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3장 53-58 (선지자가 고향에서-개인에서 우주까지)

예수님의 유명한 고백입니다.  선지자가 고향과 자기 집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고향과 자기 집에서 능력을 나타내지 아니하셨다고 합니다.

왜 고향과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인정해도 고향 사람과 가족들은 인정하지 못합니다.

일반 사람은 3개의 시각으로, 우리는 4개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가장 기본적 시각은 주관적 시각입니다.  나의 입장에서, 나의 지식에서 나의 경험으로 세상과 사람을 이해합니다.  이기적이기에 갈등과 다툼을 유발합니다.

이러한 주관적 시각에서 성숙하면 객관적 시각을 갖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사건과 사람을 이해합니다.  이기적 태도에서 벗어나 이타적 시각입니다.  나의 지식 경험보다 상대방의 지식과 경험을 인정합니다.  사랑과 이해와 용서가 나타납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성숙하면 공동체적 시각이 나타납니다.  사회와 국가의 시각을 갖습니다.  공동체적 시각입니다.  예수님이 고향과 자기 집이라 고 합니다.  이것은 공동체입니다.  가족도 고향도 공동체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의 희생과 애국지사들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공동체가 더 성숙하면 우주만물을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창세기에서 시작하고 요한계시록으로 마치는 것은 이라한 시각을 갖을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시각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4번째 시각을 제외한 3개의 시각은 잘못 볼 수 있는 위험성을 갖고 있습니다.  3번째 공동체 시각에도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 위험성은 편견입니다.

예수님의 고향과 마을은 예수님에 대한 공동체 시각이 있습니다.  요셉의 아들, 목수, 그에게 동생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공동체가 갖고 있는 사실적 시각입니다.  맞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공동체의 시각이 달라져야 합니다.  이러한 편견을 부정하려면 엄청난 시간과 힘이 필요합니다.

공동체 사람들은 이러한 힘과 시간의 소진을 알기에 편견에 쉽게 머물게 됩니다.  개인의 의지보다 공동체의 의지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장 극명하게 들어나는 것이 2차 세계 대전 때에 독일의 유대인 학살과 일제의 관동지진 때에 한국민 학살입니다.  또한 오늘 날에는 우리가 사는 미국의 양당정치입니다.  공화당원은 무조건 공화당 정책을 지지합니다.  민주당은 공화당에 무조건 반대합니다.

신앙이 성숙하면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각에는 언제나 함정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합니다.

우리들이 우주적 시각, 하나님의 시각을 가질 때에 아래의 3개에서 올바른 시각을 갖습니다.

마태복음 13장 44-52 (오늘의 천국과 내일의 천국)

어제는 왜 예수님이 비유로 천국을 말씀하시는가를 설명했습니다.  돼지에게 진주를 던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 천국의 소유하는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마 13: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마46)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집니다.  미래의 천국은 믿음으로 주어집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나의 모든 소유를 파는 것에 있습니다.  천국은 자신의 소유 모든 것을 팔아 얻습니다.  오늘의 천국과 내일의 천국은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럼으로 믿음은 나의 모든 소유를 파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떠한 목표를 두고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 버립니다.

어떤 남자는 한 여인을 사랑하기에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어머니들은 자식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인생을 팔아버립니다.

남자는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을 위하여 자신의 인생을 팔아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성공과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소진합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에게는 아름다운 사랑과 성공과 깊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적으로 찾아오는 것은 죽음입니다.  또한 인생의 허무와 깊은 고독에 빠집니다.

자신이 이렇게 살아온 이유를 목적을 스스로 설명하고 싶어하지만 헛된 것을 갖게 됩니다.  물론 보람과 기쁨도 있지만 많은 시간을 소비한 상태에서 허망함을 감추지 못합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까?  자신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너무나 객관화시킨 것입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다른 목적을 위하여 사는 것은 성숙한 인격입니다.  타인을 배려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지나친 자신의 부정은 허무와 공허함입니다.  지나친 희생은 사랑이지만, 자신이 결여됩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자식을 위하여 사셨습니다.  그들에게 보람과 기쁨은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허망함과 실패도 동시적으로 찾아왔습니다.  누군가를 위하여 사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자신은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들이 부모님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희생에 안타까움과 슬픔이 깊어지는 이유입니다.

