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5장 – 단순함의 위험

우리들이 신앙을 너무나 단순화시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단순 논리에 빠집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우리들이 죄를 지면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죄 짓지 말아야 합니다.

또는, 우리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럼으로 예수를 믿는 자는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죄인이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들이 일반적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화 시킬 때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깊이를 스스로 포기합니다.  하나님의 깊고 높고 위대하심에서 스스로 멀어집니다.  이것이 우리의 불행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기독교가 고민하지 않으며, 세상의 조롱을 받으며, 세상 철학보다 못하게 전락하는 결정적 이유가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북이스라엘과 남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를 하십니다.  죄에 대한 벌을 주십니다.  그 벌의 내용이 매우 재미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북 이스라엘이고 유다는 남 유다입니다.

(12)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좀 같으며 유다 족속에게는 썩이는 것 같도다.  좀은 썩기 일보 직전입니다.  좀과 썩는 것은 다릅니다.

(13)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병에 걸린 것과 상처도 다릅니다.  병 // Sick은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 사회는 상처 // Wounded는 상처를 입으면 치료 할 방법이 적었습니다.

(14)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늙은 사자의 공격력과 젊은 사자의 공격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단순하지 않으십니다.  벌을 주시지만 각 사람에 대한 차별이 있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환경과 책임에 대한 내용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이 남 유대보다 우상 숭배등 더 사악한 죄악을 저질렀지만 남쪽 유대를 더 심하게 징계하십니다.  그들에게는 썩는 것 // 상처 // 젊은 사자입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날까요?  단순논리의 위험성은 너와 나를 동급의 차원으로 봅니다.  단순논리는 윤리와 도덕성의 결여을 만들어냅니다.  나의 행동이 나의 행동보다 우월 할 때에 나의 도덕성과 윤리성은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단순논리는 선과 악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게 합니다.  선과 악이 차별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동등해집니다.

소크라테스는 검토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매일 검사했습니다.  자신에게 질문했습니다.  자신을 의심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물어 봤습니다.  그러한 검사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검토했습니다.  절대로 단순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철학의 시조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단순하게 살아갑니다.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에게 질문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믿음을 절대화합니다.  타인의 평가에 대해서 배타적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지 못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현재의 상황이 하나님의 축복인지, 심판인지도 구별 못합니다.

하나님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복잡하게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검토하며 사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놀라운 은혜에 있는 가를 알게 됩니다.

호세아 4장 – 착각 중의 착각

 

오늘 호세아서는 이러한 면에서 우리에게 심각한 경종을 울려줍니다.  호세아는 일종의 비유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냅니다.

(v.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제사장은 예루살렘에 있는 직분입니다.  지역적으로 유다입니다.  제사장은 아론의 지파이지만, 지역적으로 유다에게 속 합니다.

(v.15) 이스라엘아 너는 음행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너희는 길갈로 가지 말며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며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지 말지어다.

북 이스라엘은 죄를 범해도 벌을 주면 됩니다.  그러나 유다는 죄를 범하면 안된다고 합니다.   비유적으로 북 이스라엘은 이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면 벌 받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유다는 죄를 범하면 벌도 받지만,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지 못합니다.  본문의 내용처럼 유다는 역사적으로 성전이 파괴되고, 제사장 직분이 사라집니다.   (유대인들은 현재 죄의 용서 받을 길을 상실함.  이 내용은 6월 1일 수요 예배에 설교했음)

이것은 이미 역사적으로 문예부흥과 계몽주의로 교회가 죽어가고 있는 유럽의 교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사회적 기구이지, 신앙적 역활을 하지 못합니다.  미국의 많은 교회들도 이러한 상황에 빠져 들고 있습니다.

호세아 5장은 우리에 대한 경고입니다.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우리들이 죄를 범하면, 유대와 같이 제사를 드릴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사회적 현실은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민 1세는 신앙으로 이민 생활을 했지만, 우리의 자녀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부모들에 대한 실망입니다.  신앙과 현실이 분리되는 모순과 위선에서 우리 자식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입니다.

한국 교회는 더 심각합니다.  교회 학교가 아예 없습니다.   성인이 몇 만명이 모이는 대형교회에 주일 학교는 몇 백명입니다.  교회와 세상의 철저한 분리입니다.  부모들의 신앙의 내용이 자녀들에게 교육적 인성적 사회적 영향을 전혀 주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한국 교회도 자신의 발이 썩고 무너져 가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냉정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 죄에서 구원 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동시적으로 나의 현실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리로서 증명될 때에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이 생깁니다.

우리는 구원을 하늘나라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구원은 우리 현실에서 하나님의 진리성이 나타 날 때에 구원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정신과 감정으로 확인하려고 합니다.  나의 구원을 나의 확신으로 확인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와 이민 교회 가장 잘못 된 태도입니다.  신앙과 정신이 감정을 내포하지만 현실과 동 떨어지면 안 됩니다.

