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7:1-2 & 11-26 (NFL의 정신)

트럼프가 미국의 프로 흑인 운동선수 일부가 국기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문제를 삼았습니다. 그들에게 쌍욕을 하며 구단주들은 그들을 해고 시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트럼프는 나라를 애국하는 것과 운동은 서로 다른 것이기에 국가와 국기에 대한 존경심은 나타내야 한다고 합니다. 운동선수들은 국가의 공권력이 국민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거나 국민에게 억울한 죽음을 준다면 표현의 자유로 국가의 공권력에 반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트럼프는 운동과 애국은 다르다고 합니다. 흑인운동선수들은 국민은 국가에 반발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합니다. 둘 다 틀리지 않습니다.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트럼프가 맞을 수 있고, 운동선수들이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NFL (미식축구협회)는 대통령과 미국 국민들에게 정치에 스포츠를 악용하지 말라고 당당하게 경고합니다.  정치도 중요하지만 스포츠 정신도 정치만큼 중요하다고 합니다.

우리는 트럼프의 발언의 배경이 이렇고 저렇다고 말로 단정하는 순간에 비난을 당합니다. 그를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말을 하는 순간 공격을 당합니다. 그가 그러한 말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인종차별 한다고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트럼프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용어가 Culture War입니다. 직역하면 문화전쟁입니다. 애매모호한 광역적 표현입니다. 공화당과 민주당, 백인과 유색인종, 빈부의 차, 학력의 차이로 싸우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본문에도 나타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유대인의 왕이냐고 질문 합니다. 주님은 빌라도에게 내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십니다. 빌라도의 상식으로 예수님은 유대의 왕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증언은 맞지만, 증거가 없습니다. 로마를 반역할 군대나 조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증거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증언으로 맞습니다. 죄와 사망의 백성의 구세주로 오셨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빌라도가 볼 때에 증거가 없습니다. 빌라도는 로마의 법을 준수합니다. 로마는 법으로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증언은 있지만 증거가 없으면 범죄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예수님을 놓아 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백성들이 반대합니다. 유대의 왕이라고 한 자를 죽이지 않은 것은 로마의 황제 가이사를 배신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유대의 왕은 로마의 황제 가이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물에 손을 씻으면서 나는 예수의 죽음에 무죄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을 허락합니다.

빌라도는 유대 총독의 권세와 힘이 로마 황제의 손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를 죽이지 않으면 빌라도의 배신자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죽이면 그는 로마법을 지키지 않는 자가 됩니다. 이것이 그의 갈등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죄가 없다고 손을 씻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트럼프의 모습입니다. 오늘도 너와 나의 차이를 만들어 Culture war 하는 미국입니다. 우리는 서로 죄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말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빌라도와 같이 손을 씻으며 죄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NFL선수들이 발표한 마지막 문장입니다. 우리들에게, 미국의 시민들에게, 트럼프에게 경고를 보냅니다.

We understand that our job as a Union is not to win a popularity contest and it comes with a duty to protect the rights of our members. For that we make no apologies and never will.

우리, NFL은 하나의 Union, 노조로서 미국의 일반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선수들을 보호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수들의 보호를 위해 우리는 절대로 사과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사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운동선수들이 자신의 동료들을 보호합니다. 자신들은 노조, Union으로서 미국 시민들의 서로 다른 정치와 이해에 따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선수들을 보호한다고 합니다.

선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서로 다른 정치 철학과 인종과 수많은 차이가 있지만 동료이기에 마지막 한 사람도 보호하겠다고 합니다.

이제는 교회도, 신자들도 대통령도 NFL보다 못한 집단이 되는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27장 3-10 (양심과 은혜)

예수님이 가롯 유다에게 배신을 당합니다. 당시의 돈 은 삼십은 은으로 삼십 개가 아닙니다. 은은 돈을 의미하기에 은 삼십은 소 한 마리 또는 노예 한 사람의 값입니다.

금액으로 봐서 가롯 유다는 돈에 욕심을 낸 것이 아닙니다. 그가 주님을 배신 한 이유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해방시키는 정치적, 사회적 Messiah가 되지 못한 분노와 절망에 기인합니다.

