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8장 11-15절 (부활 범죄 수사대)

미국 드라마에 CSI 수사대가 있습니다. 사건 현장을 과학적으로 수사해서 범죄를 해결하는 영화입니다. CSI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것을 어떻게 조사 할까요?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유명한 논리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파수꾼들이 예수님이 부활한 것을 대제사장들에게 보고하자 무덤을 지키던 군인들에게 돈을 주면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도둑질 했다고 하라는 내용입니다. 그러자 이러한 소문이 오늘날까지 예수님이 부활 승천 하신 후에 유대인들에게 퍼졌다고 합니다.

도적설이 당시에 인정을 받는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고 기절했다고 합니다. 다른 두 명의 강도처럼 뼈를 꺾었지만 예수님의 시신은 그대로 두었기에 기절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동굴에서 예수님이 정신을 차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무덤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구출했다고 합니다. 기절설과 도적설이 합치하는 내용이 사실처럼 퍼진 것 같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는 수많은 내용들이 있습니다.  CSI는 이러한 내용도 보겠지만, 범죄의 구성과 원인과 결과도 봅니다.

사도행전 5장에 나타내는데 산헤드린의 공회원 가말리엘의 설교 내용입니다. 그는 유대교에서 수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있지만, 있다가 스스로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베드로가 전하는 부활의 예수가 “만일 하나님께서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라고 충고합니다.

이러한 가말리엘의 설교로 초대 교회는 유대교의 일파로 성장을 합니다. 유대교 자체가 예수의 부활을 인정했습니다. 이것은 가말리엘의 설교에서 나타납니다.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AD 90년에 얌니아 종교 회의에서 유대교는 기독교와 완전한 결별을 합니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현상이 동시적으로 나타납니다. 첫 번 박해, 네로의 황제와 두 번째 박해, 도미티안의 박해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네로나 도미티안은 기독교를 박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AD 90년 이전에는 기독교와 유대교의 구분이 매우 모호했습니다.

유대교의 입장에서 보면 네로의 기독교 신자 박해 이후 바로 유대와 로마의 전쟁이 일어나고 AD 70년에 예루살렘이 파괴됩니다. 그리고 유명한 마사다 항쟁이 일어납니다.

또한 2 번째 도미티안의 기독교 박해 시작과 동시에 얌니아 종교회의에서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분리됩니다. 기독교 신자들이 박해를 받았지만, 내용적으로 볼 때에 유대인들로 기독교로 오해 받고 박해 받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사실 도미티안은 유대교와 기독교를 구분 못한 역사적 정황들도 많이 있습니다.

1차 2차 박해도 유대교 신자들도 기독교 신자로 박해 받고 죽을 가능성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박해로 유대교는 기독교와 이별을 시도하고 결정합니다.  이러한 이별의 결정적 이유가 바로 부활입니다.  로마가 기독교을 박해하는 결정적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됩니다.

로마의 정치범으로 죽은 예수가 하나님, 황제와 같은 신이 된다는 것은 로마나, 유대교가 받아 들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정황이 기독교와 유대교의 분리로 나타냅니다. 가말리엘의 허락으로 유대교에서 기독교는 뿌리를 내리지만 결국은 부활로 갈라집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부활이 기절설, 도적설, 환상설, 부정됩니다.  그러나 만약에 예수님의 부활을 CSI가 증명한다면 분명하게 범죄 상황과 원인과 결과를 분석 할 것입니다. 범죄의 프로파일을 세울 것입니다. CSI는 유대교에서 기독교의 이별을 보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1-10절 (부활-2 조족지혈)

우리들이 부활을 이해 할 수 있을까요?  조족지혈과 같습니다.  새 발의 피입니다.  우리들이 부활을 믿고 있지만 이것을 나타내는 것은 너무나 작고 사소한 것 같습니다.  조족지혈, 새발의 피는 우리를 절대로 살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부활의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에 비교하면 조족지혈, 한 방울의 피도 안 되지만 이것이 우리를 살립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바울은 기독교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기초를 쌓았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제자들과 같이 예수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 직접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죽음에서 부활을 기독교 신앙의 근간으로 세웁니다.

