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는 절대적 가치와 판단은 사라졌습니다. 상대적 가치와 판단이 존중을 받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절대적 가치로 윤리적이고, 수직적 관계가 있었지만, 현재는 상대적 가치가 이 시대의 정신입니다. 상황적이고, 윤리성보다 평등적 관계가 강조됩니다.
예를 들면 이혼입니다. 60년대만 해도 미국이나, 한국은 이혼은 절대적 가치의 영역이였습니다. 부끄럽고, 해서는 안 될 일이 됩니다. 기독교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을 파괴하는 일이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혼은 상대적으로 용납 되어지고 있습니다. 상황과 입장에 따르는 변화가 나타납니다. 만약에 1960년도 이혼의 개념을 오늘 2016냔에 사용한다면 오늘의 사회는 매우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고 성전이 새롭게 지어 진 후에 하나님이 유대인들의 특별한 기적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은 이방문화에 익숙해지면서 이방여인듫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결혼을 하려면 유대인 아내, 여자와 이혼을 해야합니다. 그러면 유대인의 가정은 파괴됩니다. 이방여인이 아내갸 되면서 우상이 들어오게 됩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이 이방여인들과 결혼을 금지하는 것은 이방여인들이 갖고 오는 우상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러한 이혼을 질타하십니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혼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버리고, 유대인 여자를 버리고, 우상의 선택입니다. 본문은 유대인 여자와 이혼하고 유대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배우자가 간음을 했다면 (마 5:31-32)에서 예수님도 이혼을 인정하십니다. 그러나 음행이 아닌 이유로 이혼하면 예수님은 간음이라고 정의하십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배우자와 자녀에 대한 가정 폭력, 육체적 학대, 인격적 살인, 심지어는 성적 학대와 폭력, 살인을 당 할 수도 있기에 이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경우 하나님의 말씀과 현실의 영역 사이에서 우리 판단에 장애를 갖게 됩니다. 선과 악의 판단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선과 악을 판단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상황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고 무겁게 자리잡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강조되어 간음의 경우에만 이혼이 허락되면, 배우자와 자녀에 대한 가정 폭력, 육체적 학대, 인격적 살인, 심지어는 성적 학대와 폭력, 살인을 참고 이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경우 우리는 이 세상에서 비극적 결말을 너무나 많이 봤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상황이 강조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약화됩니다. 물론 세상의 법은 사람의 상황이 강조되기에 이러한 경우 이혼을 허락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상황에서 어떠한 선택을 할 수 있습니까? 이러한 문제는 비록 이혼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영역에 해당합니다.
오늘 본문 17절에서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이혼하면서 하나님을 괴롭게 하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며 기쁜 일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상황을 이렇게 까지 합리화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이 당한 상황을 강조만해도 안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자비하게 우리의 상황을 죄악시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상황을 판단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합니다. 우리는 철저한 죄인입니다. 그러기에 말라기 마지막 절이 마음 깊이 다가옵니다.
(말4:5-6)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말 4: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