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5장 27-32 (인간 실종)

오늘 말씀은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NETFLEX 에서 만든 영화 Black Mirror와 같은 시대입니다.  우리는 전화기, Black Mirror로 수많은 정보들을 주고 받습니다.  그러나 그 정보를 주고 받는 화면에서는 우리의 얼굴이 반사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너와 나의 대화의 내용이 상실되었기에 연예, 스포츠,  타인의 사생활이 주요 대화 내용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부끄러움과 수치가 불륜이 정당화 시킵니다.  그러다가 이러한 것도 지겨우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마5:27-32)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5: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마5: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마5: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마5: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이 시대는 인간 실종이 나타납니다.  그럼으로 Black Mirror에서 나는 세상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이제는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을 만들어 내야합니다.

전화기를 손에 서 놓고 짧은 순간에라고 두 손 모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나를 찾는 것입니다.

마태 5장 21-26 (언어 살인에 대한 심판)

오늘 본문은 십계명의 제 6 계명인 살인하지 말라 입니다.  살인은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주님은 살인을 생명이 아닌 언어 살인으로 정의합니다.

성경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을 죽이는 것과 같기에 철저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이, 언어가 살인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죽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의도적 살인이 아닌 것은 보호 받습니다.  사고로 사람을 죽이면 도피성에서 보호를 받습니다.  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성에서 보호를 받습니다.  제사장이 죽으면 그 도피성에서 해방 되어 자유를 얻습니다.  그러나 의도적 살인은 반드시 처벌을 받습니다.

우리들이 말의 실수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이해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실수 있다면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말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 벌을 받는 과정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의살인의 의도가 없으면 // 죄를 물을 수가 없습니다.

(v.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이 말씀을 // 3 개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형제에게 노하는 자는 심판을 받는다고 합니다.  노 한다는 것은 Hella로 Olgozo입니다.  상대방을 분노 Angry하게 하는 일이 됩니다.  심판은 당시 유대 사회에 지역마다 있던 동네 재판소입니다.  상대방을 화나게 하면 지방 재판소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처벌이 약한 것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라가는 Hebrew 의미로 멍청한 놈, 바보입니다.  상대방을 조롱하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공회에 끌려갑니다.  공회는 Hella로 Shenaferion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Sanhedrin입니다.  지방에서 예루살렘으로 재판을 받으러 가야 합니다.

세번째는 형제에게 미련하다고 하면 지옥불에 들어갑니다.  미련한 놈은 Hella로 Moros입니다.  어리석고 미련하다는 의미입니다.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개새끼입니다.  상대방을 개새끼라고 하면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됩니다.

지옥불은 지방 재판소도 아니고 예루살렘의 대법원도 아닙니다.  죽어서 가는 지옥입니다.

(v.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v.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미움을 갖고 드리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그럼으로 급히 서로 화해하라고 합니다.

2017년도 우리들이 서로 위로하고 이해하는 말을 시작하는 한해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 5장 17-20 ( 우리의 민낮-2017)

제가 요사이 들어 보지 못하던 단어가 있습니다.  화장하지 않거나 성형하지 않은 얼굴을 쌩얼, 또는 민낮이라고 합니다.  실체의 모습입니다.  본래의 모습입니다.

신앙에서 진짜 우리의 민낮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쌩얼은 무엇일까요?

기적이 없으면 우리 신앙의 진짜 실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다면, 은총이 없다면, 인도하심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의 실력이 들어납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율법의 준수를 강조하십니다.

(마 5:19-20)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v.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건성과 참여성입니다.  오늘 날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과 도움과 축복으로 포장된 신앙 생활을 목표로 합니다.  그 결과 우리의 모습은 이러한 것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가로 우리의 신앙을 증명합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기적과 축복을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합니다.

그러면 가난하고 실패하고, 고난과 고통에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됩니다.  아주 이상한 논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과 고난은 우리와 상관 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가장 구박 받는 것이 됐습니다.

(마 7: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러한 심판을 피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항상 머물러야 합니다.  이 부분이 실행되지 아니하면 산상수훈 21절 부터 마지막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간디가 말하고, 슈바이처가 말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훈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고 오지 않았습니다.  생명과 진리를 주시려고 왔습니다.

2017년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명과 진리에 이르시기 바랍니다.

추신 내일 저녁 8시에 송구영신 예배가 있습니다.