천국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발견은 나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시각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려면 천국이 되기에 우리의 모든 소유를 팔아야 합니다.  재산을 팔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삶의 방향과 목적과 생각과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집중해야합니다.  그러면 천국이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해야지만,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합니다.  여기에 천국이 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합니다.  여기에 천국이 있습니다.

우리의 명예와 성공 사랑해야하지만.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합니다.  여기에 천국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살면 내 자신을 발견합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에 바로 그곳이 천국입니다.

마태복음 13장 31-43절 (천국과 지옥의 증명)

사람들은 우리에게 천국과 지옥을 증명해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천국과 지옥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신자들도 천국과 지옥을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이러한 증명을 위해서 예수님은 누룩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비유로 창세로 부터 감추인 것을 말씀하신다고 합니다.

(마 13:31-33)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v.32)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v.33)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하십니다.  많은 교인들이나 목회자는 예수님이 비유로 복음을 쉽게 설명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약간 무식한 소리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비유를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경은 헬라어 (그리스어)로 쓰여있고, 그리스 철학의 영향에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당시의 비유라는 것은 어떠한 진리를 설명하는 체계입니다.  더 쉽게 표현하면 철학은 누구나 할 수 있는 학문이 아닙니다.  적어도 자신에 대한 성찰과 반성, 그리고 자연과 자신의 관계, 더 나아가서 죽음 이후에 대하여 생각하는 자들이 철학을 했습니다.  이러한 추상적 세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니 비유가 나타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비유를 사용하는 이유는 고급한 하나님의 진리, 신비한 하나님의 세계, 죽음 이후에 대한 진리이기에 비유를 사용하십니다.  설명과 해석이 목적이지만 근본적 목적은 이러한 비유를 듣는 사람들이 고급한 진리와 자신에 대한 성찰이 있다는 것을 근본으로 합니다.

오늘 날 한국 교회는 이러한 복음, 진리를, 시장 마당에서 파는 싸구려로 전락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든지 듣고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에 대한 이해와 배경을 모르는 목회자는 천국과 지옥은 절대로 전달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 하실 때에는 우리들이 이러한 말씀을 들을 자격이 있는 가를 반성해야합니다.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견유학파입니다.  그는 알렉산더 대왕이 자신을 찾아 왔을 때에 자신 앞에 비추는 햇빗을 가리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비유입니다.  알렉산더는 세상을 정복하지만 빛을 가리우는 자입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알렉산더가 디오게네스와 같이 되고 싶다고 하지 디오게네스는 자신은 당신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아니하다고 합니다.

이러한 디오네게스의 말을 들은 알렉산더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합니다.  그는 자신의 무지를 압니다.  역설적이지만 자신의 무지를 아는 자는 철학을 알 자격이 있습니다.  알랙산더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의 제자가 될 수 없음을 한탄합니다.  이것이 철학의 시작입니다.

복음의 진리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천국과 지옥은 증명하고 설명하는 성질의 복음이 아닙니다.  천국은 적어도 자신의 인생을 성찰하고, 스스로 눈물 흘려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 만물에 서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반성하는 자가 들어야 할 복음입니다.  자신의 무지와 죄악을 한탄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진주입니다.

예수 믿고 천당가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싸구려로 만드는 것은 목사의 잘못이요, 싸구려 인생을 살면서 천국을 가겠다는 신자는 양심 불량입니다.  이것은 돼지 같은 인생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알고 싶으세요?  밤 하늘의 별을 보고 반성하세요.  오늘도 피는 꽃을 보고, 자신의 더러움을 발견해야합니다.

그러면 천국과 지옥은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천국과 지옥은 얼마든지 증명이 됩니다.

마태복음 13장 27-31절 (가라지와 함께 하는 성숙의 사람)

주님이 씨를 뿌렸더니 밤사이에 사단이 가라지의 씨앗을 뿌립니다. 농부들이 곡식을 보니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농부들이 주인에게 가라지를 뽑기를 원하는지 묻게 됩니다. 주인은 가만 두라고 합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한다고 합니다.

덧뿌리는 것을 원문에 근거하면 주님이 뿌린 씨앗 위에 가라지 씨앗을 뿌린 것이 됩니다. 가라지의 뿌리와 곡식의 뿌리가 서로 뒤엉켜 있습니다. 추수 때까지 내어두라고 합니다.

