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13장- 3개의 황금 구슬

로마인의 지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로마 황제에게 무남독녀 외동 딸이 있었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딸이였고, 동시에 로마 제국을 물려 받을 상속녀였습니다.  황제는 그녀와 결혼하는 자에게 로마 제국의 모든 것을 물려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녀와 달리기를 해서 이겨야 합니다.  황제의 딸은 아름답지만, 달리기를 이길 사람이 없을 정도로 빠르게 뛰었습니다.  그런데 달리기를 하다가 딸에게 지는 자는 죽음을 당해야 했습니다.

수많은 남자들이 공주와 달리기하지만, 지고 맙니다.  그리고 죽음을 당합니다.

그런데 한 기사가 공주와 달리기를 하겠다고 합니다.  그의 친구와 부모들이 반대지만, 그는 이길 수 있다고 합니다.  기사는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3 개의 황금 구슬을 준비합니다.  3개의 황금 구슬을 갖고 경주를 시작합니다.

경주가 시작됩니다.  공주는 기사와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릅니다.  기사는 자신을 앞질러 가는 공주에게, 첫 번 황금 구슬을 그녀 앞으로 던집니다.  공주는 황금 구슬을 짚으려고 경기장 바같으로 나갑니다.  그때에 기사가 앞질러 갑니다.  그러나 공주는 구슬을 짚어들고, 다시 빠르게 앞질러 갑니다.  중간 정도에 왔을 때에, 또 하나의 구슬을 공주에게 던집니다.  그것을 짚으려고 공주는 허리를 숙이고 뛰지를 못합니다.  기사가 앞지릅니다.  그러나 공주가 다시 뺘르게 앞질러 갑니다.  이제 결승점이 보입니다.  기사는 마지막 구슬을 던집니다.  공주는 이것을 줏으려고 또 고개를 숙이고 구슬을 쫓아갑니다.  그때에 기사가 결승점에 도달합니다.  결국 기사는 황제가 되고 공주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로마인들은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공주에게 구슬은 아주 사소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에 비교하면 아주 작은 것입니다.  공주는 이 작은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았습니다.  3개의 구슬이 우상이 됩니다.  첫 번 째 구슬은 청년기의 육체적 유혹입니다.  두 번째 구슬은 중년기에 명예와 자만의 구슬입니다.  세번째 구슬은 탐욕의 구슬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끓임 없이 구슬이 굴러옵니다.  우리는 이 구슬을 줏으려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경기장을 벗어납니다.  푯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달려하지만, 다른 길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정신차리고, 다시 주님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죄에게, 사탄에게, 지게 됩니다.

오늘 호세아서는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탄식 중의 탄식입니다.  구슬을 줏으려는 유대인, 이스라엘에 대한 포기입니다.  절망입니다.

육체적, 명예욕, 그리고 탐욕이 아주 대단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절대로 대단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 허망한 것들입니다.  어느 정도는 필요한 것이지만, 도가 지나치면 안 됩니다.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도 안 됩니다.  이것들은 우리의 인생의 경주를 망칩니다.

오늘도 나에게 구슬이 굴러 올때에, 주님을 바라보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이렇게 될 때에 진정한 승리의 면류관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호세아 12장 -우리가 만든 나쁜 큰 아들, 착한 둘째 아들

오늘 날 성경은 장과 절이 있습니다.  호세아서도 14장으로 나누어져 있고, 또한 각 장 마다, 절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물론 구약 성경이나 신약이 오늘과 같이 나누어진 것은 아닙니다.  과거의 구약 성경은 문단으로 나누어져 있을 뿐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호세아서를 오늘 날의 장과 절이 없이 읽는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요?  굉장히 혼란스럽습니다.  하나님이 유다와 북 이스라엘의 죄악을 보시고, 벌을 주십니다.  징계하십니다.  그러나 다시 그들을 용서하시고, 두 번 다시 벌 주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시 한 번 그들의 죄악을 책망하고, 벌주고, 그리고 난 후에 하나님이 사랑하시겠다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계속 반복됩니다.

호세아 뿐 만 아니라 다른 선지서에도 이러한 내용이 끓임 없이 반복됩니다.  성경이 왜 이렇게 계속 반복 할까요?

