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2장 1-12 -구정물이 없는 성전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헤롯 대왕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합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닌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 이두매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를 조롱했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은 로마의 황제가 임명한 왕입니다.  헤롯의 아버지 안티파스가 로마의 황제 Julius Caesar가 Egypt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에 도움을 주어 그 대가로 팔레스틴 지역을 다스리게 됩니다.

안티파스의 아들 헤롯은 뛰어난 정치 수완으로 유대의 왕으로 살아남습니다.

오늘 날의 유대인들은 헤롯 대왕에게 감사해야합니다.  이스라엘은 관광 대국입니다.  많은 관광의 수입이 헤롯이 건설한 도시, 농업, 수도시설, 원형경기장에서 나옵니다.  그가 없었다면 유대인들은 별로 자랑 할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장 사악한 왕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세운 사람입니다.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별을 보고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에 있느냐 우리들이 경배하러 왔다고 합니다.

(v.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헤롯왕과 예루살렘이 소동했다고 합니다.  소동이라는 말은 Hella로 Tar-as-so입니다.  구정물입니다.  구정물을 오래두면 음식 찌꺼기는 밑에 가라앉고 위에는 깨끗한 물이 떠오릅니다.  냄새도 없습니다.  평상시에는 정갈하고 위엄이 있고, 깨긋하고 악취도 없습니다.

그런데 구정물을 막대기로 저어보면  혼탁해지면서 악취가 올라옵니다. 이것이 소동한다는 의미입니다.  헤롯과 예루살렘이 소동하는 이유는 헤롯은 자신이 왕인데 자신의 왕권을 빼앗길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새로운 왕을 맞이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신들을 죽일 것인지 살릴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결정적 이익이 타격을 받을 때에. 자신의 신분에 변화가 생겼을 때에, 자신이 모든 것을 잃어 버릴 수 있을 때에 우리는 소동합니다.  본색이 들어 납니다.  평소에는 거룩하고, 진지하고, 선하지만, 우리의 악취가 나고 본색이 들어나고, 사악함이 나타납니다.

대강절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우리의 성전에 누군가 찾아와서 우리에게 결정적 타격과 손해를 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정물이 없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헤롯이 손으로 지은 성전이 아닌 하나님의 성전답게 해달라고 하나님에게 지혜를 구하며 그 지혜로 하루를 사시기 바랍니다.

 

마태 1:18-25 – 나와 같으신 하나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됐다고 합니다.  이 말씀에서 정혼은 약혼이 됩니다. 결혼을 약속합니다.  동거는 결혼을 의미합니다. 아내와 남편으로 함께 지낼 수 있습니다.  결혼과 약혼의 중간 상태이지만 남자가 죽으면 과부가 됩니다.  사실적 혼인 상태입니다.  약혼의 상태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율법적인 판단에서는 돌에 맞아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요셉은 조용히 관계를 청산하려고 합니다.

(v.20)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합니다.  성령의 잉태는 남자와 여자의 성적관계 아닌 방법입니다.  이러한 잉태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은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과 사람의 중간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질문을 마리아도 갖고 있었습니다.

(눅 1:30-35)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v.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v.32)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v.33)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v.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마리아는 당연한 질문응 합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자가 없어도 임신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v.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나실 자는 //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이 시대에는 인간의 정신과 물질이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우리는 특히 물질의 능력을 매일의 삶에서 경험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엎드리어 하나님 지혜를 간구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물질의 한계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기대하는 자들에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지혜의 필요를 절감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으 추구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 1:1-17 (양반 혈통과 상놈 혈통)

우리 한국 정서는 혈통을 중요시 합니다  성이 같으면 어느 출신이냐고 묻고 성이 같으면 이름의 항렬을 따집니다.  저는 한국분중에 족보가 나쁜 분을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자신들의 조상은 다 양반들입니다.  조선시대에 우리들이 호패 (신분증)을 갖고 다녔다면 우리 중에 약 7-80%는 천민이나 상농 출신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양반입니다.

혈통은 족보는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날 자신의 출신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 출신에 따라 자신의 가치가 정해집니다.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저는 개역개정의 번역에 불만을 갖습니다.  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정확한 번역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람과 다윗의 아들입니다.  인간 예수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위한 서신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우상숭배는 죽음과 같습니다.  그럼으로 그들이 사람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마태복음은 인간 예수를 하나님으로 증거합니다.