성경의 구원은 하나님을 사랑하는자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는자 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산상수훈입니다.  산상수훈은 구원 받은 자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표준입니다.  산상수훈으로 살아야 구원 받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산상 수훈의 내용으로 우리의 구원이 현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려 주는 내용입니다.  구원은 죽음 이후에 하늘나라이지만 오늘 나의 현실에서 천국으로 살겠다는 의지의 구현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증거입니다.

이러한 의지가 구현 되는 것이 전도이고 선교입니다.  저는 이민 교회가 한국 교회가 전도, 해외 선교하는 것에 찬성합니다.  그러나 전도와 선교가 교회와 신자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일방적입니다.  전도와 선교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고귀한 사명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명의 전제 조건은 우리들이 이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정말로 선교하고 전도하려면, 한국 땅에서, 미국 땅에서 우리들이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타인에게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사회가 우리를 존경해야 합니다.  정치와 경제인들이 우리를 보고, 그들의 태도를 변화해야 합니다.  이것이 전도와 선교입니다.

우리의 사회와 가정에서 조롱과 비난을 받으면서 해외에서 불쌍한 영혼을 구제 하겠다는 것은 우리의 모순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교회의 사업이지, 하나님의 사업은 아닙니다.  이곳의 빛과 소금은 저곳에서도 빛과 소금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들이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유다가 죄를 지으면 안 된다는 것을 요구하는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교회가 사라집니다.  선교와 전도도 빠른 시간에 사라집니다.

이것을 막으려면 오늘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신자답게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심판이 유대인에게, 유럽의 교회에 이미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 오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환상,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다음에 기회에 미국 교회들이 이러한 싸움을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얼마나 처절하게 하고 있는가를 알려드리겠습니다.)

 

호세아 3장 -박탈감

이 시대는 많은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능들을 갖고 있습니다.  카톡, Facebook, Instagram등 다양한 도구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먹는지, 어떤 옷을 입는지, 어디에 가는지, 어떠한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식당에 먹은 음식을 사진으로 올리면, 그 식당에 대한 모든 정보와 그 사람에 대해서 다 알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서 다양한 산업과 정보들이 교환되고 시대는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됩니다.  나는 그 사람이 먹은 것을 먹지 못하고, 입은 옷을 입지 못하고, 가는 곳을 가지 못하며 그가 갖고 있는 것을 갖지 못합니다.  또한 이러한 사진과 글을 올릴 사람들은 너는 할 수 없지만 나는 할 수 있다는 숨어 있는 자랑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시대의 박탈감은 너무나 광범위하게 나타납니다.  과거의 박탈감은 지역적이고, 인간관계성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적이고, 너무나 깊고 다양합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고멜을 은과 보리로 아내 고멜을 다시 사오라고 합니다.  남편을 버리고, 창녀 노릇하는 고멜을 몸 값을 주고 다시 사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상을 박탈합니다.  모든 관계를 철저하게 박탈합니다.

  (v.3-4)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v.4)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사람을 만나지 말라고 합니다.  각종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합니다.  스스로 모든 것을 박탈하라고 합니다.

 

우리도 스스로 박탈하는 것이 필요한 시대인것 같습니다.  세상과 연결된 모든 것을 스스로 끓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지금까지 카톡을 안하려고 무척이나 버티고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가 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불평을 합니다.  얼마전에 새벽기도 보내는 것으로 Facebook에 연결하는 것을 몇 분에게 제안을 받았습니다.  Facebook을 열었지만, 고민 중에 있습니다.  이것을 연결시키는 것이 좋은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저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우리들이 작동을 중지시켜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Computer, 전화, TV, Internet, 그리고 나의 마음 마져도 꺼야 합니다.  내가 보던 책도 덮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도 꺼야 합니다.  그야 말로 멍 때리는 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시 찾아오십니다.

(v.5)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이 세상은 우리의 것을 박탈합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박탈감에서 벗어나려면, 이 시대의 우상의 Switch를 먼저 꺼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다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호세아 2장 2-13 우상에서 신앙으로 (No.2)

어제 이어 계속합니다.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우상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이상한 현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가보시면, 이스라엘은 지형적으로 매우 독특합니다.  유대지역, 예루살렘은 높은 산악지역입니다.  유대 광야는 사막에 가깝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우상의 조형물이 고고학적으로 발굴되는 것이 매우 적습니다.

그러나 교통의 통로가 되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북 이스라엘의 지역에는 상대적으로 많은 우상의 조형물이 발굴됩니다.  북 이스라엘은 우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리적 경제적 이유가 매우 높습니다.  풍부한 농산물 지역이고, 교통의 요지입니다.