우리는 누가 복음의 탕자의 이야기에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합니다.  저는 이렇게 상상합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준 옷과 신발과 반지를 팔아서, 또 한 번 집을 나갔을 것입니다.  돼지와 같이 죄를 먹고 마십니다.  둘째 아들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아버지는 오늘도 둘째 아들,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히 11장) 믿음의 조상들을 설명합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살았기에 구원의 증거는 받았지만 약속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구약의 모든 인물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구원의 증거 확실하지만, 약속, 예수 그리스도가 없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 이러한 반복되는 죄의 용서와 징계, 하나님의 사랑에 정통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하박국 2장 4절을 인용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롬 1:17에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변형시킵니다.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영어번역은 From faith to faith 입니다.  믿음이지만 절대로 같지 않습니다.  예수 있는 믿음과 예수 없는 믿음이 있습니다.  (히 11)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예수 없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증거는 있지만 약속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있는 믿음은 증거와 약속이 동시에 주어집니다.  예수 있는 믿음은 탕자가 아버지에게 돌아가면 용서와 사랑을 받는 증거도 확실하고 약속이 있습니다.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From faith to faith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문법적으로 믿음이지만 다른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히 12)은 이렇게 구원의 약속을 받은 자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기록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나의 십자가입니다.  나의 십자가를 진 자들은 고난과 시련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주어질 하늘 나라로 참고 인내합니다.  오늘의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돌아온 탕자가 예수의 믿음, 약속의 믿음을 가졌다면, 그는 집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는 집에서 나의 십자가로 무진 고생과 고난을 당합니다.  집 안에서 시련과 어려움을 당합니다.  믿음은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의 잔소리를 듣고, 형님에게 구박을 당하고, 참고 견디며 사는 것입니다.

그는 금 가락지 끼고, 좋은 신발을 신고, 비단 옷 입고 평생을 살 수 없습니다.  둘째 아들도 큰 아들과 같이 밭에 나가서 죽도록 일을 해야 합니다.  큰 아들과 같이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염소 한 마리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잔치는 한 번으로 족하지 두번 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이러한 잔치에 대해 불평을 하는 큰 아들을 나쁜 놈으로 만듭니다.

오늘 날 교회와 교인들은 둘째 아들을 신데렐라, 성공의 이야기, 행복의 이야기, 축복 받은 이야기로 해석합니다.  참으로 위험합니다.  아주 나쁜 해석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둘째 아들은 착한 아들, 첫째 아들은 나쁜 놈으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집에서 끝까지 고생하는 큰 아들이 다시 한 번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의 불평을 심하게 나무랍니다.  그러나 큰 아들의 불평을 들은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나의 것이 너의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큰 아들은 나쁜 놈, 작은 아들은 우리들이 본 받아야 할 복 받는 분이 됩니다.

그러나 믿음을 제대로 이해하면 큰 아들은 착하고 둘째 아들은 본 받을 것이 없습니다.  믿음은 첫째 아들과 같이 아버지의 집에서 참고, 견디며, 끝까지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버지의 것이 나의 것입니다.  아버지의 하늘 집이 나의 집입니다.

올바른 믿음을 이해해야 호세아서의 끝없는 반복이 이해됩니다.

호세아 11장-아픔과 사랑의 공존

하나님의 깊은 아픔과 사랑이 나타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아픔보다는 사랑이 큽니다.

북 이스라엘과 유대가 우상숭배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행동을 창녀 짓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호세아에게 창녀인 고멜을 아내로 다시 맞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간음하고, 그 남자로 부터 버림을 받은 고멜을 은 15개와 곡식을 주고 다시 찾아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사랑하십니다.  이러한 징계와 사랑에서 갈등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오늘 본문입니다.  징계하지만, 사랑하십니다.  매를 들고 때라지만, 버리시지 않습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징계하는 것과 같습니다.  매를 맞은 자식은 잠을 자지만, 때린 부모는 잠을 자지 못합니다.

제가 이미 설영드린 것처럼 이라한 하나님의 사랑이 호세아 자녀들의 이름에서 아주 잘 나타납니다.

창녀 짓을 한 고멜의 이름은 Hebrew로, 끝이 나다, 마지막입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절망입니다.  고멜은 죄로 끝난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고멜을 다시 찾아오라고 하십니다.  호세아의 이름은 여호수아와 같습니다.  여호수아의 이름은 예수로 발음됩니다.  예수는 그 백성을 구원하신다 입니다.  구원입니다.

죄로 끝이난 고멜과 구원, 호세아가 만납니다.  다음과 같이  자식을 낳습니다.  첫아이의 이름은 이스르엘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망하게 하시겠다 입니다.  둘째 아이의 이름은 로루하마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없다입니다.  세째 아들의 이름은 로암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와 매가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죄를 징벌 하십니다.