우리의 가라지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고통과 시련을 줍니다. 우리를 죽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가라지를 뽑겠다고 합니다. 농부와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v.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우리 인생의 밭을 보면 뽑아 낼 것이 많이 있습니다. 나의 상처와 아픔과 시련과 수치와 더러움이 있습니다. 그것을 다 뽑으면 내 인생이 아름답고 살만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뽑아내면 우리들이 죽습니다.

사람은 성숙하면 모든 것을 이깁니다. 성숙한 사람은 질병도, 가난도 이깁니다. 심지어는 죽음 앞에서 당당해집니다. 우리의 인생에 패배를 주는 것은 가라지가 아닙니다. 우리들이 성숙하지 못하면 우리는 작은 것에, 사소한 것에 패망을 당합니다.  우리들이 성숙, 거룩해지면 우리의 인격이 변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이깁니다.

우리들이 성숙하면 가라지와 함께 살아갑니다. 성숙하면 가난도 힘들지 않습니다. 성숙하면 질병도 무섭지 않습니다. 성숙하면 세상의 명예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숙하면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3장 1-23 (우리들이 씨 뿌리는 태도)

 

본문은 우리들이 기도에 많이 사용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v.23) 우리들이 옥토가 되어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 맺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아름다운 소원의 기도이지만 이러한 기도는 본문을 왜곡하게 됩니다.

우리의 현실은 항상 옥토가 아닙니다. 우리의 현실은 때로는 길가와 같이 메마르고 돌밭과 같이 척박하고 가시떨기와 같은 아픔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옥토와 같은 행복과 만족이 있지만 항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늘 날 우리는 우리의 성공을 30-60-100배의 열매로 간주합니다. 교회는 교회의 양적 성장과 전도 선교 구제 봉사 열매도 30-60-100배의 열매로 이해합니다.

아주 교묘하지만 이런 것은 올바른 열매가 아닙니다. 열매는 씨를 뿌리는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열매를 얻기 위해서 씨가 중요하고 씨 뿌리는 사람 태도가 중요합니다. 주님의 씨 뿌리는 태도가 참으로 이상합니다.

(v.4-7)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v.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v.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v.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v.8) 더러는 //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v.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일반 농부들은 절대로 길가 돌밭 가시 떨기에 씨앗을 뿌리지 않습니다. 주님은 길가 돌밭 가시 떨기 옥토에 균등하게 뿌립니다. 씨 뿌리는 양의 차이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태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v.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십니다.

옥토에서 한 알의 콩으로 수많은 콩을 얻는 것 기적이 아닙니다. 당연한 자연적 현상입니다. 그러나 열매 맺지 못하는 길가에서 자갈밭에서 가시 떨기에서 한 알의 열매를 맺는 것은 기적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들이 길가와 자갈밭과 가시떨기와 같지만 사랑과 말씀의 씨를 뿌리십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이해하신다면 이제부터 우리들에게 길가와 자갈밭과 가시떨기와 같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말씀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기대 할 수 없고 사랑 할 수 없고, 반발 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30-60-100배의 열매입니다.

이러한 신앙을 회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12장 46-50 (예수님의 가족에 대한 이해)

 

권력 앞에서는 부모 자식도 없다고 합니다. 돈 앞에서는 부부관계도 없다고 합니다. 명에를 위해서는 부모도 버리는 자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비정하다고 합니다.

(엡 6:1-3)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고 합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부모를 잘 섬길 때에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한다고 하십니다.

사랑의 예수님이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부모와 형제 관계를 부정하십니다. 매우 놀라운 내용입니다.

제자중의 하나가 예수님에게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밖에서 기다린다고 합니다. 주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고 질문을 하십니다.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은 저 바깥에서 나를 찾는 친 어머니와 친 동생들이 아니라 이 방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혈연관계를 부정하십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예수님이 귀신 들고 앞을 못보고, 말을 못하는 자의 귀신을 내어 쫓습니다. 이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절대로 용서 받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주님에게 귀신이 들렸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3장을 보면 아주 놀라운 기록이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바알세불의 사건이 있기 직전에 마가복음 3장 30절에 가족들이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미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알세불의 사건이 나오고 그리고 오늘 본문 주님의 기족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예수님을 귀신들려 미쳤다고 한 가족들과 바리새인들이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럼으로 가족들도 성령을 훼방하는 자들이 됩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바리새인들처럼 주님의 친족 가족들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가족들은 예수님 때문에 자신들이 위험에 처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으로 자신들의 이익이 상실되고 가문의 명예가 상실되고, 핍박을 받을 수 있고,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미쳤다고 합니다.

