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9장 12-22절 (종교와 생활의 연결 관계)

어떤 사람들이 주님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주님에게 안수를 받으려고 합니다. 제자들이 그들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것을 꾸짖었습니다. 예수님은 아이들이 네가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십니다. 아이들을 안수하시고 천국이 이런 자들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다음의 내용이 나타납니다.

(v.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성경은 이 사람을 부자청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부자청년에게 천국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다 지키라고 합니다. 그는 모든 계명을 다 준수했다고 합니다.

(v.18-20)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v.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v.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청년은 예수님에게 천국에 들어갈 자격과 조건을 갖추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에게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쫓으라고 하십니다.

유대사회에서 아이는 율법 // 토라를 지키지 못하기에 사람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아이들이 토라를 읽는 나이가 되면 성인식을 하며 크게 잔치를 합니다. 아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라한 아이는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합니다.

부자 청년은 율법 // 토라는 완벽하게 지켰기에 천국을 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너의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면 천국을 갈 수 있다고 합니다. 부자 청년은 자신의 것을 팔아 천국 가는 것을 거부합니다.

이렇게 구분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종교적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나타내고 증명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예배의 행위입니다. 주일 성수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담아내는 그릇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것을 팔아 나누어 주는 것은 나와 너의 인간관계입니다. 분노와 폭력과 시기와 질투와 착취와 분열에서 사랑과 인내와 용기와 겸손과 자비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젊은 부자에게 정말로 율법을 지켰다면 너에게는 자신의 것을 팔아 나누어지는 모습이 나타난다고 하십니다. 사랑과 인내와 용서입니다. 이것이 율법을 지킨자입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너는 율법을 지키지 아니한 자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종교적 형태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보전하고 지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예배와 기도와 헌금과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충성입니다. 이러한 것을 정말로 했다면 우리의 인격과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사랑과 인내와 용서가 나타납니다.

이러한 우리의 하루가 천국이 되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19장 9-12절 (바울은 결혼을 했는가? 이혼을 했는가? 독신인가?)

예수님은 독신으로 지내신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면 바울은 독신일까요? 결혼을 했을까요?

우리들이 단정적으로 바울의 독신과 결혼 여부를 확인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사회에서는 성인으로 결혼은 매우 중요합니다.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는 것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결함을 지녔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에게도 이러한 고충은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가문과 배경을 보면 그는 결혼을 했을 가능성은 100%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고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고 합니다. 그는 당시의 전통에 따라 12-13살에 약혼도 했을 것이고 1년 후에 결혼도 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결혼을 중시하는 유대인 이였기에 아내가 있었을 것입니다.

(고전 9:5) 바울도 다른 사도들과 같이 아내를 데리고 다닐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내를 데리고 다니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아내와 함께 다니지 않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은 것 같습니다. 왜 바울에게는 아내가 없었을까요?

그러면 왜 그는 아내를 데리고 다니지 못했을까요? 당시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예수를 믿으면 이혼의 사유가 됩니다. 예수를 믿으면 재산을 상속받지 못하거나 유대인의 공동체에서 축출을 당했습니다.

바울이 아내와 일찍 사별 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바울은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혼을 감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혼 당 했을 것이라는 추측 할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당시 일반 신자들에게 나타나는 이야기지만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고전 7:12-15)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v.13)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v.14)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v.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v.16)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바울은 불신자와도 결혼을 유지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v.15-a)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믿지 아니하는 자가 이혼을 원하면 신앙의 차이로 이혼의 길을 열어놨습니다. 바울은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 이혼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로 마음대로 이혼해도 됩니까? 절대로 안 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태 19:12)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 한 자는 받을지어다.

첫째는 어머니의 태로부터 고자가 됐습니다. 선천적으로 이성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결혼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사람이 만든 고자가 있습니다. 직업과 신분으로 고자 된 자들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육체적인 이유로 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신앙의 고자를 원합니다. 신앙의 고자는 종교적 이유로 이혼을 감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의 애정과 사랑을 근본으로 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전 7:1-7)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v.2)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v.3)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v.4)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결혼은 부부의 음행을 방지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v.2)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합니다.

부부는 서로를 존중해야합니다. 상대방이 자신을 음행으로부터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부 관계는 종교적 차이로도 훼손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이 다르다고 이혼을 해서는 안 됩니다.

