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1장 18-22 (종교적 잎사귀와 인격의 열매)

(v.18-19) 주님이 이른 아침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시면서 배가 고프셨습니다. 주님이 무화과나무를 가서 보시니 잎사귀만 무성합니다. 열매를 얻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말라버렸다고 합니다.

이때는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을 때 가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열매가 없다고 나무를 말라 죽게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상상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무화과는 잎이 무성하면 열매가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열매는 없습니다. 잎사귀가 있으면 반드시 열매가 있습니다. 포도에 포도 잎이 있어야 포도의 열매를 얻습니다.

예배와 선교와 전도와 봉사는 우리의 잎사귀입니다. 열매는 우리의 인격입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서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다음과 같습니다.

(갈 5:22-26)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v.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v.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v.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v.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우리 신앙의 열매는 인격적입니다. 우리는 인격으로 구원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격은 구원의 열매입니다.

유대인들은 종교적으로 화려한 잎사귀를 갖고 있습니다. 그들의 안식일과 종교적 율법을 행하는 것은 대단한 열정과 의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우리의 열매를 확인해주는 사람들은 우리 옆에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종교적 잎사귀를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격의 열매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21장 12-17절 (진짜 장사꾼과 가짜 장사꾼-3)

그러면 왜 성전에서 장사를 했을까요?

유대인들이 하나님에게 제물을 드릴 때에 유월절 제물은 흠이 없는 1년 이하로 드려야합니다. 만약에 갈릴리에서 제물을 예루살렘까지 끌고 오면 4-5일 걸어오면 제물이 상합니다. 외국에서 오는 순례자들은 제물을 갖고 올수도 없습니다. 그럼으로 제물을 예루살렘에서 구입하는 것은 매우 편리하고 좋은 일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성전 세금을 냈습니다. 성전 세금은 90% 이상의 은을 함유한 순수한 은화만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에 다른 이물질이 섞이는 것을 불경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마의 은화는 순도가 매우 떨어졌습니다. 그럼으로 성전 세금을 이스라엘의 동전으로 환전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제물의 구입도 돈을 환전하는 것도 하나님에게 예배드리는 순례자에게 매우 편리하고 좋은 일입니다.  이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성전의 가짜 장사꾼들은 이방인과 고자들의 예배 장소를 빼앗아 이러한 편리 제공하고, 경제적 이익을 취합니다.  이러한 장사가 이루어지는 장소가 이방인의 뜰입니다. 장사를 위해서 이방인의 예배의 자리를 빼앗습니다. 고자들의 예배의 장소를 빼앗습니다. 이것이 아주 사악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합니다. 만민은 고자와 이방인, 모든 죄인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가짜 장사꾼에 의하여 성전에서 이방인과 고자들이 배척을 당합니다. 이러한 행동이 가짜의 특징입니다.

어제까지 형제와 자매였지만 자신과 성경적 이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의 교회와 예배를 무시하는 것은 가짜의 특징입니다.

오늘 날의 가짜 장사꾼들은 자신의 신앙적 선명성을 강조하려고 타인의 신앙을 무시하고 짓밟습니다. 자신들의 정당성을 강조하려고 타인의 죄악성을 들추어냅니다. 자신들만이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기에 하나님과 같은 심판권을 갖고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가짜는 자신의 정당성을 강조합니다. 자신의 의를 강조합니다. 가짜는 자신의 죄악을 들어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하나님만이 성전, 교회의 주인입니다.

진짜 장사꾼은 성전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배와 교회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인정합니다. 자신의 정당성보다는 죄악성으로 부끄러워합니다. 진짜는 모든 예배와 교회가 하나님의 주권과 심판에 있음을 알고 비난하고 공격하기를 두려워합니다.

타인의 예배의 자리를 빼앗지 않는 진짜 장사꾼이 되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21장 12-17 (진짜 장사꾼과 가짜 장사꾼-2)

어제 성전의 장사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장 외부지역에 해당하는 이방인의 뜰에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성막이나, 솔로몬 성전은 유대인과 이방인, 남성과 여성으로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성전을 이렇게 구별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가장 나중에 세워진 헤롯의 성전에만 이방인의 뜰이 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신명기와 같은 말씀에 이방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못합니다. 유대인으로 절름발이, 소경, 신체불구자들 고자는 제사장도 될 수 없고 제사도 드리지 못합니다.

