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 복음 4장 30-34절 (비유와 예화)

예수님이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방법의 하나는 성경의 내용을 잘 전달하기 위한 예화와 비유입니다.  오늘 날 설교에 예화의 지나친 사용이 문제가 되고 있기도 합니다.

예화와 비유는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천국을 겨자씨에 비유합니다.  제자들의 이해를 위하여 “Similar parable”  유사한 이야기로, 비유로 제자들을 이해시켰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화와 비유를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예화는 씨를 통해서 천국을 이해시킵니다.  씨가 자라서 가지가 되고 큰 나무처럼 되어 새들이 깃들수 있습니다.  천국의 확장성과 생명력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비유는 예화와 유사하지만 하나님나라를 알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씨로서 설명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무시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는 것을 비유가 방해합니다.

(마가 4장 10-12)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 (v.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v.12)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설교를 예화로 이해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설교는 돼지에게 던지는 진주가 아닙니다.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 말씀을 믿게 하시는 것은 성령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비유입니다.  그럼으로 설교자는 지나친 예화로 교인들을 이해시키려는 것은 잘못된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더 큰 문제는 예화에 중독된 교인들입니다.  예화로 설교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교인들은 설교가 재미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재미 있으려면 TV나 영화보는 것이 낫습니다.

구약과 신약에 수많은 예화들이 나타납니다.  특히 예수님의 비유가 재미있습니까?  포도원의 일꾼의 이야가가 있습니다.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의 탕자 비유가 있습니다.  이것이 예화라면 우리들이 두 번 들으면 재미 없습니다.  재미 있는 이야기는 두 번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는 천번 만번을 들어도 재미있지 않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설교 말씀을 예화로 이해했다면 말씀을 믿어지게 하시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때에 비유가 됩니다.

 

마가복음 4장 21-29절 (누가 작전권을 갖고 있나?)

미국이 북한과의 전쟁을 기정 사실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전쟁이 나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대한민국입니다.  전쟁의 가능성이 증가되는 이유는 한반도의 군사작전권을 갖고 있는 미국에서 계속적으로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정부는 전쟁을 반대합니다.  외교적으로 북한의 핵문제를 풀어보겠다고 합니다.  한국이 미국과 상반된 의견을 갖는 이유는 전쟁의 결말은 지상군, 육군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미군의 육군 병력으로는 전쟁이 불가능합니다.  한국군의 참여 없이는 전쟁의 승리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이 미국의 도움없이 한반도에서 생존 할 수 없습니다.  세계 열강에 둘러 싸인 한국으로는 자주적으로 국방을 지킬 능력이 현재로 없습니다.  그럼으로 미국이 작전권을 갖고 있습니다.  일본, 중국은 우리를 침략한 역사적 사건들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도 이러한 일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미국과 한국이 어떻게 해결하는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결코 쉽게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똑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자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이 세상에서 엄청난 도전과 문제를 야기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싸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세상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만 이 세상에서 번번히 실패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작전권을 갖고 있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미국이 하나님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전권을 포기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이 결코 우리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세상은 마치 일본과 중국과 같습니다.  일본은 독도를 자신의 영토라고 합니다.  중국은 마라도 근해를 자신들의 해역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생존경쟁이며 우리는 세상의 약육강식의 싸움에서 싸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합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지침을 주십니다.

(마가 4:23-25)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v.24)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v.25)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우리의 작전권을 하나님이 갖고 계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만약에 우리들의 작전권을 이 세상이 갖고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것으로 평가 받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평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인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과 싸우며 살아야 합니다.

현재 남한이 자유와 민주주의, 북한의 독재와 억압에서 우리는 분명한 것을 보고 있습니다.  수많은 민족을 죽음과 이별로 몰아 넣은 6.25 전쟁의 주체가 누구인자 확신한다면 우리의 선택은 아주 명확합니다.  현재는 대한민국은 미국을 의지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면 그 대가가 너무나 혹독합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이 어려운 것처럼 우리 대한민국도 너무나 어려운 상황에 있습니다.

