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4장 26-31절 (인간의 힘)

예수님과 제자들이 감람산으로 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사건으로 너희들이 나를 버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다른 사람들은 주님을 배신해도 자신을 목숨을 다하며 예수님을 지키겠다고 합니다.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는 나를 이 밤이 가기전에 나를 부인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 앞에서 더 이상의 글을 쓰지 못합니다.  제가 베드로입니다.  더 이상의 변명을 할 수 없습니다.

마가복음 14장 22-25절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실 때까지)

유물론의 특징은 자연주의를 기반으로하는 이성주의입니다.  유물론은 신의 창조를 부정합니다.  자연 자체가 완벽화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자연주의에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것을 해결 할 수 았다고 합니다.  그럼으로 신의 존재가 필요 없습니다. 이러한 사상을 기초로 인간은 기계적인 물건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정신도 육체에 속한 기능의 작동입니다.  사람은 물건이지만 생각만 할 뿐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떡과 포도주 잔을 나누어 주십니다.

[막 14:22-23]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v.23)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떡을 자신의 몸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포도주잔을 주셨습니다.

[막 14:24-25]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v.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우리와 하늘나라에서 마실 포도주는 이 세상의 포도나무에서 난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포도주는 이 땅의 포도주와 차이가 없습니다.  똑같은 포도주입니다.  포도나무는 자연의 산물입니다.  포도주도 자연의 결과입니다.

유물론자들은 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 일반 계시를 부정합니다.  그들은 자연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봅니다.  자연을 기계적 장치로 봅니다.  인간이 자연에 순응 할 때에 인간은 행복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하늘 나라에서 이 세상의 포도나무의 포도주를 마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포도나무를 나의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갖고 싸우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먹고 싶어 할 때에 나의 포도을 양보합니다.  자연의 양육강식, 적자생존을 벗어납니다.  상대방을 위하여 나의 포도를 포기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우리는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 자연을 극복하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될 때에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이 땅의 포도주를 마시게 됩니다.  이 세상과 하늘나라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우리는 물건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고귀한 자들입니다.

마가복음 14장 17-21절 (배신의 꽃)

인간관계의 가장 아름다운 꽃은 배신감입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 당합니다.  가장 믿을 만한 사람에게 실망합니다. 책임을 져줄 줄 알았던 사람이 책임을 회피 할 때에 배신감을 갖게 됩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배신자에게 참지 못합니다.

그러면 배신을 유발한 내 자신은 잘못이 없을까요?  그를 배신의 행동을 하게한 나의 잘못은 없습니까?

가룻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합니다.  그의 배신은 분명한 잘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에게 잘못하 것이 없습니까?

본문을 다른 복음과 비교해보면 제자들도 가롯 유다의 배신을 전혀 몰랐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가롯 유다의 배신을 알면서도 방조했을 것입니다.

 [막 14:18-막 14:20]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v.19)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v.20) 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제자들이 근심하며 나는 아니라고 합니다.  근심하다의 KJV 영어번역은 Sorrowful 입니다.  정말로 미안해합니다.  정말로 슬퍼합니다.  왜 Sorrowful  단어를 사용합니까?  I am so sorry for that.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나의 실수와 잘못이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도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반역자로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러면 그의 졸개들도 법적 처형을 당해야 합니다.  단 한명도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제사장들은 유대 출신 가롯 유다에 의하여 제자들의 배신을 전제로 하여 제자들은 신변을 보장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 했을까요?  왜 제자들은 예수님의 배신에 침묵하거나 방조했을까요?

예수님의 잘못이 있습니다.  그들이 소원과 희망이 되는 예수가 정치적 경제적 메시야가 되시는 새로운 국가의 건설입니다.  자신들의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제자들을 소망을 꺽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잘못입니다.  이러한 실망과 절망이 예수님을 배신하게 합니다.  이러한 일에 가롯 유다가 앞장을 서게 됩니다.

우리들이 배신자가 될 때에는 예수님이 잘못하신 것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리의 잘못이 나타날 때에는 우리들은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역학관계를 묵상하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가복음 14장 12-16절 (기적인가? 준비인가? 또 다른 기적인가?)