유대인이지만 이방인과 동일한 취급을 받아 제사를 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사 56:3-8)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v.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v.5)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v.6)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v.7)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메시아가 오시면 하나님은 성전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기 위하여 이방인과 고자를 구원하시겠다고 합니다. 고자는 신명기의 신체불구자를 대표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 할 때에, 이방인과 고자를 성전 출입을 허가하지만, 유대인의 여자의 뜰, 유대인 남자의 뜰, 제사장의 뜰에 오면 죽음을 당한다고 경고문을 써놨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합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이지 이방인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럼으로 유대인들은 절대로 메시아를 만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성전이 우상입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유대인은 이방인과 고자와 똑같은 사람이 된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전 설계에서 나타납니다.

그럼으로 예수님은 성전이 철저하게 파괴 될 것임을 예고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메시아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자신을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지 못합니다. 그럼으로 이방인의 뜰에 가짜 장사꾼들이 판을 칩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에게도 나타납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만만이 기도하는 집이 아닙니다.  고자와 이방인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다음과 같은 이유입니다.

첫 번째는 교회의 교인들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돈이 없으면 신앙생활을 당당하게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교회에 돈의 우상 맘몬이 들어와 있습니다.  교인이나 목사나 장사를 합니다.

두 번째는 한국 교회는 교회의 역사적 과오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에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 가장 공격적 집단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사회적 약자와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복음 전도라는 목적을 갖습니다.  왼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게 합니다. 이러한 태도로 우리는 약자의 구제를 통해서 전도와 선교의 장사하고 있습니다. 조건부 장사입니다.  이것은 가짜 장사꾼의 태도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 진리를 확신하면 세상의 다른 종교를 공격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절대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으기에 타 종교를 공격해서 우리의 진리성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들이 갖고 있는 진리가 상대적이라고 인정하는 최악의 하수입니다. 본전마저 까먹는 장사를 합니다.

네 번째는 한국 교회는 신학교가 교회를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신학교를 인도합니다. 한국 교회의 신학은 무식한 대형교회의 몇 몇 목사에 의하여 좌지우지됩니다. 독일에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신학자들이 신학교에서 대형교회 목사의 신학수준인 5-60년대 신학을 가르칩니다. 대형교회의 목사가 신학교의 이사나 총장직을 맡기에 목사의 신학적 노선이 일치하지 않으면 임용이 되지 못합니다.

신학교는 학교입니다. 교회가 아닙니다. 신학교는 수많은 지식과 논쟁을 거쳐서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를 변증 하도록 교육하는 곳입니다. 이러한 변증이 없으면, 신학적 토론, 즉 철학적 구성력을 갖지 못하면 목사는 믿으라는 말만하거나, 교인들을 달래주는 설교나 축복하는 설교를 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엄청난 보화를 무식하고 무지한 돼지들이 마구 사용하고 있습니다. 많은 거짓의 장사꾼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거짓의 장사꾼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십니다.

한국에 귀한 목사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의 채찍에 맞고 쫓겨 날까봐 성전 구석에서 오늘도 벌벌 떨고 있습니다.

마태 21장 12-17 (진짜 장사꾼과 가짜 장사꾼)

우리들이 Business을 많이 합니다.  사업을 하면 진짜로 장사하는 사람이 있고 가짜로 장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은 가짜 장사꾼입니다.  그러나 돈보다 신용과 명예와 높은 목적을 갖고 장사를 한다면 그는 진짜 장사꾼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 쫓습니다.  예수님은 진짜 장사꾼입니다.  그럼으로 가짜를 내어 쫓습니다.

장사를 하려면 장소가 중요합니다.  본문은 성전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장소는 이방인의 뜰입니다.  성전은 4개의 구역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가장 중심이 제사장의 뜰입니다.  유대인 남자의 뜰입니다.  유대인 여자의 뜰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뜰이 가장 외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가짜들이 여기서 장사를 합니다.  이방인의 예배 장소입니다.  이것이 가짜들의 특징입니다.