그런데 4 번째 아이의 이름은 암미라고 합니다.  세번째 로암미에서 로를 뺀 것입니다.  나의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그리고 4번째 이름에 별명을 지어줍니다.  루하마라고 합니다.  루하마는 둘째 로루하만에서 로를 뺀 것입니다.  은혜의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백성이 됩니다.

우리들이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은혜의 백성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 죄의 분노는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픔입니다.  이러한 아픔이 나타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구원이지만,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 죽는 아픔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제 부터, 자식이 철이 들면,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하나님의 아픔을 이해해야합니다.

호세아 10장 죄악의 쓰나미에서 십자가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이 부족하고, 악하고, 추하고, 거짓이고, 못 났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구하기전에 우리 자신을 보면 위선과 모순으로 차고 넘친다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죄인 중의 죄인이 되어거고, 죄인의 괴수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지만 우리의 야욕과 욕심이 꿈틀 거리며 뱀의 혀처럼 독기를 내어 뿝습니다.

겉으로는 걱정하는 척허지만, 속으로는 멸시합니다.  위로하는 척허지만, 진정한 위로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 같지만, 예수보다 잘난 우리의 생각이 있습니다.  메마르고 메말라가는 마음의 가시는 나와 너를 찌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찌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오늘 본문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1-2절의 말씀처럼 우리들이 열매를 많이 맺으면 맺을 수록 우상의 제단이 많아집니다.  마음은 두 마음을 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만, 우리들이 맺은 열매를 생각합니다.

인간의 교만과 연약함을 그대로 지적합니다.  우리는 콩알만 한 하나라도 열매를 맺으면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내가 이렇게 기도했고, 내가 이렇게 수고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은헤를 주셨기에 이러한 열매가 있다고, 자랑합니다.  두 개의 마음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 열매를 맺어지만, 그 복으로 두 마음을 품습니다.  하나님과 우상입니다.

이러한 두 마음으로 열매를 맺지 못한 나의 주변을 불쌍한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우리의 사악한 마음에서 하나님은 사라지고, 우리 자신이 왕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죽여도 죽지 않는 죄악의 불사조가 우리안에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12-13절에서 하나님을 찾으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끔까지, 악의 씨악을 심고, 악의 열매를 먹었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죄의 삶을 뒤 엎으라고 하십니다.  그묶은 땅을 기경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의가 비처럼 내린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죄악의 땅을 뒤엎을 힘도 없습니다.  한번은 뒤엎지만, 두번, 세번은 뒤 엎지 못합니다.  아무도 우리를 죄악의 절망에서 구해주지 못합니다.  우리의 겉은 거룩하지만 죄악을 먹고 마시며 살아갑니다.  회개도 기도도 모든 것이 형식적입니다.

그러나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이 찾아옵니다.  그 십자가를 바라 볼 때에, 우리 마음에 억눌리고, 억눌렸던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이유도 설명 할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서러움이 터져 올라옵니다.  그저 십자가의 예수님만이 우리 마음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흐릅니다.  감동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찾아옵니다.  예수님이 죄많은 우리에게 발의 못 자국을 보여주십니다.  피가 떡이 되고 , 쇠못의 독으로 퉁퉁 부은 다리로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못의 구멍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예수님이 다리를 절고 절으며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이 한 순간의 감동이, 이해 할 수 없는 눈물이, 형용 할 수 없는 거룩함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죄악의 쓰나미가 우리에게 몰려 옵니다.  독을 품은 뱀들이 몰려옵니다.  예수님이 죄악의 쓰나미로 멀리 사라집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그러나 우리 귀에 아무소리 들리지 아니하고, 아무 것도 볼 수 없어, 우리는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져있지만,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믿게 됩니다.  한 번의 거룩과 신비가 우리를 죄악에서 살아가게합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죄가 사망안에서 왕노릇 한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예수님의 의가 우리 안에서 왕이 되십니다.

아멘

호세아 9장 – 몇 마디의 진실이 없기에 거짓

이 세상의 모든 종교와 신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의 하나는 가을의 추수는 축제와 기쁨의 절기입니다.  추수는 봄과 여름의 수고로 풍성하게 거두는 것에 대한 축제입니다.  우리 나라의 추석도 풍성함에 대한 감사와 축제입니다.  미국의 Thanksgiving day도 축제입니다.  그러면 성경적으로 가을 추수는 축제입니까?  아닙니다.

