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24장 잘못된 계산

마태 24장은 종말에 관하여 쓰여 있습니다.  제가 2번에 걸쳐 종말에 대한 내용을 정리합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수많은 이단들은 종말의 시기를 계산합니다.  언제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계산의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많은 분들은 종말의 시기 계산을 요한 계시록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한 계시록은 숫자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구약의 요한 계시록과 같은 다니엘서를 근거로 계산합니다.

(단 9장)으로 종말의 시간을 계산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부터가 잘못된 것입니다.  (단 9) 종말의 시간이 아니라 예수님이 Messiah 되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중의 하나가 천사 가브리엘의 등장입니다.  성경을 잘못해석하는 첫 번째 이유가 가브리엘이 종말을 알려 준다고 합니다.

가브리엘이 성경 전체에서 3 번 나타나는데 첫 번은 오늘 본문이고 두 번째는 신약에서 제사장 사가랴에게 나타나 세례요한의 출생을 고지합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의 어미니 마리아에게 아기 예수의 탄생을 고지합니다.  가브리엘에게 주어진 일관된 사명은 하나님의 역사적 사건을 이루는 사람의 출생을 통지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단9장도 종말의 시간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것이지, 종말의 시간표를 계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것으로 종말의 때를 계산합니다.  이것이 실수의 시작입니다.  지금 부터 제가 소개하는 것은 일반적 성경학자들이 시간의 계산입니다.  참고로 알아두시면 됩니다.

(v.24-25)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v.25)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첫째는 기름을 부음을 받은 자가 몇 번 나옵니까? 두 번입니다.  기름을 부었다는 것은 Hebrew로 Messiah입니다.  헬라어로 그리스도입니다.  기름을 부은 자 메시야 왕이 일어나기 까지 모두 7 이레와 62 이레라고 합니다.  첫번 기름 부은 자는 이사야 45장의 고레스로 해석을 합니다.  성전을 수축하라고 명령합니다.

이레는 Hebrew로 일주일입니다. 그러나 한 이레를 7일이 아닌 7년으로 계산하는 것에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동의합니다. 바벨론에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이 페르시아의 고레스의 명령으로 스룹바벨의 성전이 완공됩니다. 그 기간이 7 이레 7 X 7= 49년입니다. 성벽까지의 완성은 100년 정도걸립니다.

(v.25)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또 한 사람의 기름 부은 왕이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62 이레 62 X 7= 434년입니다.  예수님이 오십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많은 성경학자들은 예루살렘 성전 중건 후 430-460년 사이에 주님이 오신 것으로 계산을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승천하신 후

(v.26) 예순두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 그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예루살렘 성전 파괴가 나타납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까지 어느 정도의 오차는 발생하지만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입니다.

(v.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몇 이레가 남았다고 합니까? 한 이레라고 합니다. 7년입니다.  주님이 부활승천하고 이미 정한 종말까지 7년 안이 종말이 왔어야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2 천년이 지났지만 예수님은 오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많은 성경학가들이 계산한 62 이레와 7 이레의 계산도 틀린 것입니까?  그것을 틀렷다고 보기에느느 무리가 있습니다.  신뢰 할 만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이레에서 잘못된 종말을 계산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70 이레를 잘 이해해야합니다.  70 이레에서 70은 Hebrew로 보면 Shevim // 칠십입니다.  그 다음은 이레입니다.  이레는 Hebrew로 Shaba // Sabbath // 일곱입니다.  즉 70의 7입니다. 70의 7입니다. 7을 해석해야합니다.

성경은 70의 7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창 4:24) 가인에게는, 벌이 7 배지만, 라멕에게는 벌이 77배라고 합니다. 노아는 7일 만에 홍수를 맞습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7 일 동안 봉헌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문둥병 치료를 위하여 7번 요단강에 들어갑니다.  스가랴는 여호와의 눈을 7개라고 합니다.