오늘 날의 가짜는 에배를 상품화했습니다.  예배의 주체가 하나님인데, 예배를 드리는 사람을 중심으로 순서를 구성합니다.  사람들에게 얼마나 감동을 주고, 얼마나 위로를 받고 얼마나 하나님에게 열정을 나타낼 것인가에 관심을 갖습니다.  예배당이 시장이 되는 순간입니다.  뜨겁고 눈물이 나고, 회개의 열정이 있어야한다고 합니다.  예배의 주체가 인간으로 전락하는 순간입니다.

예배에서 열정과 감동과 회개와 눈물이 있는 것은 매우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표가 되면 예배의 주체는 우리가 되고 하나님은 객체가 됩니다.  오늘 날의 교인들은 감정이입이 없으면 예배를 드린 것 같지 않다고 합니다.  가짜 장사꾼에게 물건을 사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말을 합니다.  예배당에 불을 끄면 Night Club와 똑같다고 합니다.  너무나 가혹한 비유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배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로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 열정과 감정과 감동이 필요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를 통해서 이것을 발산하거나 이러한 것을 얻으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예배는 예배입니다.

예수님이 장사꾼이라는 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장사꾼으로 오시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럼으로 가짜를 쫓아낼 권리를 갖고 계십니다.  내일 부터 예수님이 장사꾼되심을 설명하겠습니다.

오늘도 좋은 장사꾼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21장 1-11 (다윗의 자손에서 십자가의 예수로)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입니다.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감람산에는 예루살렘성이 내려다보입니다. 예수님의 뒤에는 여리고 에서부터 따라온 무리들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많은 사람들도 예수님의 오심에 흥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에게는 십자가에서 죽을 장소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에 의하여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장소입니다. 깊은 오해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오늘도 이러한 현상은 설교에서, 교회에서 가장 잘 나타납니다.

긍정적 사고방식은 한국 교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설교의 공통점은 우리들이 믿는 대로 입으로 시인하고 그것을 얻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라고 위로하십니다. 그 결과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없기에 죄의 고발이 없습니다.

율법은 무시하고 하나님의 사랑만을 강조합니다. 죄책감 갖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만을 기대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행을 기억하시고 그 선한 행위로 우리를 돌보아 주신다고 합니다.

새로운 율법주의입니다. 새로운 공로주의입니다. 전형적인 구원파입니다.

이들은 우리의 죄에 대하여 분노하시고 벌주시는 하나님은 그들의 성경해석과 맞지 않습니다. 죄를 징계하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초대 교회의 이단 영지주의와 Marcion과 아주 흡사합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그들과 상관이 없습니다.

본문에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칩니다. 호산나의 의미는 우리를 구원해 주옵소서. 주님을 세상으로 왕으로 호칭합니다. 왕으로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해결자, 메시야입니다.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님은 언제나 다윗의 자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면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복음은 십자가에서 시작합니다.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우리도 십자가에서 세상을 이기는 비밀이 시작됩니다. 거짓에 속지 않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20장 29-34 (나의 십자가)

두 명의 소경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앞을 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소원은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들은 눈을 뜨려고, 예수님에게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눈을 뜨게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묻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길 원하느냐?  그들이 예수님에게 눈 뜨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눈을 뜨게 해주는 의사입니다.  그들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주는 해결사입니다.  희망을 주는 분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눈을 뜨게 해주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20장에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죽음과 고난을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나의 죽음과 고난의 잔을 마시겠느냐고 질문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 할 것인가로 다툽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의 맹인도 이러한 예수님의 죽음과 고난을 길을 몰랐습니다.  그러기에 눈을 뜨게 해달라고 합니다.

만약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고난을 알았다면, 제자들이 서로 높은 자리 차지하려고, 다투었을까요?

맹인들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시는 것을 알았다면 눈을 고쳐 달라고 소리를 쳤을까요?

종교에서 우리의 소원을 이루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원을 간구하기 전에 최소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고난을 생각해야합니다.

우리는 누군가 고난을 당하는데, 그에게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누군가 죽음을 당하는데, 그 사람에게 나를 살려 달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입장을 배려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십자가을 생각해야합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면 우리의 문제와 어려움은 아주 작게 보입니다. 나의 십자가로 나타납니다.  내가 마실 잔입니다.