율법에 근거한 추수는 초막절입니다.  집 바깥에 초막을 세우고 그곳에 1 주일 동안 머물게 됩니다.  초막에 머무는 이 땅의 삶은 초막과 같이 일시적이고,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스라엘 조상들이 광야에서 출애굽하여 초막에서 지낸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 초막에서 그들은 인생의 허무함을 나타내는 전도서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초막절, 추수 직전이 바로 욥키퍼 대속죄일을 지킵니다.  죄를 회개하는 날입니다.  성경적 추수감사는 일반적 추수감사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본문의 1절과 2절은 가나안 이방인들의 추수 감사를 모방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징계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처럼 먹고 마시며 춤을 춥니다.  이러한 이방의 추수 축제를 따라가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호세아 9장입니다.

이러한 추수가 우리에게도 나타납니다.  오늘 날 이 시대를 소통의 시대라고 합니다.  SNS로 수많은 Message // 멧세지를 주고 받습니다.  가끔 우리 집 사람의 카톡을 들여다 보면 많은 좋은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감동도 되고 우리의 삶을 반성하고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하는 좋은 글들이 많이 있습니다.  각박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좋은 위로와 삶의 지침이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SNS에 가장 위협을 느끼는 것이 목회자들의 설교 일 것입니다.  어떤 내용은 설교보다 감동과 깊이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문장에,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굳이 설교를 들어야 할 이유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생각을 했습니다.  로마 신화에 전령의 신 // Messenger가 Mercury입니다.  신의 뜻을 사람에게 전하고 사람의 뜻을 신에게 전달합니다.  그는 자신의 역활을 이렇게 말 합니다.

나는 진실을 전하겠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진실을 말 하면서 몇 마디의 진실은 생략 할 수 있습니다.

Mercury가 Messenger로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까?  거짓을 말하고 있습니까?  그는 그의 말대로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다만 몇 마디의 진실을 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해석을 집어 넣습니다.  이것이 가장 무서운 거짓입니다.  가장 중요한 진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거짓 보다 무서운 거짓입니다.

우리들이 SNS에서 주고 받는 수많은 좋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다 진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주고 받는 글들에서 Mercury가 생각납니다.  위로가 되고 감동이 되고 기쁨이 되지만 진실 몇 마디는 빠져 있습니다.

그 진실은 우리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시대의 멧세지는 인간의 가능성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능성을 이야기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희망으로 미래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의 Messenger, // Mercury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도 우리들은 많은 메세지를 주고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악성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인류 역사에서 인간이 저지른 수많은 죄악의 역사를 부정하고 인간의 가능성을 보는 것은 우리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인간의 추악함을 우리끼리 위로하고 감동을 주는 것 뿐입니다.  우리의 가능성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해결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추악한 죄는 하나님에게 용서 받고 위로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가능성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추수를 이방인의 추수 감사를 본 받는 것을 철저하게 징계합니다.   유대인의 추수 감사는 죄의 회개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을에 거둔 곡식과 과일을 두고 기뻐하기 이전에 너 자신을 돌아보라고 합니다.

오늘도 우리들이 주고 받는 수많은 글에서 위로와 감동도 받아야 하겠지만, 몇 마디의 진실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 진실을 찾기 원하고, 우리의 참된 가능성을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양심을 돌아보는 하루가 되어야 합니다.

호세아 8장 – Money, Power, Sex에서 하나님과 우상의 차이

본문은 우상 숭배로 인한 유대와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입니다.

이 시대의 개혁주의 설교가 John Piper 목사는 돈과 권력과 섹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Money, Power, Sex 자체를 죄악시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죄의 성품이 문제이지, 돈과 권력과 섹스는, 문제가 아니라고 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종교 개혁이전에는 일반 은총을 특별 은총의 하위개념으로 이해했습니다.  그 결과 Catholic 교회는 이러한 돈과 권력과 Sex을 죄악으로, 우상으로 못을 박았습니다.  사제들은 교인들에게 물질적 절제와 권력에 대한 죄악성, 성적 절제를 요구합니다.  교회가 교인들을 통제하는 장치로 사용했습니다.,  그 결과 Catholic 교회 자체가 사제들의 돈과 권력과 성적 타락의 본거지가 됩니다.