 

마태 5:14-16 (빛의 종류)

철학의 근본 구조를 제공하는 플라톤의 이원론에 사람들은 동굴에 쇠사살에 묶여 빛을 뒤로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그 빛을 볼 수 없기에 플라톤은 우리는 빛의 그림자를 진리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빛은 철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존재입니다.  선과 의와 진리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성경은 빛은 다릅니다.  플라톤의 빛은 선의 빛, 진리의 빛, 행복의 빛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빛은 악의 어두움, 불행, 불의를 나타내게 됩니다.  이원론적 사고에 빠집니다.  그러나 성경의 빛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예수님도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합니다.

 (v.14-a)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라고 하십니다.

빛은 생물이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생명의 근원요소입니다.  빛을 의지하지 않으면 우리는 죽습니다. 자연의 이치이며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러한 빛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빛이 있습니다.

(요한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예수님이 참 빛 하나님으로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우리 안에  참 빛이 있습니다.

철학의 빛은 우리들이 노력해서 얻어지는 빛입니다.  이 빛은 상대적인 빛입니다.  선과 악을 벗어나지 못하고, 행복과 불행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세상의 빛이 되는 이유는 참 빛, 예수님이 찾아오심입니다.  죽음에서 부활입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가는 빛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죽음과 사망을 이기는 빛입니다.

오늘도 많은 신자들은 빛을 철학적으로 이해합니다.  신앙의 가치와 목적이 현세구복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신앙의 비본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 고백이라면 세상의 빛에서, 철학의 빛에서 하나님의 빛으로 이동해야합니다.

이러한 빛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철학과 세상의 가치에 머물게 됩니다.  진리에 머무는 신앙, 빛의 신앙의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마태 5장 13절 – 소금

제가 Los Angeles에 가면 길거리에서 남미 사람들이 파는 과일을 꼭 사먹습니다.  그들이 파는 과일에는 소금을 뿌려줍니다.  달달한 과일에 소금을 뿌리면 맛이 없을 것 같지만 아주 맛이 있습니다.  특히 Mango와 Avocado에 소금을 뿌리고 먹으면 아주 맛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고추가루도 뿌립니다.  음식을 맛 내는 중요한 역활을 합니다.

아주 오래전에 본 영화인데 감옥을 탈출한 사람들이 러시아의 깊은 산으로 도망을 다닙니다.  1 달 이상 다니더니 사람이 죽어갑니다.  산에서는 소금이 없기 때문입니다.  소금을 두고 목숨을 거는 싸움을 합니다.

옛날에는 소금은 돈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Salary을 봉급이라고 합니다.  Salary는 Latin어의 영어 Salt의 의미입니다.  소금이 돈으로 봉급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군인의 봉급으로 소금을 주었습니다.  소금은 국가 전매 사업입니다.  소금은 매우 중요한 역활을 했습니다.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우리를 세상의 소금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소금이라는 의미는 소금과 소금이 함께 있을 때에는 소금의 가치가 없습니다. 맛을 내야 할 이유도 없고 방부제의 역할을 할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에 있을 때에 소금이 된다고 합니다.

오늘도 우리들이 세상에서 맛과 방부제의 역활을 해야합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초대 교회에서 신자들은 세상에 예수님을 설명해야했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핍박하고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교회는 세상에서 소금의 역활을 합니다.  그러나 중세에 들어와서 교회는 세상의 중심이 됩니다.  정치와 경제와 모든 권력의 중심이 됩니다.  이때에 교회는 타락합니다.  소금의 역활을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 날 이 시대는 현대는 다원주의 세계입니다.  다원주의라는 것은 세상의 기준점이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과거와 같이 세상의 기준점이 하나님이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의 일원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부속기관으로 전락했습니다.

저는 우리들이 초대 교회로 돌아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증명해야합니다.  변명해야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변명하는 방법의 하나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세상 사람에게 신자다운 맛을 주고 세상을 썩지 않는 역활을 해야합니다.

나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시대에서 소금으로 사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 복음 5장 1-12절 – 팔복

산상수훈을 생각하면 많은사람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많은 성화들이 이러한 모습을 그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절에 보면 예수님이 무리를 보셨지만 제자들이 주님에게 나왔다고 합니다.  4장 후반절에 주님이 제자들을 선택하십니다.   그럼으로 산상수훈은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주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니라 소수의 사람들이 주님께 나온 것 같습니다.