가롯 유다도 예수님을 배신 한 후에 자신이 무죄한 자를 팔았고 죄를 범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그는 (v.3) 스스로 뉘우쳤다고 합니다. 영어번역은 Repented himself, Repent, 회개했습니다. 양심의 회개를 했습니다.

그는 양심의 고통으로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양심으로 고통으로 스스로 목숨을 버립니다. 양심의 고통을 이기지 못한 결과입니다. 이렇게 양심의 고통을 당했지만 그는 인류역사에서 배신의 상징적 인물이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양심적으로 예수를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을 볼 때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기에 차라리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것이 더 양심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속여가면서 신앙 생활하는 것이기에 양심상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는 양심이 있습니다. 죄를 짓고 뻔뻔한 얼굴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고 합니다. 인간이기에 기본적 양심을 지켜야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양심은 중요합니다. 선과 악을 판단하고 선과 악에서 갈등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양심의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는 양심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양심은 가롯 유다의 사촌입니다. 우리의 양심과 하나님을 비교하는 것이 전형적 인본주의입니다. 우리의 양심으로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결정하는 것은 전형적인 가롯 유다입니다. 인간의 양심으로 하나님을 떠나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우리 모두 양심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 양심은 모순과 죄악의 덩어리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모른다고 3번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닭이 울 때에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다고 합니다. 그도 양심이 있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양심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양심 불량입니다. 그는 너무나 뻔뻔합니다. 주님을 지키겠다고 했지만 지키지 못합니다. 주님을 3번 부인합니다. 그러나 그는 가룻 유다와 같이 예수님의 식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양심 불량의 인간을 교회의 사도로 세우십니다.

우리들이 양심불량으로 살아도 하나님의 은혜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양심과 비교 할 수 없습니다.

은혜는 우리를 뻔뻔한 인간으로 만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양심 불량에 근거합니다.

마태복음 26장 69-75 (죄보다 큰 은혜)

베드로가 3번 예수님을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합니다. 이러한 부인은 절대적 절망에서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재판정에서 당하시는 모습은 자신의 고백대로 하나님의 아들도 아닙니다. 죄인에 불과합니다.

소설가 최인호씨가 암에 걸려서 투병 할 때에 하나님에게 기적을 베풀어 달라는 자신의 기도가 잘못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엿장수 자신을 엿판의 엿으로 이렇게 비유합니다.

주님, 이 몸은 목판 속에 놓인 엿가락입니다. 저를 가위로 자르시든 엿치기를 하시든 엿장수이신 주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우리 주 엿장수의 이름으로 바라나이다. 아멘.

암은 절대적 절망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절망에서 하나님에 대한 전적 신뢰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엿장수이고 우리는 엿 가락입니다. 이러한 관계를 아는 것이 행복이고 성공입니다. 이러한 행복과 성공은 차원이 다른 기쁨과 행복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닭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이 기억나서 울었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왜 울었습니까? 배신으로 인하여 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울음에 의미는 예수님은 엿 장수입니다. 자신이 엿가락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알고 있었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님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통곡을 합니다.

죄가 무섭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큽니다. 죄와 은혜가 상대적 관계라면 은혜가 아닙니다. 죄가 더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죄에 비교해서 절대적 관계이어야만 은혜가 됩니다.

베드로는 배신을 했지만 예수님의 크신 은혜를 느낀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26장 57-68 (증인 아닌 증인)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닭 한 마리가 재판에 회부됐습니다. 닭이 재판을 받는 이유는 닭이 잠자는 아기에게 부리로 쪼았습니다. 재판장은 법정에 증인들을 출두시켰고 증인의 증언에 따라 닭에게 유죄 선고했고 닭은 처형이 됐습니다.

탈무드는 닭이지만 증인 없이 재판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증인이 있어야 재판합니다. 증인이 없었다면 그 닭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 닭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증인들입니다.

가야바의 법정에서 주님을 죽이려고 거짓 증인들을 세웠으나 예수님을 죽일 증거를 얻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불가능해졌습니다.