정말로 우리들이 조국을 위하여기도 할 때가 왔습니다.  우리의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선택으로 조국에 전쟁 없이 평화통일이 찾아오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아주신 기적이 한반도에 일어나길 바랍니다.

 

 

 

마가 복음 4장 1-20절 (우리들이 오해하는 예수님)

대강절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이 씨를 뿌립니다.  옥토에 뿌린 씨는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가시밭, 돌밭, 길가에 뿌려진 씨앗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오늘 날 신자들은 우리들이 옥토가 되어 많은 열매를 맺자고 합니다.  성장하자고 합니다.  전도와 선교로 세상을 구원하자고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신자들이 되자고 합니다.  좋은 일입니다.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왜 열매 맺지 못하는 가시밭, 돌잩, 길가에 씨앗을 뿌리시는 이유를 모릅니다.  예수님은 농부입니다.  많은 추수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미련하게 열매 맺지 못하는 가시밭에, 돌밭에, 길가에 씨를 뿌립니다.  옥토와 똑같이 뿌립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경제적 논리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경제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착각은 우리 자신이 돌밭이고, 가시밭이고, 길가의 사람인줄 모릅니다.  우리는 옥토라고 착각을 합니다.  우리들이 옥토라고 착각하는 이유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가 어떠한 사역을 크게하면 옥토로 착각합니다.  자신이 다니는 교회가 아주 신선한 사역을 하면 옥토라고 착각을 합니다.  자신이 어떠한 선한 일을 하면 옥토라고 합니다.

그 결과 우리 자신을 옥토로 착각해서 열매에 맺는 것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하면 예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에게 영광이라고 합니다.  맞는 것 같지만 틀리는 것입니다.  필요하지만 필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본질이 아닙니다.  비본질이 본질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본질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옥토에 씨만 뿌리지 않습니다.  가시밭길, 자갈밭, 길가에 씨를 뿌립니다.  매우 미련한 농부입니다.  열매 맺지 못할 곳에 씨를 뿌립니다.  씨를 낭비합니다. 허비합니다.  마구 버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본질, 성경의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가시밭 같은 우리에게 사랑의 씨를 뿌립니다.  오늘도 돌밭과 같은 우리에게 성령이 찾아오십니다.  오늘도 길가와 같은 우리를 하나님은 인도하십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할 말은 많지만 이것으로 줄입니다.

 

마가 복음 3장 31-35절 (예수님의 가족관)

오늘 내용은 상당히 혼란스럽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가족관계를 부인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가족관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십계명에도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미쳤다고 하는 가족을 자신의 가족이 아니라고 합니다.  제자중의 하나가 예수님에게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밖에서 기다린다고 합니다. 주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고 질문을 하십니다.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은 저 바깥에서 나를 찾는 친 어머니와 친 동생들이 아니라 이 방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혈연관계를 부정하십니다.

오늘 날 이러한 말씀이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된다면 신앙의 차이로, 믿음이 다르다는 이유로 우리의 가족관계가 파괴되는 것이 정당화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불신자와의 부부관계 또는 결혼이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것처럼 나와 다르기에 상대방을 귀신들린 자라고 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러한 관계를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은 결코 가족 관계를 결코 파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이 사건의 전반부에 예수님의 가족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귀신들린자로 동조합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동네 높은 곳에서 밀어 뜨려 죽이려고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 안에서 형제와 자매와 모친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족 관계를 파괴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오늘의 본문 말씀처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들이 나의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합니다.  관계의 확장성입니다.

이러한 관계의 확장에 따라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 됩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을 끝까지 지킵니다.  예수님은 가족 관계를 파괴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제와 자매와 모친으로 확장하셨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가족관계를 가족에서 머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제와 자매와 부모의 관계로 확장시켜야 합니다.