그러나 유대지역은 북 이스라엘과 같은 경제적 사회적 장점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이 오히려 좋은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이스라엘의 12 지파 중에 오로지 하나 남은 것이 유대지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오늘 날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유대지파만 살아남은 이유도 지리적 장점입니다.  높은 지역이고, 적들이 굳이 이 지역을 정복해서 남쪽 이집트나 북쪽 레바논으로 지나갈 이유가 없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남과 북을 연결하는 왕의 도로(King’s road)나 해변 도로에서 유대지역은 가운데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유대인들이 우상을 섬기고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이들의 우상은 하나님과 우상을 합성화 시킨 것이 됩니다.  하나님을 우상으로 착각하고 우상을 하나님으로 착각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북쪽 이스라엘에게도 그대로 전파되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년에 한 번 정도는 예루살렘을 방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성경의 우상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우상도 있지만, 하나님을 우상으로 우상을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상숭배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현상에 얼마든지 노출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우상화 할 수 있고 우상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나타납니다.

(고전 8: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신은 하나님 한 분입니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Hella 원문의 의미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고, 사물, 물건도 아닌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영어번역은 Nothing입니다.  바울은 우상을 철저하게 부정합니다.

 그러나 (고전 12:2-3) 이렇게 우상을 정의합니다.  (v.2-3)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v.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바울은 우리는 예수님을 주라고 하는 것처럼, 너희들은 바알을 우상을 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주: 어제 제가 바알을 주로 해석한 것을 기억하면 이해하기 편합니다.)  바울은 비교법으로 설명합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주라고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우상 // 바알이 이끄는대로 살았다는 것은 악한 영의 역사입니다.  더러운 영의 역사가 우상에게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다음과 같이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우상은 Nothing이지만, 아무것도 아니지만 악한 영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우상을 두려워 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다만 우상을 선택하면 우상에 숨어 있는 악한 영의 역사가, 사탄의 역사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럼으로 고전 8장을 깊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로 교회의 분열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아주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고전 8:10-13)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v.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v.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v.13)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위의 구절을 깊이 읽으셔야합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의 우상은 종교적 신념입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겠다는 것은 좋은 믿음입니다.  좋은 신앙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념이 우리의 우상이 됩니다.  그 신념으로 믿음이 약한자가 멸망을 당합니다.  형제에게 죄를 짓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은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지만 영원히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우리의 우상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갖게 되는 종교적 신념입니다.  이러한 우상 숭배로 한국 교회는 사회에서 버림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정과 열심은 너무나 좋은 것 같은데 그 좋은 것은 우리의 자랑과 종교적 만족입니다.  종교가 Ghetto화 됐습니다.  나의 신념이 나의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입니다.   타인이 이해 할 수 없는 종교는 종교의 기능을 상실한 것입니다.

단군상이나 깨버리고, 타종교의 우상을 우상이라고 하면서 우리안에 우상은 그대로 남겨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것을 신앙으로 착각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무식하게 이러한 것을 방관하며 신학적으로 설교 할 줄도 모릅니다.

우리의 사회적 행동이 세상에 지탄받는 것이 바로 믿음이 없는 자를 망하게 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는 것을 전혀 모릅니다.

우상숭배의 특징은 무지입니다.  무식입니다.  무당은 무지하기에 신학이 없습니다.  자신의 종교에 무지하면 뜻도 알지 못하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영적, 영성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이 단어를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열정에 사용합니다.  이 단어를 사용하면 모든 사람들은 대응을 할 줄도 모릅니다.

그가 정신적으로 착각해서 영성, 영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지, 정말로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영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지 구분조차 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영적. 영성이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가를 전혀 알지 못하고 무당이 사용하듯 사용합니다.

한국교회, 이민 교회의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의 구분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개혁자들이  종교개혁에서 Catholic의 잘못을 지적한 것이 바로 일반은총의 배제입니다.  Catholic은 교회와 신부를 초월적 우상으로 만들었습니다.   특별 은총만을 강조합니다.  우리의 종교 개혁가들은 이것을 개혁했습니다.

문제는 한국 교회는 이러한 개혁의 정신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오히려 Catholic 교회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목회자와 교회와 교인들은 자신들이 특별한 존재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구원의 은혜로 특별하지만, 사회적으로는 법적 질서와 의무를 다하는 하나님 일반 은총의 시민입니다.

하나님은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의 하나님입니다.  오늘도 역사와 시간의 주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사회와 정치와 경제에서 배제하는 것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일반적 은총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대화적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날의 교회와 신자는 이 세상의 역사를 사탄의 역사, 죄악의 역사 심판의 역사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상숭배의 결과입니다.

우상은 우리의 가까이 있습니다.  깨어서 신앙 생활하시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호세아 2장 2-13 우상에서 신앙으로

이 세상의 모든 종교의 기초적 시작은 현세구복입니다.  현실에서 자신이 믿는 신에 의하여 주어지는 도움과 유익과 해방입니다.  기독교 신앙에도 이러한 현세구복적 내용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른 이유는 현세구복적입니다.  질병과 가난과 고통에서 해방입니다.  이러한 어려움에서 나타나는 기적과 능력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신적 인물로 이해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종교에서 항상 요구되는 기초적 현상입니다.

