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2장 38-40절 (이 시대의 목사)

오늘 말씀은 이 시대의 목회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아침 부터 지저분한 이야기입니다 .  예전에 어른들이 “사” 자가 들어가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똥은 개도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판사, 변호사, 의사, 목사의  똥은 개도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자 직업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위선과 모순으로 사는 가를 의미합니다.  자신은 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요구한다고 합니다.  어느 의사는 환자에게 술과 담배가 나쁘다고 하면서 술과 담배를절제하지 못합니다.  목사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교인들에게 요구하면서 자신은 제대로 살지 못합니다.

(v.38-40)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v.39)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v.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합니다.  긴옷은 신분을 상징합니다.  목사는 항상 깨끗한 정장을 합니다.  누가 봐도 목사입니다.  목사들은 교인들과 관계를 갖고 있기에 많은 문안을 주고 받습니다.  어느 자리에 가든지 상석에 앉습니다.  목사도 돈 걱정합니다.  교인들에게 헌금하라고 합니다.  목사들은 기도를 은혜롭게 해야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목사에게 하나님의 판결이 무섭다고 하십니다.  저도 무섭습니다.

그러나 칼 바르트의 말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의 은혜을 추구 (labor)하지 않는 목사(신학자)는 목사(신학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목사의 똥은 개도 먹지 않는다고 하지만. 저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갖고 씨름하며 살겠습니다.

마가복음 12장 35-37절 (기독교는 재미가 있는가 없는가?)

제가 아는 분이 이렇게 아들의 신앙을 고민을 합니다.  그 아들은 세상이 너무 재미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행복하게 크게 성공해야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예수님을 믿을 수도 없고 믿지 않을 수도 없다고 합니다.  그 아들은 기독교는 하나도 재미 없는 종교라고 합니다.  그저 할수 없어서 믿는다고 합니다.

제가 그 분에게 당신의 아들은 매우 정상입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그렇게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혈통으로는 다윗의 자손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사람의 아들, 다윗의 자손을 강조합니다.  유대인들에게 다윗의 자손은 히브리어로 메시야입니다.  헬라어로 그리스도입니다.

당시의 메시야, 그리스도는 현실 구원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도랴하게 하여 유대인들의 슬픔과 고난을 해결하는 자가 메시야, 그리스도입니다.  제자들은 항상 예수님에게 언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도래 할 것인가를 질문합니다.  예수님이 현실의 문제 해결자, 메시야,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의 시작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현세구복입니다.

종교가 현세구복으로 흐르면 전통적 문화와 습관과 결탁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 할 때에 백성들의 환호는 현실 문제 해결자의 등장입니다.  예수님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로마를 물리치고 새로운 나라의 도래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상상 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종교가 현세구복의 방향으로 가면 개인적 체험이 중요해집니다.  신비적 요소가 가미됩니다.  모든 종교에는 개인적 체험과 신비적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비와 체험이 공동체적인 것을 파괴합니다.  종교가 지극히 사적인 체험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 결과 이러한 체험과 경험을 하는 자들이 우위를 갖고 이러한 체험과 경험이 없으면 열등한 위치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종교가 현세구복으로 머누는 것을 절대적으로 반대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간으로 죽으십니다.  사람으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합니다.  우리도 십자가에 죽으면 예수님과 똑같이 죽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와 같은 사람으로 죽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종교를 파괴하시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시작은 현세구복적 요소가 있지만 정점에 가면 현세구복이 아닙니다.

이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기독교는 매우 고통스러운 종교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어도 세상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의 정점은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우리도 십자가의 길을 갑니다.  죽음을 선택합니다.

그럼으로 기독교는 하나도 재미 없습니다.

그러나 반전이 있습니다.  죽으면 부활합니다.  그럼으로 본문에서 다윗이 메시야에게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오늘도 십자가의 길을 가면 부활합니다.  포기하면 얻습니다.  인내하면 새로운 세상이 나타납니다.  당하면 위로가 찾아옵니다.  낮아지면 높아짐을 알게 됩니다.  무지하지만 지혜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매사에 체험하게 됩니다.  죽음에서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러한 세계가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현세구복은 세상의 모든 종교와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의 현세구복은 십자가 다음에 찾아옵니다.

이 과정이 되면 기독교는 재미를 초월합니다.

제가 처음에 말한 그 아들이 정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고민을 하고 신앙 생활해야합니다.

마가복음 12장 28-34절 (하나님과 인간관계)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입니다.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입니다.