성경이 참으로 무서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성령을 훼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가장 강력하게 부정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우리의 이익과 우리의 명예와 우리의 자존심을 선택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미친 사람으로 만들고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들이 하나님의 저녀로 산다는 것은 이러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얼마나 유약한 자들인가 알고 하나님의 은총과 용서를 찾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12장 38-45 (기적의 독과 기적의 약)

독과 약은 동전의 앞과 뒤와 같습니다. 약은 유익하지만 그 약을 남용하면 독이 됩니다.  진통제는우리 몸의 진통을 없애지만 진통제를 과용하면 진통제에 중독됩니다.  모든 약을 과용하면 약이 아니라 독이 됩니다.

우리에게도 잘 쓰면 약이 되지만 잘못 쓰면 독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기적입니다.

(v.38)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주님에게 표적 보여 달라고 합니다.

어제 말씀에서 귀신이 들려서 눈멀고 벙어리 된 자의 귀신을 내어 쫓았습니다. 이때에 무리들이 이러한 주님의 기적을 보고 다윗의 자손 Messiah라고 하게 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다시 기적을 요구하자 주님은 (v.39-a)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악하고 음란하다고 하십니다.

성경을 잘 보시면 그들은 마태복음 시작부터 예수님의 계속되는 기적을 계속적으로 부정합니다. 그들은 계속되는 기적에도 그들은 변화하지 않습니다.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기적에 절대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주님은 그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십니다.

오늘 날 교회에도 기적에 중독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에 응답해서 해결해주셔야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을 충동질 하는 것이 목사들입니다.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라는 명목으로 끝없는 기적을 요구합니다.

우리에게 나타난 기적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이 기적입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어제 저는 제가 잘 알고 지내던 고등학교 동창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제 주변에도 이러한 일들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살아있기에 기적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그 친구는 기적이 없어서 죽은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문제가 기적적으로 해결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표적, 기적 Hella로 Simeon – Sign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계속되는 기적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이 기적입니다. 이것에 만족해야합니다.

기독교가 기도로 기적이 일어나야 한다면 불교에도 기도로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독교가 기적의 종교라면 무당의 종교도와 같아집니다.

제가 기적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저에게도 수많은 놀라운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적들은 신앙의 비밀로 간직해야합니다.  제가 믿음이 없을 때에, 부끄러운 자리에 있을 때에, 제가 어려움에 있을 때에, 하나님은 은혜로 기적을 베푸십니다.  어떤 기적은 정말로 부끄러워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악하고 음란하다고 할 때에 음란은 Hella로 Moi-kalis입니다. 성적 타락을 의미합니다. Adulterous 간음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계속되는 기적의 요구는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것 같지만 하나님을 배신하는 영적간음입니다.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구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의 기적에 만족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기적에 중독되면 나타나는 가장 큰 현상은 하나님의 말씀은 지루하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현실에 당장 도움이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신앙이 충동적이고, 자극적이고, 광적인 현상을 갖게 됩니다.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한국교회는 기적을 강조하면서 기도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많은 간증도 합니다. 기도가 나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과 방법으로 전락을 했습니다. 성경의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과 찬양입니다. 성경의 일부분의 내용을 전체화하여 기도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작태는 버려야 합니다.

분명히 악하고 정의롭지 못한 일을 교인들에게 통성기도로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기도하자는 목사의 작태를 보면 정말로 무섭습니다. 세상의 법과 질서를 초월하는 불법을 기도로 해결하는 것을 기적이라고 하면 하나님은 이 시대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너희들에게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이라고 합니다. (v.40-41)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을 지내고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말을 듣고 회개한 것처럼 너희들도 나의 말을 듣고 회개해야한다고 하십니다. 만약에 너희들이 나의 말을 듣고 회개하지 않으면 니느웨 사람들이 너희를 정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말씀에 만족하지 못하면, 니느웨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조롱하고 심판합니다.

한국의 개신교가 한국사회에서 어떠한 취급을 받는가를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장 신뢰 할 수 없는 단체의 하나입니다. 니느웨, 세상이 우리를 정죄합니다.