본문을 팔복이라고 합니다.  성지순례에 가면 반드시 가는 곳 중의 하나가 바로 팔복교회입니다.  제가 이곳을 잘 기억하는 것은 우리 큰 애가 첫 번 모자를 사주었는데 잃었습니다.  이스라엘 간다고 하니 두 번째 똑같은 모자룰 사주었는데 그 모자를 이곳에서 잃어버렸습니다.  저에게는 복이 없는 곳이라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밤에 택시를 타고 백화점을 찾아가 백화점의 모든 가게를 뒤지다시피 해서 똑같은 세 번째 모자를 살 수 있었습니다.  모자 안에는 히브리어로 쓰여진 모자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팔복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습니다.  팔복을 받는 것이 결코 쉽지 아니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팔복도 잘 보시면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팔복은 이 땅의 복을 주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팔복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러나 팔복은 제가 쉽게 잃어버리는 모자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케하고 핍박을 받아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그리고 첫 번 복과 마지막 복이 천국으로 끝이 납니다.  최종의 복은 천국의 복입니다.  그 복을 위하여 이렇게 살라고 합니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같이 박해를 받았다.
이러한 복을 찾으시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마태 4장 17-22 (예수님이 주시는 성탄의 선물)

내일이면 Christmas Eve이고 주일은 성탄입니다.  우리들이 Merry Christmas라고 인사합니다.  아기 예수님이 오신 날 우리는 선물을 주고 받습니다.

우리에게는 도구가 필요합니다.  직장에 가려면 차가 필요하고, 주부에게는 부엌의 칼과 식기가 필요합니다.  세탁소에서는 세탁기와 Boiler가 기본 장비가 됩니다.  도구가 없으면 일을 하지 못합니다.

제자들을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하며 그들의 도구인 배와 그물을 버립니다.  배와 그물을 버렸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 방법을 포기한 것입니다.  이제 부터는 주님의 방법으로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v.19)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방법으로 살자고 하십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방법으로 살았는가를 돌아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각종 병자를 고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병을 고치신 것은 당시의 성경적 배경에서는 병든자를 죄인들입니다.  죄를 졌기에 병이 들었습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하심입니다.  물론 병든 자의 고통과 아픔에서 건져 주심이지만 유대적 배경에서는 죄의 용서입니다.

우리도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어야 합니다.  타인의 병든 것을 고치려면 내가 병들지 말아야 합니다.  건강해야합니다.  죄에서 멀어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가정에 충실해야합니다.  자식으로 부모에 효도해야합니다.  직장의 직원으로 성실하고 주인이면 주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죄악에서 멀어지는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와 말씀을 가까이 해야합니다.  예배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게 되면 죄에서 멀어집니다.  건강한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성실합니다.  그래야 사람을 낚을 수 있는 어부가 됩니다.  다른 사람의 병을 고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라틴어의 Discipulus은 Disciple 제자가 됩니다.  제자는 학생, 배우는 사람이 됩니다.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를 때에 우리는 왼벽한 존재로 변화되어 갑니다.  학생은 스승이 아닙니다.  그러나 스승처럼 되는 것이 학생입니다.  이러한 도구들이 갖추어 질 때 우리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성탄의 선물로 건강한 삶이 되길 바랍니다.

마태 4장 12-17 (예수님에 대한 오해의 시작)

오늘 본문의 배경은 매우 어둡습니다.  마태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공생애를 막 시작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미 일년의 시간이 지난 간 후에 본문이 기록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매우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마태 2장에서는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황금과 유황과 몰약으로 예물을 드립니다.  이것은 왕에게만 드리는 예물입니다.  주님은 하늘과 땅의 왕으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마태  3 장에서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고 하나님은 내 사랑하는 아들 내가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 4 장에서는 마귀의 시험을 3 번 이기시고 천사들이 주님을 섬기게 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우리를 당황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이 다 사라지게합니다.

(마 4:12)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세례 요한이 체포 된 소식을 듣고 주님이 갈릴리로 오셨다는 내용입니다.  세례요한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오듯이 예수님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왔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은 다른 사람에게 비겁하게 보입니다.  약하게 보입니다.  멸시와 천대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어두움에서 빛이 되는 길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민족과 국가를 변화시키고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마4:16-17)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마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십지가를 이해하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 4장 8-11 (양심과 신앙)

이번에는 마지막 시험입니다.