증인이 Hella로 Martus 인데 이 단어에서 순교자 Martyr 나옵니다. 증언을 하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증인이 등장합니다. 가야바가 예수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말하라고 합니다. 제사장이 유도신문을 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나사렛에 사는 목수의 아들이라고 하면 예수님은 살 수 있습니다. 이것도 사실입니다. 사실대로 증언하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사장에게 너의 말처럼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볼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증언을 하면 예수님은 자신이 죽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제사장은 자신의 옷을 찢으며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은 증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신분을 자신이 100% 맞게 증언하셨습니다. 그 결과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의 신분을 증언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십니다.

그 법정에 베드로가 있습니다. (마 16)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했습니다. 베드로도 증인으로 나설 자격이 있지만 그는 침묵을 합니다.

닭을 한 마리 재판을 해도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세상 법정에서 누가 예수님을 위하여 증언하려고 합니까? 죽음이 두려워 증언하지 못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세상에서 재판을 당하십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증인이 있어야 재판합니다. 제가 좀 전에 닭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증인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이라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위하여 죽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오늘도 스스로 우리의 십자가를 감당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인 것 같지만 증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님 우리의 연약함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마태복음 26장 47-56 (닭이 울때 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에게 입맞춤을 합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시도입니다.

(v.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가룻 유다는 자신과 입을 맞추는 자를 잡으라고 합니다.

Kiss는 상대방에 대한 사랑과 관계성을 나타내는 표시입니다. 가롯 유다의 Kiss는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그 배신감으로 예수님을 배신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게 되시자 자신의 양심의 질책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버렸습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유는 주님이 하늘의 힘을 빌어서 로마와 대항해서 유대인들에게 정치와 경제와 자유를 주는 Messiah가 되길 원했습니다.

그는 제자 중에 유일한 유대출신입니다. 당시에 예루살렘의 유대 지역과 갈릴리 지역은 극심한 지역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지방색을 극복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다른 제자들의 왕따가 극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극복합니다.

그를 가롯 유다라고 합니다. 가롯을 Iscariot으로 해석 할 수 있습니다. 단검입니다. 그는 유대의 열심 당원이였을 것입니다. 조국을 침략한 로마의 군인들과 조국배신하는 자들을 단검으로 죽이는 자들입니다. 그는 모세와 바울과 같은 애국심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돈 궤를 맡았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부 출신입니다. 어부는 땅을 빼앗긴 자들이 할 수 있는 최후의 직업입니다. 그들은 아주 무지했을 것입니다. 글을 몰랐거나, 돈을 계산하는 산수를 잘못했을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웠기에 돈을 맡았습니다.

그에게 많은 장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에 혁명을 일으키시지 않으십니다. 그의 기대와 상반됩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에 대한 실망이 시작됩니다. 그의 실망은 향유 사건과 주님의 마지막 만찬에서 잘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망은 오로지 가롯 유다만이 아닙니다. 주님의 다른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그럼으로 오늘 본문에 기가 막힌 표현이 있습니다.

(v.47)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가롯 유다를 열 두 제자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수사학적으로 열둘에 하나가 포함됩니다. 12과 1는 차이가 없습니다. 직설적으로 제자들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롯 유다와 같습니다.

베드로가 칼을 뽑고 말고의 귀를 자릅니다. 베드로는 왜 칼을 갖고 겟세마네 동산에 갔을 까요? 베드로도 겟세마네에서 유대의 혁명이 시작되기를 기대 한 것은 아닐까요? 혁명의 주체 예수님을 목숨을 걸고 보호한다는 것은 그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도 됩니다. 그럼으로 그는 칼로 말고의 귀를 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 밤에 예수님은 체포를 당합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을 체포한다면 제자들도 당연히 체포해야합니다. 그런데 제사장의 하인들은 제자들을 체포하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예언대로 주님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v.54)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함이라고 하십니다. (v.56)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성경을 이루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성경이 선지자의 글로 이루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단 하나를 가르쳐줍니다. Adam부터 인간은 하나님을 배신합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배신합니다. 가롯 유다나 다른 제자들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배신자들입니다. 이것은 오늘도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착각은 다른 사람은 가롯 유다이고 나는 주님의 제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철저하게 항상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배신합니다.