또한 종교는 죽음 이후에 세계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의 현실에서 살아가는 모습과 종교적 행위가 죽음 이후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가 현실의 문제 해결에 집착하면 하등종교에 속하게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당의 굿입니다.  굿은 조상의 도움으로 현실은 해결하지만 본인 자신의 죽음 이후에 대한 내용은 없습니다.

그럼으로 모든 종교는 현세구복과 죽음 이후에 대한 갈등을 겪게 됩니다.

기독교에서도 현세구복을 강조합니다.  보수 기독교는 개인적 현실 구원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언급합니다.  진보적 기독교는 사회적 구원, 사회 정의를 강조합니다.  이러한 신앙은 죽음 이후에 믿음이 상대적으로 약화됩니다.  그리고 더 심각한 결과는 현실 구원을 강조하고 죽음 이후에 대한 강조가 약화되면 비윤리적, 비상식적, 비 도덕적 종교로 전환됩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있다는 당위성을 갖습니다.  우리들이 가장 기초적인 것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죽음 이후만을 강조하면 그 종교는 윤리, 도덕이 강조되게 됩니다.  신자의 살아가는 내용이 죽음 이후의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사회성과 인간 관계성이 약화됩니다.  초월적 현상에 관심이 크기에 율법적 행동을 하게 됩니다.  또한 자신의 책임과 이성적 판단을 유보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와 자신의 기도라는 추상적 언어를 사용하게 됩니다.  이러한 태도는 매우 근본적 성향을 갖습니다.  특정한 종교적 행위가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이 됩니다.  교회의 사역이 중요해지고, 가정과 사회가 부정시됩니다.

오늘 날 교회는 이러한 이중적 신앙에 설명하는 것이 매우 부족합니다.  현실을 축복을 강조하면서 죽음 이후를 강조하면 심각한 모순이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날 교회는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 매우 쉽습니다.  그 결과는 교회는 극단성을 갖게 됩니다.  성경대로 살겠다 하는 주장을 하면서 사회성이 결여되고 세상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스스로 약화 시킵니다.

이러한 결과로 우상숭배가 나타납니다.  신앙이 극단성을 가지면 우상은 나타납니다.

많은 교회와 신자들이 이러한 태도에 만족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태도를 신랄하게 비난합니다.  오늘 본문 하나님의 백성, 북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유적지에 가보면 그들의 우상숭배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바알과 각종 우상들이 동네 입구에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이러한 우상이 마을을 지켜주고 자신들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했습니다.  그 우상이 하나님입니다.  우상을 하나님으로 섬겼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이 제 2 계명에서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성경이 이렇게 지적하는 것은 바알을 하나님으로 간주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알로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알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출 32)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 후에 아론에게 우리를 출애굽 시킨 신을 만들어 보여 달라고 합니다.  아론이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이렇게 말 합니다.  이 송아지가 우리를 출애굽 시킨 너희의 신이라고 합니다.  신은 Hebrew로 Elhoim입니다.  영어번역은 gods입니다.  우리들이 글로 하나님과 우상을 구분 할 때에는 God와 gods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귀로 들을 때에는 하나님으로 들려집니다.  우상과 하나님이 똑같습니다.

가끔 무식한 학자들이 이러한 단어를 예로 들면서 하나님, God는 우상, gods에서 출발했다고 하는 억지를 부리기도 합니다.  바알도 Hebrew 주입니다.  Lord입니다.  주인입니다.  남편입니다.  바알이 바알인 것 같지만 주인, 주님과 같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할 때에 그 주와 동일합니다.

그러기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3 계명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부르다 보면 우상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아니하고 쓰지도 못했습니다.  다만 우리들이 발음 기호로 추측을 할 뿐입니다. YAHW정도입니다.

성경의 우상은 우상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하나님으로 변형 시키는 행동입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럼으로 우리의 신앙, 오늘 날 우리의 신앙에서도 우상 숭배가 얼마든지 일어 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게도 우상숭배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군상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Catholic 의 형상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십자가도 우상 되기에 교회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이러한 우상숭배에 대한 태도를 이해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회의 역사와 신학 논쟁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성경을 근거로 예표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 우리들이 현세구복과 죽음 이후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없을 때에 우리는 오늘의 현실 해결이 우상이 되고 우리의 죽음 이후가 우상이 됩니다.  우상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상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기초와 근본에 머무르면 우상 숭배로 전락 할 수 있습니다.

우상이 무엇인지는 내일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호세아 1장-2장 1절 -절망과 희망의 차이

오늘 부터 호세아를 시작합니다.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선지자입니다.  호세아서는 소선지서의 시작입니다.

