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6장 21-28 (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

믿음과 우리의 생각은 서로 일치 하지 않는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생각은 우리의 감정에 근거해서 이성적으로 판단합니다. 믿음은 우리의 감정과 이성을 넘어서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적은 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우리의 생각과 일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적은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을 당하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신다고 합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죽으러 가시겠다고 하면 말리는 것이 정상입니다. 죽을 것을 알면서 죽는다는 것은 너무나 무모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v.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의 입장에서 죽으려고 가는 스승을 말리는 것은 당연한 생각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예수님으로부터 이러한 질책을 받습니다.

(v.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예수님도 베드로의 간청을 무조건 나쁘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사탄의 방법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다음과 같습니다.

(v.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영광을 얻습니다. 진정한 목숨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나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들이 가장 힘들도 고통스럽게 여기는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에 정답과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십자가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수없이 넘어지고 실패합니다.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골고다에서 넘어지실 때 도와준 구네레 시몬과 같이 예수님도 우리의 십자가를 도와 주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도와 주시는 십자가에 진정한 기적이 있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위로가 있습니다.

주어진 나의 십자가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하루를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16장 13-20 (신앙 고백의 중요성)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질문하십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입니다.  이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이렇게 예수님이 질문하시는 장소입니다. 성경은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합니다.

이곳에는 3개의 신전이 있습니다. 로마의 황제신전, 양을 신으로 섬기는 신전. 우상으로부터 신탁을 받는 신전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믿는 신들의 장소입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라고 합니다. 이번에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질문하십니다.

(v.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v.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예수님은 이러한 베드로의 고백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알게 하셨다고 하십니다.

(v.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의 고백을 하게하신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교회를 세우십니다.

신앙고백의 중요성이 점차로 약화되어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앙고백을 예배중에 그저 교독하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신앙고백에는 수많은 기적과 능력이 숨겨져 있습니다.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기적과 능력의 보석입니다. 주기도문, 사도신경, 교독문을 자주 읽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게 하신 말씀이며 우리의 무너져가는 삶을 새롭게 일으켜 세웁니다.

또한 우리를 지배하는 우상이 많은 세상에서 우리의 신앙을 지키게 합니다. 평소 우리의 삶에 신앙고백이 우리의 입술을 지배하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16장 5-12절 (기적의 이유)

본문은 제자들이 배를 타고 이방지역으로 건너가고 있습니다. 이방지역으로 가면 유대인들이 더 이상 따라오지 않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백성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방지역으로 회피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 땅에서는 반드시 자신들이 갖고 다니는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이방 땅에서 굶게 됐습니다. 음식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이 다시 한 번 기적을 베풀어서 떡을 먹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제자들을 보시고 그들의 믿음이 없는 것을 책망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먹고 남은 것이 몇 바구니이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이 먹고 남은 것이 몇 광주리이냐고 질문하십니다.  이제는 떡을 그만 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칠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 되심을 나타냅니다. 하나님만이 창조하십니다. 하나님만이 떡 5개로 오천명을 먹이십니다. 기적은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증명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떡을 주는 기계로 여깁니다. 이방 땅에서 떡 먹을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문제의 해결사가 됩니다. 이것이 기적의 맹점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부정하는 자들은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입니다. 그들도 예수님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야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십니다. 기적에 중독되면 기적이 나타나도 기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끝없는 기적을 요구합니다.

우리들에게 기적이 필요하면 하나님에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적을 베풀어주신다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100% 인정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주어진 기적에 감사해야합니다.  이것으로 끝이 나야합니다.  예수님이 생명과 하늘 나라를 허락하시는 구세주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에 감사해야합니다. 하루의 건강에 만족해야합니다. 하루의 일상을 기뻐해야합니다.  이미 우리는 십자가로 구원의 기적을 갖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기적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적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가까운 관계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유일한 관계 형성은 예수님의 십자가이며 오늘 날은 나의 십자가입니다.

마 태복음 16장 1-4 배탈 약의 처방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주님을 찾아와 기적을 요구합니다. 저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요구를 이렇게 이해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칠병이어의 기적으로 예수님의 기적을 무시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의 먹을 것을 해결하는 기적은 자신들에게 정말로 무서운 기적입니다.