그럼으로 전설에 따르면 베드로는 닭이 울 때마다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닭은 고대사회의 시계의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도 시계로 사용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나를 배신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닭을 시계로 사용하셨습니다. 닭이 첫 번 우는 시간이 아닌 다음 시간입니다.  베드로는 나중에 닭이 울때마다, 시간마다, 때마다 괴로워합니다.

우리의 죄는 우리의 기대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우리들이 끓임 없이 하나님을 배신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루시고, 예언자들이 성경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이러한 죄인들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서하십니다.

오늘도 우리에게는 닭이 울고 있습니다. 시계를 볼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배신하지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26장 36-46 (변화산의 영광과 겟세마네에서 고난)

예수님이 십자가에 고난과 죽음을 당하시기 전에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십니다. 주님이 11명의 제자를 끌고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11명중에서 3명의 제자들을 다시 한적한 곳으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3명의 이름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날 때 함께 있던 자들입니다.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변화산은 예수님에게 영광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네에서는 주님이 (v.38-39) 주님이 고민하고 슬퍼하십니다.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3명의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모습과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의 모습에서 어떠한 생각을 했을까요?

변화산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합니다.  겟세마네는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 정확하게 나타냅니다. 제자들은 엄청난 혼돈을 격고 있을 것입니다.

(v.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첫 번 기도는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거부하십니다. 죽음이 지나가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죽음을 받아들이시겠다고 합니다. 죽음과 삶의 경계선이 나타납니다.

(v.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두 번째 기도는 세 번째에도 반복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사는 것에서 죽는 것으로 선택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변화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러나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은 3 번의 기도에서 하나님의 아들에서 죽어야 할 사람으로 변화하십니다.

이것이 겟세마네와 변화산의 차이입니다. 죄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죄 있는 자를 대신해서 죽으시는 변화가 나타납니다.

이러한 변화는 오늘 날 우리에게 똑같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의 아들로 변화됩니다. 이것은 변화산의 변화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나의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 우리는 겟세마네의 예수님처럼 됩니다.

신앙은 변화산에서 겟세마네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많은 신자들은 베드로와 같이 변화산에서 장막 셋을 짓고 그 산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영광과 승리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겟세마네을 포기합니다. 나의 십자가가 없습니다. 아픔과 고통을 거부합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같은 삶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원합니다. 강하고 높은 것을 원합니다. 세상의 승리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겟세마네로 변화하시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럼으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주님의 명령에 거부하는 것은 겟세마네에서 주님은 기도하는중에 잠자는 제자들과 같습니다.

신앙은 변화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겟세마네의 주님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나의 선택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 앞에서 십자가가 나타납니다. 우리는 오늘도 이러한 선택에서 하루를 고민하며 살아야 합니다.

저는 우리들이 이러한 고민을 한다면 오늘 하루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시는 인사를 여러분에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앞에두고 땀이 피가 되는 고민과 싸움을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민과 싸움이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마태복음 26장 30-35 (배신자)

미국이 살아가는 것이 점차로 팍팍해집니다. 과거에는 저임금에 유색인종들이 많이 일을 했지만 이제는 백인들이 일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동네 식당에 가보면 백인들이 많이 일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과거와 같이 여유 있는 미국이 아닌 것 같습니다.

속담에 광에서 인심이 난다고 합니다. 내가 여유가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 여유가 있습니다. 여유가 없으니 인심이 사나워지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소유에 의해 자신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합니다. 소유의 부족은 불안과 염려이며 소유의 풍족함은 여유와 만족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는 소유물로 봤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소유해서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해방을 성취하려고 합니다. 그들이 주님을 믿는 것 같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소유에서 대표적으로 실망한 사람이 가롯 유다입니다. 소유는 유동적입니다. 언제든지 나를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소유가 많든 적든 그 소유로 인하여 항상 불안합니다. 예수님은 자신들의 목표를 이루는 수단이며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v.31-a)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린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나를 소유물로 여기며 이제는 필요 없기에 버린다고 하십니다.

제가 어제 제자들도 가롯 유다와 같다고 했습니다. 버린다는 Hella로 Scandalizo입니다. 범죄, 죄를 짓는다는 의미도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배신의 의도를 알고 있습니다.