우리에게는 희망과 절망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절망에서 희망을 갖기를 원합니다.  절망에서 희망을 가지려면 2 단계의 과정이 있습니다.

첫째)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부정에서 긍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적 인 것입니다.  자신의 상활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긍정적 태도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누군의 말이나, 책이나, 타인의 경우에서 긍정적 태도를 갖습니다.  나도 이렇게 살면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의 자기 계발, 또는 Positive thinking입니다.

둘째)  이러한 긍정과 희망을 유지하는 당사자의 의지입니다.  긍정에는 나의 의지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나의 의지가 없는 희망은 희망 사항으로 끝이납니다.  우리의 의지가 얼마나 유지 되는가에 따라 희망이 나타납니다.  의지는 나의 내면의 문제입니다.

결론은 희망을 갖는 것은 나와 나 자신의 싸움입니다.  인간은 세상과 싸워이겨도 자신과 싸워이기지 못합니다.  타인은 이길 수 있어도 자신은 이기지 못합니다.  인간의 비극은 절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나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환경과 현실과 사람을 원망합니다.  나를 이길 수 없는 우리의 발악입니다.

Post-modern을 살아가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자존심의 문제입니다.  이 시대는 우리가 신 //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공지능을 만들어냅니다.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인간의 자존심은 끝까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철학적으로,부정은 긍정을 만들어냅니다.  이것은 철학적 기초이며 진리입니다.  그러나 시대의 사람들은 신을 부정하면 나타나는 신의 긍정마저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저의 표현을 저속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신이 없는 우리는 우리는 이제 부터 밥만 먹고, 똥만 싸는 일이 남았습니다.  잘 먹고 잘 살든지 못 먹고 죽든지 이것만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절망입니다.  우리의 절망은 나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절망은 하나님이 없다고 싸우는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인생을 개선 시킬 수 있는 의지마져 없습니다.  나는 나를 이길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밥먹고 똥만 싸는 백성들이 나타납니다.  음란한 이스라엘, 고멜입니다.  고멜의 이름은 Hebrew로, 끝이 나다, 마지막이라는 의미입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절망입니다.  고멜은 The end입니다.  끝난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고멜과 결혼하라고 합니다.  호세아의 이름을 풀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같은 발음입니다.  여호수아의 이름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발음이 됩니다.  호세아, 여호수아 예수는 서로 다른 발음이지만 같은 의미입니다.

신약적으로 해석하면 예수님과 고멜, 인생의 끝장난 우리들이 결혼을 했습니다.  주례자는 하나님입니다.  다음과 같이  자식을 낳습니다.  첫아이의 이름은 이스르엘입니다.  북 이스라엘에 망한 장소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망하게 하시겠다 입니다.  둘째 아이의 이름은 로루하마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없다입니다.  세째 아들의 이름은 로암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입니다.

놀라운 것은 4 번째 아이의 이름입니다.  암미라고 합니다.  세번째 로암미에서 로를 뺀 것입니다.  나의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그리고 4번째 이름에 별명을 지어줍니다.  루하마라고 합니다.  루하마는 둘째 로루하만에서 로를 뺀 것입니다.  은혜의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백성이 됩니다.

절망에서 희망은 우리들이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희망을 만들어내십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되는 것이 절망에서 희망입니다.  절망의 고멜에게 하나님은 나의 백성으로 은혜의 백성으로 시작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고멜의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이며, 긍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죄에서 벗어난 희망과 긍정은 주실 때에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직장, 가정 모든 환경에 감사합니다.  우리는 밥만 먹고 똥만 싸지 않습니다.  이것을 저속하다고 하기 이전에 우리의 실제 모습을 생각하면 이것도 얼마나 고상한 표현입니까?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좋은 것을 이미 주셨습니다.

희망의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다니엘 12장 -과학보다 더 확실한 진리

오늘로 다니엘서를 마칩니다.

모든 것에는 마지막이 있습니다.  역사로 보면 한 개인의 종말, 한 국가의 종말, 문화의 종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화의 종말은 또 다른 문화를 만들어내고 정신의 종말은 또 다른 정신을 만들어냅니다.  한 국가의 종말은 또 다른 국가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국가, 문화 정신의 주체는 인간입니다.

그러면 인간 개인의 마지막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마지막은 죽으면 끝이라고 합니다.  한 줌의 흙이 된다고 합니다.  한 줌의 흙을 보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다른 것을 기대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인생이 허망하다고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과학적 사실입니다.  우리의 신체가 부패하면 한 줌의 흙이 되기에 모든 것이 끝이 난다는 것은 물리적, 실증적,과학적 귀결입니다.  이 시대는 이러한 것을 근거로 진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마지막은 죽음, 다음에는  영생이 있다고 합니다.  지옥과 천국이 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고대 시대의 무지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신화, 이야기라고 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과학적으로 물리적으로 실증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교인들은 간증을 좋아합니다.  천국과 지옥의 간증을 믿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천국과 지옥을 알려주는 수단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역사에서 이러한 증언들이 많은 부작용을 만들어낸 것을 우리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간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신자 자신이 스스로 죽음 이후에 대한 확신과 개념을 정립해야 합니다.