그 기적으로 백성의 마음이 급격하게 변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물과 기름입니다. 개와 고양이 사이입니다. 그들은 서로 미워했습니다. 원수들이 오늘의 동지가 됩니다. 에수님의 기적이 자신들의 입지를 흔들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기적을 받아들이든지 말든지 선택을 해야합니다.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합니다. 악하다는 마음이 병든 상태입니다. 하늘의 기적을 요구하는 것은 악한 일 마음이 병든 상태 불행한 상태입니다. 바리세인과 사두개인들이 이러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들에게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이라고 합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동안 있다가 다시 살아납니다. 죽었다가 살아납니다. 물고기 뱃속을 스올이라고 합니다. 음부 죽음입니다. 그곳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진정한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기적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기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됐습니다. 이것이 기적을 추구하고 배탈이 나는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처방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기적의 배탈에서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 기적으로 만족하면 음란하고 악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기적으로 감사하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15장 29-39 (욕심으로 끝나는 관계)

우리에게 아쉬울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내가 이렇게 했더라면 지금 보다는 훨씬 더 좋은 환경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에 내가 이렇게 말했으면 이러한 일을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때에 내가 좀 더 열정을 가졌으면 지금의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14장의 오병이어의 기적의 반복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과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차이가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구니입니다.

오병이어의 먹고 남은 음식의 Koff-nos라고 합니다. 이 바구니는 유대인들이 이방 땅을 지나갈 때에 이방 음식을 먹지 않으려고 갖고 다니는 나무 가지로 만든 Basket입니다. 작은 바구니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광주리는 Spoo-rece입니다. 이 단어는 Sprea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이 단어는 군대 보병 4-6백 명의 인원을 의미합니다. Sprea가 10개가 모이면 Legion // 군단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탈출 할 때에 이 광주리에 담아서 성 바깥으로 탈출합니다.

오늘 본문은 오병이어와 완전히 다른 기적입니다. 기적의 내용도 다릅니다.

마태 14장의 기적은 제자들이 기적의 떡을 먹고 배탈이 납니다. 마태 15장의 기적은 무리들이 떡을 먹고 배탈이 나는 기적입니다. 기적의 성격이 다릅니다.

(v.30-32) 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 (v.31)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주님의 무리들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시어 많은 병자와 장애인들이 치유를 받습니다.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백성들의 치유와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님이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목적과 이유입니다.

다리를 저는 사람은 다리가 회복되면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장애인은 마을에 돌아가 일을 해야합니다. 맹인은 다른 맹인에게 찾아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해야합니다. 벙어리가 말을 했다면 새로운 직장을 잡고 일을 시작해야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에 주님이 //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목적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집으로, 마을로 친구로, 직장으로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 붙어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과 교회를 중심으로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사에게 좋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만 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신앙의 고백인 것 같지만, 믿음의 고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고 싶다고 합니다. 매우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 때문에 눈물과 고통을 당하는 가족과 이웃이 있습니다. 결코 좋은 일도 아니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본문의 무리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을 보고, 주님의 옆을 떠나지 않습니다.

(v.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3일을 떠나지 않습니다. 왜 3일 동안 먹지 아니하며 주님의 곁을 지킵니까? 그들에게 새로운 욕심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주님에게 새로운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정치적 경제적 Messiah가 되어 달라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욕심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마음 아프게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해하고 있습니다.

(v.39)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으로 가시니라.

무리를 흩어 보내셨습니다. 이 단어는 관계가 절단 내는 의미입니다. 더 이상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지만 그들과 관계를 정리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이렇게 살아가기를 소망하십니다.

하나님과 교회를 중심으로 살겠다고 하면 사람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만 했으면 좋겠다고 하면 너에게 주어진 일에 정직과 성실로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고 싶다면, 너와 가장 가까운 사람을 기쁘게 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유지되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절단 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이 우리의 삶이 되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유지 됩니다.

마태복음 15장 21-28 (떡과 부스러기)

우리들이 서커스를 보면 사자나 호랑이와 같은 짐승을 자유롭게 다루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자유롭게 다루는 것이 먹이입니다. 잘 한 행동의 보상으로 먹이는 줍니다. 개에게 먹이를 줄 때에 개는 먹이를 봅니다. 사람을 보지 않습니다. 먹이를 들고 좌우로 흔들어보면 개의 머리도 좌우로 흔들립니다. 개는 주인을 보는 것이 아니라 먹이를 바라봅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봅니다. 우리의 믿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나의 소원과 희망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고 영원한 생명을 믿습니까?

아주 간단한 도식이 나타납니다.

나의 소원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

나의 소원과 관계 없이 그저 하나님을 바로 보는 사람

한 여인이 큰 소리로 자신의 딸이 귀신에 들렸다고 합니다. 제자들에게 매우 곤혹스러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유대의 풍습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먼저 말을 하면 이혼의 사유입니다. 여자가 큰 소리로 주님을 부릅니다. 이 여자는 유대인이 상종하지 않는 이방인입니다.