(v.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v.6)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 .

서로의 성적 요구를 거부하지 말라고 합니다. 부부의 성관계를 독려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이유로 부부관계를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러한 태도는 개인의 분노와 욕심에 따르는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과 애정이 식으면 부부관계도 식을 수 있습니다.

서로의 몸을 거절하지 말라고 합니다. 신앙 때문에 부부 관계를 절제하는 것도 좋지만 서로의 합의하에 얼마간하지 반드시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가지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이 시험한다고 합니다. 바울은 명령이라고 합니다.

(v.7-9)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v.8)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v.9)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바울은 결혼, 재혼을 인정합니다. 이혼을 했지만 독신의 은사를 받았다면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욕을 이길 수 없으면 재혼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고전 7:39-40)을 보면 재혼하는 경우에는 믿는 자와 결혼하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많은 성서학자들의 판단입니다. 바울은 아마도 아내와 일찍 사별을 했거나, 또는 신앙의 차이로 이혼 당했을 것입니다. 그의 부부관계도 애정과 신뢰의 관계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그는 복음을 위하여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가 된 자입니다. 그는 독신으로 복음을 위하여 지냅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우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이혼을 정당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부끄럽지 아니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9장 1-12 (이혼에 대하여)

결혼을 인륜지대사라고 합니다. 결혼은 행복을 전제로 하지만 모두가 행복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 가족 친척 친구들 중에는 이혼을 한 사람들이 하나 둘 정도는 있습니다. 지금도 이혼을 고려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혼을 어떻게 이해해야합니까?

(v.3)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당시 유대사회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이혼에 대한 판단이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신 24:1)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

유대인들은 성경을 문자대로 해석합니다. 일부 유대인들은 수치 되는 일이 있으면, 아내에게 부정이 있으면 이혼을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유대인들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남편의 감정을 강조했습니다. 더 마음에 드는 여자가 나타나면 이혼을 허락하게 됩니다.

똑같은 구절을 서로 다르게  해석을 합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후자를 선택합니다. 이혼이 남자의 감정에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남자가 아내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이 가능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이혼을 질문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분열을 이용하고 예수님을 곤란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였습니다.

우리들은 이 시대에서 어떻게 이혼을 다루어야 합니까?

Catholic 교회는 이혼하면 미사는 참석하지만 영성체 봉헌과 고해성사를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조당이라고 합니다. 조당은 하나님 앞에서 장애, 지장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제도를 거부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와 우리 각자는 각 사람의 신앙 앙심을 판단하거나, 제한하지 못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양심이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양심의 판단이 어떠한 교회 법보다 우위를 갖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양심의 자유입니다. 우리는 개인의 신앙적 판단권리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러한 배경은 영국의 청교도들이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

(v.6)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이혼은 죄입니다. 그러나 간음, 도적질, 사기, 음란, 부정, 시기 멸시도 죄입니다. 어는 것이 큰죄이고 어느 것이 작은 죄가 아닙니다. 죄를 상대화하면 바리세인이 됩니다.  죄의 크고 적음에 따라 의인과 죄인이 나타납니다.  율법주의가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마가 3:28-29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를 받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용서 받지 못합니다.  성령을 훼방한다는 것은 우리들이 하나님이 되어 죄를 심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모든 죄는 용서 받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죄를 판단하거나 다른 사람의 죄를 판단하는 죄는 용서 받지 못합니다.  내가 하나님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이혼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혼은 분명한 죄이며, 죄에 따른 용서가 있으며, 회개하며 새로운 출발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v.7-8)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v.8)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완악함 때문에 모세가 이혼 증서를 주었다고 합니다.  모세의 의도는 이혼을 당한 사람은 그 증서를 갖고 재혼을 할 수 있게했습니다. 모세는 이혼하지만 또 다른 행복을 찾는 길을 열어줍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제도를 악용했습니다. 예수님이나 모세는 이혼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픔에서 또 다른 행복이 있다면 그 길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용서가 있고, 새로운 삶의 허락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사마리아 여인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여인이 물동이를 두고 동네로 달려가는 이유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용서입니다.

다윗과 밧세바의 간음의 결과로 우리아 장군이 죽고 그들의 사이에서 태어난 첫 아들이 죽지만, 하나님은 둘째 아들 솔로몬을 주십니다. 솔로몬은 살롬,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결혼은 짧은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축복과 비교하지 못합니다.