(v.33) 베드로는,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려도 자신은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말은 제자들이 주님을 배신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자신은 아니라고 합니다. 자신만은 절대로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왜 예수님은 닭이 3번 울 때라고 합니까?

유대인들은 일 년에 한 번 모든 죄를 용서 받는 대속죄일이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닭을 잡아서 속죄의 제물로 사용합니다. 이러한 전통은 유대인들은 바빌론의 포로가 되면서 성전이 완전히 파괴됩니다. 성전이 없기에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지 못합니다. 특히 바벨론의 포로들은 대속죄일을 당하면 제사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때에 닭을 제물로 사용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와 지금도 이러한 방법으로 제사를 드립니다.

닭이 3 번 울기 전에 나를 부인한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새벽 시간에 나를 부인한다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는 베드로가 주님을 3 차례 모른다고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합니다. 그 결과 예수님이 닭과 같은 존재가 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속죄물이 됩니다.

예수님은 배신자의 제물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배신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소유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배신자를 미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배신자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마태복음 26장 17-29 (양 다리 걸치기)

먹는 다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그러나 누구하고 먹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맛없는 음식이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음식을 먹으면 맛이 없는 것도 맛이 있습니다.

식탁은 정신과 감정을 나누는 것이고 문화가 공유되는 곳입니다. 영적 교감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이 없이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고통입니다. 맛있는 음식이지만, 자신을 배신하고 자신에게 죽음을 갖다 줄 사람과 식사를 한단느 것은 고통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팔아 버릴 가롯 유다와 식사를 합니다. 예수님은 고통의 식사를 합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와 같은 사람들이 또 있습니다.

(v.22) 제자들 몹시 근심하며 주님에게 내가 당신을 팔 사람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왜 제자들이 이렇게 반응을 합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실망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제자들의 기대대로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로마를 물리치고 왕이 되실 것 같으면 실망했을까요? 어느 여인이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었을 때에 제자들은 그 여인에게 분노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노는 예수님에 대한 분노입니다.

예수님이 왕이 됐다면 제자들은 예수님을 향유 한 병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유의 항아리에 빠뜨렸을 것입니다. 5만 불이 아니라 100만 불을 사용해도 그 여인을 칭찬했을 것입니다.

저는 제자들도 가롯 유다와 같이 주님을 배신하려고 했다고 성경을 해석합니다. 당시의 수많은 정황이 그렇습니다.  베드로의 가야바의 법정에서 부인등 많은 사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 후에 너무나 무능하셨습니다. 성전 청소 한 번 하고 그저 예루살렘과 베다니를 왔다 갔다 하십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기대하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식탁에서 예수님에게 내가 당신을 팔 사람입니까?  라고 질문합니다.

제자들은 제사장이나 성전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 일에 협조 했을 지도 모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면 살길을 찾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의 표현으로 양다리 걸친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도 양다리 작전을 합니다.  한 다리는 세상에 다른 다리는 하나님에게 걸치고 있습니다.

가롯 유다는 식탁을 떠납니다. 양다리에서 완전히 예수님에게 다리를 뺍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식탁을 떠나지 않습니다. 끝까지 양다리 걸치고 있습니다.  모두가 배신자입니다.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식탁을 떠나는 자는 배신자가 됩니다. 식탁을 떠나지 않는 자는 제자가 됩니다.  완전히 다리를 주님에게 뺀 자가 배신자가 됩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을 배신합니다. 그러나 식탁, 주님의 곁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끝까지 양다리 걸치고 계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오늘도 양다리 걸치고 살아가는 이 배신자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6장 1-16절 (우리는 누구일까요? )

우리는 누구입니까?  내가 나를 알까요?  다른 사람이 나를 알까요?  우리 자신을 그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들이 우리 자신을 아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태도에서 나타납니다.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사건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문둥병자, 시몬의 병을 고쳤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문둥병은 Hebrew로 Charas입니다. 때리는 매나 벌 받는 징계를 의미합니다. 문둥병은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벌, 하나님의 징계, 하나님이 때리는 매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문둥이를 치유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매를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동등하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되심을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첫째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과 능력을 보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야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익과 권위에 도전이 되기에 주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둘째는 백성들입니다. 예수님은 백성들에게 로마에서의 정치적 해방과 경제적 축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자신들의 현실적 문제를 해결 할 정치적 경제적 Messiah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 할 때에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환호했습니다. 그러기에 제사장들이 주님을 죽이면 폭동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자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칩니다.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면 메시아,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으며 죽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이익에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 제자들은 향유를 팔아 가난한자들을 구제 할 수 있다고 합니다. 향유를 허비했다고 비난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보다 향유의 값어치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 후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혁명을 일으키면, 영의정과 좌의정을 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예수님이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시기에 제자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습니다.