천만이 안 되지만 약 2백만이 교회 나가지 않는 가나안 (안나가)신자, 약 2백만이 이단으로 나타나는 한국의 기독교입니다. 이러한 책임은 기도로 기적을 얻겠다고 가르친 목사들의 책임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 구원의 기적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추구하면 우리의 하나님은 우상이 됩니다.

기독교는 기적이 없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적은 불신자를 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들이 신자라면 오늘의 삶에 만족하고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찬양과 신앙고백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깊은 하나님의 은총과 손길에 있음을 알고 감사하게 됩니다.

예수임의기적이 우리에게 약이 되려면, 오늘의 구원에 감사하시고 기쁨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12장 22-37 (우리의 선과 악)

우리들은 어떠한 일에 반응을 합니다. 우리의 일반적 반응은 우리에게 이익이 되면 선한 것이고 우리에게 불이익을 주면 악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러한 모습이 그대로 들어납니다.

사람들이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3가지 질병을 갖고 있습니다. 귀신들렸고, 눈이 멀고, 벙어리가 됩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자 벙어리가 말을 하고 앞을 보게 됐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기적을 보고 2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합니다. 무리는 Hella로 Oklaso입니다. 그들은 법적 신분 보장을 받는 일반백성 Laos나 Demos가 아닙니다. 그들은 소작을 하다가 농지를 빼앗겼거나 남의 돈을 갚지 못한 빚진 자, 세상을 원망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자신들에게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줄 혁명가로 봤습니다. 로마를 무너뜨리고 기존의 종교 계급 지주들을 타파합니다. 그러기에 다윗의 자손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바알세불 사탄의 도움으로 귀신을 쫓아냈다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매우 껄끄러운 상대입니다. 예수님이 하층민으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자신들의 종교적 권위로 하층민 백성을 통제했지만, 예수님이 자신들의 이익과 권한을 빼앗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쫓아냈다고 합니다.

한 가지 현상을 놓고 한쪽은 다윗의 자손 선하다고 하고 다른 한 쪽은 바알세불 악하다 합니다.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선과 악이 갈라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v.31-32)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v.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아주 난해한 구절입니다. 주님에게 어떠한 잘못을 해도 용서 받습니다. 그러나 성령에 대한 모독은 절대로 용서 받지 못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너무나 표면적 해석입니다.

성령을 훼방은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성령 훼방은 불신자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우리에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불신자로 과거에 성령을 무시하거나 거절해도 성령 훼방 아닙니다. 그들이 회개 했다면 예수님은 그들을 용서하십니다. 성령 훼방은 신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거나 모욕하면 성령 훼방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기적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계시적 방법입니다. 예수님의 기적 귀신들리고 벙어리가 말을 하고 앞을 보게 됐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제사장 바리세인들은 이것을 알면서도 거절하는 것이기에 성령 훼방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바알세불의 힘을 빌리지 않았지만 자신의 이익에 따라 거짓으로 주님을 거부합니다.  이것을 알면서도 거절하는 것이 성령 훼방입니다.

그럼으로 예수님은 선과 악을 새롭게 정리하십니다. 주님은 선과 악이 우리의 유익을 따라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선과 악은 우리 마음에 쌓아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려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성령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의 유익에 따르는 선과 악이 아닙니다.  진정한 성령의 사람은 끝까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합니다.  절대적 절망이 있지만, 실패가 있지만, 인내하고 감사합니다.  그 절대적 절망과 실패의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인생의 해답을 얻습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성령 훼방은 이러한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을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부정합니다.

이러한 성령 훼방에서 벗어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12장 10-21 (사랑이 없는 계명은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의 성격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논쟁으로 1-9절로 바리새인들과 싸우셨습니다. 예수님이 또 회당에 들어가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싸우려고 의도적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도 매우 집요하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고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우리들이 이 질문을 잘 이해해야합니다.

유대인의 율법은 많은 피를 흘리거나 목숨이 죽어가는 사람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을 허락합니다. 그러나 한쪽 손이 말랐다고 합니다. 당장 죽을병은 아닙니다. 내일 고쳐도 무방합니다. 불편하지만 다른 손으로 지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병은 안식일에 못 고칩니다.

그런데 그들의 율법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배가 심하게 아픕니다. 그런데 죽습니다. 배가 아픈 것은 안식일에 고치지 못한지만 맹장이 터져 죽을 수 있습니다. 몸에 열이 나는 병은 안식일에 고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혼수상태가 되어 그날에 죽습니다. 율법으로 죽을 병이진 살아날 병인지 알지 못합니다.