이러한 바울의 태도를 볼 때에 부활 신앙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됩니다.  부활은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들이 부활신앙을 황당무계하다고 타자로 부터 공격을 당 할 때가 있습니다.  절대적 은혜이기에 우리의 설명에 한계가 있습니다.  성경적 근거에서만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부활 신앙은 우리의 각자의 것이지 결코 세상 사람들과 공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도 부활 신앙을 갖지 못하거나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비난이나 공격을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도 성령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로 부활 신앙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부활 신앙을 갖고 있다면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울은 부활 신앙을 세상 사람들에게 결코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들이 부활 신앙을 갖고 있기에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사신과 향기가 될 것을 요구합니다.  겸손한 인격적 삶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성령의 열매로 정의합니다.  삶이 주는 고난과 시련에서 얼마나 신자답게 사는 가를 요구합니다.

우리의 부활은 과학이나 이성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어떠한 종교적 행위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부활은 이 세상이 해결하지 못하는 인간의 아픔과 고통을 죽음을 우리들이 얼마나 성숙한 자세로 받아들이는가로 증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태도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비교하면 조족지혈입니다.

우리의 부활은 조족지혈, 새발의 피와 같습니다.  한 방울의 피도 안 되지만 이것이 우리를 살립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마태복음 28장 1-10 (부활-1)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삼일 후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되시며 우리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롬 1:3-4)

그럼으로 부활은 우리의 신앙의 기초이며 또한 완성입니다. 부활 신앙에 대한 이해와 믿음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제가 이해와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은 부활을 믿음과 이해로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초월적이지만 이해는 우리의 이성을 사용하기에 자연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초월적 방법도 사용하시지만 우리의 자연적 방법도 이용하십니다.

철학도 이러한 체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플라톤의 영향으로 초월적으로 인간을 해석합니다. 그러나 스토아 철학으로 이성적으로 인간을 해석합니다.

우리들이 부활의 사건을 무조건 초월의 사건으로 제한을 하면 우리에게 찾아오는 하나님의 은혜는 매우 피상적입니다. 추상적이고 현실적 개념이 약화됩니다. 부활은 신비적 사건 초월이지만 우리들이 깊이 생각하며 접근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크게 나타납니다.

죽음에서 부활은 비상식적이고 과학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믿기 쉽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천사가 나타납니다. 천사도 초자연적인 존재입니다. 부활은 자연을 벗어난 초자연 현상임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신이 사람이 됐습니다. 100% 초월적 현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우리와 같은 100% 자연적 현상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 100% 자연성을 갖고 계시며 하나님과 같은 100% 초월성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나 부활이 초월의 사건이지만 자연인 우리를 위한 사건임을 알려줍니다.  증거가 6-7절에 나타납니다.

(v.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천사의 말에 아주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그가 말씀하셨다입니다.”

(v.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천사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했다고 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에 제자들에게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하셨다 입니다.  말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100% 자연적 현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입니다.  100% 초월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자체가 초월과 자연입니다.

죽음에서 다시 산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믿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말씀하신 것들이 있습니다. 산상수훈과 같은 말씀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자연스러운 말씀을 생각하시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부활의 하나님이 됩니다.

자연과 초월은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우리의 합리적 판단과 이성도 하나님의 은혜, 초월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태복음 27장 62-66절 (정상적인 불안)

C.S. Lewis는 누구라도 천국은 가고 싶어하지만 죽기는 싫어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죽을 것을 알지만 죽을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지 않을 것 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죽음 앞에서 우리는 매우 놀랍니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난 것처럼 놀랍니다.

그러나 정말로 죽음과 직면하면 어떠한 마음이 들까요?  어떠한 생각을 하게 될까요?  우리의 실체가 나타날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나타납니다.