제가 여러 차례 지적했지만 사악한 이단은 요한 계시록과 다니엘서를 악용해서 우리에게 마지막을 공포와 심판으로 나타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소망과 은혜와 감사의 시간이 됩니다.

(단 12:1)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큰 환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그 생명책의 이름은 우리들이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영광을 보시고, 우리의 이름을 기록하십니다.

우리의 마지막을 두려움과 공포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사탄의 뜻입니다.  우리에게 마지막은 찾아오지만 두려워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승리합니다.

엄마는 아이들에게 뜨거운 것을 만지면 손을 데인다고 가르쳐줍니다.  뜨거운 것을 만지면 손을 데인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어린아이가 직접 뜨거운 것을 만질 때까지는 진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머릿속에 진리입니다.  그러나 뜨거운 것을 만지거나 뜨거운 것에 손이 데이면 그때에 엄마의 말이 진리가 됩니다.  진리는 경험에서 나타납니다.  머리의 진리가 가슴의 진리로 변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는 이것보다 더 확실하고 깊이가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 대해 이렇게 가르쳐줍니다.

다니엘 12장에서 마지막에 대해서 2번의 질문이 나옵니다.  첫 번에는 6절에서 세마포 입은 자가 강물 위에 있는 사람에게 마지막을 질문합니다.  두 번째는이 질문과 대답을 이해하지 못한 다니엘에게 강물의 사람이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단 12:9-10) 그가 이르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이 말씀은 마지막 까지 비밀로 간수하라고 합니다.  떠들지 말라고 합니다.  마지막을 알고 있다고 떠드는 것들은 다 가짜입니다.  예언자, 선지자라고 하는 인간들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하늘의 비밀을 알려주시면 그 비밀은 믿음의 비밀로 간수하고 봉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적 그리스도의 구별입니다.

(v.10)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천국과 지옥과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자는 오늘 시련과 여러움을 당합니다.  예수님의 정신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종말에 어려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적 그리스도는 이것을 반대로 가르칩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를 믿기에 참고 인내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악한 자는 마지막의 비밀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자칭 예언자와 환상이, 간증이 거짓입니다.  알지 못하는 자들이 떠들기에 거짓으로 판명이 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에 영적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합니다.  영적이라는 단어를 거짓의 목적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지혜 있는 자는 깨달습니다.  깨닫는다는 Hebrew어 의미는 지적으로 이성적으로 완벽하게 안다는 것입니다.  Hebrew로 Be-ne입니다.  이 단어는 물리적이고, 과학적이고, 머리와 가슴으로 느끼는 진리보다 더 확실하게 이성적으로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추호의 의심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깨달아지는 것은 아주 분명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줌의 흙이 되지만, 하늘나라를 확신합니다.  나에게 천국을 경험하는 간증이 없다고 할지라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죽음 이후와 세상의 마지막에 대한 확신은 이성적 판단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비밀을 간수하고 봉함해서 깨닫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다니엘 11장 22-45 이해 할 수 없는 일

우리들이 정말로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나보다 잘난 사람이 잘 되는 것은 인정 할 수 있습니다.  나와 같은 사람이 잘 되는 것은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보다 못한 사람이 잘 되는 것은 정말로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참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북방 왕은 정말로 이해 할 수 없는 왕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사람을 역사의 왕으로 사용하신다면 나도 왕이 될 수 있고 우리 모두 왕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 할 수 없습니다.

북방 왕은 성격 장애도 있습니다.  행동도 이상합니다.  그는 모든 면에서 비정상입니다.  그가 왕이 됩니다.  그런데 그가 하는 일은 그가 원하는 대로 됩니다.  자신이 왕이 되고 싶으면 왕이 됩니다.  자신이 로마의 볼모로 가야하지만,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볼모로 보내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이길 수 없는 전쟁이지만, 대승을 합니다.  전쟁을 할 때마다 이깁니다.  미친 왕이지만 만사가 이렇게 형통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다시 전쟁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로마가 이번에는 전쟁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로마의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전쟁을 포기합니다.   그가 전쟁을 포기하고 돌아오는 길에 예루살렘을 들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돼지 머리를 두게 합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에 돼지 머리가 들어간 것을 보고 너무나 불경하기에 돼지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못합니다.  가증한 것 다른 성경은 미운 물건이라고 합니다.