그 증거의 첫 번 방법이 족보입니다.  3절에서 6절을 보면 예수님의 족보는 우리의 족보와 비교 할 수 없습니다.  시아버지와 간통을 한 여자가 있고 이방여인 창녀가 있고, 이방 여자가 있고, 다윅과 간음한 여자도 있습니다.  또한 수많은 사악한 왕들이 나타납니다.  이 가운데 좋은 사람, 믿음의 사란, 선한 사람도 있지만 너무나 브끄러운 혈통입니다.

인간 예수의 혈통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러나 16절에 보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형제와 자매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어 성령으로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단은 예수님의 혈통을 가장 잘 이용합니다.  인간의 피와 다르기에 구원을 받는 자는 피가름을 해야한다고 합니다.  그 피가름은 우리의 피가 거룩한 피로 변한다는 사악한 논리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에수님이 철저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이렇게 강조하십니다.

(계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밧세바와 간음을 한 다윗의 자손 (Offspring)  솔로몬 다윗의 뿌리 (Root)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근거를 사람으로 나타냅니다.

(마1:6-7)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마1: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이러한 근거가 이해되어야 예수님이 하나님이 되십니다.  우리의 모두의 족보는 양반입니다.  그러나 그 족보로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왜 예수님의 혈통, 족보를 성경이 이렇게 더럽고 추하게, 사악하게 표현하는지 깊이 생각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말라기 4장 4-6 (마지막에 일어 날 일)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말4:4-6)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v.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v.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마지막에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고 그래도 하나님을 거부하면 하나님이 직접 오시겠다고 합니다.  마지막 절 후반 절에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엘리야는 세례 요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십니다.   그 결과 신약의 마지막 요한 계시록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입니다.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차이가 없습니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 오시기 전입니다.  하나님이 오시기 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저주로 땅을 심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 이 땅에는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이며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으로 갈라집니다.  그럼으로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본질이고 핵심입니다.  우리는 죽어서도 하나님을 만날 것이고, 살아서는 재림의 예수님을 만납니다.  우리들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절대로 피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결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속히 만나기를 원할 뿐입니다.

강림절에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기 바랍니다.

저 개인적으로 이 아침에 하나님에게 감사합니다.  지난 11년 동안 목회 시작하면서 마태복음에서 말라기까지 새벽마다 성경 말슴을 묵상하게 하셨습니다.  저에게는 영광이며,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다시, 마태복음을 시작합니다.

 

말라기 4장 2-3절 (악에 대한 응징)

오늘 본문은 악에 대한 응징입니다.  전통적으로 선과 악은 상대적 개념이였습니다.  빛과 어두움, 정의와 불의로 나누어지는 이원론적 개념이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원론적 개념은 현대에 (Post-modern)들어오면서 깨어집니다.

전통적 악의 개념이 변질됩니다.  지난 번에 말씀드린 한나 아렌트의 지적대로 악이 평범성입니다.  누구든지 악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을 학살한 전범들의 재판에서 전범들은 상급자가 살인을 명령을 하면 그 명령을 수행하는 책임 의식이 먼저 요구되지 그 살인에 대한 양심적 판단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자신의 책임을 변명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변명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악의 가능성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럼으로 이 시대의 문화와 가치관에서는 선과 악의 구분이 약화되고 있습니다.  악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상참작과 상황에 대한 인식이 높아집니다.  그 결과 인간의 인권이 강조됩니다.  인권을 강조하는 진보적 국가에서는 사형제도가 폐지 됩니다.  죄수의 인권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형무소의 생활도 세상과 별 차이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제는 영화나 소설에서 선과 악의 구별은 사라졌습니다.  선과 악의 경계가 뚜렷한 내용은 흥행이 되지 않습니다.  선한 사람도 악한 것으로 묘사합니다.  감옥의 소장, 경찰, 목회자, 악을 징계하는 사람들에게도 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에 대한 위선과 숨겨진 악을 악인이 보복하는 것이 더 좋은 일입니다.  그 결과 악에도 선이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물타기로 선과 악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렇게 나타납니다.