제자들은 유대인으로 당하는 황당한 곤혹을 면하려고, 주님에게 빨리 저 여자의 문제를 해결해서 보내자고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냉담한 반응에 그 여인은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합니다. 귀신들려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딸이 아니라 자신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또 한 번 거절합니다. 아주 냉정하십니다.

어떤 학자는 주님의 대답이 없는 것이 그녀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함이라 합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주님도 그 불쌍한 여인을 도와주고 싶지만, 그녀를 도울 수 없습니다. 그녀는 이방여인입니다. 당시의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를 잘 알면 절대로 도울 수 없습니다.

길 가는데 개가 짖는 소리에 우리들이 응답하지 않습니다. 그야 말로 개소리입니다. 우리와 상관없습니다. 개가 짖는 소리마다 응답을 하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이 됩니다.

유대인에게 이방인은 개입니다.

(v.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마 10:5-6) 주님이 제자들에게 전도를 보내시면서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의 지역적 전달 순서도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땅 끝입니다. 전도의 대상의 순서도 유대인이고 그리고 이방인입니다.

그녀가 (v.25) 도와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v.26)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고 합니다. 자녀의 떡 유대인의 떡입니다. 유대인이 먹을 떡을 이방인에게 줄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변경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원문의 의미는 죄입니다.

그녀는 개입니다. 주인의 상에서 유대인이 먹다 남은 찌꺼기라도 달라고 합니다.

이 여인이 떡을 달라고 합니까? 떡을 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떡을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떡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이 먹고 남는 부스러기를 먹겠다고 합니다.

개들을 보면 압니다. 먹을 것을 주면 누구에게도 꼬랑지를 흔듭니다.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면 떡과 떡의 부스러기라도 없으면 그 자리를 떠납니다. 그녀는 유대인 자녀들의 상 밑에 있게 만 해 달라고 합니다. 떡의 부스러기를 찾겠다고 합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을 100% 인정합니다. 자신에게 기적이 없어도 좋다고 합니다. 다만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합니다. 예수님만을 바라보겠다고 합니다. 떡이 아니라 부스러기입니다. 부스러기에 떨어지는 상에만 있겠다고 합니다.

(v.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예수님의 말씀의 순서는 네 믿음이 크도다. 그리고 네 소원대로 되리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오병이어의 예고편입니다.  떡을 먹은 유대인들이 주인을 죽입니다.  부스러기 먹은 이방인의 하나 백부장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떡을 주시든 부스러기를 주시든 예수님을 바라보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14장 34절-15장 20절 (문화 전통과 기독교 )

모든 종교는 그 사회에서 문화로 나타납니다. 유럽, 남미, 이스라엘, 중동은 종교가 문화로 나타나는 대표적 지역들입니다. 그럼으로 종교는 경제, 정치, 교육, 인간의 행복 추구에서 강력한 영향을 주게 됩니다.

특히 기독교는 민주주의에 발달 과정에 깊은 영향을 줍니다. 예수님의 여자와 종과 다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신분이 지배하는 계급사회를 흔드는 강한 파괴력을 나타냅니다.

또한 아담 스미스가 오늘 날의 경제 체제에 대한 이론을 설정하지만, 막스베버는 개신교와 가톨릭의 비교를 통해서 오늘 날의 경제체제가 왜 자본주의로 들어서게 됐는가를 잘 설명합니다.

우리는 종교가 문화로 나타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니이버는 종교가 문화로 나타나는 다양한 사회를 잘 설명합니다.

종교와 세상은 밀착 할 수 있고, 종교는 세상을 거부 할 수 있고, 종교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중동의 국가들은 종교 지배사회입니다. 유럽은 기독교는 사라지고, 기독교 문화가 강하게 나타나는 사회입니다.

