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4장 1-4 떡과 말씀

(마 4:1-4)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v.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v.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v.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귀의 첫 번째 유혹은 광야에서 사십일을 먹지 못하신 주님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명령해서 떡이 되게 하라고 합니다.  마귀가 주님을 3 번 유혹 할 때마다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면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시험을 대응하는 주님의 태도는 하나님의 아들 보다 인간 예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신적 권위로 40일을 굶어도 배가 고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혹을 당하시는 예수님은 인간으로 배가 고프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많은 유혹을 당합니다.  예수님의 유혹은 우리가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탄은 돌이 떡이 되게 하라고 합니다.  돌과 떡은 성분이 다릅니다.  돌은 먹을 수 없지만 떡은 먹을 수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자연에서 초자연적 현상을 요구합니다.  우리들이 신자로 초자연 증거를 갖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돌이 떡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능합니다.  자연에서 초자연을 만들어내십니다.  주님은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죽은 자를 살리고, 물 위를 걸어가셨습니다.

마귀는 주님이 할 수 있는 당연한 부탁을 합니다.  주님에게는 이러한 요구는 어려움이 없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유혹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깊이 살펴보면 엄청난 유혹입니다.  예수님은 인간 예수, 자연인, 우리와 같은 사람이시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으로 나타나라고 합니다.

(v.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인간의 인간 다움은 무엇입니까?  철학적 표현으로 자연인의 자연인 다움은 무엇입니까?  사람의 사람 다움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 사람은 //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메추라기와 만나 반석의 물을 먹었습니다.  돌이 떡이 되는 기적과 능력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정력이 약해졌다고 합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생선과 부추와 마늘을 먹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애굽에서 생선 부추  마늘을 먹을 때에는 하나님에게 노예로 사는 고통으로 탄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생선 부추 마늘도 그들에게 절대로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인간의 자유와 진리와 행복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어느 남자가 여자에게 Diamond을 선물합니다.  여자가 매우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그 Diamond을 좋아하는 이유는 첫째는 Diamond 때문입니다.  둘째는 Warranty Paper 때문입니다.  그 반자를 준 남자가 사라집니다.

우리에게 자유와 진리와 행복은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삶입니다.  그 방법의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 6:51) 주님은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한다고 합니다.  세상은 나의 떡으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도 좋은 식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식사 할 때마다, 하나님의 떡, 말씀의 떡을 드시기 바랍니다.

마태 4장 1-4 (유혹과 시험)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마태 복음 4장의 말씀을 사탄이 예수님이 시험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유혹과 시험을 구분해야합니다.  이러한 구분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필요합니다.

유혹은 상대방을 미혹 현혹시켜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창세기에 뱀 사단이 Eve을 유혹하여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명령한 선악과를 먹도록 유혹합니다.  유혹은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상대방을 잘못 된 길로 인도합니다.  이러한 유혹의 결과 아담과 이브에게 죽음과 사망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시험은 상대방의 의지와 실력을 알아보는 방법입니다.  우리들이 학생 때에 시험 때문에 공부합니다.  학생들은 시험 때문에 원망하며 불평하며 밤을 새워 공부합니다. 시험은 학생을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시험은 그 학생을 적정한 수준으로 이끌고 갑니다.  학생을 학생답게 하는 것이 시험입니다.  시험 없는 학생은 학생이 되지 못합니다.

사탄의 유혹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에서 사탄의 자식이 되게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답게 만들어줍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탄을 3 차례에 걸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겨냅니다.

다음과 같이 정리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유혹을 당 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만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가 없다면 우리는 유혹으로 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르 시험하시는 이유는 고전 10장 12절에서 이렇게 밝혀줍니다.

(고전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믿음의 사람이 교만해지만 하나님은 시험을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고, 시험을 피하게 하시고 또한 시험을 당하면 그 시험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유혹과 시험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죄악에 빠지면 사탄에 유혹을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 교만하면 하나님이 시험을 하십니다.

이러한 선택에서 벗어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추신: 3번의 유혹을 3 번에 나누어 하겠습니다.

 

마태 3장 13-17 (천국과 유토피아의 차이)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세례 받는 장면입니다.  세례 요한은 세례를 줄 수 없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십니다.

세례 받으실 때에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하늘에서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비둘기와 같이 강림하십니다.