결혼은 매우 귀하지만 영원한 관계는 아닙니다.

Robert Frost의 말을 인용하며 마칩니다.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하려면 이혼을 하라고 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에서 이혼을 해야, 결혼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혼을 생각하지 말고 자신과 이혼을 생각하는 히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18장 21-35 (형제에 대한 용서와 징계)

본문은 형제에 대한 예화입니다. 예수님은 형제 용서에 대한 결론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v.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우리들이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예화를 무조건의 용서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화를 잘 보시면 회개를 전제로 하는 용서입니다.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오늘 날의 1억불 정도입니다. 주인은 종에게 빚진 자신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빚 갚으라 합니다. 빚을 지면 노예로 팔렸습니다. 죄인이 되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빚을 갚지 못하면 죽이기도 했습니다.

종은 주인에게 1억불을 갚을 테니 엎드리어 참아 달라고 합니다. 종은 1 억불의 가치를 모르기에 빚을 갚겠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일억을 불을 갚을 수 있습니까?  당시의 빚은 죄와 동일한 의미입니다.

그는 자신의 죄의 크기와 깊이를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갚겠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하기에 회개 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면 죄를 해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는 죄를 해결했기에 의인이 됩니다. 죄를 해결하지 못한, 세리와 창기와 빚진 자들은 죄인입니다.  그들은 성전 앞에서 가슴을 치며 회개 합니다.  용서 받는 제사의 자리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죄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바울의 말대로 율법은 우리의 죄를 나타낼 뿐입니다.

주인은 종을 용서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그럼으로 은혜를 받은 자는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합니다.  자신의 만달란트를 용서 받았기에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다른 사람을 용서합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그가 회개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절대로 용서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자는 자신의 은혜를 알지 못하기에 다른 사람을 무시합니다.  용서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신학적 Frame이지만  오늘 날 교회에서 강조되지 않습니다.

만달란트 빚진자가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납니다. 백 데나리온은 오늘 날의 만불입니다. 동료의 Hella 의미는 아주 재미있습니다. 동료를 Shen-dulos라고 합니다.  종을 Hella로 둘로스라고 합니다. 둘로스 앞에 접두사가 있습니다. Shen입니다. 가깝다, 동참하다, 같은 위치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친구와 같은 종입니다. 형제와 같은 종입니다. 첫 번째 주인과 종의 관계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는 형제와 같은 동료입니다. 친구입니다. 영어번역은 Fellow servant입니다. 동등한 관계임을 나타냅니다.

동등하지만, 빚진 자는 자신의 형제에게, 친구에게 , 드려 간구합니다. 간구하다는 // Para-klel입니다. 소리치며 애원합니다. 성경에서 주님을 부르는 소리, 기도하는 소리로 종종 사용됩니다.

그는 자신의 빚을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갚지 못한 것을 회개합니다.  또한 만불은 얼마든지 갚을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알고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용서 받은 자가 친구를, 형제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아니한 자가 회개한자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만달란트 빚진자는 백 데나리온 빚진자를 용서해야합니다.  예수님은 회개한 자를 용서하지 아니한 회개하지 않은 자를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에 하나님 말씀의 정교함이 있습니다.  우리의 착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예수님으로 부터 용서 받은 우리는 회개하는 형제는 100% 용서해야합니다.

회개는 용서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만달란트 빚진 자와 같이 회개하지 아니하는 자는 우리들이 용서 하고 싶어도 용서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강조합니다.

(고전 5:11-13)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v.12)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v.13)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개혁교회가 교회되는 3가지 신학적 증표가 있습니다. 첫 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읽혀지고 선포됩니다. 둘째는 세례와 성찬입니다. 그리고 3번째는 권징입니다. Discipline입니다. 법에 따르는 징계입니다. 문제는 오늘 날의 교회는 3번째를 하지 않습니다.

형제와 원수를 구별하지 못하기에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모든 것을 사랑으로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 사랑에는 회개하지 아니하는 형제에 대한 징계와 벌이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한 형제는 용서와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교회가 교회 답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 해야합니다.

마태복음 18장 15-20절 (원수와 형제의 강박적 용서-2)

어제에 이어 계속합니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위하여 기도해야합니다. 그러나 형제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형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v.15) 주님은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권고는 Hella의미는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질책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가 너의 말을 들으면 형제를 얻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안 되면 다음 단계로 들어갑니다.