(v.31)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을 세울 것이며.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v.35) 또 그들 중 지혜로운 자 몇 사람이 몰락하여 무리 중에서 연단을 받아 정결하게 되며 희게 되어 마지막 때까지 이르게 하리니 이는 아직 정한 기한이 남았음이라

성전을 정결하게 지키려는 사람들은 고난을 당합니다.  성전은 이러한 사람들에 의하여 정결하기도하고, 더러워지기를 반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한 기한이 남아 있습니다.  결국 북방의 왕은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성전은 예수님이 오신 후 AD 70년에 완전히 파괴됩니다.

우리에게는 이해 할 수 없는 많은 사건들이 있습니다.  북방왕과 같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주역이 되는 것을 봅니다.  그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의심 할 때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저런 사람의 편을 들어주면서 우리 편은 들어주지 않는가 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교회는 이 세상의 성전과 같이 영광과 수치를 동시에 받습니다.  수치를 받을 때가 더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교회를 영화롭게 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은 성전을 지키려는 사람들과 같이 신앙을 지킬 때도 있고, 고난과 시련을 이기지 못해서 신앙을 지키지 못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정한 기한이 있습니다.  이것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 세상은 그저 뜻 없이 흘러가는 세상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왜 이러한 아픔을 당하고, 시련을 당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한 기한이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하나님의 이유와 목적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정한 기한, 하나님의 정하신 이유와 목적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장차 미래에 우리는 왜 우리들이 이렇게 살았는가를 알게 됩니다.  이러한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최고의 선이며 축복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정하신 기한으로, 목적으로 우리는 살아갑니다.  오늘도 희망과 용기의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다니엘 11장 1-22 (무서운 여자와 남자)

오늘 본문은 지난 10장의 내용과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에서 페르시아의 멸망은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알렉산더의 등장은 3-4절에 잘 나타납니다.

(단 11:3-4) 장차 한 능력 있는 왕이 일어나서 큰 권세로 다스리며 자기 마음대로 행하리라  (v.4) 그러나 그가 강성 할 때에 그의 나라가 갈라져 천하 사방에 나누일 것이나 그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또 자기가 주장하던 권세대로도 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 나라가 뽑혀서 그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로 돌아갈 것임이라.

알렉산더가 오늘의 인도까지 정복하다가, 32살 젊은 나이에 죽게됩니다.  그의 나라는 4명의 장군에 의하여 분열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4개 나라 중에 이집트와 시리아가 남북으로 갈등 하다가, 결국 로마에 멸망하는 내용까지 입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암살 사건이 일어납니다.  왕이 되려고, 상대방을 죽여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는 독살이 끓임 없이 진행됩니다.  이러한 독살에는 가정이 깊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알렉산더의 어머니 올림피아입니다.  역사가들은 그녀가 아들 알렉산더를 왕으로 만들기 위하여 자신의 남편을 독살했다고 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알렉산더도 어머니가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을 왕으로 만든 것에 대한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과 어머니에 대한 두려움으로 원정을 떠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무서운 아내이며, 어머니가 됩니다.

또한 아들 알렉산더가, 죽고 나라가 4개로 나누어지자,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고, 알렉산더의 어머니는 자신들의 손자, 최소한 2명을 죽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무서운 할머니가 됩니다.

무서운 아내, 무서운 어머니, 무서운 할머니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여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무서운 여자로 만든 것이 누구입니까?  그녀의 남편입니다.  알렉산더의 아버지입니다.  남편은 전쟁에 집착합니다.  그리고 남편이 아내를 학대합니다.  학대의 이유는 아내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알렉산더의 어머니는 당시 신비의 종교, 뱀을 숭배했습니다.  밤에도 남편과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뱀과 함께 잠을 잤다고 합니다.  남편의 학대가 먼저인지, 뱀의 숭배가 먼저인지 알지 못합니다.

이러한 괴물의 가정이 바로 알렉산더의 가정입니다.  알렉산더는 아버지가 너무 많은 나라를 정복하는 것에 분노를 느꼈다고 합니다.  자신이 정복 할 땅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더도 세상을 정복했지만, 아버지와 아들이 세상을 정복했지만, 그 모든 것은 다른 사람, 4명의 장군이 갖고 갑니다.

우리의 가정에, 어머니와 남편과 자식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집착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들은 사업, 직장, 생계, 밤 잠을 자니 아니하며 고민합니다.  오늘 날 전쟁에 집착을 합니다.

어머니들은 자식과 가정에 집착합니다.  남편은 집에 돈 벌어 주는 기계입니다.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노동자입니다.

이렇게 하지 아니하면 망한 다고 합니다.  어떤 것이 좋은 아버지, 좋은 엄마, 좋은 부모가 되는 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문제가 생겨서 찾아오는 부부의 100%는 부부들은 방을 따로 사용합니다.  이러한 부부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서로 집착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도록 일하고 쌓아 놓지만, 좋은 엄마와 아버지가 되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은 헛된 것이 됩니다.  남들이 갖고 갑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일은 지금도 얼마든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무서운 여자와 남자는 우리들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가볍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의 여유가 생깁니다.

