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 6장 하나님 중심, 사람 중심에서?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 먼저이고, 그리고 사람이 다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아모스는 우리에게 다른 순서를 보여줍니다.

성경의 많은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배신하는 우상숭배에 대한 질책을 합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북 이스라엘이 경제적 풍성함으로 나타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회적 불평등, 부정 부패, 정치 권력의 남용을 질타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것처럼, 부자들은, 권력자들은 상아궁에서 잠을 잡니다.  너무나 풍족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가난한자들은 권력자에게 땅을 빼앗기고, 자신의 자식을 노예로 팔아 부자들에게 빚을 갚아야 합니다.  그들의 고난과 고통은 무시 당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부자들의 제사와 번제, 소제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제사를 받으시는 전제 조건이 사회적, 정치적 정의 실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먼저 제사를 드리고, 정의를 실현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 중심, 예배가 우선입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들이 먼저 정의롭게, 거룩하게 살면, 예배를 받으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먼저이고, 그리고 나에 대한 예배라고 하십니다.

어느 것을 우리들이 선택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거룩하게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거룩하게 변화되어 간다고 합니다.  성화, Sanctification를 주장합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하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100% 맞습니다.  그러면 실질적으로 확인해봐야 합니다.

우리들이 얼마나 거룩해졌습니까?  정말로 달라졌습니까?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욕심을 부리지 않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미운 사람 용서하고 있습니까?  나쁜 습관을 버렸습니까?  주일 날 교회 오는 것으로 거룩하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스스로 질문하고 자신에게 답을 해야합니다.

만약에 이러한 변화가 없다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거룩하게 변화한다고 주장만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스스로 변명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신앙을 추상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경향이 매우 강합니다.

오늘 날의 교회는 이것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이라고 가르칩니다.  저도 하나님 중심을 절대로 반대하지 않습니다.

요셉은 종이지만, 주인 보디발을 감동 시켰습니다.  감옥에서는 간수와 다른 죄수들을 감동 시켯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감동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죽이는 로마의 백부장을 감동시키셨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중심이 되려면, 사람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람을 감동시킬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은혜와 복이되는 예배가 됩니다.

 

 

아모스 5장- 우리의 정의는 어디에?

오늘 본문에는 우리들이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v.7)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v.11) 너희가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v.14)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v.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

(v.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우리는 직장에서 주어진 일을 책임있게 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그러나 주어진 일이 부당 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은 정의가 아니고 불의한 것입니다.  그러나 직장에서는 정의입니다.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이 정의입니까?  우리들이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그러나 주어진 상황은 정의롭지 않습니다.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정의로운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자식들은 정의롭지 아니하다고 합니다.  부모의 정의가 자식에게는 불의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갈등을 세대 차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정의로운 대답입니까?  진정한 정의는 부모와 자식에게 동시적으로 정의로워야 합니다.  직장에서 너와 네가 정의로워야 합니다.  우리 모두 정의로워야 합니다.  이러한 정의가 가능합니까?

또한 우리의 환경이 정의롭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환경과 재능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Trumph처럼 아버지가 백만불을 용돈 주듯이 준 돈으로 성공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을 일해도 자신의 통장에 몇 백불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정의롭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상대방에게 주어진 것과 나에게 주어진 환경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차이를 좁히는 것이 사회적 윤리적 정의입니다.  약자를 강자가 돌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제 언급한 것처럼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이지, 결코 타인의 환경을 정의롭게 수용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자체가, 인간자체가 정의로울 수 있습니까?  내 자신이 정의롭습니까?  내가 내 자신을 정의롭게 평가 할 수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 거울을 보면 답이 나옵니다.  우리는 결코 정의롭지 않습니다.

그럼으로 세상의 철학은 이러한 정의를 다양하게 추구합니다.  공리주의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정의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철학의 약점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미국 자본주의에서 철저하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결코 다수가 행복하지 않습니다.  최소는 만족 할 수 있어도 다수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정의가 아닙니다.

