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신학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손에는 손바닥과 손등이 있습니다. 손바닥은 부드럽습니다. 무엇인가를 잡을 수 있습니다. 손바닥은 포용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손등은 딱딱합니다. 무엇인가 잡지 못합니다. 손등은 포용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손등이 없는 손이 없고 손바닥이 없는 손이 없습니다. 손은 손등과 손바닥으로 구성되어 집니다.
세례 요한은 주님에게 우리들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합니까? 세려 요한은 예수님이 자신이 기대하는 Messiah와 다르기에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현실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메시아는 자신과 민족의 미래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의심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의심하는 요한에게 이렇게 알려주라고 하십니다.
(v.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왜 예수님은 이러한 기적의 사건을 말씀하십니까? 기적은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는 표적입니다. 기적은 세상의 일반적 법칙을 파괴합니다. 나병환자가 깨끗해집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납니다. 기적은 일반적 법칙이 파괴되고 하나님의 법칙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기적을 기다립니다. 예수님이 정치적으로 로마를 멸망시키고, 경제적으로 모든 백성들에게 풍족함을 선물하고 종교적으로 예루살렘의 제사장들과 종교인들이 새롭게 회개하고 변화해야합니다. 세례 요한은 이러한 기적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맹인이 눈을 뜨는 것은 맹인에게 기적이지만 우리에게는 기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맹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면 죽은 자에게 기적이지만 우리에게 기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세례 요한에게 5절의 기적은 기적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의 기적과 예수님이 보여주는 기적이 자릅니다. 이러한 차이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의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바닥을 보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내가 경험한 손등의 하나님을 보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세례 요한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손등의 하나님이라면 그는 손바닥의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기적이 있습니다. 신비가 있습니다. 그러나 손등이나 손바닥의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손등과 손바닥을 동시적으로 경험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교리적으로 믿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신학적으로 해석하지 말라고 합니다. 저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의도는 이해합니다. 그러나 아주 무지하고 사악한 소리입니다.
우리의 경험과 체험으로 하나님을 설명하면, 하나님을 손등이나, 손바닥으로 이해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설교의 가장 무서운 독성은 우리의 죄를 우리들이 이겨 낼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체험하면 모든 것을 이겨 낸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성을 부정합니다. 설교하는 자도 이러한 독성을 모를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에 대한 교회의 신앙고백과 교리와 신학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손바닥과 손등을 알려줍니다. 신학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손의 구조를 설명합니다. 교리는 손등이나 손바닥으로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일 계속합니다. 좋은 하루를 만들어내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