성경의 7은 완전수입니다 70이레는 70의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70입니다. 주님도 이 숫자를 사용하십니다. 7 번씩 70번을 용서하라고 합니다.  우리들이 490번용서가 아니라는 것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완전한 용서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들이 계산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지금까지 계산은 62+7=69입니다.  70에서 69을 빼면 1 이레, 7년 대환란으로 해석을 합니다.  아주 조심해야할 해석입니다.  문자적으로, 숫자적으로 성경을 해석해야하지만 그렇다 고해서 숫자로 맞추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에서 69이레를 빼면 우리는 그 숫자가 무엇인지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수학을 배울 때에 무한대에서 일반 숫자를 빼면 무한대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들이 알 수 없는 시간적 계산이 나옵니다.  

그러나 몇년 전에도 Family Radio의 Dr. Kemp가 엉터리 예언을 했습니다. 1992년도의 이장림의 다미 선교회의 휴거 사건도 있엇습니다.  69이레의 계산이 대략적으로 역사의 내용과 일치한다고 해서 나머지 한 이레를 숫자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70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정확한 종말은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시작됐습니다. 한 이레 남았습니다.  칠년이 아닙니다.  곧 오십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에 있습니다.  그저 우리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릴 뿐입니다.

우리 가정에서 아버지를 믿는 자식들은 아버지의 Business을 신뢰합니다.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질문하지 않습니다.  그저 아버지가 하는 일의 결과을 기다립니다.  아버지를 믿지 못하는 자식들은 아버지의 사업에 참견합니니다.  이것은 자식이 아니라 원수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Business을 신뢰하기에 말 없이 기다립니다.

종말을 새롭게 이해하시는 사순절이 되길 바랍니다.

 

마태 22장 우리의 옷

오늘 말씀은 천국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약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아들을 결혼 시키는 아버지가 결혼 잔치에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초청 받은 사람들은 당연히 와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초청 받은 사람들은 잔치 참여를 거절합니다.  잔치의 초대장을 갖고 간 종들을 죽입니다.  이에 분노한 아버지는 군대를 보내어 그들을 진멸합니다.

아들의 즐거운 잔치가, 피의 잔치, 살육의 잔치로 변절했습니다.

이번에는 잔치에 참여 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오라고 합니다.  길거리에서 자격없는 자들을 초대합니다.  왕은 종들에게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초청하라고 합니다.  악한 자나 선한 자들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누구라도 참여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왕의 초청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그들을 밭에서 직장에서, 농장에서, 일 하다가 참여합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한 사람은 예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사람들은 정식적으로 초대를 받지 않았습니다.  예복을 준비 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예복이 없이 오는 것이 당연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예복을 입고 왔습니다.  밭에서 농장에서 일하다가, 집에가서 예복을 입고 왔습니다.  단 한 사람만 예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이 한 사람만 결혼식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는 본문의 예복을, 아름다운 옷이나, 정장으로 이해합니다.  아닙니다.  예복은 Hella로 En-du-ma Gamos라고 합니다. En-du-ma는 옷입니다. Gamos는 결혼입니다. 영어성경은 Wedding clothes // Wedding garment로 번역했습니다.

결혼식장에 가면 신부만 특별한 옷을 입습니다.  유대인의 결혼식에서, 신부는 특별한 치장을 합니다.  세계 모든 나라의 결혼에서 신부는 특별한 옷을 입습니다.  이것이 신부와 모든 사람의 구별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예복으로 구별합니다.  만약에 신부가 밭에서, 농장에서 일하는 옷을 입고 결혼을 하겠다고 하면 이것은 결혼식에 참여한 모든 사람을 조롱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왕의 아들의 신부입니다.  우리의 신랑 예수 그리스도의 아내로 우리들이 결혼식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결혼식에 초대된 사람들은 축하객이 아니라 결혼의 당사자입니다.