결론으로 이 세상의 정의 실현은 불가능합니다.  철학적으로 자신이 희생하고 타인을 구하는 것을 정의로 보지 않습니다.  양자가 동시적으로 이익을 보는 것이 이 세상의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정의는 양면성을 갖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의 용서입니다.  우리에게 정의가 주어집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정의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정의로워집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죽음은 불의한 것입니까?  예수님만 희생을 당하셨기에 불의 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 영광을 스스로 버리시고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정의는 강제적이 아닙니다.  강제성이 없는 희생입니다.  정의를 위한 자신의 선택입니다.  이것을 불의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우리의 실력과 노력이 아닌 예수님으로 주어진 정의입니다.  우리에게는 정의가 주어졌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정의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정의를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아모스 4장 하나님의 정의와 우리의 정의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다음과 같이 제사를 드립니다.

(v.5)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에게 열정적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그 제사에 대해서 하나님이 다음과 같이 반응하십니다.

(v.2)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이를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 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도 그리하리라.

하나님이 북 이스라엘을 앗수르의 포로로 끌고 가시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가난한 자를 압제하기 때문입니다.  힘있는 자가 힘 없는 자를 지;ㅅ누르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이 자연 재해로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냅니다.  그 내용이 6절에서 10절입니다.  6-7절을 예로 듭니다.

  (v.6-7) 또 내가 너희 모든 성읍에서 너희 이를 깨끗하게 하며 너희의 각 처소에서 양식이 떨어지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v.7) 또 추수하기 석 달 전에 내가 너희에게 비를 멈추게 하여 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시대는 강자와 약자로 나누어집니다.  지식적 강자와 약자, 경제적 강자와 약자, 권력의 강자와 약자들이 있습니다.  인간은 이러한 힘의 강약의 차이로 불평등이 존재합니다.  강자는 약자를 착취하고, 부당하게 대우합니다.  약자는 이러한 강자와 맞서 싸워 자신의 권리와 힘의 회복을 추구해왔습니다.

칼 마르크스는 인류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라고 합니다.  현재 미국도 한국도 계급투쟁이 일어나고 잇습니다.  한국의 금수저와 흙수저의 논란과 미국의 소수 1% 가 미국 재산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현상입니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시작한 셰계 경제의 세계화는 이러한 경제적 양국이 극단적으로 벌어지게 했습니다.  더욱이 지식이 강자와 약자는 이 시대의 경제적 약자와 강자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시대 우리 자녀들이 대학을 졸업해서 30년 전과 같은 위치를 결코 회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특정한 지식만이 경제적 사회적 위치를 보장 할 것입니다.

더욱이 지식이 강자와 약자는 이 시대의 경제적 약자와 강자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시대 우리 자녀들이 대학을 졸업해서 30년 전과 같은 위치를 결코 회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특정한 지식만이 경제적 사회적 위치를 보장 할 것입니다.  이러한 지식은 소수만이 공유하고 나눕니다.  Google, Internet, 항공, 우주 산업, 고도의 지식의 산업을 제외한 나머지는 그 지식의 노동자로 전락합니다.  세상에서 출세 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영화 Hunger Game이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공평한 계급에서 계급과 경제적 투쟁은 자연 발생적입니다.  이것이 작금의 흑백 갈등입니다.  특히 트럼프의 등장으로 이러한 갈등은 노골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가는 미국사회가 한국사회가 넘어야 할 산이지만, 근본적 해결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사회적 윤리성입니다.  강자가 약자에게 얼마나 양보하는가입니다.  성경도 이러한 사회적 경제적 윤리성을 강조합니다.  과부와 나그네와 고아에 대한 관심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요구합니다.  또한 바울은 이러한 약자들에게 상전에 대한 힘 있는 자들에 대한 순종도 요구하고 있습니다.  칼을 가진 자- 힘을 가진 자들에 대한 순종입니다.  물론 이러한 내용은 신학적 논쟁의 여지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착각하는 것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이 크기에 그들을 구원과 직결시키는 시도가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의  천국과 부자의 지옥을 예로 듭니다.  물론 가난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인정하지만, 그듫이 가난하기에, 착취 당하기에, 사회적 고난을 당하기에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은 너무나 작의적 해석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방적 부르심입니다.  우리의 자격과 조건을 부르시지 않습니다.   흙수저이기에 구원을 받고 금수저이기에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것은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약한자의 편이십니다.  그러나 강하고 힘있는 자의 편도 되십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구원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이렇게 반박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약자, 흙수저, 가난한 자로, 태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선택이고, 어떤 사람은 강자와 금수저로 태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선택이냐고 합니다.  이러한 성경의 해석은 아주 잘못된것입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선택을 강조하는 것은 구원이 하나님이 절대은총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일반적 은총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표현대로 유대인의 하나님, 이방인의 하나님, 강자와 약자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신분, 경제, 사상, 피부의 색갈에 관계 없이 부르십니다.