특히 종교 다원화 된 Post-modernism에서 한국의 기독교는 기독교적 특성과 가치가 세상에서 사회적으로 심한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미국을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국가라고 하는데 미국은 진정한 기독교 정신은 상실한지 이미 오래됐습니다. 미국을 세운 국부들이 Deism을 추구했습니다. Deism (이신론)은 진정한 기독교 정신이 아닙니다. 미국은 다양한 이민자들의 신앙이 뒤섞여 기독교 정신이 아주 혼란스럽게 나타나는 국가입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고르반에 대한 유대인들의 악용을 공격하십니다. 종교가 문화로 정착되는 전형적 형태입니다. 부모를 돌보지 아니하려고 자신의 재산을 빼돌리는 제도입니다.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부모를 돌보지 않는 문화, 사회, 종교 제도를 비난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을 떠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하나님의 경계선상에서 서있습니다. 경계선상은 언제나 불안한 사람들입니다. 그 어느 중심에도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유대인의 종교적 열심, 메노나이트와 같이 세상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합니다. 반대로 진보적이고, 자유적으로 세상에 속해서 기독교의 정신으로 윤리와 도덕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발전은 그 사회의 가운데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변두리 Marginalized에 의하여 일어납니다. 세상의 주체는 변두리입니다. 창조와 개혁은 변두리의 권한이고 특징입니다. 사회적 가운데는 현 상황을 보수 유지하려고 하기에 창조와 개혁을 거부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변두리이고, 당시의 제사장, 바리세인들은 사회 중심입니다. 로마시대에 교회는 사회적 변두리이고 교회를 박해한 로마 정부는 당시 세상의 중심입니다. 기독교는 변두리에서 중심을 혁명적으로 넘어뜨린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이 땅의 변두리로 오셨습니다. 우리들은 이민자로 이 사회의 약자이며 변두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문화적으로 만드는 것을 거부해야합니다. 한국의 교회와 신자들은 신앙이 문화화 되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합니다. 그 결과 오늘 날 기독교는 사회적 지탄을 받습니다.

우리들이 신자답게 산다는 것은 오늘의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며 내 자신이 개혁되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살아갈 때에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세상의 중심을 변화시키고 그 중심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순간 우리는 즉시 중심에서 변두리로 내려와야 합니다.

마태복음 14장 22-31 (기적의 후유증)

바나나를 현대인의 만병통치약이라고 합니다. 특히 당뇨에도 가장 좋은 과일이 바나나입니다. 바나나는 혈당을 흡수합니다. 그러나 바나나는 열량과 탄수화물이 매우 높습니다. 당뇨환자는 하루에 한 개 이상을 먹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당뇨 부작용이 심해집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기적은 바나나와 같습니다. 기적은 우리의 신앙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기적을 체험하면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고, 자신의 믿음에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기적을 추구하면 우리는 영적 당뇨환자가 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대중적 기적입니다. 그동안의 기적은 개인적 기적이지만 오병이어는 대략 만 오천 명이 경험한 기적입니다. 대중적 기적은 예수님을 오해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백성들로 분리시킵니다. 기적으로 제자들이 병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v.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제자들을 재촉했습니다. 재촉은 Hella로 Anankazo 억지로 강제로 쫓아 보냈습니다. 그리고 무리들을 보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무리들이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을 배에 태워 건너편으로 가게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는 제자들과 무리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고 기적에 중독이 됐습니다. (요 6:15)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무리들이 와서 주님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했다고 합니다.

(v.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제자들은 파도와 풍랑으로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새벽 3-6시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 유령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베드로가 주님에게 나를 물 위로 걷도록 명령하라고 합니다. 주님이 나에게 걸어오라고 명령하십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걸으며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v.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자,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기적에 중독되면 조그마한 변화에 당황합니다. 기적에 중독되면 예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 같지만 상황에 집착합니다.

우리들이 이 질문에 대답을 해야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풍랑은 있었습니다. 바람과 물결로 죽을 지경입니다 기적에 중독되면 현실을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집니다.  이러한 현상을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v.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기적에 중독되면 예수님을 의심합니다.  신앙이 약화됩니다.  우리에게 이미 기적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적입니다. 이 기적에 대한 감동과 감격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기적을 지켜내지 못합니다. 기적인줄도 알지 못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풍랑은 있었습니다. 바람과 물결로 죽을 지경입니다 기적에 중독되면 현실을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집니다.

마태복음 14장 13-21 (잘못 먹고 배탈 나는 기적)

예수님 당시에는 3 명의 지배자들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통치되고 있었습니다. 분봉왕 헤롯은 갈릴리 지역을 통치했고, 그가 세례요한을 죽였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예수님이 그 지역을 떠나십니다. 미치광이 헤롯은 주님을 체포, 재판 할 수 있고 죽일 수 있는 법적권한을 갖고 있는 구역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떠나십니다. 예루살렘은 빌라도의 관할 구역입니다. 여우를 피했더니 호랑이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에게는 항상 죽음이 따라 다녔습니다.