지난 3 주동안 Atlanta 회의, 이사와 인터넷이 설치되지 않은 관계로 말씀을 보낼 수 없었음을 이해바랍니다.  종려 주일과 고난 주일을 맞이하면서 다시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유월절 식사를 준비를 명령하셨는데 2가지로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사전에 유월절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미리 돈을 지불하셨기에 집 주인이 방과 음식을 준비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식당을 예약하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예수님이 준비하신 만찬입니다.

다른 하나는 기적입니다.  물동이를 지고 가는 남자 하인을 만나면, 그를 따라가면 주인이 방을 내어 준다고 하십니다.  그 시간에 예루살렘 성 안에 한명의 남자 하인만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유월절에 수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물동이를 지고 다녔을 것입니다.  확율적으로 한 명의 남자 하인을 만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럼으로 기적입니다.

어느 것이 맞을까요?  예수님의 기적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사전에 준비하신 것입니까?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일생이 이러한 질문에 답을 해줍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기적의 시작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사역도 많은 기적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의 사건에 초점이 맞추어 지면서 기적은 점차로 사라집니다.  특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는 기적이 거의 없습니다.  이러한 행동에 수많은 사람들이 실망을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는 결정적 이유가 됩니다.  백성들이 원하는 혁명은 하나님의 기적으로 예수님이 왕이 되는 새로운 국가의 출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십자가 밑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려오라는 조롱도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대한 기적의 갈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에서는 기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처음 믿을 때에는 기적과 같은 사건으로 믿음도 얻고,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신앙 생활이 길어 질 수록, 우리에게 기적이 점차로 사라집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신앙의 정상적 과정입니다.  신앙의 정점에는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는 십자가만 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예수가 기적입니다.  십자가의 기적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든 기적과 다릅니다.  십자가는 내가 죽고 사는 것을 경험하는 길입니다.  나의 멍에을 예수님과 나누어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해도 병들어도, 고통과 시련이 있어도,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 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기적은 지금까지의 기적과 다릅니다.  또 다른 기적입니다.

진정한 기적은 현실이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화합니다.  우리만 변하면 이 세상은 기적으로 충만합니다.

이러한 고백의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가복음 14장 10-11절 (지우개로 지워지지 않는 신앙)

가롯 유다는 12명의 제자중에 유일한 유대 출신입니다.  11명의 제자들은 갈릴리 지역 출신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지역 감정이 매우 심했습니다.  유대지역은 갈릴리 지역을 천박하게 받아들였고 갈릴리는 유대지역, 예루살렘을 착취의 대상으로 봤습니다.  갈릴리 지역은 농사가 가능하고 이러한 땅의 주인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지주들이 됩니다.

다수의 제자들이 어부입니다.  어부는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소작농들이 선택하는 최후의 직업입니다.  당시의 배로 물고기를 잡는 것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일입니다.  그럼으로 성경은 바다를 죽음의 세력으로 봅니다.  그럼으로 어부들이 예루살렘, 유대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갖지 않았을 것입니다.  유일한 유대 출신의 가롯 유다는 11명의 제자들과 함께 있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돈을 맡았습니다.  우리는 돈 세는 것을 쉽게 생각합니다.  당시에 산수를 할 수 있는 매우 적었습니다.  돈을 맡았다는 것은 그가 현명하기에, 살림과 재정을 책임졌을 것입니다.  그는 모든 면에서 탁월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아마도 그는 자발적으로 예수님에게 찾아갔을 것입니다.  성경은 가롯 유다가 제자되는 과정에 침묵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에 정치적 경제적 회복을 가장 열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됐을 것입니다.

가룻을 Iscariot으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단검입니다.  열심당원들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서 단검을 갖고 다녔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서 예수님이 왕이되어야 한다는 열정과 열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기대가 크면 상대방에 대한 실망이 큽니다.  열정이 식으면 모든 일에 냉랭하게 됩니다.

그 결과 그는 예수님을 배신합니다.  그가 은 삼십에 탐이 나서 예수님을 배신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예수님을 팔겠다고 하자 제사장들이 은 삼십을 줍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면서 배신감을 갖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날 우리의 신앙은 연필로 하나님에게 쓰는 편지와 같습니다.  연필로 많은 내용으로 채웁니다.  기도와 예배와 헌신과 봉사로 채웁니다.  그러나 연필로 썼습니다.  지우개는 연필로 쓴 글을 지웁니다.