나의 십자가가 없으면 예수님은 나의 문제 해결사가 되어야 합니다.  제자들과 두명의 맹인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알지 못합니다.  그럼으로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문제가 크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있으면 나의 문제는 나의 십자가 됩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됩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고 생명과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에 만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의 문제와 어려움을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시간에 해결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마태복음 20장 17-28 (죄의 고백)

왜 이렇게 악할까?

왜 이렇게 교만 할까?

왜 이렇게 참지 못할까?

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할까?

우리에게 나타나는 심성은 정말로 더럽습니다.  겉은 멀쩡하지만 우리의 속은 다 악한 냄새가 납니다.

이러한 표현을 양해바랍니다.  우리의 오장육부에는 배설해야 할 물질로 가득차있습니다.  냄새나고 더럽고 각종 병균들로 가득찬 것들입니다.  이것을 똥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신비합니다.  이러한 우리 오장육부안에 있는 오물들을 냄새가 나지 않게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기가 막힌 피조물입니다.  자신의 몸에 있는 더러운 오물을 자신은 냄새 맡지 못합니다.

저는 종종 개들이 우리들에게 다가와 냄새를 맡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개는 우리 몸의 냄새, 오물의 냄새를 맡을 것입니다.  어떤 개들은 암 환자의 냄새를 맡는다고 합니다.

저의 진심입니다.  저는 개 앞에서 창피합니다.  개에게 미안 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개가 두렵기도 합니다.  개는 나의 더러운 냄새를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종종 개만도 못합니다.  저는 개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개의 냄새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만도 못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냄새는 귀신처럼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약점은 누구 보다도 잘 알고 공격을 합니다.  세치 혓 바닥으로 찢어진 눈으로 벌어진 입술로 허공을 치는 손으로 상대방의 죄악을 성토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는 개보다 잘 냄새를 맡습니다.

오늘 본문에 우리와 똑같은 인간들이 나타납니다.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는 상관 없이 누가 세상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 할 것인가로 다툽니다.

오늘도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우리와 예수님의 십자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기도합니다.

예수님 저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똥같은 저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지금 주님에게 드릴 것은 아주 짧은 길이의 눈물 몇 방울과 저의 우울함입니다.

그러나 기도가 끝이 나면 저는 오늘도 다시 한 번 똥같은 인간이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개를 두려워하고, 사람을 두려워하고 오늘을 살 것입니다.

예수님 이 글을 마치기전에 다시 한 번 간구합니다.

저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마태복음 20장 1-16 (예수님의 자본주의)

Karl Marx (칼 마르크스)는 영국의 산업 혁명과정에서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의 착취와 어린 아이들이 노동현장에서 당하는 비인간적 모습에 분노합니다.

그는 정치, 경제, 문화, 수학, 물리, 과학, 철학등은 인류 역사에서 인간을 위하여 정상적 진화의 과정을 거쳐 왔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종교는 타락했다고 합니다. 초기 기독교는 약자와 가난한자의 종교였고, 인간을 위한 종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억압당하는 자의 하나님이며, 착취자를 응징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출애굽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종교는 시간이 가면서 인간에 의하여 변질된다고 합니다. 중세의 교회는 왕과 영주를 위한 종교로 농민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고 합니다. 자본주의 시대에는 종교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억압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교회가 미래의 천국을 강조하면서, 현실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인민, 노동자에게 환상적 미래를 종교적 목표로 만들어 버리기에 인민은 종교라는 아편에 취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그럼으로 종교는 사라져야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진화론에 의한 종교의 변질과 타락은 러시아의 레닌에게는 진리가 됩니다. 당시 러시아 정교의 타락은 마르크스의 논리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가 공산혁명의 선두가 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러시아 종교의 타락이 매우 컸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본주의에서 돈이 종교이며 돈이 신이라고 갈파합니다. 매우 정확한 지적입니다. 자본주의에서는 돈이 신입니다. 그는 이러한 자본주의에 기독교가 큰 역할을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돈을 신으로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럼으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무너지면, 인민은 종교에서 해방이 된다고 철학적 논리를 갖게 됩니다.