(v.9)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합니다.

사탄에게 절 한 번 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구원의 목적이 달성됩니다.  십자가 사라지고, 사탄에게 경배하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오늘도 우리에게는 우리의 신앙을 버리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길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아니하고 살면 해결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나의 자존심, 경제적 손해를 당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됩니다.

마귀는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돈을 벌려면 교회를 떠나야 한다고 합니다.  신앙생활하면서 돈을 버는 것은 거짓도 있고 양심을 속이는 것이기에 교회를 떠나는 것이 신앙적으로 떳떳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귀의 음성입니다.

마귀는 우리들이 세상 사람과 같다고 합니다.  양심을 지키며 살라고 합니다.  양심을 지키지 못하면서 무슨 신앙을 지키느냐고 조롱합니다.  그럴듯합니다.  우리는 양심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음성입니다.

(v.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의 양심과 상관 없이 우리는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 자식들이 우리에게 양심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자식이 양심적이 아니라고 해서 그 자식을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는 부모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은 무조건입니다.  우리의 자격과 조건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습니다.

 

오늘도 사탄에게 속지 않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마태 4장 6-7 ( George Washington Bridge에서 떨어지면? )

마귀가 예수님을 두 번째로 유혹을 합니다.

(v.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성경은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신분을 밝힙니다.  예수라고 합니다.  나사렛 예수입니다.  예수님에게는육친의 아버지, Joseph 이 있고 육신의 어머니 Maria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인간 예수로 시험 당합니다.

우리들이 George Washington Bridge (일명 조다리) 에서 떨어지면 죽으까요?  살까요?  조다리에서 떨어지면 우리들이 살아나지 못합니다.  물에 부딪히는 충격도 대한 할 것이고, 물에 빠져서 나오는 시간에 이미 익사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조다리에서 떨어지면 죽을까요?  살까요?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시장하셨습니다.  먼길을 걸으면 피곤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죽습니다.

마귀는 항상 이것을 무시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유혹합니다.

(v.6)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나라렛 예수, 인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신다고 합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떨어지면 천사가 사뿐히 앉고 내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오늘 날 한국 교인들에게 만연된 시험이 바로 이러한 시험에 빠져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조다리에서 뛰어 내리면 산다고 합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부추기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믿음이라는명목아래에,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혀 예의를 지키지 않습니다.  전혀 법과 상식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니 세상은 우리를 보고 미쳤다고 합니다.  무식하다고 합니다.

Princeton University에 Firestone이라는 도서관이 있습니다.  2 차 세계 대전 이후에 지어진 가장 큰 도서관입니다.  그런데 도서관에 들어가 보면 지하로 지어 놨습니다.  이유는 그 옆에 University Chapel이 있는데 그 건물보다 높게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식이 사상이 하나님을 누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의미로 인간의 이성과 지성은 하나님으로 부터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 날 신자들은 인간의 이성과 지성을 하나님으로 부터 시작하지 않았고 마귀로 부터 시작했다는 오만한 발상을 갖고 있습니다.  신앙고백과 신학은 쓰레기 통에 처박앗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날 많은 신자들은 조다리에서 뛰어 내립니다.  조다리에서 뛰어 내리면 기적과 같이 살아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일이 생기면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이라고 합니다.  대부분 죽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죽으면 믿음이 없는 결과라고 합니다.

이러한 기적과 능력을 나태내려고 우리들이 즐겨 암송하는 말씀의 하나입니다.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을 악용해서 자신이 목적을 달성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심지어는 신자들을 선동합니다.  우리의 꿈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적과 능력을 베풀어주십니다. 2016년과 지난 목회와 저의 개인적 시간에서 저는 수많은 기적과 능력을 확인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적과 능력은 믿음의 비밀로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믿음 없는 저에게, 죄 많은 저에게, 불쌍해서 하나님이 도와 주신 것입니다.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의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알면 절대로 우리의 꿈과 목적으로 사용 할 수 없습니다.

(빌 4:10-12)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v.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v.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바울은 자신의 현실에서 모든 것을 감당한다고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듯이 자신의 현실을 십자가로 질 능력을 달라고 합니다.  이것이 내게 능력 주시는 주님에게 행하는 모습니다.

예수님이 죽어야 할 곳은 십자가입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 죽으시면 안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곳은 나의 십자가입니다.  나의 현실에서 진지하게, 성실하게 하루를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