초자연의 하나님이 자연에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이 보고 느끼고 알 수 있는 존재로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시간과 질서와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하늘에 계시지만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이 감옥에 수감된 것을 아시고 세례 요한의 설교를 반복하십니다.  (마 4:17)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 천국입니다.  루터의 말대로 지옥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이 계신 곳은 천국입니다.

인류도 계몽주의 이후에 천국을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이것을 유토피아 (Utopia)라고 합니다.  인간의 이성과 지식과 경험으로 천국과 같은 유토피아를 만들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류는 전쟁과 빈부의 격차와 사상적 갈등으로 Dystopia (디스토피아)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도 미국의 정치 한국의 최순실 사태는 전형적 디스토피아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하여 상대방을 디스토피아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에 우리의 환경과 조건을 초월하는 천국이 나타납니다.  장차 우리에게 천국이 주어지지만 우리는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천국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유토피아와 천국의 차이입니다.

천국의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 3장 1-12 (우리의 신분)

세례 요한이 등장합니다.  그는 제사장 집안 출신입니다.  그럼으로 그가 있어야 할 곳은 광야가 아니라 예루살렘의 성전이 됩니다.  그가 입어야 할 옷은 제사장의 옷이지만 그는 낙타의 털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가 먹어야 할 음식은 제사의 제물이지만 그는 꿀과 메뚜기를 먹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신분의 변화가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신분의 변화가 있습니다.

우리는 조국을 떠나 이곳 미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민자라는 신분으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도 세례 요한과 같이 당연히 있어야 할 곳이 있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왓다고 합니다.  정확한 의미는 천국이 IS AT OUR HAND입니다,  우리는 천국의 신분입니다.  우리는 광야 같은 세상에 살지만 우리의 신분은 한국도 아니고 미국도 아닌 하늘의 시민권자들입니다.

그럼으로 회개합니다.  우리들이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서 회개해야합니다.  우리의 신분이 천국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세례요한과 같이 광야 같은 세상에 살아가지만 우리들의 영원한 장소가 아닙니다.  언제가는 우리의 집 천국으로 가야합니다.

우리의 신분을 확인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 2장 13-23 Draem에서 Vison으로

우리는 꿈을 꿈니다.  꿈에는 2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Dream과 Vision입니다.  Dream은 누군가 해몽을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Vision은 스스로 꿈을 꾸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꿈이 나타납니다.  Dream과 Vision 어느 것에 해당하는 꿈이 됩니까?

요셉이 다음과 같은 꿈을 꿉니다.

(마 2: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하나님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을 가라고 합니다.  그 결과 헤롯은동방박사들에게 아기 예수의 탄생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합니다.  헤롯은 16-17절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들을 죽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그의 잔학성에 의심을 표합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는 충분히 아기들을 죽입니다.  그는 자신의 왕권을 지키려고 자신의 아들, 아내 심지어는 어머니도 죽였다고 합니다.

(v.22-23)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v.23)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물론 꿈으로 이러한 일들과 과정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요셉의 입장이 되어 본다면 요셉은 꿈을 따른 것 같지만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요셉은  Dream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Vision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잉태된 임마누엘의 하나님되심을 알려 주었습니다.

꿈은 Dream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방법의 하나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우리의 Vision이 됩니다.  그의 말씀과 명령을 따라 살아갑니다.  꿈으로 계시된 예수님이 우리의 현실에 빛과 목표가 됩니다.  우리의 Vision이 됩니다.

이러한 꿈의 결과 예수는 베들레헴의 예수가 아니라 나사렛 예수가 됩니다. 나사렛 사람이라고 합니다.  요셉은 꿈을 통해서 임마누엘, Immanuel,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동시에 나사렛의 사람이 됨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지난 밤에도 개꿈이든 용꿈이든 꿈을 Dream 꾸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Vision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임마누엘입니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는 우리와 같은 현실을 살아가십니다.  꿈을 통해서 예수님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Dream에서 Vision으로 살아갑니다.  우리의 Vision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태 2장 1-12 -구정물이 없는 성전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헤롯 대왕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합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닌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 이두매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를 조롱했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은 로마의 황제가 임명한 왕입니다.  헤롯의 아버지 안티파스가 로마의 황제 Julius Caesar가 Egypt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에 도움을 주어 그 대가로 팔레스틴 지역을 다스리게 됩니다.