오늘 날 교회에서 강조하는 물질적 축복과 사회적 성공은 마르크스의 비난과 조롱을 피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잘되고, 명문 가정이 된다는 설교는 기독교를 자본주의 일부로 예속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저질 목사는 말씀의 강단을 훼손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자본주의에서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기독교 신자들은 반성해야합니다. 이러한 설교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신자들은 기독교를 저질로 만드는 것입니다.  무식한 목사를 교회 강단에 세워서 자신들에게 위로와 힘을 얻으려면 교인들은 이 시대에 우상숭배자들입니다.

이러한 논리는 기독교 신학과 정신에도 맞지 않는 미신적 행위입니다.  그 결과 일부 교회와 교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는 상관없는 교회와 교인들이 됩니다. 마르크스 주의자들에게는 타도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자본가, 농장의 주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v.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주인은 일꾼들에게 하루 일당 한 데나리온을 약속합니다. 그는 아침 9시, 정오, 오후 3시. 저녁 5시에도 일꾼을 찾으러 갑니다. 그는 오후 5시 만난 사람에게, 왜 여기서 놀고 있느냐고 합니다. 우리들을 품꾼으로 쓰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오후 5시에 돈을 주고 품꾼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병들었거나 늙었거나 무능한 노동자들입니다. 주인은 그들을 노동자로 사용합니다.

오후 6시가 되자 임금을 지불합니다. 가장 무능한 자 오후 5시에 온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 받습니다. 이것을 바라보는 아침 일찍 온 사람들은 한 데나리온 이상을 받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들은 오후 5시 보다 거의 11시간 이상을 일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이에 대해서 일찍부터 일했던 많은 사람들이 불평을 합니다. 왜 우리에게 더 많은 돈을 주지 않는 가입니다. 그들이 매우 정당한 것 같습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모든 노동자는 노동시간에 따르는 임금은 평등해야합니다. 공산주의 입장에서 예수님은 자본가로 평등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렇게 임금을 주는 태도는 아담 스미스의 노동자는 상품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만큼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노동 가치에도 맞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에도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노동자에게 포도원의 일을 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들이 일을 해서 하루 생계를 유지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돈을 주는 목적으로 일꾼을 찾아다녔습니다.

당시의 노동자는 한 데나리온이 있어야 한 가족이 하루의 식사와 생계를 해결 했습니다. 만약에 아침 일찍 온 사람들과 비교해서 돈을 주면 오후 5시에 온 사람의 가족은 굶습니다.

예수님의 자본주의는 공산주의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자본주의는 오늘 날의 자본주의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자본주의는 하늘나라의 자본주의입니다.

예수님의 자본주의는 이 시대의 경쟁관계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행동 할 수 있는 경제체계와 거리가 있습니다. 매우 비현실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되는 자가 먼저 된다는 것은, 천국은 이러한 경제체계라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우리의 천국, 미래의 경제체계가 이러하다면 우리들이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돈을 사랑하는 것에서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돈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늘 나라의 자본주의대로 살아가려고 우리는 발버둥 치며 살아갈 뿐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살려고 발버둥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19장 27-30 (먼저 된자 나중되고 나중 된자 먼저 된다-Max Weber)

부자의 비유에서 예수님이 결론적으로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신앙 생활을 먼저 한 사람이 있지만 나중에 믿는 사람에 비교해서 못 할 수 있다고도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지만, 나중되는 자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우리 자신의 태도와 신앙을 돌아보는 경고의 말씀으로 많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권한은 믿는 자와 믿지 아니하는 자를 구별합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예정론으로 이러한 논리를 더욱 강화합니다.  칼빈의 예정론은 비정한 종교라는 공격도 받지만, 매우 성경적인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개신교, 장로교는 구원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구원 받은 자에게 현실적 책임을 부여합니다.  청지기 정신입니다.  예정론을 가장 크게 오해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정해 놓으셨기에 우리들이 할 것이 없다고 하는 착각입니다.  이것은 신학적 무지와 오해입니다.

칼빈의 예정론에서 요구되어지는 것은 구원 받은 자의 청지기 정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확장시키는 청지기 정신입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잘 나타납니다.

캐톨릭은 물질과 성공에 대하여 부정적입니다.  부자가 되는 것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있습니다.  장로교, 칼빈주의자들은 반대입니다.  물질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Max Weber의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유럽의 개신교와 캐톨릭 국가들은 종교적 이유로 경제적 차이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개신교 국가들이 캐톨릭 국가에 비교하면 뷰유합니다.  같은 국가안에서도 캐톨릭 신자와 개신교 신자의 수입의 차이가 현격합니다.