환경이라는 지우개가 지우면 내용들이 지워집니다.  질병이 찾아오면 믿음이 무너지고, 가난이 찾아오면 하나님 원망이 찾아옵니다.  시련이 찾아오면 사람이 미워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자 신앙을 떠나 보냅니다.

우리들이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에게 볼펜으로 써야 합니다.  쓰고나면 지워지지 않을 신앙과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환경과 사람을을 이겨낼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질병이 찾아오지만, 담대해집니다.  가난이 찾아오지만,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시련이 찾아오지만, 끝까지 인내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지만, 천국 간것으로 믿습니다.  이제 부터 우리의 신앙이 지우개로 지워지지 않는 볼펜으로 쓰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14장 3-9절 (이익과 손해)

우리들은 매사를 판단 하는 기준의 하나는 이익과 손해의 분기점입니다.  우리에게 이익이 되면 일을 하지만 손해가 되면 일을 포기하거나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이익과 손해를 잘 구분 할 때에 성공과 실패가 결정됩니다.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어느 여자가 예수님에게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분노하는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향유를 팔아 가난한자들을 구제 할 수 있다고 합니다. 향유를 허비했다고 비난 합니다.  향유의 가격은 300 데나리온입니다.  약 5만불에 해당합니다.  사람들은 향유를 부은 여인을 공격하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정말로 비난하고 공격하는 것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사람들의 기대를 완전히 져버리셨습니다.  예루살렘 입성 후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십니다.  로마의 군대는 그대로 있고 백성들의 삶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습니다.

만약에 사람을의 요구대로 예수님이 정치적 경제적 메시야로 행동했다면 5만불의 향유로 그 여인은 칭찬을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매우 합당한 예우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의 장례를 위함 이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죽일 것이라고 하십니다.  향유는 예수님에게 죽음의 신호입니다.  모든 사람이 가고 싶지 않은 길을 예수님은 가십니다.  그러나 이 길이 하나님의 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예수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자신들의 이익과 손해에 따라 예수님에 대한 행동이 극명하게 차이가 나타납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익과 손해를 초월하기에 믿음의 행동을 합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이익이 될 것인지, 손해가 될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면 손해와 이익을 벗어납니다.

우리들이 손해와 이익을 벗어 날 때에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의 자리에 들어서게 됩니다.

손해와 이익을 극복하는 것이 어렵지만 믿음으로 사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가복음 14장 1-2절 (예수님에 대한 오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잡아서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발이 두려워서 유월절 명절에는 하지 말자고합니다.

제사장과 서기관이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사람들로 부터 메시야로 인정을 받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경제적 메시야로 이해했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줄 자로 봤습니다.

제사장과 서기관은 예수님을 자신들에게 도전하는 불순한 종교 세력으로 봤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을 어렵게 하는 자로 봤습니다.

또한 로마는 자신들의 군사력으로 비교 할 때에 예수님은 정치적 경제적 메시야도 아닙니다.  하나의 유대인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과 이해를 가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렇게 오해했기에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죽음을 당합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경제적 정치적 메시야입니까?  하나의 종교 창시자입니까?  그저 우리와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중심에 계시면 예수님을 이렇게 오해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예수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마가 복음 13장 3-37절 (마지막의 징조)

예수님이 마지막 때의 징조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말씀하시면서 마지막 때를 설명하십니다.  우리는 섶부르게 이 말씀을 세상의 종말로 직결을 시킵니다.  예수님이 오심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성전으로 파괴된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때가 언제 일지 알 수 없다고 하십니다.  천사도 예수님도 모릅니다.  하나님 아버지만  아십니다.

그리고 각종 세상이 마지막이 되면 어떠한 일이 일어 날 것인가를 다양하게 설명하십니다.   마지막의 현상은 믿는 자들이 고난을 당합니다.  부모 자식으로 부터 핍박과 고난을 당합니다.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납니다.  우주적 변회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파괴된 이스라엘이 회복됩니다.