마가복음 3장 20-30절 (성령 훼방)

예수님이 자신을 가장 잘 아는 가족들은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미쳤다고 합니다.

가장 성경을 잘 알고 깊은 종교 행위를 하는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귀신을 내어 쫓는 것를 보고 마귀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내어 쫓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백성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힘을 갖고 백성을 구하러 오신 메시야로 찾아옵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들과 서기관이 예수님의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가장 멀리 있는 백성들이 예수님의 실체를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성령훼방을 누가 할 가능성이 있습니까?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오늘 날의 신자들과 목사들입니다.  가장 근접해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장 오해하는 집단입니다.

성령 훼방은 불신자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신자에 의하여 일어납니다.  내용과 실체를 알지 못하는 불신자는 성령을 훼방을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훼방에 대한 관심도 없습니다.

한국 교회의 치명적 약점은 목사나 교인마자 말 끝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운운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뜻입니까?  예배와 기도와 신실함이 신자의 하나님의 축복이며 아름다운 덕목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이나 자신이 예배와 기도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벌을 받는 대상으로 판단합니다.  무서운 성령 훼방입니다.

우리들이 오늘도 수없이 우리의 욕심과 행동으로 성령을 훼방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조심하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마가복음 3장 7-19절 (외형에 속는 우리들)

외형적인 것이 판단의 기준입니다.  기업의 외형적 매출과 이익으로 기업의 가치를 평가합니다.  이렇게 되면 그 기업이 어떠한 방법으로 수익을 발생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기업 윤리와 도덕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외형적 매출로만 기업을 평가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사람도 외모가 중요합니다.  잘 생기고 건장하면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호감을 주지 못하는 외모와 외소한 체격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합니다.  이렇게 되면 그의 내면의 인격과 정신 세계와 가치, 정직과 성실은 외모에 뭍혀버립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외모에 만족하지 못하고 성형수술도 합니다.

오늘 날 교인들은 교회의 외형적 규모와 성장은 하나님의 손길과 비례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형 교회는 하나님이 특별하게 사용하시는 교회, 또는 목회자라고 합니다.  그들의 사역을 보면 대단 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대형 교회의 교인들의 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자부심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교회는 무엇인가 부족하고 하나님이 특별하게 사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작은 교회 목회자나 교인들이 대형교회 앞에서 주눅이 드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사역을 보면 매우 초라합니다.

크기에 따라 긍지를 갖고 긍지를 갖지 못합니다.  전형적인 세속주의와 물질주의입니다.  약자에게 강자가 복종하는 조폭의 세계와 같습니다.

11절에 예수님이 귀신을 내어 쫓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12명의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예수님이 12명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갖고 계신 능력과 힘을 주십니다.

   (마가 3:14-15)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v.15)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이러한 12명의 제자중에 아주 놀라운 제자가 있습니다.

(v.19) 또 가롯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러라

가롯 유다 예수님과 같이 귀신을 내어 쫓았습니다.  전도도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똑같은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배신합니다.

오늘 날 한국 사회와 외국에서 엄청난 사역을 하는 교회가 세습문제로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사역을 위해서 교회가 안정되고 아들에게 세습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 결과 사회에 지탄을 받고 교회적으로 깊은 아픔과 갈등이 찾아온 것 같습니다.

경기도 신도시 지역에 대형교회의 목사인데 그의 입에서 나오는 설교는 하나님 말씀의 강단을 파괴하는 것 같은데 수많은 교인들이 모인다고 합니다.  목회자들이 이러한 현상을 이해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세계 최대의 교회을 창립한 목회자가 서울에 있습니다.  교인들을 그가 예수님보다 더 큰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그가 교회 돈 몇 백억을 횡령했다고 고발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가롯 유다가 제자로 부르심을 받을 때에 예수님과 똑같은 일을 한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의 경주는 마지막에 나타납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과 지지 아니하는 것으로 교인과 목회자와 교회는 하나님으로 부터 평가를 받습니다.