또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나타납니다. 무리들입니다. 당시에 사회적으로 법적 보장과 경제적 안전망을 상실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어렵고 힘든 현실을 이겨보려고 합니다. 무리들은 가난을 피해, 어려움을 피해,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들의 현실에 새로운 변화를 기대합니다. 법적 경제적 회복을 추구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피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 같지만, 십자가에 죽으러 가시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목적으로 예수님과 무리들이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저는 종종 이 장면을 상상합니다. 주님은 끝까지 무리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병을 고쳐주시고, 그들에게 깊은 애정과 슬픔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내용,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무리들은 주님의 길이 죽음의 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가는 길은 그들의 현실 문제가 해결되는 길입니다.  이러한 길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우리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생략을 합니다.  성경에서 유일하게 기적의 파장이 아주 길게 나타나는 사건입니다.  단순한 기적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십니다. 기적의 음식입니다. 배가 고플 때에 음식을 먹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배가 고플 때에 음식을 허겁지겁 먹으면 배탈이 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의 떡을 먹은 무리들도 배탈이 나고, 제자들도 배탈이 납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제부터 떡을 먹고 배탈이 나는 과정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4장 1-12 (반복되는 정치 순환)

한국에 새로운 문재인 정부가 출범을 했습니다. 성경을 정치적인 시각으로 보면 정치적 내용이 나옵니다. 성경을 경제적 시각으로 보면 경제적 시각이 나오고, 인권적 시각으로 보면 인권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면에서 성경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신비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정치적 시각으로 보겠습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정치적 시각이 있습니다. 사회적 정의와 경제적 불평등에 의한 시각으로 쓰인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모스서나 이사야서가 대표적입니다. 그럼으로 정치적 시각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 비 성경적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정치적 이익으로 이용하는 것은 안 됩니다.  그래서 정치신학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는 제사장과 빌라도의 정치적 이익과 손해가 계산됩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하여 예수님에게 십자가의 죽음을 선고합니다.

오늘 본문에 분봉왕 헤롯이 나옵니다. 아버지 헤롯 대왕과 아들 분봉왕 헤롯은 정치적 산물입니다. 헤롯 대왕은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입니다. 그는 탁월한 정치적 판단으로 로마 황제 옥타비누아스의 지원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헤롯 대왕은 자신의 정치적 약점을 보완하려고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조 하스몬가의 마리안네와 정치적 결혼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지키려고 아내와 장모 동서를 그리고 두 아들을 죽입니다. 그는 정치적 지지 기반을 확대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의 물 부족을 해결하는 수로 공사를 완성합니다. 유대인의 정치적 지지를 받으려고 예루살렘 성전을 지어줍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 시장을 할 때에 국민들로 부터 정치적 지지를 받으려고, 청계천 복원공사를 했습니다. 대통령이 된 후에는 4대강에 댐을 만들어 수로와 홍수를 조절하는 보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비리를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노무현 대통령은 자살을 합니다.

정치적 동기는 정치적 동기가 다른 반대 정권 들어서면 정치적으로 진행됩니다.

4대강을 다시 조사한다고 합니다. 지난 7년간 4번을 조사했고, 이번에 5번째 한다고 합니다. 정치적으로 조사했기에 정치적으로 만족하지 않은 것입니다. 4 대강으로 국가에 이익과 손해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또 한 번의 조사를 합니다.  진실과 정의가 나타나는 조사가 되지 아니하면 끝없는 정치적으로 악용됩니다.  10번도 100번도 하게 됩니다.  정치적 목적이 없는 조사가 되어야합니다.

본문에 분봉 왕 헤롯은 자신의 이복동생 빌립의 아내 Herodias 재혼합니다. Herodias는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이루기 위하여 남편 빌립을 버리고 분봉왕 헤롯과 재혼을 합니다. 그 Herodias의 딸이 본문의 살로메입니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결혼을 책망한 것이 세례요한입니다. 그 결과 세례요한은 참수형을 당합니다. 살로메는 춤의 보상으로 세례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살로메는 세례 요한에게 정치적 보복을 한 것입니다. 헤롯의 생일날 세례 요한 죽음을 정치적 선물로 주고받습니다. 이것이 정치적 방법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에 수많은 아기를 죽인 헤롯 대왕은 정신적 불안으로 두 번의 자살을 시도합니다. 아들 분봉왕 헤롯도 비정상적 행동을 합니다. 몸에 벌레가 생겨 죽는 자식도 생깁니다. 가족들 사이에서 살육과 배신과 죽음이 난무합니다.

어제는 박근혜 전직 대통령이 재판정에 피고인으로 최순실과 함께 재판에 출두했습니다. 정치적 재판이 될 것인지 순수한 법적 재판이 될 것인지는 역사가 판단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정치적 순환입니다. 政治(정치)는 글자가 의미하는 대로 올바르게 치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올바르게 다스리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 결과 정치에는 끝없는 거짓과 악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정치 순환은 정권이 바뀔 때 마다 나타납니다. 정의를 가장하는 저급한 정치입니다. 모든 일을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환논리가 나타납니다.  그럼으로 국민들은 정치에 지치고 식상 합니다.

대한민국 정치에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