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3:29-39 (정상적 인간, 정상적 인격)

아주 본질적 문제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천국에 간다고 합니다.  그러면 지금 예수 믿고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직전에 가장 신랄하게 공격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 사두개인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이 전체가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니고데모,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숨어서 예수를 믿는 종교지도자들도 있습니다.

(v.29-30)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이러한 예언자들의 무덤을 화려하게 장식합니다. 이러한 의인들에게 기념비를 세워줍니다. 악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은 이러한 의로운 선지자들이 조상에게 핍박 받으며 죽은 것을 안타깝게 여깁니다. 자신들이 조상들과 같이 선지자와 의인을 죽이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날까요? 왜 조상들의 실수를 반복할까요?

우리들도 나는 저러한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합니까? 좀 더 직설적 표현하면 우리를 왜 똑같은 죄를 매일 반복하면서 살아갑니까?  매일 회개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렇게 살다가 천국가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신앙은 인격입니다. 우리에게는 미래의 하늘나라가 있고 현재의 세상이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중간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격의 변화입니다.  많은 신자들은 이러한 인격을 신앙과 무관하게 생각합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는 율법을 다 지켰기에 완벽한 종교인입니다. 예수님이 너의 것을 팔아 가난한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그는 근심하며 주님을 따르지 못합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까? 그는 인격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따르지 못합니다.  그의 물질과 돈이 그의 인격을 압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물에 손을 씻으면서 자신이 예수를 죽이는 것에 죄가 없다고 하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죽음으로 보냅니다. 왜 이러한 모순의 행동을 합니까? 빌라도는 예수님을 만났지만, 인격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은 인격입니다. 나의 인격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감당하는 인격이 되지 못하면 평생 신앙 생활이 매우 고생스럽습니다. 종교로 자신을 증명하려고 노력하는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위선자가 됩니다. 자신의 열심과 능력으로 자신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한국 교회는 이러한 거짓의 행동을 축복이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극단적 성령주의에 빠져서 자신의 인격을 상실하는 영지주의자가 됩니다. 세상과 분리하려고 합니다. 세상을 왜곡하고 자신의 인격과 양심을 믿지 않습니다. 극단적 이원론을 지지합니다. 이성과 분리되는 행동을 합니다. 세상의 법과 질서를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자들을 화인 맞은 양심이라고 합니다. 성령님을 인격의 영으로 믿지 않습니다.

신앙은 인격입니다.  정상적인 인간이 되어서 하늘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정상적인간으로 만들어 놓으시려 합니다.  정상적 인간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르는 인격입니다.

One Reply to “마태복음 23:29-39 (정상적 인간, 정상적 인격)”

Leave a Reply to 홍두식 Cancel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