오늘도 외형적인 것으로 교회와 신앙 생활을 판단한다면 교회는 전형적 세속주의와 물량주의입니다.  가롯 유다가 은 삼십에 예수님을 배신 한 것과 같습니다.  윤리와 도덕성을 상실하면 교회는 성형수술로 위장한 것과 같습니다.  교회가 분장은 해야합니다.  그러나 위장을 해서는 안 됩니다.

보여지는 것에 속지 않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교회와 신자는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살지 않습니다.  나의 십자가로 살아 갈 뿐입니다.

주님 오늘도 말만 하는 제가 아니라 정말로 십자가를 행동으로 지게 하여 주옵소서.

 

마가복음 3장 1-7절 (악한 의기투합)

예수님이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십니다.  이것을 보고 바리세인과 헤롯당이 한 마음이 되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그들이 악하게 의기투합합니다.

바리세인은 종교적 원리주의 집단입니다.  율법이 그들의 삶의 지침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대 해석해서 모든 것을 종교적으로 행동합니다.  종교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공격합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반로마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헤롯당은 바리세인들과 반대입니다.  하나님과 전혀 관계 없는 정치적 사회적 이익집단입니다.  그들은 친로마의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돈과 명예에 집착합니다.  헤롯당은 자신들의 정치적 세력을 약화시킨 세례 요한을 죽인 집단입니다.  그들은 정치적 입지를 굳히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정치적 생명이 그들의 신앙입니다.

이렇게 서러 다른 성향의 집단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마음을 모으고 결의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독교 신앙의 칼라가 나타납니다.  기독교는 종교적 형태를 갖추어야 하지만 바리세인과 같이 종교적 행위로 증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헤롯당과 같이 완전하게 종교적 형태를 버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는 여유를 갖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종교성의 증명을 이용하려고 타 종교를 비난하고 공격하는 것은 이 시대의 바리세인입니다.  오늘 날 미국과 세계의 가장 큰 문제는 종교적 갈등입니다.  특히 이슬람과 힌두교에 대한 태도입니다.  자신의 종교적 힘으로 상대방을 적대시 함으로 자신의 기독교적 가치와 종교성을 인정받으려는 것은 아주 비겁한 일입니다.

우리들이 그들과 굳이 교제를 갖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종교가 다르다는 것으로 적으로, 원수로 간주하는 것은 종교가 원리주의, 극단주의로 빠지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ISIS가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겠다고 하면서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심각한 모순을 갖게 됩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이러한 면에서 좀더 성숙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로마서 12장의 말씀처럼 누군가에 대한 징벌과 보복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시대의 바리세인들은 종교로 국가와 사람을 판단합니다.  미국과 Trump를 맹신합니다.  미국이 기독교 국가이고 Trump가 하나님이 선택한 대통령이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문제를 야기합니다.  우리들이 미국을 인정하고 Trump을 도와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미국은 자국의 이익이 우선이고 Trump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이 우선입니다. 미국과 미국의 대통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한다고 믿는 것은 불합리합니다.

이 시대의 헤롯당이 있습니다.  다원주의입니다.  다원주의는 모든 종교의 진리성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다양한 인종과 종교적 배경을 갖고 살아갑니다.  직장, 사회에서 서로 다른 종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종교를 강조하면 타종교와 분열과 갈등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현대사회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와 타종교를 일치시키는 행위는 헤롯당입니다.

우리는 Anti-USA 또는 Anti-Trump 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시대의 헤롯은 친로마 성향입니다.  미국을 마귀와 같이 취급을 합니다.  한국 전쟁의 역사를 부정합니다.  이들의 특징은 부분적 지식으로 전체를 포장합니다.  하나의 거짓 선동입니다.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고 기독교를 이용하는 세력은 헤롯당입니다.