(말 4:2-3)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v.3)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은 악에 대한 철저한 징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선한 자에 대한 보상이 있습니다.  선과 악의 경계가 뚜렷합니다.

우리에게는 선과 악의 경계도 무너지기에 하나님만이 우리의 선과 악의 판단을 하십니다.

말라기 3장 16-4장 1절- 선에 대한 구원과 악에 대한 심판

오늘 본문은 세상의 마지막에는 선과 악에 대한 심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과 악에 대한 판별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나의 선과 악과 하나님의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의 잣대와 얼마나 일치하는가에 따라 심판과 구원으로 갈라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초점과 관심은 하나님과 우리의 선에 대한 일치가 됩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선과 일치를 이루어 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마지막이 불안합니다.

이러한 불안을 잘 설명한 것이 플라톤의 이원론입니다.  선과 악 사이에 중간 역활의 부재입니다.  우리는 그림자와 환상에 불과한 선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실제적 선을 경험하거나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이 이러한 중간 역활로 제시하는 것이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로고스 (말)과 지식 (그노스시)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말과 지식은 인간의 것입니다.  선에 대한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선에 한계가 있는 것을 인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하늘)에서 악 (땅)으로 오셨습니다.  말씀과 지식으로 오셨습니다.  지난 주 고린도 전서 1장 5절의 모든 언변 (로고스)과 모든 지식(그노시스)로 설명을 했습니다.  그리고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중보자의 역활을 하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철학과 기독교의 분리가 나타납니다.  철학은 이성과 논리의 학문이기에 인간이 얼마나 알고 깨달음을 얻는가에 따라 선에 가까울 수 있고 악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우리의 행위와 능력으로 선에 가깝고 악에 멀어지는 것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우리 자신이 선에 가까워지고 악에서 멀어집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인간의 이성이 아닌 하나님의 노력과 구원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고전 1장 8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마지막 심판의 날에 책망 할 것이 없는 자로 견고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타력 구원입니다.  자력이 아닙니다.  자력갱생이 아닙니다.  외부의 힘으로 우리의 선이 완성되어집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힘으로 사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말라기 3장 13-18 세상의 악과 하나님의 선하심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조롱합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서 악인이 잘 되고 번성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조롱합니다.  그럼으로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하고도 하나님 앞에서 잘못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다음과 같습니다.

(말 3:14-15)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v.15)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라

하나님은 절대로 선하지 아니하다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슬픈일 억울한 일이라고 합니다.  오히려 교만한 자가 악한 자가 더 잘살고 행복하며 불행도 당하지 아니하기에 하나님은 절대로 선하지 아니하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논리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1번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2번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3번

그러나 이 세상에 악이 있습니다.  4번

1-2-3번은 서로의 상관 관계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명됩니다.  그러나 4번의 등장으로 1-2-3번은 틀린 것이 됩니다.  그럼으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선하지 아니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과 우리의 선하심은 다릅니다.  우리의 선은 상대적입니다.  오늘의 선이 내일의 악이되고 나의 선이 너에게는 악이고 너의 선이 나에게는 악이 됩니다.  우리의 선의 중심은 우리가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선은 절대적 선입니다.  항상 선하십니다.  하나님의 선은 우리의 선과 같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럼으로 1-2-3번에서 4번으로 세상의 선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정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세상의 악은 우리에게는 악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선과 악으로 하나님의 선을 틀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에게 다시 이렇게 공격합니다.  그래도 세상에는 악이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악의 존재는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와 맞지 않다고 합니다.

그럼으로 1번으로 2-3번은 증명되지만 4번으로 1-2-3번은 틀린 것이 된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악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악은 절대적 악이 아닙니다.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악을 절대적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사악함이 절대적 악이 아닙니다.  어린아기가 백혈병에 걸려 죽는 것이 절대적 악이 아닙니다.  쓰나미로 수십만명이 죽어도 절대적 악이 아닙니다.  히틀러가 유대인 6백만을 죽여도 절대적 악은 아닙니다.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말합니다.  유대인 6백만을 죽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전범자들의 재판을 보면서 그녀는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살인자들이 우리와 똑같다는 악의 평범성을 말합니다.

인간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구조로 인하여 악인이 되거나 선인이 된다고 합니다.  절대적 악이 없다고 합니다.