안티파스의 아들 헤롯은 뛰어난 정치 수완으로 유대의 왕으로 살아남습니다.

오늘 날의 유대인들은 헤롯 대왕에게 감사해야합니다.  이스라엘은 관광 대국입니다.  많은 관광의 수입이 헤롯이 건설한 도시, 농업, 수도시설, 원형경기장에서 나옵니다.  그가 없었다면 유대인들은 별로 자랑 할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장 사악한 왕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세운 사람입니다.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별을 보고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에 있느냐 우리들이 경배하러 왔다고 합니다.

(v.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헤롯왕과 예루살렘이 소동했다고 합니다.  소동이라는 말은 Hella로 Tar-as-so입니다.  구정물입니다.  구정물을 오래두면 음식 찌꺼기는 밑에 가라앉고 위에는 깨끗한 물이 떠오릅니다.  냄새도 없습니다.  평상시에는 정갈하고 위엄이 있고, 깨긋하고 악취도 없습니다.

그런데 구정물을 막대기로 저어보면  혼탁해지면서 악취가 올라옵니다. 이것이 소동한다는 의미입니다.  헤롯과 예루살렘이 소동하는 이유는 헤롯은 자신이 왕인데 자신의 왕권을 빼앗길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새로운 왕을 맞이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신들을 죽일 것인지 살릴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결정적 이익이 타격을 받을 때에. 자신의 신분에 변화가 생겼을 때에, 자신이 모든 것을 잃어 버릴 수 있을 때에 우리는 소동합니다.  본색이 들어 납니다.  평소에는 거룩하고, 진지하고, 선하지만, 우리의 악취가 나고 본색이 들어나고, 사악함이 나타납니다.

대강절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우리의 성전에 누군가 찾아와서 우리에게 결정적 타격과 손해를 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정물이 없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헤롯이 손으로 지은 성전이 아닌 하나님의 성전답게 해달라고 하나님에게 지혜를 구하며 그 지혜로 하루를 사시기 바랍니다.

 

마태 1:18-25 – 나와 같으신 하나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됐다고 합니다.  이 말씀에서 정혼은 약혼이 됩니다. 결혼을 약속합니다.  동거는 결혼을 의미합니다. 아내와 남편으로 함께 지낼 수 있습니다.  결혼과 약혼의 중간 상태이지만 남자가 죽으면 과부가 됩니다.  사실적 혼인 상태입니다.  약혼의 상태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율법적인 판단에서는 돌에 맞아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요셉은 조용히 관계를 청산하려고 합니다.

(v.20)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합니다.  성령의 잉태는 남자와 여자의 성적관계 아닌 방법입니다.  이러한 잉태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은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과 사람의 중간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질문을 마리아도 갖고 있었습니다.

(눅 1:30-35)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v.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v.32)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v.33)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v.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마리아는 당연한 질문응 합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자가 없어도 임신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v.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나실 자는 //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이 시대에는 인간의 정신과 물질이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우리는 특히 물질의 능력을 매일의 삶에서 경험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엎드리어 하나님 지혜를 간구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물질의 한계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기대하는 자들에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지혜의 필요를 절감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으 추구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 1:1-17 (양반 혈통과 상놈 혈통)

우리 한국 정서는 혈통을 중요시 합니다  성이 같으면 어느 출신이냐고 묻고 성이 같으면 이름의 항렬을 따집니다.  저는 한국분중에 족보가 나쁜 분을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자신들의 조상은 다 양반들입니다.  조선시대에 우리들이 호패 (신분증)을 갖고 다녔다면 우리 중에 약 7-80%는 천민이나 상농 출신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양반입니다.

혈통은 족보는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날 자신의 출신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 출신에 따라 자신의 가치가 정해집니다.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저는 개역개정의 번역에 불만을 갖습니다.  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정확한 번역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람과 다윗의 아들입니다.  인간 예수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위한 서신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우상숭배는 죽음과 같습니다.  그럼으로 그들이 사람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마태복음은 인간 예수를 하나님으로 증거합니다.