이러한 현상이 가장 적나라하게 들어난 것이 프랑스 혁명에서 제 1 계급 종교 계급의 타락입니다.  당시의 사제들의 사생아는 조카들이였습니다.  자신들의 자식을 조카라고 했습니다.  외형적으로 경건한 그들은 사생아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돈과 권력으로 가장 부유했습니다.  귀족을 포함한 사제 계급 2%가 나라의 부를 차지했습니다.  그들은 이러힌 것들을 지키려다가 혁명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이 오늘 우리 교회에 똑같이 반복이 됩니다.  교회는 권력과 돈과 성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죄악시합니다.  한국 교회의 치명적 약점은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특별 은총의 하위개념으로 강조하고, 설교합니다.  그 결과 세상의 모든 것을 죄악시하고, 교회만이 정상이라고 합니다.  신학적 무식의 소치입니다.  일반 상식도, 법도,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 되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 권력과 물질과 성적 타락은 세상과 하나도 차이가 없습니다.  교회의 분열은 정점은 재산 싸움입니다.  100% 세상 법정에서 판가름이 납니다.  최고의 윤리성을 강조하는 교회가 세상에서 가장 타락한 집단으로 질타를 받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끝없이 발생하는 성적타락은 세상과 하나도 차이가 없습니다.

본문이 이러한 우리의 타락에 대한 답을 줍니다.  (v.5-9) 이방인이 우상으로 섬기는 금송아지를 이스라엘 백성들도 금송아지를 우상으로 섬깁니다.  이방인들에게 금송아지는 자신들에게 번영과 안전을 보장하는 우상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금송아지는 자신들에게 번영과 안전을 보장하는 하나님입니다.  금송아지가 자체의 기능은 똑 같습니다.  이방인들에게는 금송아지,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세상과 동일한 가치와 목적과 수단을 믿고 사용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금송아지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기도하면 모든 것을 이겨냅니다.  목사인 저 자신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맞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기도하면 모든 것을 이겨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은총입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돈과 권력과 섹스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신자나 불신자나 자신의 노력과 양심에 따라 성공 할 수 있고, 실패 할 수 있습니다.  돈은 사용자의 인격에 따라, 사람을 구제 하는 도구도 되지만,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됩니다.  Power는 권력의 소유자의 양심에 따라,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든지, 사리사욕을 채웁니다.  Sex는 윤리성과 절제에 따라, 종족 번성과 인간이 즐기는 최고의 즐거움도 되지만, 타락과 파괴의  도구로 전락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면, 우리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특별은총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일반은총도 확신해야합니다.  우리의 상식과 준법 정신과 교양과 정직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상은 법당의부처, 성당의 마리아상, 교회의 십자가, 무당의 굿만을 우상숭배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고전 8:4) 이러한 우상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Nothing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우리의 우상은 바로 우리 자신의 탐심과 욕심이라고 합니다.

(골로세서 3장 5절)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에베소서 5장 5절)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탐하는자,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

우리의 탐심을 채우는 목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기도를 강조하면 이 모든 것들은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나 탐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복주심과 기도를 강조하면 다음과 같이 달라집니다.

돈은 사람을 구제 하는 도구가 됩니다.  Power는 공공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Sex는 종족 번성과 인간이 즐기는 최고의 즐거움이 됩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세상이 우리의 도덕성과 윤리성에 항복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건전한 상식과 예의와 사회적 질서를 추구합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하나님 심판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호세아 7장- 뿌리를 보는 것

오늘은 북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 내용을 떡을 굽는 화덕에 비교합니다.  유대인들이 떡을 굽는 화덕은 다음과 같습니다.

왕궁이나 집에서는 오늘 날 Pizza oven과 같은 화덕을 만듭니다.  밑에는 불을 때울 수 있는 시설이 있고 그 위에는 커다란 돌을 놓습니다.  그리고 진흙으로 그 위를 덮습니다.  그리고 반죽 한 것을 Pizza 굽는 것처럼 돌 위에 올려놓고 떡을 굽어냅니다.  이러한 방법은 많은 양을 한꺼번에 구워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화덕을 의미합니다.

창세기에 요셉의 꿈 해몽에서 떡 맡은 관원장이 나옵니다.  바로 이러한 화덕에 떡을 굽는 책임자를 의미합니다.  아주 중요한 직책입니다.  왕에게 떡 // 음식을 책임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짧은 역사에 약 19명의 왕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8명의 왕들이 암살 당합니다.  특히 15대에서 호세아가 에언하던 19대 마지막 왕 까지 5명의 왕중에 3명은 암살, 1명은 쿠테타로 왕이 바뀝니다.