이것이 공의,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아모스는 이러한 하나님의 정의, 구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v.12-13)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 (v.13) 보라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이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니라

우리는 사회적 경제적 정의를 실현해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정의, 공의는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 부르심입니다.  우리들이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구원에서 우리는 우리 삶의 현장에서 윤리적이고, 도덕적 정의를 추구해야합니다.

 

 

아모스 3장 -당하는자가 더 정의로워야 한다

정의는 국가, 사회, 공동체가 올바른 길을 가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정의로운 국가와 사회가 되어, 올바른 길을 가야만 공동체는 존재 합니다.  만약에 부정한 공동체라면 병든 것과 같아서 쉽게 무너지고, 분열이 생깁니다.  이러한 정의를 추구하는 중요한 수단은 법적 장치와 그 법적 행동을 수행하는 정치와 군대, 경찰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정의가 실현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현재 Baton Rouge에 발생한 총격 사건은 백인 경찰과 흑인 사회의 충돌입니다.  이 사건에서 법적으로 누가 정의롭고, 불의한가를 판단 받을 것입니다.  이러한 법적, 정의로운  판단에 경찰과 흑인 사회의 수용은 매우 다르게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을 예상한 일부 흑인들은 백인 경찰을 총으로 조준 암살하기도 했습니다.

경찰은 경찰 대로 정의로운 이유를 개진하고, 흑인 사회는 흑인 사회대로 정의를 주장 할 것입니다.  양쪽을 만족 시킬 수 있는 법적 정의 실현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미국 사회의 소수민족에 대한 불의는 분명하게 존재합니다.  저도 몇 차례의 Town 공청회 과정을 통해서 일방적으로 당한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불의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지만, 저는 희망을 갖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결코 정의롭지 않습니다.   우리도, 소수민족도, 결코 정의로운 집단이 아닙니다.  제가 양비론적으로 양쪽을 비난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자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새로운 대안을 찾아도, 우리는 인간은 불의합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결코, 정의를 추구 할 수 없으며, 정의롭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정의로운 국가와 사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정의롭지 못하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암 3:1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서리에나 걸상의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도 건져냄을 입으리라.

사자가 양을 잡아 먹지만, 일부는 남겨둡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 하실 때에 일부는 남겨두시겠다고 합니다.  그들은 호화로운 침대에와 의자에서 이방인들과 종교적 간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지만, 사자가 먹고 남기는 귀와 다리처럼 남겨 두시겠다고 합니다.  남은 귀와 다리는 앗수르의 포로로 끌려가는 고난을 당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사자와 같이 철저하게 죄에 대해서 질책하십니다.  양을 잡아 먹는 것 같이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일부는 남겨 두십니다.  남겨 둔자들이 앗수르의 포로이고, 바벨론의 포로입니다.

이렇게, 양의 귀와 다리처럼 남은 자들은 노예로 심한 고난을 당합니다.  이러한 고난에서 그들은 신앙을 회복합니다.  앗수르의 고난을 당한 포로들은 사마리아 교단을 세웁니다.  바벨론의 포로들은 유대 교단을 세웁니다.

오늘 날의 유대교의 성경과 신앙은 바벨론 포로 후손들이 세운 것입니다.  사자가 먹고 남은 귀와 다리들입니다.  고난 당한자들이 세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하나님은 고난 당 할 자를 남겨두시고, 고난을 통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다가올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 (Typology)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전통에서 예수님이 오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류의 죄에 대한 정의를 세우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로 남겨 두십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정의가 새롭게 구현되는 방법입니다.

그럼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정의 구현은 고난에 대한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가십니다.  바울도 스스로 고난의 길을 갑니다.  바울이 (고후 11:4) 사십에 하나를 감한 매를 맞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이기에 이러한 태장을 맞지 않아도 됩니다.  고후 11장에 여러번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바울이 얼마든지 고난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의도적으로 선택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미국 사회의 법적 정의는 어느 당사자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정의롭지  못할 것이고, 갈등과 분열은 증폭 됩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모든 국가와 사회에서 정의가 실현되는 전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는 당하는 자의 의도적 고난에 참여입니다.  당하는 자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 자들이 정의로운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형을 보여준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이러한 십자가를 본 받은 비폭력의 간디와 마틴 루터 킹 목사입니다.