이러한 일이 세상의 마지막 때에 나타날 현상들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나면 세상의 마지막에 맞습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이러한 현상은 지난 2천 년 동안 수도 없이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실상이라면 세상의 마지막은 수도 없이 나타났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마지막 때에 나타날 예수님은 재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이렇게 다양한 현상을 말씀하십니까?  현상은 실상은 아닙니다.  그러나 현상은 우리에게 경각심을 줍니다.  세상의 마지막 때가 있음을 알게 합니다.  심지어는 해와 달이 떨어져도 마지막 때는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우리에게 경고를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고를 받고 우리들이 우리의 행동을 다시 수정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v.34-35)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v.35)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우리 각자에게 맡겨진 사무 (Assigned task)에 충성을 해야합니다.  우리의 가족, 직장, 사업에 충실해야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일을 어떻게 하시는 가를 보시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집주이 언제 올지 알 수 없습니다.  세상에 마지막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러나 세상의 마지막의 현상은 우리에게 회개와 반성을 요구합니다.  이단은 이러한 현상을 마지막이라고 강조합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자고 합니다.  현실도피합니다.  현실을 부정합니다.  현실을 죄악시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마지막을 믿는 사람은 현재 우리 삶에서 충실함과 성실함을 강조하십니다.

 

마가복음 13장 1-2절 (예수님과 성전 파괴)

예수님이 성전이 파괴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아주 짧은 절이지만 이스라엘의 역사의 최고의 변화입니다.

유대교의 붕괴입니다.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됩니다.  제사장,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사라집니다.  오로지 바리세인들만 남게 됩니다.  이들이 오늘 날의 유대교의 근간을 이루게 됩니다.  바리세인들이 유대교가 율법적으로 형성되는 결정적 역활을 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제사를 드리지 못합니다.  결국 영원한 죄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럼으로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전회복입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이 회복되어야 제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되면 누가 제사장을 할 것인가 중요한 문제로 나타나게 됩니다.  제사장의 혈통이 이미 끝어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일부 한국 교회가 유대적 사상에 빠져서 성전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성경의 몇 개의 구절을 차용합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제사장직을 부인하게 됩니다.  (히브리서를 참조하시면 알게 됩니다).  그리고 성전을 건물로 오해하게 합니다.  (에베소서와 빌립보서를 참조하시면 됩니다).

또한 계시록 21장의 새하늘과 새 땅, 새로운 예루살렘을 무시하는 결과을 만들어냅니다.

오늘도 많은 한국 교회와 교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돌위에 돌하나 없이 파괴됩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

문제을 우리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해야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오신다고 합니다.  전형적 세대주의입니다.  신사도입니다.  이단적 요소가 매우 강합니다.

성전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이 계시면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과 생명에 있습니다.

 

마가복음 12장 41-44절 (가난과 부자의 경계)

예루살렘 성전 앞에는 헌금함이 있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과부가 헌금을 합니다.  예수님은 과부는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헌금을 했다고 합니다.  특히 부자보다 더 많은 헌금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금액적으로 과부의 헌금은 가장 적은 액수입니다.  예수님이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우리는 이 헌금을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아닙니다.  이 헌금은 구제헌금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앞에 가난한자들과 병자들을 위한 구제 헌금통이 있었습니다.

과부는 구제의 대상입니다.  구제의 대상이 오히려 구제 헌금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보시고 가장 적은 액수이지만 가장 큰 액수라고 하십니다.

남을 도와 주지만 의무감과 책임으로 도와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돕지 아니하는 것보다 100%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도움을 받는 사람은 이러한 도움에 모멸감을 느낍니다.  사랑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러한 도움을 받으면 남을 제대로 돕지 못합니다.  구제라는 사랑이 퇴색됩니다.

성전에 많은 사람들이 헌금하지만 그들은 진정한 사랑과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율법의 의무대로 자신의 일부를 헌금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도움을 받아 본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돕습니다.  깊이 있는 도움은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베품의 사랑을 베풉니다.  과부가 자신의 재산의 전부를 헌금한 이유는 진정한 사랑과 도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이렇게 헌금을 해도 결코 두렵거나 힘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가 부자일까요?  돈이 많으면 부자입니까?  돈이 없어 가난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부자이면 진정한 부자입니다.

누군가의 진정한 도움과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은 부자입니다.  행복한 사람입니다.

진정한 행복자는 왼손의 도움을 오른 손이 모릅니다.  자신이 누구를 도와 주는 지 모릅니다.  기억을 하지 않습니다.  도움을 받는 사람이 도움을 받는지도 모릅니다.  상대방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도움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자신의 모든 것을 헌금하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