(계 19:7-9)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v.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v.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우리는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이 옷을 어디에서 얻습니까?  (계 7:13-14)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v.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 예복은 예수의 피로 씻은 옷입니다.  우리가 준비 한 옷이 아닙니다.  어린양의 피에 옷을 씻어 희게 되었다고 믿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입니다.  내가 빨래한 옷이 아닙니다.

천국은 누가 갑니까?  예수를 믿은 사람이 갑니까?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한 사람이 갑니까?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천국갑니다.  그러나 믿는다는 의미를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아래와 같은 사람들이 천국갑니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십자가에서 씻겨주시고 나를 은혜로 구원하심을 고백하는 사람이 천국에 갑니다.  천국은 나의 공로가 의지가, 노력이, 0.0000000000001%도 없습니다.  전적은혜입니다.  내가 믿어서 천국간다는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오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천국의 예복은 예수의 피로 씻은 옷입니다.  우리가 준비 한 옷이 아닙니다.  어린양의 피에 옷을 씻어 희게 된 옷을 입는 것을 믿는 자들이 천국에 갑니다. 

사순절에 믿음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마태 21장 진짜와 가짜 대제사장

예루살렘에 가면 아주 긴장감이 감도는 곳이 있습니다.  황금 돔이 있는 이슬람 사원입니다.  일명 Dome of Rock 입니다.  유대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곳이라 하고, 이슬람은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곳이라고 합니다.  이슬람은 성경의 내용과 다르게 말 합니다.  이슬람은 아브라함이 자신들의 조상 이스마엘 제물로 바치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곳에 들어가보는 것이 매우 쉽지 않습니다.  시간이 정해져있고,  유대인들이 들어가면 회교도들이 돌을 던집니다.  저는 한번 들어가본적이 있습니다.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은 위치를 가늠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구조적으로 보면 4개의 뜰이 있습니다.  가장 바깥은 이방인의 뜰 그 다음은 유대인 여자들의 뜰 그 다음이 유대인의 남자의 뜰 그리고 가장 안쪽에 제사장의 뜰이 있습니다.  이방인의 뜰은 유대인이지만, 죄인들, 소경과 다리는 저는 자들도 들어 올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지만 죄인은 이방인 취급을 받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모세의 성막이나, 솔로몬의 성전에는, 이방인의 뜰이 없습니다.  나중에 세워진 예루살렘 성전에만 이방인의 뜰이 있습니다.  제사장은 이러한 이방인의 뜰을 지나지 않으려고, 구름다리를 만들어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왜 가장 나중에 세워진 헤롯의 성전, 예루살렘 성전에만 이방인의 뜰이 있습니까?  그 이유는, 모세오경은 이방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못합니다. 또한 유대인이지만  절름발이 소경 신체불구자들 신낭이 상한 자 (고자)는 제사장도 될 수 없고 제사도 드리지 못합니다. 이들은 유대인이지만 이방인과 동일한 취급을 받아 제사를 드리지 못합니다.

모든 자들이 하나님께 나올 수 있습니다.  (이사야 53:3-8) 고자와 이방인들이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릴 수 있다고 합니다.  (v.7)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됩니다.  하나님은 성전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기 위하여 이방인과 고자를 구원하시겠다고 합니다. 고자는 신체불구자를 대표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예루살렘은 2천년 전의 예루살렘 성전과 하나도 차이가 없습니다.  서로 자신들이 옳다고 하는 주장만하는 곳입니디.

제가 아주 독실하고, 보수적 유대교 신자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너희들 이슬람 성전을 허물고, 그 자리에 예루살렘 성전을 짓고 제사를 드릴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합니다.  제사장의 후손, 레위지파가 없다고 합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제사장의 직책은 끓어져있습니다.   성전을 지어도 제사를 드려줄 제사장이 없습니다.  죄의 용서를 빌어줄 대제사장이 없습니디.

제사장을 Hebrew로 Cohen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중에 가장 흔한 이름이 Cohen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일부 한국 교회 신자들은 이슬람 성전을 허물고, 그 자리에 예루살렘 성전이 들어서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예루살렘에서 요주의 인물의 하나가 한국인들입니다.  그곳에서 통성기도하고, 이슬람 사원이 무너지라고 빙빙 돌기도 한다고 합니다.

