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3장 16-4장 1절- 선에 대한 구원과 악에 대한 심판

오늘 본문은 세상의 마지막에는 선과 악에 대한 심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과 악에 대한 판별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나의 선과 악과 하나님의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의 잣대와 얼마나 일치하는가에 따라 심판과 구원으로 갈라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초점과 관심은 하나님과 우리의 선에 대한 일치가 됩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선과 일치를 이루어 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마지막이 불안합니다.

이러한 불안을 잘 설명한 것이 플라톤의 이원론입니다.  선과 악 사이에 중간 역활의 부재입니다.  우리는 그림자와 환상에 불과한 선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실제적 선을 경험하거나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이 이러한 중간 역활로 제시하는 것이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로고스 (말)과 지식 (그노스시)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말과 지식은 인간의 것입니다.  선에 대한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선에 한계가 있는 것을 인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하늘)에서 악 (땅)으로 오셨습니다.  말씀과 지식으로 오셨습니다.  지난 주 고린도 전서 1장 5절의 모든 언변 (로고스)과 모든 지식(그노시스)로 설명을 했습니다.  그리고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중보자의 역활을 하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철학과 기독교의 분리가 나타납니다.  철학은 이성과 논리의 학문이기에 인간이 얼마나 알고 깨달음을 얻는가에 따라 선에 가까울 수 있고 악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우리의 행위와 능력으로 선에 가깝고 악에 멀어지는 것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우리 자신이 선에 가까워지고 악에서 멀어집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인간의 이성이 아닌 하나님의 노력과 구원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고전 1장 8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마지막 심판의 날에 책망 할 것이 없는 자로 견고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타력 구원입니다.  자력이 아닙니다.  자력갱생이 아닙니다.  외부의 힘으로 우리의 선이 완성되어집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힘으로 사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말라기 3장 13-18 세상의 악과 하나님의 선하심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조롱합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서 악인이 잘 되고 번성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조롱합니다.  그럼으로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하고도 하나님 앞에서 잘못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다음과 같습니다.

(말 3:14-15)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v.15)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라

하나님은 절대로 선하지 아니하다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슬픈일 억울한 일이라고 합니다.  오히려 교만한 자가 악한 자가 더 잘살고 행복하며 불행도 당하지 아니하기에 하나님은 절대로 선하지 아니하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논리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1번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2번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3번

그러나 이 세상에 악이 있습니다.  4번

1-2-3번은 서로의 상관 관계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명됩니다.  그러나 4번의 등장으로 1-2-3번은 틀린 것이 됩니다.  그럼으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선하지 아니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과 우리의 선하심은 다릅니다.  우리의 선은 상대적입니다.  오늘의 선이 내일의 악이되고 나의 선이 너에게는 악이고 너의 선이 나에게는 악이 됩니다.  우리의 선의 중심은 우리가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선은 절대적 선입니다.  항상 선하십니다.  하나님의 선은 우리의 선과 같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럼으로 1-2-3번에서 4번으로 세상의 선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정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세상의 악은 우리에게는 악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선과 악으로 하나님의 선을 틀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에게 다시 이렇게 공격합니다.  그래도 세상에는 악이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악의 존재는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와 맞지 않다고 합니다.

그럼으로 1번으로 2-3번은 증명되지만 4번으로 1-2-3번은 틀린 것이 된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악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악은 절대적 악이 아닙니다.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악을 절대적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사악함이 절대적 악이 아닙니다.  어린아기가 백혈병에 걸려 죽는 것이 절대적 악이 아닙니다.  쓰나미로 수십만명이 죽어도 절대적 악이 아닙니다.  히틀러가 유대인 6백만을 죽여도 절대적 악은 아닙니다.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말합니다.  유대인 6백만을 죽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전범자들의 재판을 보면서 그녀는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살인자들이 우리와 똑같다는 악의 평범성을 말합니다.

인간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구조로 인하여 악인이 되거나 선인이 된다고 합니다.  절대적 악이 없다고 합니다.