이웃을 미워하면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종교적 열정이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들어납니다.

사람을 속이면 하나님을 속입니다.  사람에게 정직하면 하나님에게 정직합니다.

 

마가복음 12장 18-27절 (현세와 죽음 이후의 차이)

우리들이 궁금한 것은 이 세상의 인간관계가 죽은 후에 하늘 나라에서 어떻게 변화 되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현재의 부부가 죽은 후에 어떠한 관계가 되는가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에게 이러한 질문을 합니다.  어떤 여자가 일곱명의 남자와 결혼을 합니다.  부활후에 7명의 남자들과 어떠한 관계가 되는가를 질문합니다.

 (v.25)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고 합니다.  우리는 천사들이 어떻게 사는 지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들의 인간관계가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현재의 부부가 죽은 후에도 부부가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관계가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합니다.

(v. 26)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에 500년 전에 죽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500년 전에 죽은 이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살아있다고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습니다.

우리에게 부활은 확실하게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었지만 그들은 살아있습니다.  우리들이 그들을 만날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 이후의 관계는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마가복음 12장 13-17절 (무식하면 열정이 없는 것이 낫다)

헤롯당과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바리세인과 열심당원들은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을 하나님에 대한 배신으로 이해했습니다.  헤롯당과 바리세인들은 로마에 세금 내는 것을 정당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서로 원수입니다.  둘다 세금에 대한 반대 의견을 갖고 있지만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친구가 됩니다.  예수님이 세금을 내지 않겠다고 하시거나 내겠다고 하시면, 누구에게라도 비난과 공격을 당합니다.

특히 열심당원들과 바리세인들은 로마에 세금을 내지 않고 죽음을 당했을 것입니다.  로마의 인두세는 각 개인에게 부과 했기에 세금을 내지 않으면 죽였습니다.  아마도 일부 바리세인들과 열심당원들은 종교적 열심으로 죽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다고 자부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것과 하나님의 것에 대한 동등함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에 매우 생소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법이 세상의 법보다 더 월등하고 중요하다고 합니다.  신앙을 지키려면 세상의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것을 선택해야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순교자의 정신을 본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세상을 적대시합니다.

물론 우리들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우리의 목숨으로 표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살아가는 많은 시간들이 일상적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평범하고, 하루 하루 우리의 생계를 걱정하며, 가족을 염려하고 일을 하며 살아갑니다.  우리의 삶이 일상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중요한 신학적 변경은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에 대한 이해입니다. 종교 개혁이전에는 스콜라 철학의 영향으로 일반은총은 특별은총에 비해서 하등하거나 열등한 것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중세의 Catholic은 일상은 천박하고 교회는 특별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헤가 특별하고 우리의 일상의 삶은 일반적으로 차등을 두었습니다.  스콜라 철학의 영향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하나님의 특별은총을 설명하려고 일반 은총을 열등하게 구분합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은 이것을 거부합니다.

Martin Luther의 종교개혁은 우리의 일반적 삶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특별은총과 일반은총은 동등하게 취급을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특별은총이라는 단어 때문에 특별은총이 특별한 것으로 오해합니다.

특별과 일반은 동등한 내용입니다. 다만 특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의 입장에서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특별한 은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전혀 특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반적 은총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도 일반적 은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일반적 은총은 자연의 질서와, 군대와 경찰, 정치, 지식과 과학과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것을 하나님의 일반적 은혜로 이용하고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자연보호, 환경을 보호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일반적 은혜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반적 은총이 없으면 생존하지 못합니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인류를 멸망합니다.  해가 뜨지 않으면 우리는 죽습니다.

한국 교회는, 특히 우리들은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무시하면 특별은총을 무시하게 됩니다.  많은 한국교회는 근본주의와 세대주의 영향으로 아직도 Catholic 신학에 젖어있습니다.  참으로 우스운 것은 자칭 보수라고 하면서 카톨릭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더 심하게 카톨릭적입니다.

신학의 무지입니다.  성경도 제대로 이해 못하는 무지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은총이 더 높고 일반은총은 낮은 것으로 계급적 판단을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주시는 비와 바람과 태양을 자연신학이라고 매도 합니다.  그들은 뜨거운 열정은 있는데 생각이 없습니다.  열정은 있고 생각이 없다면 그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종교개혁은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의 동등화를 이루어 낸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러한 신학을 근거하여 만인제사장이 나타납니다. 목사와 같은 성직이나 우리들이 생업을 위하여 갖고 있는 직업이 동일한 하나님의 부르심, Calling from God입니다. 즉 Vocation 소명과 사명이 됩니다.  차이가 없습니다.