만약에 이러한 태도를 갖고 있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대제사장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의 예루살렘을 회복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스스로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그가 오셔서 성전의 휘장을 위에서 밑으로 찢으셨습니다.  더 이상 성전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예수에 의해서 새롭고 산길이 열렸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새롭고 산길이 아닙니다.  오늘도 예루살렘 성전이 새롭고 산길이라고 하는 사람에게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신앙의 정체성을 갖는 사순절이 되길 바랍니다.

마태 19장 돈과 죄인

우리는 돈이 우리를 죄인이 된다고 합니다.  돈 때문에 사람을 속이고, 돈 때문에 수치를 당하고, 돈 때문에 배신하고, 심지어는 살인도 합니다.   돈 때문에 우리들이 죄인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돈은 종이에 불과 합니다.  돈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돈의 생명은 사람이 갖고 있습니다.  좋은 사람에게 돈이 있으면 사람의 생명을 살립니다.  나누어 사용합니다.  그러나 악한 자의 손에 들어가면 그 돈으로 사람을 죽입니다.  타인의 것을 빼앗습니다.  그럼으로, 돈이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돈을 사악한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돈이 많은 부자는 행복하고, 돈이 없어 가난하면 불행하다고 믿습니다.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악한자에게 돈이 많아도, 그 돈으로 불행해집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에게 돈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는 행복합니다.  물질적으로 부유하지만, 마음의 풍성함이 없으면, 가난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부는 저주입니다.  부유하기에 더 불행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v.23)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의미를 잘 이해해야합니다.  부자이기에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도 우리들이 부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에게도 좋은 부자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베다니의 나사로는 부자입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도 부자였습니다.

주님이 부자이기에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의 부자는 돈이 많은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가난하지만 돈이 주인이 되면 그는 부자입니다.  그 증거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에서 나타납니다.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쫓았다는 것은 우상, 돈을 버리고, 주님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이 시대는 물질이 주인입니다.  돈이 우상입니다.   우리들이 돈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때문에 돈은 선과 악으로 나타납니다.

돈을 쓰지 않고 모아만 두면 수전노가 됩니다.  수전은 한문으로 지킬 수 돈전입니다.  돈을 지키는 자입니다.  노는 노예 노입니다. 돈을 벌었지만 돈의 노예가 됩니다.

돈을 벌었지만,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하면, 졸부라고 합니다.  졸부를 한문으로 보면 개와 사슴의 짐승 변에 마칠 졸입니다.  짐승과 같이 빠른 것을 졸이라고 합니다.  졸부는 갑자기 부자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는 아주 빠르게, 마음과 삶이 가난해집니다.  돈이 사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돈을 따르면 졸부가 됩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부자를, 천석군, 만석군으로 군(君)을 사용합니다.  군은 임금 군(君)에서 유래됐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선한 부자를 임금과 같이 대접을 했습니다.  부자들은 하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존중했습니다.  그는 그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나누어 사용했습니다.

임금과 같은 부자는 흉년과 기근이 들면 가난한 자의 전답을 사지 않았습니다.  흉년이 들면 사방 10-30리에 굶는 사람에게 양식을 풀었습니다.  진짜 부자는 부엌의 연통을 아주 낮게 만들었습니다. 밥 짓는 연기가 높이 올라가지 않게 했습니다.  지나가는 손님에게 대접을 했습니다.  그 집의 남자들은 높은 벼슬을 하지 않앗습니다.  아녀자들은 무명 옷을 입었습니다.

이러한 부자는 몇 백년의 부를 유지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지켜 주었습니다.  우리 한국, 경주에 이러한 부자가 있습니다.