본문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세인들이 예수님이 다시 살아난다고 했으니 무덤을 지켜달라고 빌라도에게 부탁합니다. 제자들이 시신을 도적질해서 예수가 다시 살아아났다고 선동 할 것이라고 합니다.

해괴한 논리입니다.  제사장의 말대로 제자들이 죽은 시신을 훔쳐서 살아났다고 하면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산 사람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당시의 로마와 제사장들은 죽은 시신을 훔친 제자를 잡아 들이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제사장들은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그들의 마음에 이상한 불안이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또한 제자들도 시체를 도적질 한 후에 빈 무덤으로 예수님이 살아났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죽은 시체를 가지고 죽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살아있는 예수님을 증거로 나타내야 합니다.

제사장들이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죽은 시체를 지켜 달라고 하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정상적 불안입니다.  죽음이 죽음으로 끝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제사장들이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에는 정상적 불안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상적 불안을 외면하고 살아갑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는 제사장들과 같이 죽음 이후에 다시 사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죽음이 두렵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정상적 불안입니다.

 

마태복음 27장 57-60절 (가장 감동적인 제자)

저에게 항상 도전을 주는 제자입니다. 저는 이 사람만 만나면 할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이 도망을 갔습니다. 당시에 법에 따르면 십자가의 처형된 시신을 거두면 그 사람도 십자가에 처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주님의 시신을 거둡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 길 수 있지만 각오하고 예수님을 자신의 무덤에 장사 지냅니다.

이렇게 성경에 한 번 등장하고 사라집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제자라고 합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수많은 위인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숨어서 있는 위인들은 알지 못합니다.

(마태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은 이러한 자들의 상급이 크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영광을 받았기에 하늘의 상급이 적을 지도 모릅니다.  매우 두렵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5-56 (십자가의 죽음-3)

사람 사는 것을 생로병사라고 합니다.  태어나 늙어서 병들어 죽는다고 합니다.  외형적으로 이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게 살아갑니다.

지난 2 차례에 걸처 둘째 아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새로운 창조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증거가 다음과 같습니다.

(v.52-53)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v.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죽었던 사람들이 부활합니다. 죽음에서 부활은 죄의 힘이 파괴당한 것을 의미합니다. 마귀의 권세, 죽음의 권세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둘째 아담 예수님에 의하여 새로운 창조가 나타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산다는 것은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장차 죽음에서 부활 할 것을 믿습니다. 이러한 부활은 과학과 상식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부활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괴기한 내용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우리는 죽음에서 부활을 믿습니다. 신자들 중에 가장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과학자들과 의사들도 죽음에서 부활을 믿습니다. 세상의 과학자들과 의사들은 과학적으로 의료적으로 부활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과학자들과 의사들은 부활을 믿습니다. 똑같이 이성적이고 과학을 근거하지만 왜 이러한 차이가 발생할까요?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성과 과학입니다. 이 두 가지가 신자에는 충돌하지 않습니다. 차이가 없습니다.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갖게 되면 부활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창조,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갖지 못하면 부활을 과학과 이성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이러한 두 가지가 서로 충돌합니다. 죽음에서 부활은 믿지 못합니다. 이성과 과학이 부활을 짓누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과학과 이성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부활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입니다. 우리들이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생명을 가졌기에 죽음에서 부활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죽었던 자들이 죽음에서 부활하는 것처럼 우리도 부활합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외형적으로 생로병사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우리들이 죽음을 향하여 가는 날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가는 날이 됩니다.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7장 45-56절 (십자가의 죽음-2)

어제는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의 창조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는 시간에 다음과 같은 일이 나타납니다.

(v.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적 시각에서 본다면, 죄의 제거입니다. 바울의 표현대로 첫째 아담의 죄로 창조가 파괴됐지만 둘째 아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죄가 사라지고 새로운 창조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은 일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기에 죄와 절대로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로 죄인이 되어 하나님에게 철저하게 버림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로 죽었다면 누가 승리했습니까? 사탄의 승리입니다. 사탄의 승리는 다음과 같이 나타납니다. 주님을 조롱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v.47-49)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v.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v.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마치 마귀가 첫째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게 하고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의역합니다.