(v.16-17)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v.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증인 앞에서 죄를 지적하라고 합니다. 증인들 앞에서도 죄를 시인하지 않으면 교회에게 말하고 교회 말도 듣지 아니하면 이방인 세리로 여기라고 합니다. 이방인은 개와 같이 여기라고 합니다. 인간 취급하지 말라고 합니다. 세리는 성전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를 신자로 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형제의 판단에 대하여 하나님이 이렇게 함께 하십니다.

(v.19-20)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형제의 잘못을 지적하면 하나님이 그 잘못을 처리하신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예수님이 강경하게 말씀하십니까? 형제가 긍극적으로 교회를 비난하고 조롱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되신 교회를 조롱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확장시키면 우리 각자가 교회인데 우리의 신앙과 믿음을 조롱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의 신자들은 형제의 죄를 적하지 않습니다. 형제의 잘못을 사랑으로 용서해야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니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교회를 조롱하게 됩니다.

아마 베드로도 그동안 주님에기 들은 말씀과 비교하니 혼란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v.21)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줍니까? 일곱 번까지 합니까?

베드로는 주님에게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을 용서해야 할 것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본문과 똑같은 내용이 누가 복음에 나타납니다.

(눅 17: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v.4)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형제를 용서하는 조건이 회개입니다. 형제가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회개하면 일곱 번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형제는 원수가 아닙니다. 형제는 형제입니다. 회개하면 용서해야합니다. 7번이라는 단어가 반복되는 이유는 형제는 형제가 됩니다.

참고로 형제이지만 원수가 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부모의 재산 상속, 동족의 전쟁으로 형제이지만 원수와 같습니다. 원수보다 더 악한 관계가 됩니다. 이렇다고 해도 형제는 형제입니다. 원수가 아닙니다. 원수보다 더 악하지만 원천적 관계가 형제이기에 그들이 회개하면 용서해야합니다.

원수는 나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이 나에게 해악을 주면 원수가 됩니다.

형제가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는 용서 할 수 없습니다. 원수는 회개 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수를 갚으십니다. 그러나 형제가 회개하면 우리는 용서해야합니다. 우리는 원수를 위해서는 기도하며 사랑해야합니다.

그럼으로 형제에게 바울은 다음과 같이 판단하라고 합니다.

(고전 5:11-13)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v.12)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v.13)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형제가 회개하지 아니하면 형제의 심판권은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형제와 원수를 구분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18장 15-20절 (원수와 형제의 강박적 용서-1)

우리는 신자로 용서와 사랑에 강박관념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무조건 용서해야한다고 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용서에 대해서 경고하고 구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형제에 대하여 말씀한다. 형제는 나와 상관관계, 이해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원수는 나와 이해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형제는 어떠한 목표를 두고 하나의 마음이 되면 형제라고 합니다. 의리를 지키며 신의를 쌓는 관계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서로 해결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수는 나와 관계가 없는 사람이 나에게 고통과 슬픔을 안겨줍니다.  나의 인생을 파멸시킵니다.  깊은 원한의 관계를 만들어냅니다.

로마 교황이 본문을 인용해서 명동성당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일본을 무조건의 용서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교황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해야 우리가 하나님에게 용서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는 용서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분열의 간격을 메우고 상처를 치유하며 형제적 사랑을 이루는 하느님의 능력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교황이 강론 할 때에 그 자리에는 14살의 어린 나이에 일본군의 위안부로 끌려가서 수많은 군인들에게 성적 노리개로 착취를 당하고 평생을 고통으로 살아온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몸과 마음의 상처로 정상적 결혼이 불가능했습니다. 평생을 가난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일부는 중국에 버려졌습니다. 너무나 어린 나이에 끌려왔기에 조국의 말도 잊고 고향의 부모와 형제들을 그리워하며 죽고 자살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위안부 할머니들 앞에서 설교를 하셨다면 무조건 용서 하라고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수와 형제를 구분하며 말씀 하셨을 것입니다.

(마 5:44) 원수는 복수가 아닌 사랑의 대상이라고 하십니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롬 12:19-20) 원수 갚지 말라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원수를 맡기면 하나님이 갚으시겠다고 합니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합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숯불을 원수 머리에 쌓으십니다. 원수는 하나님이 갚으십니다.

