서 자신을 이해하는 방법의 하나가 이러ㅏ한 신분에 대한 구별입니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친구에게는 친구, 교회에서는 목사, 집에서는 가장이라는 의식이 철저하게 구분되어 진다고 합니다.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아니히면 집에서도 목사, 친구들에게도 목사로 착각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마 6:1-a) 사람에게 보이려고.

예수님은 우리들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무엇인가를 한다고 합니다.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사람들에게 눈길을 끌려고 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배우로 연극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들이 어떠한 행동이 사람 때문에 한다고 합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눈길을 끌어야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행동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연극이 됩니다. 가짜가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행동으로 의로운 존재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셔야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행위로 의로운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이것을 잊으면 우리는 의로운 존재가 되어야 하는 강박증에 걸립니다.

새벽기도 좋은 것이지만 우리는 기도로 의롭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 십일조 헌금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십일조로 우리들이 의롭게 되지 않습니다.  우리들 기도와 십일조 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은혜와 특권입니다.  은사입니다.  세상에는 허락되지 않은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하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십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이미 의로워진 존재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사회적 신분, 가정에서 역활, 교회에서 역활, 사회에서 역활에 충실해야합니다.

직장에서 직원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집에서 아내와 남편으로, 자녀들의 어버이로 신실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의에 대한 찬양입니다.  교회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직임에 대해서 열의와 정성을 갖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의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이러한 구별과 질서가 하나님의 영광 올리드리는 것입니다.

마태 5장 43-48절 (하나님은 나의 원수를 사랑하신다)

우리에게 가장 힘든 것이 있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원수가 아닌 가까운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는데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의 무게가 우리를 항상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가까운 사람과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깊은 죄책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는 이유는 우리들이 원수를 미워하거나 보복을 할 자격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십니다.  그들에게도 우리와 똑같이 해와 비를 내리신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원수를 미워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미워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너도 과거에는 나의 원수였기에 너도 너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하십니다. 우리들이  우리 원수보다 잘난 것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누구보다 잘 났고 그를 조롱 할 자격을 갖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마5:43-48)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마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5: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나의 원수를 용서할 때에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원수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 5장 38-42 (한 번의 손해로 10번의 이익)

 먼저 본문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마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v.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v.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v.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v.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손해와 이익

우리들은 이렇게 살면 손해보낟고 합니다.  바보 취급을 당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것을 빼앗아 갈 것입니다.  나의 시간 나의 물질, 나의 것을 지켜내지 못합니다.

만약에 내가 이렇게 산다고 하면 나는 주변 사람들을 근심시키거나, 나는 주변 사람을 악하게 만들 것입니다.

왜 주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삶을 원하십니까?  이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우리는 이익을 발생시키기 위하여 많은 수고와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열 번 이익을 봐도 한 번의 손해로 모든 이익을 다 빼앗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크게 성공해도 한 번의 실수로 나락에 떨어집니다.  평생을 정직하게 살았는데 한 번의 욕심으로 세상에서 수치를 당합니다.  한 번의 손해가 모든 것을 빼앗아갑니다.

한국의 대통령은 한 사람을 잘못 만나서 그녀의 평생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길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한 번의 실수을 모면하려면 나의 이익만을 위하여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한번 이익에 빠지면 그 이익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끓임없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합니다.  짐승과 같습니다.  우리는 순간순간마다 손해 볼 불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실패하지 않습니다.  한 번의 손해가 10번의 이익을 지켜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자신만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특징은 끓임없이 타인을 공격하고 비난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빼앗길 것을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것을 빼앗아 갈 것이라는 피해 의식에 살아갑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한 번의 손해가 10번의 이익을 지켜줍니다.  그러나 10번의 이익은 한 번의 손해도 다 빼앗깁니다.  이러한 지혜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저의 목회적 경험입니다.

 

마 5:33-37 맹세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는 제 3 계명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당시 사람들은 자신의 진심, 결백, 올바름을 나타 낼 때에 자신이 믿는 신의 이름으로 맹세했습니다.  이러한 맹세가 지켜지지 아니 할 때에 그 신은 그 사람에게 모독을 당합니다.

성경에서 다윗은 요나단은 서로 돌봐  줄 것을 맹세했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 절름발이 므비모셋을 자신의 식탁에서 식사하게 합니다.  절름발이는 왕의 앞에 나올 수 없습니다. 그와 식사를 하는 것은 왕의 권위와 체면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요나단과의 맹세를 지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다윗이 므비보셋을 죽이거나 맹세를 지키지 아니했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맹세를 지킬 실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맹세를 이렇게 가르켜 주십니다.

(v.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주님이 맹세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헛맹세 거짓으로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주님 앞에 한 맹세는 다 지키라고 합니다.  맹세를 지키는 것은 나의 희생과 아픔을 전재로 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헛맹세를 하게 됩니다.  헛맹세는 나의 이익과 입장을 살려주기 때문입니다.  너의 이익이라면 도무자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에수님은 우리에게 맹세의 한계를 정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 낼 수 있다면 우리는 먕세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한 다면 우리는 맹세하지 못합니다.  맹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익보다 하나님의 영광이 중요합니다.

우리들이 진실을 말 할 수 있다면, 법정에서 진실을 말하겠다고 맹세해야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진실을 말 할 수 없다면 맹세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맹세해서 그 사랑을 희생과 눈물로 지킬 실력이 있다면 결혼을 해야합니다.  상대방의 명예를 지켜줄 실력이 있다면 다윗과 같이 맹세햐야합니다.

(v.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그럼으로 맹세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먕세는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합니다.  거짓의 모습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게 됩니다.

우리는 맹세 없는 모습으로 세상의 인정을 받고 세상 사람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발견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진정한 맹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