 

돈을 지키면 부자가 됩니다.  역설적이지만, 돈을 지키려면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이 미국의 Old money의 생존전략입니다.  존경 받고, 그 부를 지킵니다.  카네기 홀과 미국의 수많은 도서관 Manhattan의 수많은 박물관과 예술활동은 부자들의 헌납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돈이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돈이 없어도 죽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돈을 빚지는 것을 죄로 표현합니다.  빚만 지지 않으면 반드시 부자가 됩니다.  없으면 쓰지 말고, 노력해야합니다.

 

마태복음 18장 사랑과 가치

이 시대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단어의 하나가 가치입니다.  가치는 2개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수학적 가치입니다.  크고 작은 숫자에 따라 가치가 정해집니다.  또 하나는 철학적 가치입니다.  이 시대는 절대가치가 없습니다.  상대적 가치입니다.  너와 나의 가치관의 비교입니다.  이것을 가치관이라고 합니다.

숫자적 가치가 물질적이라면 철학적 가치는 정신적입니다.  우리는 두개의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가치관을 파괴합니다.  너희는 99 마리를 산에 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십니다.  수학적 가치와 철학적 가치의 질문입니다.  99 마리의 양과 1 마리의 양입니다.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습니까?  우리의 수학적거치는 99마리가 중요합니다.  철학적 가치도 99마리가 중요합니다.  다수의 의견과 다수의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찾습니다.  99 마리는 안전한 우리에 두는 것이 아니라 산에 두고 한 마리를 찾으러 갑니다.  산에는 늑대, 곰, 들개가 양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가치는 한 머리보다 못합니다.  

주님은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길을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는 것을 더 기뻐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본문의 양을 영어로 Lost Sheep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영어 번역을 보면 Lost 대신에 Astray를 사용합니다.  Astray 길을 잃고, 타락하다는 의미입니다.  Hella로 Planeo인데, 미혹을 당하다, 속다입니다. 영어로, Deceive, Misguided , Mistake로 번역합니다.  마태복음의 길 잃은 스스로 의지를 갖고 떠난 양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가치관을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치관은 사랑입니다.  한 마리 양은 예수님의 사랑을 벗어나 양입니다.  숫자보다, 철학적 가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십니다.

99마리의 양은 주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양들입니다.  곰과 늑대의 공격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랑은 어떠한 도전과 시련을 이겨 냅니다.  사랑은 죽음도 이겨냅니다.  사랑을 확신하며 사는 자는 진정한 행복을 누립니다.

그러나 한 마리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그는, 사람도 사랑하고, 가장 높은 숫자의 가치를 갖고, 모든 사람을 제압 할 수 있는 정신적 가치를 가져도 예수님의 사랑이 없으면 그는 죽은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바로 이러한 사람입니다.

저는 이 시대의 우리들이 사랑을 이해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한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은 숫자의 가치와 철학의 가치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늘 날 교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외치지만 그 사랑이 매우 허무합니다.

사랑의 완성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진정으로 믿을 때에 우리의 가치는 사랑으로 변화합니다.  99마리보다 한 마리가 중요하게 됩니다.  이것은 가치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정말로 사랑을 원하십니까?

사랑을 하고 싶으십니까?

사랑의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까?

예수님을 믿으세요.  이것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마태 17장 의심

주님은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합니다.  주님은 태양과 같이, 빛과 같이 변형하셨습니다.  주님의 얼굴이 like the sun, 주님의 옷은 as the light와 같이 변형, Transfigured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형은 인간에서 하나님으로, 나사렛의 예수에서 하나님의 아들 나타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변화가 무엇입니까?  예수님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초막을 3 채나 짓자고 합니다.  베드로는 모세와 엘리야를 주님과 동급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비극이고 우리의 비극입니다.

베드로는 16장에서 주님을 입술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고 17장에서 주님의 변화를 눈으로 봤지만 그의 마음에 아직도 주님에 대한 의심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초막 3을 짓겠다고 합니다.