그들은 폭력으로 정의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상대방에게 정의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자신들에게 정의를 요구했습니다.  그러기에 간디는 종교가 고난을 자초하지 아니하면, 종교가 아니라고 합니다.  스스로의 희생이 없는 종교는 결코 사회적 정의를 세우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나의 고난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에게 고난을 해결해달라고 합니까?  아니면,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정의를 찾으려고 노력하겠습니까?

Baton Rouge의 총격 사건을 하나님의 정의에서 바라보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아모스 2장- 정의로운 백성이 되는 길

아모스는 공의의 선지자라고 합니다.  2장은 공의를 세우러면 다음과 같은 법적 과정에 필요합니다.

잘못한 자에 대한 죄의 질책이 나옵니다.  이것은 검사의 논고와 같습니다.  그 죄악에 대한 징벌이 나타나야 합니다.   검사의 논고를 듣고, 재판장이 판단을 합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벌을 줍니다.   그래야 정의, 공의가 세워집니다.  이것은 세상의 공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다릅니다.  아모스에서 흘러가는 중요한 흐름은 하나님은 공의를 세우시지만, 벌을 주시지만, 심판을 하시지만, 그 백성을 회복시킵니다.  아모스 9장 11-15에 이렇게 나타납니다.

  (v.11-15)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v.12)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v.1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그 때에 파종하는 자가 곡식 추수하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 (v.14)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이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 그들이 황폐한 성읍을 건축하여 거주하며 포도원들을 가꾸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v.15)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으리니 그들이 내가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의 정의는 벌주는 것으로 끝이 나지 않습니다.  그 벌에서 벗어나서 우리들이 영화롭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가 세워질 때까지,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고, 바다가 없어 질 때까지, 우리는 불의와 죄악에 머물게 됩니다.

그럼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삶의 태도는 우리에게 주어질 하나닝의 정의, 우리의 영화를 위하여, 오늘을 정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정의롭게 이 세상의 불의와 좌악과 싸워야 합니다.

과거 대한민국에 70-80년에 독재정권 시절에 교회는 아모스서로 국가와 사회정의를 설교했습니다.  악의 제도를 무너뜨리고 선의 정치적 사회적 제도를 세우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는 것을 정의라고 착각합니다.

참 된 정의는 오늘의 현실에서 신자로서 자신의 자리에서 정의를 세우는 것입니다.  7-80년대의 정의가 참 된 정의였다면 2016년도 정의로운 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2016년에는 세상과 신자와 교회에게 정의가 사라졌습니다.  7-80년의 정의는 부분적 정의입니다.  과거에 수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정치적 정의를 세웠다고 하지만, 이 시대, 우리의 사회는 결코 정의롭지 않습니다.  불의외 갈등과 불만과 원망이 넘치는 불의한 사회와 정치입니다.

참 된 정의는 한 인간으로, 사람으로, 나에게 주어진 현실에서 정의입니다.  교회의 목사와 신부들은 사회적 정치적 정의로 사람들을 흥분시켜서는 안 됩니다.  정의의 선지자 올바른 선지자는 한 인간에 대한 철저한 죄의 고발입니다.  참된 정의는 개인에서 시작합니다.

미국의 인종차별의 불의을 무너뜨린 Martin Luther King 목사의 정의를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그는 누구에게 정의를 원했습니까?  인도의 간디는 누구에게 정의를 원했습니까?  이들의 공통점은 흑인들에게, 인도 사람에게 호소했습니다.  자신들을 죽이고 억압하는 백인들이 아닙니다,  영국인들이 아닙니다.  이것이 비폭력입니다.  정의는 불의한 자에게 정의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정의는 불이익을 당하고, 착취를 당하는 자들이 정의로울 때에 진정한 정의가 세워집니다.  사회와 정치와 국가가 변합니다.