그 증거의 첫 번 방법이 족보입니다.  3절에서 6절을 보면 예수님의 족보는 우리의 족보와 비교 할 수 없습니다.  시아버지와 간통을 한 여자가 있고 이방여인 창녀가 있고, 이방 여자가 있고, 다윅과 간음한 여자도 있습니다.  또한 수많은 사악한 왕들이 나타납니다.  이 가운데 좋은 사람, 믿음의 사란, 선한 사람도 있지만 너무나 브끄러운 혈통입니다.

인간 예수의 혈통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러나 16절에 보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형제와 자매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어 성령으로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단은 예수님의 혈통을 가장 잘 이용합니다.  인간의 피와 다르기에 구원을 받는 자는 피가름을 해야한다고 합니다.  그 피가름은 우리의 피가 거룩한 피로 변한다는 사악한 논리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에수님이 철저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이렇게 강조하십니다.

(계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밧세바와 간음을 한 다윗의 자손 (Offspring)  솔로몬 다윗의 뿌리 (Root)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근거를 사람으로 나타냅니다.

(마1:6-7)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마1: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이러한 근거가 이해되어야 예수님이 하나님이 되십니다.  우리의 모두의 족보는 양반입니다.  그러나 그 족보로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왜 예수님의 혈통, 족보를 성경이 이렇게 더럽고 추하게, 사악하게 표현하는지 깊이 생각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말라기 4장 4-6 (마지막에 일어 날 일)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말4:4-6)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v.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v.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마지막에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고 그래도 하나님을 거부하면 하나님이 직접 오시겠다고 합니다.  마지막 절 후반 절에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엘리야는 세례 요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십니다.   그 결과 신약의 마지막 요한 계시록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입니다.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차이가 없습니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 오시기 전입니다.  하나님이 오시기 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저주로 땅을 심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 이 땅에는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이며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으로 갈라집니다.  그럼으로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본질이고 핵심입니다.  우리는 죽어서도 하나님을 만날 것이고, 살아서는 재림의 예수님을 만납니다.  우리들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절대로 피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결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속히 만나기를 원할 뿐입니다.

강림절에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기 바랍니다.

저 개인적으로 이 아침에 하나님에게 감사합니다.  지난 11년 동안 목회 시작하면서 마태복음에서 말라기까지 새벽마다 성경 말슴을 묵상하게 하셨습니다.  저에게는 영광이며,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다시, 마태복음을 시작합니다.

 

말라기 4장 2-3절 (악에 대한 응징)

오늘 본문은 악에 대한 응징입니다.  전통적으로 선과 악은 상대적 개념이였습니다.  빛과 어두움, 정의와 불의로 나누어지는 이원론적 개념이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원론적 개념은 현대에 (Post-modern)들어오면서 깨어집니다.

전통적 악의 개념이 변질됩니다.  지난 번에 말씀드린 한나 아렌트의 지적대로 악이 평범성입니다.  누구든지 악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을 학살한 전범들의 재판에서 전범들은 상급자가 살인을 명령을 하면 그 명령을 수행하는 책임 의식이 먼저 요구되지 그 살인에 대한 양심적 판단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자신의 책임을 변명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변명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악의 가능성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럼으로 이 시대의 문화와 가치관에서는 선과 악의 구분이 약화되고 있습니다.  악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상참작과 상황에 대한 인식이 높아집니다.  그 결과 인간의 인권이 강조됩니다.  인권을 강조하는 진보적 국가에서는 사형제도가 폐지 됩니다.  죄수의 인권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형무소의 생활도 세상과 별 차이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제는 영화나 소설에서 선과 악의 구별은 사라졌습니다.  선과 악의 경계가 뚜렷한 내용은 흥행이 되지 않습니다.  선한 사람도 악한 것으로 묘사합니다.  감옥의 소장, 경찰, 목회자, 악을 징계하는 사람들에게도 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에 대한 위선과 숨겨진 악을 악인이 보복하는 것이 더 좋은 일입니다.  그 결과 악에도 선이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물타기로 선과 악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렇게 나타납니다.

(말 4:2-3)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v.3)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은 악에 대한 철저한 징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선한 자에 대한 보상이 있습니다.  선과 악의 경계가 뚜렷합니다.

우리에게는 선과 악의 경계도 무너지기에 하나님만이 우리의 선과 악의 판단을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