그 의심의 증거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의 얼굴은 태양과 같았습니다.  Like the sun입니다. 그의 옷은 As white as light. 옷이 희어졌는데 빛과 같습니다.  이러한 주님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산 아래에 도착했을 때에 한 사람이 자신의 아들의 간질병을 고쳐 달라고 합니다.  

본문의 간질은 Hella로 Selenazomai입니다. Selenazomai는 Selene 달 Moon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영어 번역은 달과 관련된 Lunatick 또는 Epileptic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어떤 영어번역은 간질을 Moonstruck로 번역을 했습니다. 이것도 달, Moon과 연관성을 나타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달은 부정적 상징, 태양은 긍정적 상징으로 생각했습니다.  간질은 달의 악한 영적 기운이 나타나고 그 달의 기운에 매를 맞는 사람에게 광적현상이 나타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간질은 // Moonstruck, 달에 매를 맞는 자, Lunatick, 달에 영향을 받는 자가 됩니다.

주님은 변화산에서 태양과 같이 변화하셨지만, 제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빛으로 달의 어두움과 영향력을 제거하려고 하지만, 그들은 간질병, 당시에는 귀신들린 자를 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달이 태양을 이기고 있습니다.  당시에 달이 태양을 이기는 것을 일식이라고 했습니다.  일식은 달이 태양을 잡아 먹기에 매우 두려운 현상이였습니다.

간질병 환자는 어린 아이입니다.  이 아이는 육체적 질병에 걸렸을 뿐입니다.  정말로 간질병에 걸린자들은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불안하며 주님의 능력을 의심을 할 때에 태양이 달에 잡혀 먹는 일식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간질이 제자들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마음은 매우 어두워졌습니다.

Greek 신화에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르페우스는 자신의 아내 유리디체가 뱀에 물려 죽자 죽음의 나라의 왕 플루토(Pluto)을 찾아가 자신의 아내 유리디체를 세상에 돌려보내 달라고 합니다.  죽음의 왕 플루토는 다음과 같은 // 조건을 요구합니다.

유리디체를 지상으로 돌려보내 주겠다.  그런데 이곳을 출발하여 흑암을 지나 지상의 광명을 볼 때까지 결코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유리디체는 언제나 너의 뒤를 달려가고 있으니, 너는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합니다.

오르페우스는 아내와 함께 죽음에서 생명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르페우스의 마음에는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달이 태양을 잡아 먹습니다.  일식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유리디체가 정말 자기를 따라오고 있을까?  플루토 왕이 거짓말을 했거나 자기를 놀리는 것이 아닐까?  죽은 사람이 정말 다시 살아나서 자기를 따라 올 수 있을까?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그의 마음을 불신으로 정복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광명의 세상에 도착하기 직전에 뒤를 돌아보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자기 뒤를 열심히 따라오고 있는 자신의 아내 유리디체를 발견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플루토의 말대로 유리디체는 다시 죽음의 나라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의심의 결과입니다. 의심의 결과는 태양이 달에 잡혀 먹는 일식입니다.  영원한 죽음입니다.

우리의 의심은 오르페우스처럼 의심은 또 하나의 불신을 만들게 됩니다.  태양의 빛이 사라집니다.  예수님이 사라집니다.   일식은 일시적 현상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태양이 빛을회복합니다.

그러나 그 일식의 시간에 모든 것을 빼앗깁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의심이 사라지면, (v.20)의 말씀대로,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게 합니다.  

의심이 없는 믿음으로 빛의 생활, 생명력 있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 16장 나는 누구인가 고백할 수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매우 철학적인 질문 같지만 우리들이 나 자신에게 매일 질문하게 됩니다.  내가 나를 모릅니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고, 이러한 일이 나에게 일어나고, 내가 무엇 때문에 살아왔는지 질문하게 됩니다.

심리학자 Carl Jung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은 파괴적으로 된다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얻어도, 내가 나를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의 정신 세계는 파괴되는 중이라고 합니다.  내가 나를 알지 못하면 성공하는 것 같지만 실패중입니다.  실패하는 것 같지만, 성공하는 것을 모릅니다.  