미국의 Trumph도Hillary도,Obama도 이 정신을 상실했습니다.  대한민국의 교회와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로 대한민국이 남북통일을 원하다면, 북한의 김정은을 무너뜨리기 보다, 우리, 신자 자신이 정의로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순간을 기다리실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영화로운 국민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아모스 1장 -길을 알지 못하는 우리들

아모스는 남쪽 유대 출신이지만, 그는 북 이스라엘에 대해서 예언을 했습니다.  그는 목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직업을 가졌는데, 뽕나무를 키웠다고 합니다.  많은 학자들은 그가 가난해서 뽕나무를 키웠다고 하지만, 어떤 학자는 그가 양을 목축하는 사업과 뽕나무를 키우는 농부로 매우 부유한 예언자로 이해합니다.  당시의 목자는 무식하고, 사회적으로 배척을 당하는 사람들의 직업이였습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이러한 목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외국의 방문이 많았습니다.  1장에서  보여주는 것 같이 그는 주변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합니다.  그는 외국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는 양털 장수로 외국 여행이 많았습니다.  그는 나일강의 홍수를 알고 있었습니다.  주변국가들의 정치와 사회적 상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모스는 경계를 벗어나는 선지자입니다.  유대를 벗어나 이스라엘을 예언했고, 자신이 살던 지역을 떠나 외국을 자주 다닌 것 같습니다.   또한 직업도 목자와 뽕나무를 키우는 농사꾼입니다.  직업의 경계도 무너뜨린 사람입니다.  우리도 아모스와 같이 경계을 넘나들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이미 경계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인터넷, 교통, 통신의 발달로 경계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학문도, 사회도, 경제도, 경계가 무너지면서 통합화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세계화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특정한 경계안에 있던 각자의 정체성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건축도, 음악도, 예술도 현대라는 이름으로 정체성이 매우 모호합니다.  이것은 정신의 파괴이며, 전통문화와 가치와 사회의 파괴로 나타납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시대, Post-modern은 경계의 파괴입니다.  선과 악의 정체성이 모호해졋습니다.  이제는 권성징악의 영화나 소설이 없습니다.  악도 악한 정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선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부분적 입장이지 총체적 입장에서는 선도 악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영역은 철저하게 파괴 시켰습니다.

이렇게 정치, 경제, 사회, 철학의 모든 분야의 경계가 파괴되면서, 인류는 새로운 방향으로 편성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류는 새로운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계는 파괴 시켰지만, 파괴 이후에 대한 대안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는 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합니다.

아모스를 공의와 정의의 선지라고 합니다.  그는 경계가 파괴된 시대에 있는 우리에게 정의를 세우라고 경고합니다.  공의와 정의는 인간과 신의 경계를 초월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귀입니다.

우리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신적 영역과 인간의 영역의 경계를 십자가로 넘어 오시고, 넘어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신의 영역을 지키시고, 또한 인간의 영역을 철저하게 지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양쪽의 양쪽의 경계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갖고 계십니다.  인류의 미래에 대한 해답은 그리스도가 갖고 계십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만이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을 분명하게 알려주십니다.

우리들이 좀 더 깊이 십자가를 묵상하여, 혼란의 이 시대에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요엘서 3장 -우리들의 정치적 타락

요엘서는 시오니즘의 교과서의 역활을 합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그동안 유대인을 괴롭혔던 민족들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징벌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러한 구절이 있습니다.

(v.9-10) 너희는 모든 민족에게 이렇게 널리 선포할지어다 너희는 전쟁을 준비하고 용사를 격려하고 병사로 다 가까이 나아와서 올라오게 할지어다  (v.10) 너희는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지어다 낫을 쳐서 창을 만들지어다 약한 자도 이르기를 나는 강하다 할지어다.

보습은 삽과 같은 것으로 밭은 가는 쟁기와 같은 것입니다.  보습으로 칼을 만들라고 합니다.  낫으로 창을 만들라고 합니다.  전쟁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적들을 징계하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요엘서 3장 9-10절은 싸움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괴롭혀 왔던 유대인들이 적들에 대한 복수입니다.  적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2장 4절은 반대의 말씀입니다.

(사 2:4)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전쟁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평화를 준비하라고 합니다.  메시아의 오심으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의미합니다.  어느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우리 교회 Stain glass 중의 2개중의 하나가 요엘서와 이사야서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Stain glass의 그림으로 보면 망치가 있습니다.  그 망치로 칼과 창을 만드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망치로 보습과 낫을 만드는지 알 수 없습니다.  망치는 분명히 보여지지만 그것으로 무엇을 만드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정치적 해석이고, 예술의 정치화입니다.