호세아는 마지막 왕도 암살 당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암살에 떡 맡은 관원장이 중요한 역활을 합니다.  왕이 가장 믿고 신뢰하는 자가 왕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5절에는 술 맡은 관원장도 배신에 합세를 합니다.  떡과 술에 독약을 넣는 것 같습니다.

  (v.4-7)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라 과자 만드는 자에 의해 달궈진 화덕과 같도다 그가 반죽을 뭉침으로 발효되기까지만 불 일으키기를 그칠 뿐이니라 (v.5)우리 왕의 날에 지도자들은 술의 뜨거움으로 병이 나며 왕은 오만한 자들과 더불어 악수하는도다 (v.6)그들이 가까이 올 때에 그들의 마음은 간교하여 화덕 같으니 그들의 분노는 밤새도록 자고 아침에 피우는 불꽃 같도다 (v.7)그들이 다 화덕 같이 뜨거워져서 그 재판장들을 삼키며 그들의 왕들을 다 엎드러지게 하며 그들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 배신을 합니다.  그러나 배신을 하는 사람도 배신 할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배신이 정의입니다.  배신으로 모든 사람이 살 수 있습니다.  배신이 악이 아니라 선입니다.  왕을 죽이는 것으로 나라와 백성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배신하는 자에게는 배신이 아닙니다.  배신하는 사람에게는 정의와 선입니다.  그 결과 인류 역사에는 수많은 배신이 일어납니다.  배신을 정당화합니다.  로마를 위해서 자신의 양 아버지 시이저를 죽이는 부르투스와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의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New Jersey는 Garden state 입니다.  무성한 나무들과 아름다운 꽃들이 한창입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보고 아름답다고 합니다.  하늘의 태양을 향하여 자신의 생명력을 나타내는 꽃과 나무를 보고 자연의 신비를 찬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의 것을 보지 못하기에 배신합니다.  생명의 근원은 뿌리에 있습니다.  그 꽃과 나무들이 빛도 없는 땅속에서 물을 찾아 뿌리를 내리려고 흙을 파고 내려가는 고통과 바위를 뚫는 시련을 무시합니다.  죽음과 같은 고통이 바로 그 나무들의 뿌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왜 우리에게 배신이 생길까요?  왜 우리의 인간관계에는 아픔과 고통이 나타날까요?  우리는 상대방의 태양을 향하는 모습만을 볼 뿐입니다.  상대방이 땅 밑을 향하는 모습을 알지 못합니다.  내가 너보다 더 잘 할 수 있다.  내가 너보다 더 훌륭하다.  그러기에 배신이 나타납니다.

때로는 우리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식에게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것 만을 요구합니다.  세상에서 승리와 영광을 쟁취하라고 합니다.  패배는 바보 짓이라고 합니다.  끝없이 성공하라고 합니다.  그들의 뿌리를 무시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 사람의 뿌리를 봐야 합니다.  생명의 근원은 뿌리에 있습니다.  그러면 배신 할 수 없습니다.  이해 할 수 있습니다.  함께 울 수 있고, 마음을 나눌 수 있고 도와 줄 수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승리를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소원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늘을 향하는 모습입니다.  교회는 승리의 장소입니다.  패배는 용납 할 수 없습니다.  이 시대의 긍정적 사고 방식의 가장 큰 약점은 뿌리를 무시하게 합니다.  오늘 날 현대 기독교가 병든 이유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굿판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요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죽음과 고난과 배신과 절규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뿌리입니다.  패배입니다.  양보입니다.  겸손입니다.  낮아짐입니다.  배려입니다.  배신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의 태양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쳐서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죽음과 같은 과정이 있어야 부활의 영광과 승리가 있습니다.  이러한 안목이 없으면 신자가 아닙니다.

오늘 하루를 사시면서 하나님에게 나의 사랑하는 사람의 뿌리를 보게 해달라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뿌리를 보게 해달라고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뿌리를 보게 해달라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은 100% 달라질 것입니다.