이러한 병은 어떻게 해야 하는 가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v.11-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v.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예수님은 너희들이 안식일에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끌어낸다. 너희는 양에게는 자비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양보다 귀하다면 너희는 왜 사람에게 자비 할 수 없느냐입니다.

(v.12-b)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정확한 원문의 표현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율법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안식일은 자비와 사랑을 나타내는 날이라고 하십니다.

율법은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자비가 없으면 오히려 악한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사랑이 없으면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자비가 없는 4 계명을 파괴합니다. 사람을 무시하는 계명은 계명이 아닙니다.

(v.13-14)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v.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사랑이 없는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을 죽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에 가장 거룩하고, 가장 신실하고, 가장 의로운 척하지만 사랑이 없으면 수많은 사람에게 고통과 아픔을 주게 됩니다. 사람을 죽입니다. 거짓으로 비난하고 조롱합니다.

이것이 종교의 타락입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자비가 없는 4 계명을 파괴합니다. 사랑이 없는 계명은 인간이 만들어낸 율법이지 하나님이 계명이 아닙니다.

오늘도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심판의 잣대로 사용하는 사악한 인간들이 있습니다. 가장 거룩한 척하고 가장 신실한 척하면 그 말씀으로 수많은 사람에게 심판으로 사용합니다. 용서가 없는 십계명은 율법입니다. 이러한 예배는 거짓의 예배입니다.

(요일 4: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v.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오늘도 분열과 시기의 세상에서 하나님은 사랑을 나타내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12:1-9 (종교와 신앙 사이에서-율법과 자비 사이에서_

종교적으로 유대인이 되는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유대교를 믿겠다고 선언하고 안식일을 지키면 유대인으로 취급합니다. 유대인이지만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면 유대인이 아닙니다. 이것이 종교적 구분입니다.

유대인들은 정체성은 안식일의 준수에서 나옵니다. 그 안식일을 지키는 수준에 따라 그들의 신앙의 척도를 판단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을마다 안식일에 벗어 날 수 없는 지계표를 설정했습니다. 그 지계표를 벗어나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됩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면서 배가 고파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배가 고팠다는 Hella의 의미는 꼬집혀서 아픈 것처럼 아주 배가 고팠습니다. 제자들도 너무나 배가 고파 이삭을 잘라먹으면 율법을 어긴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이삭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허락하신 것이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제자들이 안식일에 노동을 했다고 비난합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4 계명을 범했다고 비난 합니다. 예수님이 다음과 같은 예를 듭니다.

(v.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v.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율법에 따라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떡을 다윗과 다윗의 사람들이 먹었다면 다윗이 잘했다는 것입니까? 잘못 했다는 것입니까? 배가 고픈 자에게 거룩한 떡을 주는 것이 당연하지만 율법을 어긴 것은 잘못 한 것입니다.

거룩한 떡은 율법에 따라 일반 사람들이 먹어서는 안 됩니다. 대제사장은 거룩한 떡을 다윗과 다윗의 동료들에게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이러한 예를 말씀하십니까?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들도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먹은 것은 잘못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은 주어서는 안 될 떡을 주었고 다윗도 먹어서는 안 될 떡을 먹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 배고픔, 삶의 환경과 여건에 대하여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룩한 빵을 우리들이 먹을 수는 없습니다. 안식일에 율법을 범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이러한 예를 들어서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은 다윗에게 끝까지 자비하셨습니다. 그가 율법을 범하고 떡을 먹었지만, 하나님은 다윗에게 끝까지 자비하셧습니다.

다윗은 그 떡을 먹고 블레셋에 항복해서 미친개처럼 살아도 하나님은 다윗에게 끝까지 자비하셨기에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율법보다 높은 하나님의 자비를 설명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이 안식일을, 주일을 잘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예배를 잘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믿는 하나님은 자비하십니다. 그럼으로 예수님은 이렇게 자신의 자비를 나타내십니다.

(v.6-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v.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v.8) 인자는 //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지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십니다.

오늘도 수많은 신자들이 종교로 살아갑니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돌을 던집니다.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려고 형제들을 비난하고 조롱합니다. 그들은 종교인입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인들은 자비합니다. 종교가 아닌 신앙으로 사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