그가 미국을 방문하고 미국의 경제에서 그는 개신교 자본주의을 확신합니다.  그는 경제적 번영이 개신교의 윤리와 자본주의가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다른 말로 청지기 정신입니다.

오늘 날의 자본주의의 탐욕은 이러한 정신의 상실에서 기인합니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 Max Weber가 주장하는 기독교 윤리가 사라질 때에 우리는 자본주의도 지키지 못 할 것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자본주의가 인간의 최고의 경제제도인가에 대한 질문을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우리들이 나중되고 먼저 되려면 우리의 경제 활동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경제 활동에 윤리적 행동을 실천해야합니다.

마태복음 19장 23-27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과 보이는 사람의 손)

우리는 물질에 대해 매우 예민합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체계를 세운 아담 스미스 (Adam Smith)는 그의 국부론에서 인간의 탐욕을 지적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물질에 대한 욕심은 “보이지 않는 손”이 제한시키거나 통제해야 한다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수많은 해석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나타나지 아니하면 자본주의는 최악의 경제제도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보이지 않는 손”이 나타나면 자본주의는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경제제도입니다. 모두가 “보이지 않는 손”의 통치를 인정하면 물질적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 국부론의 중요 내용입니다.

예수님에게 부자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베다니의 나사로, 아리마대 요셉, 니고데모도 부자였습니다. 그들은 권력과 힘을 가진 부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세리의 친구들입니다. 당시의 세리는 탐욕의 부자들이였습니다. 예수님은 탐욕의 부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즐겼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친구였다고 하십니다.

성경의 부자는 돈이 많고 적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돈을 의지하면 부자입니다. 마음이 부자입니다. 돈이 많지만 돈을 의지하지 아니하면 마음이 가난한 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돈의 많고 적음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이 살아갈 것을 원하십니다.

(신명기 24:18-22)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v.19)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v.20)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v.21)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v.22)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하나님은 내가 너희들을 애굽에서 구출하지 아니했다면 너의 밭 너의 감람나무 너의 포도밭은 너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구원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하십니다. 만약에 내가 너를 구원하지 않았으면 너는 애굽에서 가난한 노예로 죽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부자가 되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초점은 너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너의 소유가 나의 것이기에 이웃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의 부자가 아니라 정신의 부자가 될 것을 요구하십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이라고 하면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벌을 주십니다.

(신 8:17-20)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v.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v.19)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v.20)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니라.

성경은 하나님을 우리들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인정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을 (v.24)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하셨습니다. (v.25) 제자들이 놀라면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제자들은 부자가 물질적 부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신들이 이미 부자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v.26)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v.30)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고 하십니다.

돈의 역사를 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사람들은 자본주의에서 “보이지 않는 손”을 거부합니다. 그 결과 자본주의는 극도로 타락합니다.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자본주의로 극심한 빈부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이에 반발하는 칼 마르크스 (Karl Marx)는 자본주의를 철저하게 비판합니다.

그는 노동자가 경제의 주체가 되어야 하기에 자본가, 생산자를 타파하는 무산계급을 주장합니다. 노동자가 경제의 주체입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손”을 거부합니다.

물론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해석은 오늘 날도 난무합니다. 그러나 저는 당시 역사적 배경으로 볼 때에 “하나님의 손”으로 봅니다.

공산주의는 사람을 위한 경제체계입니다. 논리적으로 아주 훌륭합니다. 그러나 레닌과 스탈린에 의하여 악용됩니다. 노동자가 자본가에 대한 경제적 투쟁으로 경제 이익을 창출합니다. 자본가의 탐욕의 손에서 노동자의 이익을 돌려 받아야 합니다. 그는 경제적 혁명은 정치적 사회적 혁명으로 봅니다.  그에게 ‘보이지 않는 손”은 없습니다. 공산주의는 최악의 경제체제로 100년을 넘기지 못합니다.

우리들이 부자가 되는 일은 중요합니다. 가난에서 벗어나서 행복과 안전을 추구해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물질을 우리에게 주셨기에 우리의 물질을 우리의 손을 통해서 이웃과 나누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