그럼으로 예수님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만약에 이스라엘을 열심당원들과 바리세인들이 통치했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동족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고 죽였을 것입니다.  실제로 열심 당원들은 자신들의 동족을 배신자라고 수없이 죽였습니다.  그들은 오늘 날의 IS와 같습니다.  당시의 로마 황제 가이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주신 일반 은총입니다.

또한 사두개인들과 헤롯당은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이 것은 하나님에게라고 합니다.

열심당원이 있습니다.  열심이 있습니다.  열정이 가득합니다.  저는 목회자입니다.  목회자가 목회자를 비난하는 것은 자신의 얼굴에 침 뱉기입니다.  작금에 일부 한국 교회와 이민 교회들의 목사은 열정은 있는데 생각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무식하면서 용감합니다.  한국 교회는 이러한 무지와 열정에 속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성경을 아전인수로 해석합니다.

한국 교회와 교인들은 숫자의 우상에 빠져있습니다.  숫자가 크면 하나님의 은총, 숫자가 작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없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Ideology에 빠져서 성경을 해석합니다.  그들에게 성경은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는 철학적 변증입니다.  차라리 열정이 없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 사고는 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는 않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이 하나님의 일반적 은총이지만 동일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라는 것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마가복음 12장 1-12절 (하루의 모퉁이돌 예수님)

이스라엘에 가보면 돌로 집을 짓습니다.  집을 지을 만한 나무가 없기에 모든 것이 돌입니다.  창문도 바닥도 심지어는 의자도 돌로 만듭니다.  이렇게 집을 짓는데 집의 크기를 결정하는 돌이 있습니다.  머릿돌 (Corner stone)입니다.  머릿돌의 크기에 따라 집의 크기가 결정됩니다.  머릿돌이 크면 아주 큰 집이 됩니다.  머릿돌이 작으면 작은 집이 됩니다.  머릿돌이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버린 돌이 집을 짓는 모퉁이의 머릿돌이 됩니다.  예수님을 기초로 새로운 종교와 신앙을 세운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럼으로 머릿돌은 두개의 기능을 갖게 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머릿돌을 버린 자들에게 머릿돌이 위에서 떨어지거나, 또는 그를 버린자들이 돌에 떨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심판을 의미합니다.

본문 마태복음에서는 머릿돌이 구원의 집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의미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루의 집을 짓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의 기초는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을 중심으로 집을 짓습니다.  자신의 물질, 건강, 인간관계, 자신의 능력으로 집을 짓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집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초는 예수님입니다.  오늘도 아침을 기도로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호흡을 주시고, 일을 하게 하시고,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하늘을 바라보게 하시고, 춥지만 좋은 날씨를 주셨습니다.  이러한 감사와 기쁨을 하루를 시작되면 우리의 집은 예수님이 기초가 됩니다.

마가복음 11장 27-33절 (예수님을 아는 법)

예수님의 대화하시는 법을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정결하신 것에 대해서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도전을 합니다.  어떠한 근거로 성전의 장사를 못하게 했느내고 합니다.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을 합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느냐, 사람의 것이냐고 질문을 하십니다.

만약에 하늘의 것이라고 하면 그들이 곤란해집니다.  분봉왕 헤롯이 세례 요한을 죽일 때에,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침묵 했습니다.  그들이 악한 제사장과 서기관이 됩니다.

만약에 사람의 것이라고 하면 더 곤란해집니다.  많은 백성들이 세례 요한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 믿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백성들과 다투게 됩니다.

너희들이 이것을 대답하지 못하면 나도 너희에게 대답을 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상대방이 공격적이지만 상대방의 공감을 얻으시고, 자신의 입장을 나타내십니다.  상대방에게 자신의 사건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으시고, 간접적으로 표현하십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이해해야, 나를 이해한다고 하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에게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나를 알고 싶으면 다음의 질문에 대답하라고 하십니다.

너의 옆 사람이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냐? 그저 사람이냐?

우리의 아내와 남편, 자식, 형제와 친구가 누구입니끼?  하나님이 보내셨습니까?  그저 만난 사람입니까?

우리의 대답에 따라 우리의 삶은 엄청나게 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게 됩니다.