언젠가는  어린 아기가 백혈병에 걸려 죽는 일이 없도록 의학은 발전 합니다.  쓰나미로 수십만명이 죽는 일을 막을 수 있는 경보 제도가 나타날 것입니다.  세상의 악도 상대적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에게 끝까지 저항 합니다.  악합니다.  그러기에 어거스틴은 인간의 악은 선의 결핍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에서 타락으로 악하게 나타나지만 선의 결핍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적 선으로 이러한 우리와 세상을 창조 이전으로 회복시킵니다.  그럼으로 예수님은 둘째 아담이 됩니다.  하나님은 절대 선이십니다.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4번, 세상의 악으로 절대 악이 아닌 것으로 하나님의 절대 선을 부정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은 1-2-3번으로 선하시며 4번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파괴 할 수 없습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이러한 변증에 관심이 있으면 화요 성경 공부에 참여 바랍니다.

 

 

말라기 3장 7-12 정의, 긍휼, 믿음의 십일조

본문은 말라기에 유명한 십일조에 관한 말씀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면 내가 너희들의 모든 것을 책임지신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일조를 철저하게 드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심하게 질책하셨습니다.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예수님이 십일조로 드릴 필요도 없는 박하, 회향 근채를 드리는 서기관 바리새인을 질책하십니다.  그들은 십일조 이상을 하나님에게 드렸지만 정의 긍휼, 믿음을 버렸기에 질책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십일조를 드리지 말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십일조는 반드시 드릴 것을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십일조는 정확하게 십의 2조, 20%입니다.  하나님에게 드리는 10%는 매년 드립니다.  그러나 레위인에게 10% 가난한 이방인 고아 과부를 구제의 10%는  격년제 입니다.  그럼으로 매년 20%가 됩니다.

돈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현실을 지탱하는 중요한 역활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돈으로 십일조를 하지만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가지라고 합니다.

첫째 돈의 지배를 받으면 정의가 없어집니다.  남의 돈이 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 나의 것입니다.  정의가 없는 돈은 상대방을 고통스럽게 하며 나의 돈으로 만듭니다.  그 돈으로 자신의 인격이 파괴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에게 십일조를 드리기전에 이 돈을 벌기 위하여 얼마나 정의롭게 살았는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돈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 정의롭게, 정직하게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신뢰를 받습니다.  돈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가장 영적인 사람은 돈의 지배를 극복하는 사람입니다.

둘째 돈의 지배를 받으면 긍휼이 없어집니다.  이것이 그 자신이 돈이 많고 적음에 상관 없습니다.  상대방의 돈을 부정한 방법으로 평가합니다.  그 돈으로 상대방의 인격과 삶의 내용을 평가합니다.  모든 판단의 잣대가 돈입니다.  돈의 지배를 받으면 돈을 악하게 여깁니다.  특히 돈의 정의를 외치는 자일 수록 돈에 집착합니다.  이중 인격이 됩니다.

돈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면 마음이 여유롭습니다.  타인과 별로 문제가 없습니다.  항상 열린 마음이 됩니다.  돈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람의 특징은 가정이 화목하고, 이웃과 잘 소통합니다.

셋째 돈의 지배를 받으면 믿음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상실됩니다.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하나님보다 돈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어지는 이유는 돈의 투자에 대한 효용성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의 돈은 투자 가치의 결과가 매우 중요합니다.  투자에 대한 결과가 없으면 상대방을 믿어주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돈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들이 하나님에게 드린 물질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하나님에게 드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합니다.  그 이유는 믿음으로 드리면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돈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들이 물질적 투자한 사람에게 인내하고 참아줍니다.  그를 믿어줍니다.  나의 기도와 물질에 대한 투자가 하나님의 시간과 하나님의 방법으로 귀하게 나타날 것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세로 십일조를 드리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말라기 3장 1-6 이 시대의 경고

본문의 해석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보낼 사자가 누구인가 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내용으로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본문의 내용과 일치합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예수님이 오시기전에 사자가 됩니다.  “내가 내 사자를 보낸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사자는 세례 요한입니다.  저는 이것을 지지합니다.  그 이유는 동일한 내용이 4장 5절과 6절에 반복됩니다.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고, 그리고 하나님, 예수님이 오신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 시대의 상황과 너무나 똑 같습니다.  저는 이것이 두렵습니다.

(말3: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사람을 속이는 점치는 자들이 나타납니다.  말끝마다,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조합니다.  점치는 자들입니다.  마술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부정한 관계로 간음하는 자들이 나타납니다.  타락한 인간관계입니다.  돈에 독이 올라서 정의를 거짓으로 만듭니다.  돈과 간음을 합니다.  인간 관계를 돈으로 환산합니다.