마지막은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여인입니다. 그 여인의 행동을 보시고 예수님은 나의 장례를 위함 이라고 하십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인정하십니다.

제사장, 장로, 백성, 제자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문둥병을 치유하시는 기적을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자신들의 이익과 손해에 따라 예수님을 바라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름 없는 여인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봅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립니다. 향유가 아깝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우리의 이익과 손해에 따라 바라본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릴 수 있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보면 우리 자신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2-46 (인간의 존엄-2)

어제에 이어 계속합니다.

1929년에 세계 공황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공황으로 유럽과 미국의 경제적 차이가 벌어지는 계기가 됩니다. 공황으로 유럽은 독재정권, 파시스트가 등장합니다. 한 사람이나 특정집단에 정치적 권력을 주어 위기를 극복하자는 태도입니다. 독일은 Hitler을, Italy는 Mussolini를 선택합니다.  유럽은 강한 정부를 만들려고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합니다.

이러한 선택의 결과는 사회적 정치적 약자에 대한 박해가 나타납니다. 이것이 2 차 세계 대전에서 유대인과 집시의 학살과 추방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미국은 유럽과 반대의 길을 서택합니다. Roosevelt을 대통령으로 선출합니다. 그는 뉴욕 주지사 때부터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을 사용합니다. 노인과 농민과 가난한 계층을 위한 사회 보장을 실시합니다. New Deal 정책을 선언합니다. 뉴딜은 가난한 계층에 대한 배려로 시작했지만 엄청난 효과를 발휘합니다. 2차 셰계 대전을 치루는 원동력을 제공합니다. 또한 자본가들과 정치인들의 결탁으로 막혀 있던 노조 설립을 허락합니다. 그의 정책은 약자중심입니다.

특히 그의 아내 일리노오는 당시에 흑인을 차별하는 법이 있었지만, 그녀는 흑인의 인권을 위해서 백인들과 당당하게 싸웁니다. 당시에 대부분의 흑인들이 노예 해방의 주역 링컨의 영향으로 공화당원이였지만 루즈벨트 때에 민주당으로 당적을 변경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미국과 유럽의 차이입니다. 유럽은 사회적 약자인 유대인과 집시의 학살을 방조합니다. 그들은 약자를 쓰레기 취급을 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은 미국의 정치적 사회적 지배를 받습니다. 이러한 미국의 지배는 지금도 진행중입니다.

어제 제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은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면 그것이 그 사회의 치명적 약점이 되고 결국은 기득권층이 무너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미국이 선진국을 유지 할 것인가를 이민자와 사회적 약자에게 달려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이 백인들의 고도의 정치적 판단과 경제 정책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정책이 그 국가을 가장 안전하게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정신입니다.

예수님이 사회적 소자, 약자를 돌보는 것이 나를 돌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들이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것이 우리 사회적 안정 구조로 지키며 하나님의 축복을 현실화시키는 것입니다.

인간은 존엄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피조물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했기에 그 누구에도 무시 당하거나 죽음을 당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을 얼굴의 색깔과 법적 신분으로 구별하는 것은 그 사회와 국가가 망하는 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심판입니다.

미국의 DACA의 처리는 미국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Trump의 정치적 행보는 인종과 피부의 색깔에 따른다는 것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 자신이 장로교 신자라고 합니다. 많은 백인 기독교인들이 Trump을 지지합니다.  이것이 미국의 불행의 시작입니다.  인간이 인간의 존엄을 지키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사회적 경제적 약자를 배려해야합니다.  피부색갈과 물질적 소유로 약자를 배착하는 행위는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고 하나님의 심판에 이릅니다.

우리들이 타인의 존엄을 지킬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존엄을 지켜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