우리는 원수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위하여 기도해야합니다.

교황은 설교를 잘못했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용서하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위안부 할머니와 일본은 원수관계이지 형제가 아닙니다. 이렇게 설교해야합니다. 일본을 사랑해야합니다. 일본을 위하여 기도해야합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하면 하나님은 일본의 머리 위에 숯불을 두실 것입니다. 우리는 원수를 용서 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내일 형제에 관해서 언급합니다.

마태복음 18장 12-14 (가치와 사랑)

(v.12)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세상의 상식과 수학적 계산, 경제적 논리에 맞지 아니하는 것이 99 마리의 양을 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는 것입니다. 99마리의 양과 1 마리의 양,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고 중요합니까?

99마리를 목장이나 안전한 곳에 두는 것이 아닙니다.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찾습니다. 산에서는 늑대, 곰, 들개, 양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 99마리는 이러한 것들의 공격을 받으면 어떻게 될까요?

어떤 분은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상징적이라고 하면 우리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 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99마리가 산에 있어도 하나님이 지켜 주시는 것을 전제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산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 했을 때에는 위험성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본문과 관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어제도 언급했지만 예수님의 상식과 가치는 우리와 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v.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우리의 상식과 가치와 경제적 논리와 모든 것이 무너뜨리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세상의 윤리와 가치를 파괴합니다. 자식이 살인자라고 해도 부모는 그 자식을 살인자 취급을 않습니다. 그저 부모의 잘못으로 생각하기에 부모가 가슴을 칩니다.

99마리의 양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양들입니다. 사랑은 자신의 죄악성을 깊이 아는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자신의 죄악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면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생존합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수치를 이기게 하는 사랑으로 모든 것을 사랑하며 이길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의도적 고난도 자초합니다.

1마리의 양은 사랑을 알지 못하는 양입니다. 자신의 죄악성을 알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세상을 이기는 힘과 능력을 전혀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돈과 명예와 자존심으로 살아갑니다.

우리의 힘은 우리의 죄의 비참함을 아는 데서 시작합니다. 죄악의 더러움과 비루함에서 우리는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해방을 예수님이 주실 때에 우리는 가장 사람다워집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어려움을 기쁨으로 이기고, 어려움도 스스로 자초합니다. 나의 죄악을 갚는 길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알면 그 길은 우리들이 세상을 이겨가는 99마리의 양이 됩니다.

(v.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죄와 세상을 이길 힘을 갖지 못한 한 마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99마리의 양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기에 오늘도 산에 두고 계십니다. 이러한 은혜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18장 1-10 (상식 Common sense)

세상은 계급과 신분의 사회입니다. 높고 낮은 것이 있고, 많고 적은 것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혁명을 하시면 예수님은 왕이 되시고 자신들은 영의정 좌의정 그리고 장관을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자리를 두고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상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상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v.2-3)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v.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 아이는 Hella로 보면 Paidon을 사용했습니다. 막 출생하거나 아주 어린아이입니다. 본문과 동일한 배경의 마가복음은 엄마로부터 건네받은 아주 어린 아기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탈무드를 읽지 아니하면 사람 취급을 안 했습니다. 무기를 들고 싸울 수 없으면 그 사람은 그 사회에서 짐이 되는 짐승으로 생각했습니다. 부모가 빚을 갚지 못하면 아이들은 노예로 팔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한다고 합니다. 이런 아이를 실족케 하면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깊은 바다에 빠져 죽는 것 이 낫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일로 실수하는 사람들은 손이나 발을 찍어 내버리라고 합니다. 불구자, 절뚝발이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합니다.

(v.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천국은 우리들이 어린 아이, 소자를 나와 같은 인격으로 받아줄 때에 천국의 문이 열립니다.

내가 무시하고, 조롱 할 수 있는 사람을 존중하면 우리는 천국에 갑니다.

나에게 손해를 주는 사람을 비난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천국에 갑니다.

우리의 사랑과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고 심지어는 배신한 사람을 우리들이 용서하면 우리는 천국에 갑니다.

천국은 참으로 가기 힘이 든 것 같습니다. 우리들이 비상식적 인간관계를 유지해야합니다.  이러한 비상식적 인간관계는 우리에게 참으로 고통스럽습니다.

그러기에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의지합니다.