거짓 증거하는 목회자와 신자들이 나타납니다.  교회와 세상의 삶이 차이가 있습니다.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정당성을 위해서 거짓을 사용합니다.

품꾼의 임금을 착취합니다.  직장에서 직원들을 착취하는 자들이 나타납니다.  이민자와 약자를 핍박하는 자들이 나타납니다.  사회정의는 돈에 질식 당합니다.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자들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정치에서 확실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조국과 미국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본문이 하나님의 경고로 나타납니다.  인류의 최고의 발명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최고의 발명이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가를 보고 있습니다.  절망과 탄식이 나타납니다.  대통령이 바뀐다고, 정치가 바뀐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어두운 날들이 계속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기도합니다.

본문 2절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매우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말라기 2장 10-17 (우리들이 판단 할 수 없는 세상)

이 시대는 절대적 가치와 판단은 사라졌습니다.  상대적 가치와 판단이 존중을 받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절대적 가치로 윤리적이고, 수직적 관계가 있었지만, 현재는 상대적 가치가 이 시대의 정신입니다.  상황적이고, 윤리성보다 평등적 관계가 강조됩니다.

예를 들면 이혼입니다.  60년대만 해도 미국이나, 한국은 이혼은 절대적 가치의 영역이였습니다.  부끄럽고, 해서는 안 될 일이 됩니다.  기독교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을 파괴하는 일이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혼은 상대적으로 용납 되어지고 있습니다.  상황과 입장에 따르는 변화가 나타납니다.  만약에 1960년도 이혼의 개념을 오늘 2016냔에 사용한다면 오늘의 사회는 매우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고 성전이 새롭게 지어 진 후에 하나님이 유대인들의 특별한 기적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은 이방문화에 익숙해지면서 이방여인듫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결혼을 하려면 유대인 아내, 여자와 이혼을 해야합니다.  그러면 유대인의 가정은 파괴됩니다.  이방여인이 아내갸 되면서 우상이 들어오게 됩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이 이방여인들과 결혼을 금지하는 것은 이방여인들이 갖고 오는 우상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러한 이혼을 질타하십니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혼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버리고, 유대인 여자를 버리고, 우상의 선택입니다.  본문은 유대인 여자와 이혼하고 유대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배우자가 간음을 했다면 (마 5:31-32)에서 예수님도 이혼을 인정하십니다.  그러나 음행이 아닌 이유로 이혼하면 예수님은 간음이라고 정의하십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배우자와 자녀에 대한 가정 폭력, 육체적 학대, 인격적 살인, 심지어는 성적 학대와 폭력, 살인을 당 할 수도 있기에 이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경우 하나님의 말씀과 현실의 영역 사이에서 우리 판단에 장애를 갖게 됩니다.  선과 악의 판단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선과 악을 판단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상황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고 무겁게 자리잡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강조되어 간음의 경우에만 이혼이 허락되면, 배우자와 자녀에 대한 가정 폭력, 육체적 학대, 인격적 살인, 심지어는 성적 학대와 폭력, 살인을 참고 이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경우 우리는 이 세상에서 비극적 결말을 너무나 많이 봤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상황이 강조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약화됩니다.  물론 세상의 법은 사람의 상황이 강조되기에 이러한 경우 이혼을 허락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상황에서 어떠한 선택을 할 수 있습니까?  이러한 문제는 비록 이혼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영역에 해당합니다.

오늘 본문 17절에서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이혼하면서 하나님을 괴롭게 하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며 기쁜 일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상황을 이렇게 까지 합리화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이 당한 상황을 강조만해도 안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자비하게 우리의 상황을 죄악시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상황을 판단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합니다.  우리는 철저한 죄인입니다.  그러기에 말라기 마지막 절이 마음 깊이 다가옵니다.

(말4:5-6)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말 4: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라기 2장 1-9 하나님은 누구의 편인가?

본문에 하나님이 제사장들을 질책하십니다.  제사장은 당시의 종교적 권위와 특권을 누리던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베드로의 말대로 이 시대의 제사장으로 살아갑니다.  어제는 하나님과 우리의 간격을 설명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의 편인가입니다.  하나님과 나의 간격이 이렇게 벌어진 이유가 무엇인가 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소외 당하고 가난하고 버림 받은, 약자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불이를 징계하고 올바름을 세우신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지식과 종교적 권위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항하신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정치적 사회적 압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수없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1장 1-2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히브리서 1장 3절로 예수 그리스도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죄인은 윤리적 도덕적 죄인이 아닙니다.