언젠가는  어린 아기가 백혈병에 걸려 죽는 일이 없도록 의학은 발전 합니다.  쓰나미로 수십만명이 죽는 일을 막을 수 있는 경보 제도가 나타날 것입니다.  세상의 악도 상대적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에게 끝까지 저항 합니다.  악합니다.  그러기에 어거스틴은 인간의 악은 선의 결핍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에서 타락으로 악하게 나타나지만 선의 결핍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적 선으로 이러한 우리와 세상을 창조 이전으로 회복시킵니다.  그럼으로 예수님은 둘째 아담이 됩니다.  하나님은 절대 선이십니다.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4번, 세상의 악으로 절대 악이 아닌 것으로 하나님의 절대 선을 부정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은 1-2-3번으로 선하시며 4번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파괴 할 수 없습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이러한 변증에 관심이 있으면 화요 성경 공부에 참여 바랍니다.

 

 

말라기 3장 7-12 정의, 긍휼, 믿음의 십일조

본문은 말라기에 유명한 십일조에 관한 말씀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면 내가 너희들의 모든 것을 책임지신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일조를 철저하게 드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심하게 질책하셨습니다.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예수님이 십일조로 드릴 필요도 없는 박하, 회향 근채를 드리는 서기관 바리새인을 질책하십니다.  그들은 십일조 이상을 하나님에게 드렸지만 정의 긍휼, 믿음을 버렸기에 질책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십일조를 드리지 말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십일조는 반드시 드릴 것을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십일조는 정확하게 십의 2조, 20%입니다.  하나님에게 드리는 10%는 매년 드립니다.  그러나 레위인에게 10% 가난한 이방인 고아 과부를 구제의 10%는  격년제 입니다.  그럼으로 매년 20%가 됩니다.

돈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현실을 지탱하는 중요한 역활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돈으로 십일조를 하지만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가지라고 합니다.

첫째 돈의 지배를 받으면 정의가 없어집니다.  남의 돈이 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 나의 것입니다.  정의가 없는 돈은 상대방을 고통스럽게 하며 나의 돈으로 만듭니다.  그 돈으로 자신의 인격이 파괴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에게 십일조를 드리기전에 이 돈을 벌기 위하여 얼마나 정의롭게 살았는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돈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 정의롭게, 정직하게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신뢰를 받습니다.  돈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가장 영적인 사람은 돈의 지배를 극복하는 사람입니다.

둘째 돈의 지배를 받으면 긍휼이 없어집니다.  이것이 그 자신이 돈이 많고 적음에 상관 없습니다.  상대방의 돈을 부정한 방법으로 평가합니다.  그 돈으로 상대방의 인격과 삶의 내용을 평가합니다.  모든 판단의 잣대가 돈입니다.  돈의 지배를 받으면 돈을 악하게 여깁니다.  특히 돈의 정의를 외치는 자일 수록 돈에 집착합니다.  이중 인격이 됩니다.

돈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면 마음이 여유롭습니다.  타인과 별로 문제가 없습니다.  항상 열린 마음이 됩니다.  돈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람의 특징은 가정이 화목하고, 이웃과 잘 소통합니다.

셋째 돈의 지배를 받으면 믿음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상실됩니다.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하나님보다 돈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어지는 이유는 돈의 투자에 대한 효용성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의 돈은 투자 가치의 결과가 매우 중요합니다.  투자에 대한 결과가 없으면 상대방을 믿어주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돈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들이 하나님에게 드린 물질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하나님에게 드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합니다.  그 이유는 믿음으로 드리면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돈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들이 물질적 투자한 사람에게 인내하고 참아줍니다.  그를 믿어줍니다.  나의 기도와 물질에 대한 투자가 하나님의 시간과 하나님의 방법으로 귀하게 나타날 것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세로 십일조를 드리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말라기 3장 1-6 이 시대의 경고

본문의 해석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보낼 사자가 누구인가 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내용으로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본문의 내용과 일치합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예수님이 오시기전에 사자가 됩니다.  “내가 내 사자를 보낸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사자는 세례 요한입니다.  저는 이것을 지지합니다.  그 이유는 동일한 내용이 4장 5절과 6절에 반복됩니다.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고, 그리고 하나님, 예수님이 오신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 시대의 상황과 너무나 똑 같습니다.  저는 이것이 두렵습니다.