저는 Zionism, 예루살렘의 회복을 열망하는 유대인에게 요엘서의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유대인 6백만이 죽음을 당한 2차 세계 대전의 Holocaust을 기억하는 그들로 자신들에게 아픔과 고통을 준 자들에 대한 심판을 기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사야서의 의미도 갖고 있다고 봅니다.  메시야의 오심을 평화를 소망하는 그들의 기대 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Stain glass 옆에 이사야 2장 4절을 설명으로 붙여 놨습니다.  제목이 Shalom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평화입니다.

저는 이러한 설명을 하면서 마음이 매우 착찹합니다.  이번 미국 대선을 보면서, 이 시대의 교회와 신자들은 정치적으로 편향되고 사회 정의 문제로 교회가 구별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에 속해있기에 정치와 사회 문제를 무시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정치적 판단과 행동을 한다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가 세상의 정치에 관여 했을 때에 교회는 타락했습니다.  정치적 힘으로 세상을 변화 시킨다는 것은 매우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특정한 정치인을 지지해서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겠다는 것은 사악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미 미국에서 Bush 정권에서, 한국의 김영삼, 이명박 정권에서 철저하게 경험을 했습니다.  그들은 신자이고, 장로이지만, 기독교적 신념을 갖고 있지만, 정치인입니다.  정치인은 자신의 정치적 이익에 충실하고 자신의 정권을 지키는 것이 그들의 목적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얻어보겠다고 선출을 했지만, 그들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대변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작태와 치부가 이번 대선에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번 미국 대통령이 누가 되더라도, 대통령이 되면, 그들은 자신이 속한 정당의 이익과 정치적 노선을 유지 할 것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세상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낼 것이라고 생각하면, 미국의 대통령은 Messiah가 됩니다.  예수의 복음은 없어지고, 우상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망치로 칼과 창을 만듭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대통령을 이용해서 우리를 반대하는 적들은 죽이는 무서운 짓을 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중세의 역사가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교회가 세상의 권력을 소유 할 때에, 세속의 역사가들은 Black age- 암흑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치욕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고 살아갑니다.  심지어는 종교 개혁가들도 신앙의 노선과 색깔이 다를 때에 정치적 방법으로 수없는 생명을 죽였습니다.

우리는 망치로 보습과 낫을 만들어야 합니다.  소극적인 것 같지만, 나의 골방에서 나의 생업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은 성경을 가장 많이 봤던 대통령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 되기보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편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정치적으로 우리 편이 되는 대통령이 선출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편이 되어 살아야 합니다.

 

요엘서 2장- 한계를 벗어날 때에,

우리에게는 주어진 공간과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지구라는 공간과 주어진 한계가 있습니다.  지구라는 공간과 한계를 벗어나면 사람은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을 한계 상황이라고 합니다.  일반인들에게 주어진 공간과 한계는 학교, 가정, 직장, 사회등 자신이 속한 공동체입니다.  이것을 벗어나면 죽음의 상황이 찾아옵니다.

공동체 // Community // Common ground라는 단어가 의미하듯이 사람은 한계 상황을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또한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는 것을 배반자로 죄악시합니다.  주어진 상황과 공간을 벗어나는 것은 공동체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기에 죄악을 의미합니다.  모두가 정한 규례와 법칙을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주어진 공간과 한계에서 질서를 유지하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서 법과 질서가 필요하게 됩니다.

그러나 지구를 다시 작게 쪼개어 본다면 나라와 국가마다, 문화, 정치, 경제 사회의 다양한 질서로 자신의 공동체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공동체에 다른 공동체가 개입하면 적의 침입으로 간주하고 전쟁을 하게 됩니다.  다른 공동체와 경쟁도 합니다.   이것이 오늘 날의 국가와 사회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공동체를 더 작게 세분화 되면, 같은 국가 안에서도, 지역주의 사회적 빈부의 갈등, 가정의 갈등로 나타납니다.  인간은 이렇게 주어진 공간과 한계에서 갈등과 미움과 전쟁으로 살아갑니다.  죄악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오늘 날의 정치와 경제와 사회를 이러한 개념으로 보면, 테러와 전쟁은 자신의 공동체를 지키려는 인간의 최악의 수단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공간과 한계를 성경적으로 이렇게 해석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만드시고, 한계, 공간을 주십니다.  에덴동산이라는 한계와 공간입니다.  그리고 선악과와 생명나무로 인간의 규칙과 질서를 정하십니다.  그러나 뱀 // 사탄의 등장으로 인간의 공간과 한계는 죄악으로 철저하게 파괴됩니다.  뱀의 유혹도 있지만 인간의 대표자인 아담과 이브의 죄성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야망과 욕망입니다.