죄인은 하나님이 없이 올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죄인은 나의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우주창조와 역사와 시간의 창조주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죄인기에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갖고 사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이러한 죄인이 됩시다.

우리 모두 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말라기 1장 4-14 하나님과 우리의 간격

본문은 하나님의 한탄을 계속 나타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에게 아주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아주 악하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유대인 사이에 커다란 계곡이 나타납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유대인은 서로 건널 수 없는 관계로 나타납니다.  사실 본문의 내용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v.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하나님은 유대인 제사장들에게 멸시를 당하셨는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멸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v.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하나님에게 더려운 떡을 드리고도 개끗한 떡을 드렸다고 강변합니다.

(v.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그들의 총독에게는 더 좋은 것을 드리면서 하나님에게 사람도 먹지 않을 병든 제물을 드렸습니다.

(v.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이러한 짓을 하면서도 하나님에게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말을 할 수 있느냐?

(v.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차라리 나에게 제사를 드리지 말라, 성전을 없애 버리는 것이 낫다.

(v.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이제는 너희를 버리고 이방인을 택해서 그들의 제사를 받겠다.

(v.12)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식탁은 더러워졌고 그 위에 있는 과일 곧 먹을 것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이제는 너희들이 여호와에게 드리는 제물도 더러운 것을 드릴 수 있다고 한다.

(v.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 제물들은 훔친 것과 병든 것들이다.  나는 도저히 받을 수 없다.

(v.14) 짐승 떼 가운데에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속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천벌을 받고 죽을 인간들아, 좋은 것은 너희들이 갖고 나쁜 것은 나에게 주는 너희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오늘 날 있어도 좋은 하나님, 없어도 좋은 하나님, 우리의 신앙의 자세를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본문의 유대인들과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요?

 

 

말라기 1장 1-3 (부모에게 공부 잘 하게 해달라는 자식?)

말라기는 구약 마지막 성경입니다.  말라기의 의미는 히브리어의 Malak은 왕, 대변인, 사자를 의미합니다.  말라기는 하나님의 대리인입니다.  성경은 이 사람의 신상에 대해서 전혀 알려주지 않습니다.

성경 학자들은 성경의 배경을 바벨론 포로 귀환해서 성전을 완공한 후로 봅니다. 신약 성경이 나오기 전, 마지막 하나님의 음성으로 이해합니다.  그 결과 성경의 마지막에 위치합니다.

유대인들은 70년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됐습니다.  성전을 다시 지었습니다.  구약의 예언서를 보면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성전을 다시 짓고 난 후에 그들에게 승리와 영광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실질적 변화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페르시아의 식민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유대는 페르시아 이후 그리스의 알렉산더, 로마에 의해 식민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심합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셨다면 현실적 증거가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현실의 변화가 없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신앙 생활은 형식적이고 타락한 모습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말 1:2-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v.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하나님은 야곱의 형 에서는 미워하셨고 야곱은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사랑의 증거는 너가 나를 사랑한다면 대가를 치르라고 합니다.  부모들이 자식을 헌신적으로 희생하기에 자식들은 부모의 사랑을 인지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희생적 사랑에 익숙합니다.  사랑한다며 누군가 사랑의 증거를 보여주어 우리는 사랑 받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은 자식에게는 매를 들고 잔소리하고 심지어는 집에서 내어 쫓아내기도 합니다.  어떤 자식은 자신의 부모가 아니라 계모와 계부라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철없는 자식은 가출도 합니다.  자신이 남의 집 자식보다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식을 자식답게 키우는 것 후자의 사랑입니다.  전자의 사랑은 자식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셨습니다.  이 두 사람이 뱃속에 있을 이미 이렇게 결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이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선택과 은혜가 야곱이 인지하지 못하는 가운데 주어졌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 시대의 야곱의 후손들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은혜를 받은 백성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현실에서 나타나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부모가 아니라 계모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는 하나님의 특별 은총입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만족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에게 콩쥐의 계모와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모든 사람에게 일반 은총을 주셨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게 건강, 지식, 물질, 재능을 주셨습니다.  자신의 수고와 노력에 의하여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정한 경쟁이고, 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들이 특별 은총을 받았기에 하나님에게 일반 은총까지도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공부를 못하는 자식이 부모에게 공부를 잘하게 해 달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공부는 학생의 노력과 수고입니다.  만약에 이러한 것을 요구하는 자식은 한심한 자식입니다.