대한민국의 통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을 이루려는 방법으로 기독교가 북한의 인권과 종교적 탄압을 무시하면 헤롯당이 됩니다.  평화적 통일은 중요하지만 그 방법으로 인권과 자유와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태도는 자신의 정치적 야먕을 이루는 이 시대의 헤롯입니다.

이 시대의 헤롯장과 바리세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우리는 어느 곳에도 속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이 이 시대의 헤롯과  바리세인의 태도를 방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가복음 2장 23-28절 (종교가 비정하게 될 때-2)

기독교는 항상 종교와 신앙 사이에서 갈등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갈등을 본문에서 정확한 지침을 알려주십니다.

  (막 2: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킴으로 신앙의 정체성을 찾습니다.  종교적 행위는 우리의 신앙을 건강하게 담아내는 그릇과 같습니다.  종교가 없는 신앙은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로 신앙은 증명하지 못합니다.  신앙 없는 종교도 존재하지 못합니다.

종교와 신앙은 영어로 쉽게 구분됩니다.  종교는 Religion입니다.  신앙은 Religious life입니다.  종교는 종교자체가 요구하는 것을 행동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종교가 요구하는 삶을 현실에서 사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유대교와 같이 안식을 주일예배를 드립니다.

보수적 유대교는 종교적이기에 성경이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철저하게 안식일을 준수합니다.  전화도 받지 않습니다.  음식에 불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물건을 구매하지 않습니다.  자동차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면 그들은 유대인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종교적 유대인들은 유대인이냐 아니냐는 구분하는 첫 단계가 안식일의 준수여부입니다.  이것은 종교입니다.  이것이 지나치면 어제 말씀드린 하시딤 유대인들이 됩니다.  세상과 분리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은 Religious life입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만, 월요일에서 토요일도 매우 중요한 날입니다.  신학적으로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특별은총이지만, 월요일에서 토요일의 세상의 삶은 일반적 은총입니다.  특별은총과 일반은총은 차이가 없습니다.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월요일에서 토요일이 중요하기에 주일에 하나님에게 예배와 종교적 행위를 포기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일반은총이 특별은총보다 중요하게 되는 모순을 갖습니다.

그럼으로 우리의 매일의 삶은 특별은총과 일반은총의 혼재입니다.  신앙과 종교가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럼으로 신앙생활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떤 면에서 종교적으로 사는 것이 더 쉽습니다.  하시딤이 어려운 것 같지만 더 쉽습니다.  종교적 행위로 신앙을 증명하려는 속성이 우리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v.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그럼으로 오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2장 18-23절 (종교가 비정하게 될 때에)

우리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갖고 있습니다. 종교는 인간을 비정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습니다.

Netflix에서 Brooklyn에 거주하는 하시딤 유대인(Hasidic Jews)에 대한 Documentary를 봤습니다. 제목은 One of us입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와 같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뉴욕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검은 옷을 입고 수염을 깍지 아니하고 남자들은 구렛나루를 길게 기릅니다.  여자들은 머리를 기르지 못하고 가발을 쓰고 다닙니다. 아이들에게 internet와 i phone을 사용하게 하는 것은 죄라고 합니다.  아이들의 교과서에서 여자의 얼굴은 다 지워버립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아이들에 대한 교육은 율법서를 읽게 하는 Idish와 기초적인 영어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전혀 적응 할 수 없습니다.  가게나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기초적 수학능력이 없기에 거의 불가능합니다. 남자와 여자들은 거의 일을 하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Torah와 율법서만 읽습니다. 여자들은 아이만 낳습니다.  평균 5명의 이상의 아이들을 출산합니다.  그리고 정부의 지원으로 기초적 생활만을 유지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하다고 합니다.

마약에, 가정폭력에, 세상의 자유가 그리워서 그들의 종교적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랍비들이 결정을 합니다.  그들은 랍비의 결정에 따라 살아갈 뿐입니다.