우리는 매우 이중적입니다.  주어진 공간과 한계를 지키려고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공간과 한계를 벗어나려는 욕망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표적 증거가 여행입니다.  여행은 나에게 주어진 공간과 한계의 탈피입니다.  책임과 의무를 벗어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러기에 여행은 즐거운 것입니다.  다른 공동체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요엘서를 잘 보시면 이러한 내용이 잘 나타납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주어진 공동체 에덴 동산이 파괴됩니다.  엄청난 무질서가 찾아옵니다.  죄악의 결과로 다른 Community // 적들이 침입을 합니다.  유대인 공동체가 파괴됩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됩니다.  앗수르의 포로가 됩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한계와 공간, 이스라엘을 벗어나는 경험을 합니다.

이러한 한계를 벗어 나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개입을 하십니다.  죄악으로 무질서해진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새로운 질서와 구원을 베푸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이 임합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v.28-32)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v.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v.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v.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v.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무질서 // Chaos는 // 질서로 // Cosmos로 가는 여정입니다.  창세기의 창조도 혼돈에서 질서로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십니다.  Chaos에서 Cosmos가 됩니다.  무질서가 계속된다면 인류를 멸망합니다.  우리의 국가와 사회는 파괴됩니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는 사람의 실력과 능력으로 해결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개입이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역사가 우리에게 나타나야만 합니다.

이것이 신의 존재 증명,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증명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는 베드로가 사도행전에서 인용한 요엘서의 본문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영, 성령,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철학에서는 한계 상황을 벗어나 인간은 신의 초월적 개입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가장 잘 정리한 학자가 야스퍼스입니다.  이것은 지난 번에 간단하게 언급을 했습니다.

예배와 기도는 우리의 주어진 한계와 공간을 벗어나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Liminal 또는 Liminality  라고 합니다.  사람의 경계와 하나님의 경계 중간에 있는 것이 우리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복입니다.  이 자리는 아무나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설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들이 하나님에게 드리는 예배와 기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경계를 벗어나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순간과 장소가 됩니다.

그러나, 오늘 날 교회의 타락과 죄악은, 하나님의 찾아오심으로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안정과 번영을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합니다.  (제가 지금 축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이 단어 자체도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단어입니다.  무질서하게 사용하길래 이해하시라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  우리들이 인간의 경계와 하나님의 경계에서 하나님의 찾아오심으로 성경이 강조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 참고 바랍니다.)

글이 너무나 길어져 오늘 이것으로 줄입니다.  좋은 하루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요엘서 1장 -개신교의 시오니즘

요엘서는 베드로의 사도 행전의 설교의 본문으로 등장합니다.  요엘서 2장을 베드로가 인용합니다.  요엘서는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매력적인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다른 예언서와 달리 유대의 죄악에 대한 철저한 징계가 나타나지만, 유대인의 회복으로 말씀이 끝을 맺습니다.

다른 예언서는 유대인의 죄악에 대한 심판으로 하나님의 분노가 나타나고, 치유와 용서가 계속 반복됩니다.  그러나 요엘는 다릅니다.  요엘서는 1장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분노가 나타나지만, 2-3장에서 하나님의 신, 성령의 임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를 핍박하던 나라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유대는 영원할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요엘서는 유대인들에게 Zionism의 교과서입니다.  곳곳에 나타나는 이른비, 새포도주 등은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오심이지만, 유대인들과 이야기해보면 요엘서는 예루살렘의 성전을 회복시켜줄 Messiah 대망입니다.  시오니즘의 교과서입니다.

하나의 성경이지만 우리와 엄청난 시각의 차이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시오니즘을 일부 한국 개신교가 차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예루살렘 회복입니다.  외형적으로 이슬람, 유대인 전도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성전회복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오실 종말까지 연결시킵니다.  성경을 작위적으로 해석합니다.