 

 

 

마가복음 11장 19-26절 (하나님을 믿음으로 사람을 믿어준다)

잎은 무성하지만 열매 없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말라 죽게 하신 것을 보고 베드로가 주님에게 무화과 나무가 말라버렸다고 합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을 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고 합니다.  믿고 기도하는 대로 응답받는다고 하십니다.  누구든지 기도하면 산이 바다에 던져 진다고 하십니다.  의심하지 아니하고 기도하면 그대로 되어 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서로 용서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많은 대화와 질문을 보면 누군가  A라고 질문하면 하면 A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많은 경우에 B로 대답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도 같은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그날 성전을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건들을 B로 대답하십니다.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과거의 시대입니다.  그러기에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을 정결하게 하십니다.  무화과 나무는 구약입니다.  율법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는 새로운 시대를 여십니다.  믿음은 율법이 아닙니다.  신약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어지는 새로운 시대입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믿음을 율법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믿으면, 기도하는대로 우리들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도식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율법입니다.  율법은 내가 하는 것 만큼 보상을 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믿음을 강조하시는 이유는 믿음은 하나님과 교제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해서 우리의 소원을 이루는 것이 믿음의 목적이 아닙니다.  산이 들려서 바다에 빠지게 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산이 들려서 바다에 빠져 가는 중에,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v.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과 믿음의 교제를 하는 사람은 사람과 정상적 교제를 합니다.  인격적 교제를 합니다.  하나님과 믿음으로 일치하면 사람과 일치합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사람과 인격적 교제를 잘 하고 있다면 산이 바다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과 교제가 없다면 산은 아직도 산에 있습니다.

우리의 수많은 문제가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간적 관계성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너와 나의 인간 관계에서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확실해지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가복음 11장 15-19절 (비본질에 분노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이 성전의 장사에 대해 분노하십니다.  그러면 왜 성전에서 장사를 했을까요?

제사의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성전 세금을 냈습니다. 성전 세금은 90% 이상의 은을 함유한 순수한 은화만 받았습니다.  당시의 로마의 은전은 너무나 많은 이물질이 썩여있었습니다.  유대이들의 은전이 순도가 가장 높고 정확했습니다.  성전 세금을 이스라엘의 동전으로 환전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제물은 순례자에게 매우 편리하고 좋은 일입니다.  이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날의 교회가 교인들에게 많은 편리를 제공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는 Community Center입니다.  교인들에게 많은 편리를 제공해야합니다.  자녀들의 교육과 교인들의 사회적 문화적 발전을 도와야 합니다.  이민자를 보호하고,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책임을 가져야 합니다.  이 시대의 여려움을 극복하는 교육적 Program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성전의 장사 지역은 이방인의 뜰입니다.  이방인의 예배의 자리를 빼앗습니다.  죄인들의 예배자리, 세리와 창기들의 예배자리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배 드려야 할 곳에서 장사를 했습니다.  이방인들과 죄인들이 예배를 드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합니다. 만민은 고자와 이방인, 모든 죄인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는 장소입니다.

오늘 날의 교회는 예배와 교인을의 편리응 위한 사회적 책임과 돌봄을 다하려고 합니다.  이 시대의 새로운 교회의 모습입니다.  너무나 당연힌 일입니다.

그러나 본질이 비본질을 추월 할 수 없습니다.  비본질이 본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본질에 먼저 충실하면 비본질에 충실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예배로 시작해서 모든 것에 충실한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마가복음 11장 12-14절 (종교적 속임)

예수님은 시장 하시어, 무화가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 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무화과의 열매를 구하십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열매를 구하시는 이유는 잎사귀가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잎사귀가 풍성하면 열매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무화과에 속으셨습니다.  잎은 풍성한데 열매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 나무를 저주하십니다.  참으로 무서운 내용입니다.

오늘 날 우리들은 잎은 풍성합니다.  종교적 행위는 풍성합니다.  기도와 예배와 선교와 전도의 잎은 풍성합니다.  그러나 열매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찾으시는 열매는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선교하고 전도하면서, 우리들이 얼마나 변화했습니까?  우리들은 타인은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변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예배를 드리자고 하지만 우리의 악한 습관은 그대로입니다.  많은 기도하지만, 나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전도하고 선교하지만, 나의 불만과 원망은 그대로입니다.  잎은 무성한데 열매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종교적으로 풍성하다면 열매를 보여달라고 합니다.  세상보다 잘난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합니다.  우리는 종교적으로 세상과 다른데 우리 살아가는 모습은 세상과 차이가 없습니다.  결국 열매가 없습니다.  차이가 종교적 행위로만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열매를 먹고 싶어하십니다.  잎은 무성한데 열매가 무엇이냐고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