오늘 날 야곱의 후손, 우리들이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특별 은총,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현실적으로 사랑의 증거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은  우리 자식들이 매일 놀면서 우리에게 공부 잘 하게 해 달라는 것과 같다는 것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좋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날이 되길 바랍니다.

스가랴 14:9-21 거래의 달인에서 믿음의 달인으로

요즘은 거래의 달인이 대접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Trump도 거래의 달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도 거래의 달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오실 때에 마지막 때의 모습입니다.  세상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적들은 응징을 당합니다.  또한 이 세상은 새로운 인적구성이 이루어집니다.  유대인이 아닌 모든 민족이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슥14:16)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달라지는 세상이 됩니다.  이렇게 달라집니다.

 (슥14:20-21)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슥14:21)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제사장은 이마에 성결이라고 씁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결이 말의 방울에도 사용됩니다.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거룩해집니다.   달라집니다.  모든 것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절대로 달라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떠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21절 후반절에 나타납니다.

(슥14:21-b)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가나안 사람만 제외됩니다.  가나안은 다른 번역에는 장사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가나안 해변에서 무역을 하는 페니키아인을 의미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자들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입니다.  마가 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간과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제물을 사는  사람도 쫗아내십니다.  오늘 날의 표현으로 교인들도 쫓아내십니다.

(막11: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아무나는 성전에서 제물을 구입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싹군 목사도 쫓아내시고 교회에 거래하러 오는 교인도 쫓아내십니다.

장시의 목적은 이익입니다.  목회도 이익이 되면 하고 신앙 생활도 이익이 되면 합니다.  손해를 보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과 유익을 챙기는 자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성전에 머물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물질적 이익, 명예와 자존심, 자신의 가치관이 손해를 볼 수 없다면 장사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믿음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나의 이익보다 나의 손해가 많습니다.  믿음은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믿고 의지하기에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손해 봐야합니다.  이것을 경건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태도를 거룩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을 마지막에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억에 남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나의 이익과 손해의 분기점을 계산하는 거래의 달인에서 믿음의 달인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스가랴 14장 1-8 -마지막은 희망

모든 것에는 시작과 마지막이 있습니다.  시작은 희망과 꿈을 갖게 합니다.  새로운 것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이 찾아올 때에는 두렵고, 아쉬운 것이 많게 됩니다.  마지막이 찾아온다는 것은 알 수 없는 또 하나의 세계가 우리는 기다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마지막이라고 하지만, 마지막이 아닐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세상의 모든 법칙은 원인과 결과 인과응보입니다.  현재의 모든 것이 마지막에 마지막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지막 다음에 결과를 치를 것이라고 합니다.  현재의 원인를 마지막 너머의 세계의 결과와 직결합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 마지막에 대한 경고입니다.  무서운 심판이 나타나고 환경적 변화가 나타납니다.

(v.1-2)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네 가운데에서 나누이리라 (v.2) 내가 이방 나라들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당하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우리는 은혜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은혜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파괴합니다.  은혜는 인과응보와 반대의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현재의 원인이 미래의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원인과 결과의 순환에서 벗어나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에게는 은혜의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불행은 종말을 인과응보로 해석합니다.  기독교를 불교로 해석합니다.  이상하게도 종말에는 은혜가 사라집니다.  한국의 수많은 이단은 종말론으로 교인들을 협박합니다.  요한계시록과 다니엘서를 사용합니다.

기독교를 불교로 해석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됩니다.  은혜는 끝까지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도 무서운 종말이지만 이렇게 은혜가 나타납니다.

(v.4-6)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 산은 그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v.5)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이를지라 너희가 그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 하리라. (v.6)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것들이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마지막에 우리들이 피신할 길을 만들어 내십니다.  5절에서 보듯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피신입니다.

(v.7-8)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v.8)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이스라엘을 가보시면 이 말씀이 얼마나 위로와 능력이 되는 줄 알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물이 부족한 고지대입니다.  높은 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곳의 물이 동쪽으로 흘러갑니다.  동쪽은 사해, 풀 하나 없는 메마른 사막입니다.  그리고 물이 서쪽으로 흘러 갑니다.  서쪽도 황량한 유대 광야입니다.  오늘 날의 브엘세바쪽으로 흐르게 됩니다.

죽음에서 생명의 부활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입니다.  우리의 마지막은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