(v.47-49) 거기 섰던 자 중 // 마귀가 //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여호와 하나님 부른다 하고 (v.48) 그 중의 // 마귀가 //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v.49) 그 남은 // 마귀들이 //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여호와 하나님이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예수님이 죽으신 오후 3시는 사탄이 승리하는 시간입니다. 마귀들은 잔치하고 춤을 춥니다.

우리 인생에도 오후 3시가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마귀들이 조롱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조롱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아침 해가 뜨기 직전 새벽이 가장 어둡습니다. 아침의 빛이 나타나기 직전입니다. 어두움과 빛 사이에는 종이 한 장의 차이입니다. 거의 동시적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우리에게 고난과 시련이 있다면 빛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죽음이 있다면 부활과 영생이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조롱하는 말들을 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일시적입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이러한 조롱과 비난에서 하나님의 창조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7장 45-56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1)

몇 차례에 걸처 예수님의 십자가의 족음을 다양하게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창 1:2) 흑암이 깊은데서 빛을 창조하십니다.  빛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흑암입니다.  그리고 빛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완벽합니다. 흑암은 생명의 시작입니다. 태아가 엄마의 자궁에 있을 때에 그 자궁은 흑암의 세계입니다. 그 태아가 생명을 얻는 것은 그 자궁에서 흑암에서 빛의 세계로 나와야합니다. 자궁의 흑암은 생명의 근원이고 빛은 그 생명을 주는 원동력입니다.

이 땅의 모든 생물들은 빛으로 생명력을 유지합니다. 만물은 빛이 없으면 죽습니다. 그리고 밤은 그 생명이 휴식하고 잠을 자서 건강해집니다. 만약에 밤이 없다면 모든 생명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밤이 흑암이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빛과 어두움의 창조는 완벽합니다. 하나님의 빛과 어두움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근원입니다.

그러나 Adam과 Eve의 죄로 어두움과 빛도 타락합니다.  이러한 빛과 어두움을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마 27:45)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날 시간으로 아침 9시에 못박히셨습니다.  그리고 정오 12시에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어두움은 정오에서 오후 3시에 나타났습니다.  (다른 복음서와 보면 시간 게산은 쉽지 않습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납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세상을 십자가에서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창세기의 반복입니다. 어두움을 빛 보다 먼저 창조하십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에게는 죽음을 이기는 창조의 시간, 부활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어두움, 죽음은, 예수님에 의하여 새롭게 창조되었기에 예수님은 부활하십니다.

우리는 죽음을 새롭게 이해해야합니다.  우리의 밤이, 어두움과 휴식과 안식과 건강을 얻는 것 처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죽음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감사해야합니다. 우리의 죽음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과 평안과 위로입니다.  그리고 빛이 찾아올 때에 우리는 부활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죽으시고 찾아온 어두움을 생각하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27장 32-44 (영화의 주인공 누구인가?)

우리들이 극장에서 영화를 봅니다. 똑같은 내용이지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에 내용도 다르게 나타납니다. 영화를 주인공을 중심으로 볼 수 있고 조연을 중심으로 영화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영화감독의 의도를 영화 중에서 찾으려고도 합니다.

우리는 영화를 주인공 중심으로 보는 곳에 익숙해져있습니다. 그러기에 영화 제작 할 때에 주인공에게 많은 돈을 지불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장면의 영화를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연입니다.

조연으로 구레네 시몬이 나타나고,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는 자들이 나타나고, 예수님의 양 옆에는 강도 둘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조롱하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주인공입니까? 물론 주인공입니다. 성부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는 값을 치루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상상을 초월하는 값을 성자 하나님에게 지불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영화를 보면 영화를 잘못 보는 것입니다. 본문 영화의 주인공은 조연입니다.  우리들이 주인공입니다.  예수님을 조롱하고, 옷을 빼앗아 나누어 갖고, 강도처럼 예수님을 저주합니다.