아주 보수적인 유대인들도, 예루살렘 회복에 대해서는 아주 조심합니다.  솔로몬이 세운 예루살렘의 성전 자리에는 현재 이슬람의 황금 사원의 자리로 추정합니다.  유대인들은 그곳에 마음대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실제로 들어가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시간이 제한되어 있고, 만약에 유대인으로 들어가겠다고 할 때에, 사원경찰이 제지하면 들어가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이 마음대로 기도하고, 예배하는 곳은 황금 사원 아래에 위치한 통곡의 벽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Messiah가 오면 그 자리에 성전이 새롭게 지어질 것을 기대합니다.  또한 유대인들도 보수, 개혁 보수, 진보, 세속화된 유대인에 따라 성전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의 메시아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이고, 우리의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죽으시는 가장 큰 이유의 하나는 성전 모독죄입니다.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 후에 세우시겠다는 말씀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이 성전을 거론했는가를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구원 받았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증거로, 에베소서는 우리들이 하나님이 거하실만한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중입니다.  (It is being built).  수동태 진행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성전으로 지어가고 계십니다.   우리들이 짓는 것이 성전이 아닙니다.  우리의 실력으로 성전을 회복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들이 성전을 짓겠다면 우리는 유대교를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일부 개신교는 선교와 전도의 이름으로 예루살렘 땅을 회복하자고 합니다.  성전을 회복하자고 합니다.  전도와 선교는 거룩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들이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명령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교회를 부인하는 방향으로 사용하는 것은 사탄의 사악한 짓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한 이사야, 다니엘, 에스겔을 통해서 하나님은 유대의 하나님, 예루살렘의 하나님에서 이 세상의 하나님, 우주만물의 창조 하나님으로 계시되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기에 계시의 하나님입니다.  그러기에 2016년 7월에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 내용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성전의 한 구석으로 몰아넣는 사악한 짓이 얼마나 하나님 말씀, 성경에 위반되고 있는 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호세아 14장-한계 상황에서 만나는 하나님

오늘로 호세아서가 끝이 납니다.  호세아서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결혼으로 비유해서 설명합니다.  우리와 고멜의 같은 입장이기에 14장을 해석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예수님과 결혼했지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죄악과 결혼을 했습니다.  우리의 결혼은 매우 부정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정결한 신부로 여기지만 우리는 결코 정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죄의 세상에 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부정적 관계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존재합니다.  이것이 14장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철학자 야스퍼스는 한계상황에서 초월자, 신적 존재를 대면한다고 합니다.  그는 우리들이 어떠한 극한 상황, 인간의 정신과 육체의 한계 영역, 한계 상황에서 초월적 존재를 경험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한 육체적, 정신적 죄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악을 정당화시키자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 부부사이에서 아내나 남편이 제 3자와 부정한 관계를 가졌다면 그것을 용서하고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또한 이러한 관계가 발각이 되었다면 즉시로 회개해서 원래의 관계로 원상복구 되도록 노력해야합니다.

고멜에게 이러한 노력이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끓임없이 죄악과 간음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완전히 파탄이 난것입니다.  하나님이 이혼을 해주시지 않은 것이지, 이혼과 똑같은 상황입니다.  이러한 관계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v.4-8)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그에게서 떠났음이니라 (v.5)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v.6)그의 가지는 퍼지며 그의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의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v.7)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그들은 곡식 같이 풍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 (v.8)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그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하나님은 우리를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랑하십니다.  우리들이 죄악과 간음을 하면, 하나님은 분노하고, 화를 내시고, 징계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죄악과 간음을 계속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끓임없이 사랑하십니다.  우리들이 죄악과 결혼을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계속 죄를 지어도 좋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악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들이 이 상황을 극복 할 수 있는 실력과 인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죄악을 먹고 마시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결혼 관계를 유지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존이며, 우리의 한계입니다.  바울의 고백대로 누가 나를 이 사망에서 건져 낼 수 있는가 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존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깊은 절망에서, 우리는 신의 존재, 하나님의 절대성이 요구되어집니다.  야스퍼스는 이것을 철학적으로 초월자, 신의 암호라고 합니다.  신의 존재가 필요해지는 순간입니다.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야스퍼스는 우리들이 초월자, 신적 암호를 풀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의 존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신,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찾아오십니다.  우리에게는 철학적 암호가 아니라 뚜렸한 십자가로 찾아왔습니다.

다만 제가 애스퍼스를 인용하는 것은 한계 상황에서 초월적 존재를 만난다믄 그의 철학에 동감하기 때문입니다.  철학적으로도 이렇게 고민하면 신을 만납니다.  우리의 정신과 육체가 세상과 결혼한 부정한 관계이지만, 오늘도 우리의 죄악으로 절망하며, 한계를 느낄 때에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확인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