(말3: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사람을 속이는 점치는 자들이 나타납니다.  말끝마다,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조합니다.  점치는 자들입니다.  마술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부정한 관계로 간음하는 자들이 나타납니다.  타락한 인간관계입니다.  돈에 독이 올라서 정의를 거짓으로 만듭니다.  돈과 간음을 합니다.  인간 관계를 돈으로 환산합니다.

거짓 증거하는 목회자와 신자들이 나타납니다.  교회와 세상의 삶이 차이가 있습니다.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정당성을 위해서 거짓을 사용합니다.

품꾼의 임금을 착취합니다.  직장에서 직원들을 착취하는 자들이 나타납니다.  이민자와 약자를 핍박하는 자들이 나타납니다.  사회정의는 돈에 질식 당합니다.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자들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정치에서 확실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조국과 미국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본문이 하나님의 경고로 나타납니다.  인류의 최고의 발명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최고의 발명이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가를 보고 있습니다.  절망과 탄식이 나타납니다.  대통령이 바뀐다고, 정치가 바뀐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어두운 날들이 계속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기도합니다.

본문 2절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매우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말라기 2장 10-17 (우리들이 판단 할 수 없는 세상)

이 시대는 절대적 가치와 판단은 사라졌습니다.  상대적 가치와 판단이 존중을 받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절대적 가치로 윤리적이고, 수직적 관계가 있었지만, 현재는 상대적 가치가 이 시대의 정신입니다.  상황적이고, 윤리성보다 평등적 관계가 강조됩니다.

예를 들면 이혼입니다.  60년대만 해도 미국이나, 한국은 이혼은 절대적 가치의 영역이였습니다.  부끄럽고, 해서는 안 될 일이 됩니다.  기독교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을 파괴하는 일이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혼은 상대적으로 용납 되어지고 있습니다.  상황과 입장에 따르는 변화가 나타납니다.  만약에 1960년도 이혼의 개념을 오늘 2016냔에 사용한다면 오늘의 사회는 매우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고 성전이 새롭게 지어 진 후에 하나님이 유대인들의 특별한 기적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은 이방문화에 익숙해지면서 이방여인듫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결혼을 하려면 유대인 아내, 여자와 이혼을 해야합니다.  그러면 유대인의 가정은 파괴됩니다.  이방여인이 아내갸 되면서 우상이 들어오게 됩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이 이방여인들과 결혼을 금지하는 것은 이방여인들이 갖고 오는 우상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러한 이혼을 질타하십니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혼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버리고, 유대인 여자를 버리고, 우상의 선택입니다.  본문은 유대인 여자와 이혼하고 유대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배우자가 간음을 했다면 (마 5:31-32)에서 예수님도 이혼을 인정하십니다.  그러나 음행이 아닌 이유로 이혼하면 예수님은 간음이라고 정의하십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배우자와 자녀에 대한 가정 폭력, 육체적 학대, 인격적 살인, 심지어는 성적 학대와 폭력, 살인을 당 할 수도 있기에 이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경우 하나님의 말씀과 현실의 영역 사이에서 우리 판단에 장애를 갖게 됩니다.  선과 악의 판단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선과 악을 판단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상황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고 무겁게 자리잡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강조되어 간음의 경우에만 이혼이 허락되면, 배우자와 자녀에 대한 가정 폭력, 육체적 학대, 인격적 살인, 심지어는 성적 학대와 폭력, 살인을 참고 이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경우 우리는 이 세상에서 비극적 결말을 너무나 많이 봤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상황이 강조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약화됩니다.  물론 세상의 법은 사람의 상황이 강조되기에 이러한 경우 이혼을 허락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상황에서 어떠한 선택을 할 수 있습니까?  이러한 문제는 비록 이혼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영역에 해당합니다.

오늘 본문 17절에서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이혼하면서 하나님을 괴롭게 하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며 기쁜 일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상황을 이렇게 까지 합리화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이 당한 상황을 강조만해도 안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자비하게 우리의 상황을 죄악시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상황을 판단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합니다.  우리는 철저한 죄인입니다.  그러기에 말라기 마지막 절이 마음 깊이 다가옵니다.

(말4:5-6)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말 4: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