영화의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만약에 수학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비교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와 예수님 중에 누구를 더 사랑하실까요?

하나님은 예수님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기에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주십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신앙생활은 매우 힘들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죽이는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용서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영화를 보면 우리는 영화를 잘못 보게 됩니다.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찾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고 우리의 죄를 탄식해야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의 용서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음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찾아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사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27장 27-31 (뒤틀어진 옹이와 용목)

지난주에 Louisville에 다녀왔기에 글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다시 보냅니다.

Las Vegas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약 2만 명이 이상이 모인 곳에 Stephen Paddock // 스티븐 패덕이라는 백인 남성이 총으로 난사를 했습니다. 59명이 죽고 약 600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사망자는 더 늘어 날 것입니다.

경찰은 그가 왜 이러한 일을 했는지 원인을 동기를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총을 난사한 결과가 59명이 죽고 600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원인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마음에 깊은 옹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옹이는 나무가 자라면서 병이 들면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암과 같은 현상입니다.

Home depot에서 나무를 살 때에 살펴보는 것이 옹이입니다. 나무에 옹이가 있으면 그 부분이 쉽게 부러집니다. 옹이기 생기면 못이나 Screw가 박히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에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싶어 하는 마음의 상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 옹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옹이는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마음에 폭력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 폭력성을 절제하느냐 절제하지 못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폭력성에는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폭력성은 불안과 열등감에서 시작된다고 봅니다. 이러한 것들이 증오와 미움으로 변질되면서 폭력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학자는 히틀러는 자신의 어머니가 유대인 의사에게 성폭행을 당했기에 유대인 6백만을 학살했다고 합니다. 스탈린은 아버지가 알콜 중독으로 약자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고 스탈린은 자기보다 강한 자에 대한 증오와 복수로 자국민 수천만을 죽였다고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서로 다르지만 이러한 옹이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로마의 군인들이 예수님을 왕이라고 하면서, 주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머리를 때립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39대를 맞습니다. 맞을 때마다 살점과 피가 튀는 채찍으로 맞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상관의 명령에 따라 이러한 폭력을 행합니다. 로마 군인으로 사형수에게 이러한 폭력은 매우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폭력이 정당화 됩니다.

우리도 수많은 이유로 로마의 병사와 같이 당연하게 폭력을 행사합니다. 나의 정당방위로, 주어진 현실에 대한 분노와 반발로 언어적 육체적 폭력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특히 언어적 폭력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형제에게 언어적 폭력을 행사하면 지옥에 간다는 것을 무시합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옹이가 있습니다. 옹이는 나무의 다른 부분보다 훨씬 더 단단합니다. 톱으로 망치로 칼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옹이만을 사용하는 목수가 있습니다. 목수 중에서 최고의 가구를 만드는 목수는 옹이 나무를 사용합니다. 이때에 옹이 나무는 용목이 됩니다.

용목은 용의 무늬가 나무에 나타난다고 합니다. 일반인들은 버리는 나무입니다. 그러나 목공의 장인들은 아무리 비싼 값이라도 돈을 주고 사옵니다. 단단하고 아름다운 무늬 때문입니다. 용목으로 만드는 가구는 절대로 변질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가구는 부르는게 값입니다.

예수님은 목수입니다.

우리의 옹이와 같은 마음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용목을 만드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용목으로 만드시려고 마음에 옹이진자들에게 고난과 죽음을 당하십니다. 그리고 그 옹이진자들을 십자가에서 용서하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믿는 자는 용목이 됩니다.

Las Vegas 총기 사건에서 우리들이 또 한 번 확인하는 것은 우리의 폭력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우리를 옹이에서 용목으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도 폭력을 버리고, 예수님과 같은 태도와 생각으로 살아가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