마태복음 17장 22-27 (세금과 신앙)

세금은 이 세상을 유지하는데 절대적 인 것입니다. Market을 보던 Shopping을 하던 High way을 다니던 영화를 보던 식당에서 음식을 먹던 세금을 내야합니다. 집이 있으면 재산세를 내고 차를 갖고 있으면 자동차 등록세를 내야합니다.

이러한 세금으로 국가와 국가의 제반 시설을 유지합니다. 세금이 없으면 우리는 물을 마시지 못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러한 세금으로 성전을 유지하는 세금, 다리를 건너는 교량세, 각 사람에게 인두세가 있었습니다. 많은 종류의 세금들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의 소속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세금은 그 백성의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이 세금을 내는 대상에 따라 예수님의 소속된 나라가 결정됩니다.

(v.24)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반 세겔은 성전세로 바치는 금액입니다. 약 $200.00 금액입니다.

성전의 세금을 내면 예수님은 성전에 속한 사람입니다. 유대인의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 아버지에게 세금을 납부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상의 임금이 자신의 아들에게 세금을 받지 않는 것처럼 예수님 자신도 성전 세금을 낼 이유가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법과 질서를 인정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의 법과 질서를 준수하시면서 세금을 지불합니다.

(v.27)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세상의 문화와 정치와 제도를 인정하십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일반적 은혜라고 합니다.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이해해야 합니다. 올바른 은혜는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와 일반적 은혜를 결코 차등을 두거나 분리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특별 은혜,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자는 구원의 은혜에 치중하고,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일반적 은혜를 무시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은 아주 잘못된 죄악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입니다.  특별은혜를 강조하려고 일반은혜를 부정하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도 세금을 내야합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을 적대시하면 안 됩니다. 경찰과 군인과 공무원은 우리를 지키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이 세상의 제도와 우리는 분리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무조건 적대시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인정할 수도 없습니다.  인정 할 수 없기에 신앙을 지키며 세상이 우리에게 주어진 의미와 책임을 감당해야합니다.  예수님이 세금을 내시는 것은 이러한 상징적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바다와 같이 항해를 합니다. 배에 물이 들어오면 우리는 침몰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물이 없이 이 세상을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의 가장 상징적 존재가 바로 세금입니다.

세금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7장 14-21 (배탈 나지 않는 기적의 결과)

성경에 수많은 기적이 있습니다.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기적은 귀한 예수님의 은혜지만 그 기적으로 제자들이나, 백성들이 배탈이 납니다.  그러나 배탈이 나지 않는 기적이 있습니다.  변화산의 기적입니다.

변화산의 기적은 다른 기적과 내용이 다릅니다.  성경의 많은 기적들은 우리의 필요와 요구에 의하여 주어지는 기적입니다.  물론 이러한 기적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계시 됩니다.  그러나 변화산의 기적은 예수님과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계시합니다.  하나님이 빛난 구름으로 나타나십니다.  성령 하나님이 하늘에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빛과 같이 희어지십니다.

그 결과, 베드로와 제자들은 죽음과 같은 공포를 경험합니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기적은 기쁨과 감사입니다.  사람이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계시하는 기적은 죽을 것 같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어떠한 기적은 정말로 부끄럽습니다.  우리의 죄와 욕심이 들어납니다.  그 결과 남에게도 말 할 수 없기에 믿음의 비밀로 간직하게 됩니다.  이것이 배탈이 나지 않는 기적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내려오시니, 제자들은 간질로 발작하는 아이를 고치지 못합니다.  주님은 이러한 제자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라고 책망하십니다.

예수님이 지적하는 제자들의 믿음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말씀하신 것 처럼, 제자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의심은 끝없는 의심을 양산합니다.

그럼으로 베드로는 모세와 엘리야, 예수님을 위하여 초막을 3개를 짓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엘리야, 모세와 같은 수준으로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죽을 것 같은 경험을 합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기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는 것이고, 그것을 알 때에 죽음과 같은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가 들어나기 때문입니다.

산 밑에 있는 제자들은도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간질 환자를 고치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믿음이 작은 자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었다면 간질 환자를 고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성령이 오심으로 알게 됩니다.  그 비밀을 알게 된 제자들은 주님과 같은 십자가의 길을 갑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우리들이 의심에서 벗어나는 길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인정하고 그의 말씀을 듣고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