 

 

호세아 6장 오해된 사랑

Mothers Theresa는 이 세상에세 가장 가난한 나라는 인도의 빈민가도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도 어니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는 미국이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너무나 가난한 나라가 미국입니다.  Mother Theresa가 가난하다고 한 이유는 인간과 인간 관계의 정신적 가난일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외롭게 가난하게 살아갑니다.  입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도 그의 마음은 가난합니다.    이러한 가난은 가정과 교회에서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랑이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의 것을 베푸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구제입니다.  자선입니다.  이러한 구제와 자선은 받는 사람의 문제와 어려움이 해결이 목적입니다.  구제와 자선을 하는 것도 고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주는 것도 베푸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인격을 주고 받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자식에게 사랑을 주지만, 인격적 교류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자식은 괴물로 변질합니다.  그 자식은 부모에게 구제와 자선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자식을 가장 가난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사랑에는 징계도 있습니다.  사랑에는 고난과 시련과 눈물도 있습니다.

가정과 교회에서 사랑을 강조합니다.  어떠한 사랑입니까?  상대방의 필요를 채우고 있습니까?  구제와 자선입니다.  물질적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너와 나의 만남이 없다면 그것은 비극과 가난의 시작입니다.

Martin Buber는 너와 나의 만남에서 인격적 만남이 아닌 물질적 만남은 비극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너와 나 사이에 It, 제 3인칭, 물질이 있다면 인간은 불행하진다고 합니다.  너와 나는 It 아니라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실력입니다.  It 없이도 너와 나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바탕으로 나의 것을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면 It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격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반대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도와 주시고, 책임져 주신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강조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가난한 관계입니다. 불행한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죄의 제거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It, 죄가 제거되어야 하나님과 우리는 만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 되시는 이유는 자신의 모든 것,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제와 자선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난하게 하려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만나시려고 인격적 관계를 가지시려고 십자가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오늘 날 교회와 가정은 본질과 비본질이 구별이 안 됩니다.  본질이 비본질이 되고 비본질이 본질이 됐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죄의 용서입니다.  이 사랑에 만족해야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이 사랑으로 만족하며, 기뻐해야합니다.  이 사랑에는 죽음과 눈물과 고통과 배신이 있습니다.  이 사랑에는 죽음을 이기는 부활과 승리와 영광이 있습니다.

호세아는 (v.1) 하나님에게 돌아가자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찢으셨으니 낫게해주실 것이고 치셨으니 싸매어 주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병도 주고 약도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1절의 짧은 구절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이러한 진노에서 나타납니다.

이러한 사랑을 받으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호세아 5장 – 단순함의 위험

우리들이 신앙을 너무나 단순화시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단순 논리에 빠집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우리들이 죄를 지면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죄 짓지 말아야 합니다.

또는, 우리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럼으로 예수를 믿는 자는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죄인이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들이 일반적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화 시킬 때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깊이를 스스로 포기합니다.  하나님의 깊고 높고 위대하심에서 스스로 멀어집니다.  이것이 우리의 불행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기독교가 고민하지 않으며, 세상의 조롱을 받으며, 세상 철학보다 못하게 전락하는 결정적 이유가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북이스라엘과 남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를 하십니다.  죄에 대한 벌을 주십니다.  그 벌의 내용이 매우 재미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북 이스라엘이고 유다는 남 유다입니다.

(12)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좀 같으며 유다 족속에게는 썩이는 것 같도다.  좀은 썩기 일보 직전입니다.  좀과 썩는 것은 다릅니다.

(13)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병에 걸린 것과 상처도 다릅니다.  병 // Sick은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 사회는 상처 // Wounded는 상처를 입으면 치료 할 방법이 적었습니다.

(14)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늙은 사자의 공격력과 젊은 사자의 공격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단순하지 않으십니다.  벌을 주시지만 각 사람에 대한 차별이 있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환경과 책임에 대한 내용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이 남 유대보다 우상 숭배등 더 사악한 죄악을 저질렀지만 남쪽 유대를 더 심하게 징계하십니다.  그들에게는 썩는 것 // 상처 // 젊은 사자입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날까요?  단순논리의 위험성은 너와 나를 동급의 차원으로 봅니다.  단순논리는 윤리와 도덕성의 결여을 만들어냅니다.  나의 행동이 나의 행동보다 우월 할 때에 나의 도덕성과 윤리성은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단순논리는 선과 악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게 합니다.  선과 악이 차별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동등해집니다.

소크라테스는 검토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매일 검사했습니다.  자신에게 질문했습니다.  자신을 의심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물어 봤습니다.  그러한 검사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검토했습니다.  절대로 단순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철학의 시조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단순하게 살아갑니다.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에게 질문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믿음을 절대화합니다.  타인의 평가에 대해서 배타적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지 못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현재의 상황이 하나님의 축복인지, 심판인지도 구별 못합니다.