랍비와 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가 대화를 합니다.  랍비는 아주 극소수만이 Idish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세상에 나가도 행복하지 못하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자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우리들은 세상에 나가서 적응하지 못하기에 이러한 비정상적 사회에서 살아야 할 뿐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성경에 따라서 이 세상을 죄악시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으로 세상과 철저하게 담을 쌓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은 New York시 한 복판에 우리와 같이 살아갑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는다고 불평을 합니다. 예수님이 요한의 제자들의 비난에 대해서 유명한 비유인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는다고 하십니다.

종교는 타락하면 종교성으로 종교를 증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종교적 우위를 강조합니다.  이것을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극단적 성향을 취함으로 자신들과 타인들을 구분합니다. 그 결과 인간에게 비정함이 나타납니다.  타인을 정죄하고 세상을 부정하고, 율법에 벗어난 행동에 제재를 가합니다.

종교는 인간성의 회복입니다.  종교는 문화와 시대와 대화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라 Cult, 광신적 집단이 됩니다.  종교의 비정함은 하나님의 시대와 문화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는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종교개혁을 하신 분입니다.  종교성이 아니라 신앙,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강조하셨습니다.  성령에 의한 인간성의 변화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종교성으로 우리를 증명하려고 하면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오늘 날의 하시딤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습니다.  종교 때문에 비정한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을 부인해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어 오늘도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이 세상은 마귀가 통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오늘도 하루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의 One of us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One of us가 아니라고 해도 안 됩니다.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과 세상의 경계선에 있습니다.  이것을 잊으면 기독교는 비정한 종교가 됩니다. 많은 한국 교회는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One of us 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One of us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를 믿기 때문입니다.

자유와 기쁨으로 사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가복음 2장 13-17절 (나의 자리와 믿음의 자리)

모든 사람에게는 주어진 자리가 있습니다.  자신에게 맞는 자리가 있다고 합니다.  좋은 자리가 있다고 합니다.  가고 싶은 자리가 있고, 앉고 싶은 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자신의 자리에 만족하는 자리가 있을까요?  마음 편하게 살아갈 자리가 있을까요?

마태는 세리입니다.  그가 세관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많은 돈을 주고 샀습니다.  치열한 경쟁을 버리고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가 소망하던 돈을 얼마든지 벌 수 있습니다.  일정금액만 로마 정부에 내고 나머지는 자신이 다 가질 수 있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도 그 자리에 앉고 싶어합니다.  다만 그들도 능력이 없어 세관의 자리에 앉지 못합니다.

그 자리를 차지하고 나니, 돈을 벌고 나니, 그 자리가 좋은 자리가 아닙니다.  질투와 모욕과 원망의 자리가 됩니다.  그 자리에 앉고 나니 그 자리의 진가를 발견합니다.

우리들의 자리는 어떠합니까?  마음이 편합니까?  성공해서, 꿈을 이루어서 앉을만 합니까?

예수님이 마태를 부르시듯 우리를 부르십니다.  마태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쫓습니다.  예수님을 쫓는 자리는 편안한 자리입니까?  기쁨과 성공의 자리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르시면 우리는 쫓아가는 자리입니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에 관계 없습니다.  이것을 은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자리는 우리들이 오늘도 쫓아가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무엇인가 확실하게 주어진 자리가 아닙니다.  그럼으로 믿음의 길이라고 합니다.  불안 할 수도 있고,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리의 자리와 다릅니다.  우리들이 현재 추구하는 자리와 다릅니다.

믿음의 자리는 예수님이 정하신 길을 가는 자리입니다.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자리를 그 길을 순종하며 갑니다.  기쁨과 슬픔을 실패와 성공을 행복과 불행을 다 함께 감사로 받아들입니다.

나의 자리는 내가 인생의 주인입니다.

믿음의 자리는 하나님이 나의 주인입니다.

이러한 자리의 차이를 구분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