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장 1-6 (예수님에 대한 실망-1)

우리는 기대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기대합니다. 조국에 훌륭한 지도자가 나올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그 일이 좋은 일리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의 희망을 저버리지 아니 할 것을 기대합니다.

이렇게 기대하는 것이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요? 희망이 절망이 되고 배신감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 배신감은 분노로 나타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마 3:11-12)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주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며 자신은 주님의 신발도 들 수 없다고 합니다. 주님이 손에 키를 들고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신다고 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한 엄청난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늘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킬 메시아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하신 일을 듣고 그는 절망합니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소식을 듣습니다.

제가 목회자로 고급 식당을 전전하고 비싼 요리에 술에 취하고, 제가 만나는 사람들이 창녀 도둑 전과자 이완용 같은 매국노와 술 마시며 어울린다면 저는 여러분의 기대에 못 미칩니다. 제가 목회자답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의 목회적 자질과 자격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제가 성경을 배경적으로 해석을 하면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배신했습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제자들을 공유했습니다. 오늘 날의 표현으로 공동으로 사역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체포되자 예루살렘에서 도망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배신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과 같이 부정한 죄악을 고발하지도 아니했고 갈릴리로 탈출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모든 행동이 매우 실망스러울 뿐입니다.

그러기에 세례 요한은 주님에게 우리들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합니까?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Messiah 이냐고 질문합니다.  당신은 내가 기다리는 메시아가 아닌 것 같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며 기대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기대치를 충족시키는 것을 믿음이라고도 합니다. 더 쉽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대대로 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기대하는 예수님은 우리의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고 두 번 다시 그러한 어려움을 당하지 않게 해야합니다. 우리에게 사회적 신분적 경제적 자유를 허락해야합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까? 이렇게 나의 기대를 채우지 못한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나, 부처를 믿는 것이나, 다른 종교의 신을 믿는 것과의 차이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종교들은 믿는 자들의 기대치를 채워주는 현상이 있습니다. 이것을 現世球福 (현세구복)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기대치가 충족되면 자신의 종교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나의 현실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신이 나의 미래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현실을 해결하면 우리의 미래를 해결 할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에 대한 의심을 갖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우리의 기대에 응답하십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까?  우리에게는 많은 실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망이 2 천 년 전의 세례요한의 질문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에 대한 실망을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내일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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