하나님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복잡하게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검토하며 사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놀라운 은혜에 있는 가를 알게 됩니다.

호세아 4장 – 착각 중의 착각

 

오늘 호세아서는 이러한 면에서 우리에게 심각한 경종을 울려줍니다.  호세아는 일종의 비유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냅니다.

(v.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제사장은 예루살렘에 있는 직분입니다.  지역적으로 유다입니다.  제사장은 아론의 지파이지만, 지역적으로 유다에게 속 합니다.

(v.15) 이스라엘아 너는 음행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너희는 길갈로 가지 말며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며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지 말지어다.

북 이스라엘은 죄를 범해도 벌을 주면 됩니다.  그러나 유다는 죄를 범하면 안된다고 합니다.   비유적으로 북 이스라엘은 이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면 벌 받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유다는 죄를 범하면 벌도 받지만,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지 못합니다.  본문의 내용처럼 유다는 역사적으로 성전이 파괴되고, 제사장 직분이 사라집니다.   (유대인들은 현재 죄의 용서 받을 길을 상실함.  이 내용은 6월 1일 수요 예배에 설교했음)

이것은 이미 역사적으로 문예부흥과 계몽주의로 교회가 죽어가고 있는 유럽의 교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사회적 기구이지, 신앙적 역활을 하지 못합니다.  미국의 많은 교회들도 이러한 상황에 빠져 들고 있습니다.

호세아 5장은 우리에 대한 경고입니다.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우리들이 죄를 범하면, 유대와 같이 제사를 드릴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사회적 현실은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민 1세는 신앙으로 이민 생활을 했지만, 우리의 자녀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부모들에 대한 실망입니다.  신앙과 현실이 분리되는 모순과 위선에서 우리 자식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입니다.

한국 교회는 더 심각합니다.  교회 학교가 아예 없습니다.   성인이 몇 만명이 모이는 대형교회에 주일 학교는 몇 백명입니다.  교회와 세상의 철저한 분리입니다.  부모들의 신앙의 내용이 자녀들에게 교육적 인성적 사회적 영향을 전혀 주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한국 교회도 자신의 발이 썩고 무너져 가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냉정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 죄에서 구원 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동시적으로 나의 현실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리로서 증명될 때에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이 생깁니다.

우리는 구원을 하늘나라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구원은 우리 현실에서 하나님의 진리성이 나타 날 때에 구원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정신과 감정으로 확인하려고 합니다.  나의 구원을 나의 확신으로 확인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와 이민 교회 가장 잘못 된 태도입니다.  신앙과 정신이 감정을 내포하지만 현실과 동 떨어지면 안 됩니다.

성경의 구원은 하나님을 사랑하는자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는자 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산상수훈입니다.  산상수훈은 구원 받은 자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표준입니다.  산상수훈으로 살아야 구원 받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산상 수훈의 내용으로 우리의 구원이 현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려 주는 내용입니다.  구원은 죽음 이후에 하늘나라이지만 오늘 나의 현실에서 천국으로 살겠다는 의지의 구현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증거입니다.

이러한 의지가 구현 되는 것이 전도이고 선교입니다.  저는 이민 교회가 한국 교회가 전도, 해외 선교하는 것에 찬성합니다.  그러나 전도와 선교가 교회와 신자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일방적입니다.  전도와 선교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고귀한 사명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명의 전제 조건은 우리들이 이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정말로 선교하고 전도하려면, 한국 땅에서, 미국 땅에서 우리들이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타인에게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사회가 우리를 존경해야 합니다.  정치와 경제인들이 우리를 보고, 그들의 태도를 변화해야 합니다.  이것이 전도와 선교입니다.

우리의 사회와 가정에서 조롱과 비난을 받으면서 해외에서 불쌍한 영혼을 구제 하겠다는 것은 우리의 모순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교회의 사업이지, 하나님의 사업은 아닙니다.  이곳의 빛과 소금은 저곳에서도 빛과 소금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들이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유다가 죄를 지으면 안 된다는 것을 요구하는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교회가 사라집니다.  선교와 전도도 빠른 시간에 사라집니다.

이것을 막으려면 오늘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신자답게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심판이 유대인에게, 유럽의 교회에 이미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 오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환상,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다음에 기회에 미국 교회들이 이러한 싸움을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얼마나 처절하게 하고 있는가를 알려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