좋은 엄마와 좋은 아버지가 되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 역사에서 그 자식들이 선하게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

 

 

 

다니엘 10장 -영적 전쟁

우리들이 조심해서 사용 할 단어가 영적 전쟁이라는 단어입니다.  영적으로 전쟁을 하고 있다는 단어입니다.  기독교 서적이나, 교인들 대화에서 많이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우리들이 사탄의 세력과 영적 전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조심해서 사용해야 할 말입니다.

모든 종교에는 신비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신비성에 인간이 주도 하는 종교는 정상적 종교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 종교가 주관적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주관적이 된다는 것은 신학적이지 아니하고 비윤리, 비도덕성을 갖추게 됩니다.

가장 좋은 예는 무당이 됩니다.  무당 자체가 신비를 강조하며, 자신이 영매가 되어 굿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종교는 정상적 종교가 아닙니다.

한국 교회와 교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기독교 종교를 극단적으로 신비화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영적 전쟁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지금 세계는 ISIS와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영적 전쟁이라고 합니다.  악한 영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 전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러한 전쟁이 일어나게 된 이유를 조금이라고 상식과 역사적으로 이해한다면, 이 전쟁은 인간의 탐욕과 야망이 만들어낸 전쟁입니다.  특히 서구와 미국이 이 책임을 벗어 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전쟁을 영적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끌어 대는 것은 전쟁에서 죽은 수많은 억울한 생명의 책임을 하나님에게 뒤집어 씌우는 사탄의 계략입니다.

우리는 내 안의 감정적 갈등도 영적 전쟁이라고 합니다.  물론 우리들이 감정적 갈등에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어떠한 유혹과 어려움에서 우리들이 싸우기에 영적 전쟁이 됩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들의 욕심과 야망과 욕정과 불의한 태도를 영적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로 무당과 같은 짓거리는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단어를 서슴없이 사용합니다.  우리의 사악함을 영적이라는 단어로 얼버무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철저한 죄인들입니다.

본문에서 영적 전쟁을 이렇게 보여줍니다.

바벨론 포로들이 해방됩니다.  하나님은 고레스를 통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 하게하며 빼앗았던 성전의 금과 은의 기물을 이스라엘로 되돌려 보냅니다.  바벨론으로 잡혀왔던 포로들을 조국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70년 포로 생활의 결과 이제는 조국 이스라엘 보다 바벨론이 살만한 나라가 됐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건을 목격한 다니엘은 안타까워 (v.2) 세이레, 21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이렇게 금식 할 때에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v.1) 하늘의 큰 전쟁의 환상을 보여줍니다.  영적 전쟁입니다.

환상은 금식 21일 후에 봤습니다.  다니엘은 그날이 1월 24일이라고 합니다.   환상 중에 그는 (v.5) 한 사람 , 하나님과 같은 사람을 만납니다.  다니엘은 이 사람을 때로는 인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v.12)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

예수님, 하나님이 다니엘의 기도의 내용을 듣고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의 기도를 첫날부터 들으셨습니다.  그 첫날이 언제입니까?  다니엘은 21일 동안안 금식했습니다.  하나님의 환상을 본 것은 3 주 후, 1월 24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금식 첫날부터 다니엘의 기도를 들으셨다면 1월 21일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우리는 금식의 기간과 기도 내용으로 하나님을 설득 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금식과 기도의 내용이 아니라 삶의 태도입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 백성이 조국을 버리는 것을 안타까워 해서 기도 할 때에 하나님은 첫 날부터 다니엘의 기도를 들었습니다.

(이사야 58: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우리들이 금식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신약의 4 복음서를 깊이 봐야 합니다.  다음에 다룹니다.

그러면 영적 전쟁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다니엘 10:13) 그런데 바사 왕국의 군주가 이십일 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 왕국의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가장 높은 군주 중 하나인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 주므로.

공동 번역은 페르시아의 악령이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오시는 길을 21일 동안 막았다고 합니다.  영적 전쟁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천사장 미가엘을 호출해서 이 싸움을 했다고 합니다.  (참조) 천사론에 대한 해석은 매우 조심해야합니다.  성경대로 설명했습니다.

사단이 21일 동안 주님을 못가도록 방해했습니다  다니엘에 금식한 기간이 21일입니다.  다니엘이 21일 동안 금식하는 기간 동안에 천사장 미가엘은 악한 권세와 21일 동안 영적 전쟁을 했습니다.

우리를 이 말씀에서 금식하는 것이 영적 전쟁이라고 성급한 결정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바리세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지만, 주님에게 무서운 징계를 받습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영적 전쟁은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다니엘은 이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영적 전쟁은 우리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이 천사장 미가엘을 불러서 전쟁을 치루십니다.  우리는 사탄의 세력과 영적 전쟁을 치를 실력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들이 영적 전쟁이라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사용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