Carl Jung은 사람이 자신을 아는 것은 신 하나님에게 소속감을 가질 때에 자신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기에 누구보다고 사람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럼으로 그 하나님을 아는 것이 나를 아는 것이 나를 아는 것과 직결됩니다.

(v.13)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냐 하느냐고 질문하십니다.  너희들이 나를 알고 있느냐 입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알고 있습니까?  실제적으로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실체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비실체를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질문에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v.16)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주님이 이 대답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v.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교육을 시킨 것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알게 하셨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셨다고 합니다.  아주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지식과 노력과 의지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v.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이 알게 하시는 것을 근거로 우리를 교회로 세우십니다.  우리들이 교회입니다.  내 자신이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는 교회가 내 자신입니다.

(v.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베드로가 천국 열쇠를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천국의 열쇠를 갖고 있다는 이 말씀에 확신을 갖고 있습니까?  믿음을 갖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절대로 알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을 거울에 비추어보면 나와 같은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현대의 정신치유는 그 인간을 칭찬하고 격려하라고 합니다.  Positive thinking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죄성은 그 거울의 사람에게 비방합니다.  나 자신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비하와 조롱과 무시는 타인에게 그대로 연결됩니다.  다른 사람과 아주 불편한 관계를 의도적으로 만들어냅니다.  자신이 희생당한다고 억울한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공격적으로 변화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에 사람은 자신에 주어진 교회의 열쇠를 자신을, 교회를 파괴하는 것에 사용합니다.

우리는 (v.16)을 베드로의 고백이라고 합니다.  Confession은 신학적 고백입니다.  교회와 신자는 자신의 신앙을 신학적으로 고백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게 되면 반드시 신학적 성찰, 고백의 의 과정을 갖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주요한 기독교 교단들은 신학적 고백을 갖습니다.  이단은 신학적 고백을 할 수 없습니다.  (이 부분은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하겠습니다)  교회는 Confessional church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이 교회이기에 자신을 신앙을 성찰하여 고백을 만드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 14장 2개의 생일

우리는 태어나는 날을 생일이라고 합니다.  그 날을 기뻐하며 Happy Birthday라고 즐거워하며 축하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생명이 이 땅을 떠나는 날을 Memorial Day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죽은 날을 슬퍼하며 힘들어 합니다.

과연 이것이 올바른 태도일까요?  저는 우리들이 죽는 날을 Memorial Day로 지키는 것은 성경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죽는 날은 하늘 나라에서 새롭게 생명을 얻는 날이기에 또 다른 Happy Birthday가 됩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생명을 보내기에 슬프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생명을 얻는 날이기에 기쁜 날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에 분봉왕 헤롯이 나타납니다.  헤롯은 자신의 생일날 큰 잔치를 베풉니다.  살로메의 춤에 정신을 빼앗긴 분봉왕 헤롯은 살로메의 요구대로 세례 요한을 참수형 시킵니다.  살로메는 요한의 머리를 자신의 엄마, 헤로디아에게 선물로 줍니다.

아주 Irony합니다.  헤롯의 생일날 세례 요한 죽음을 당합니다.  한 사람은 태어난 날, 한 사람은 죽습니다.

헤롯의 Birth Day에 세례 요한의 Memorial Day가 됩니다.  그러나 헤롯의 생일은 그에게 죽은 날입이다. 헤롯의 Birth Day는 Memorial Day가 됩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그는 선지자 세례 요한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헤롯의 생일날 죽었지만, 그는 새롭게 태어나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긴 날입니다.  세례 요한에게는 육체적으로 Memorial Day가 되지만, 하나님에게 하늘의 Birth Day가 됩니다.

사람은 생로병사-태어나서 늙어서 병들어서 죽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Birth Day와 Memorial Day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Memorial Day가 하늘 나라의 Birth Day가 됩니다.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Happy Birth Day가 생깁니다.  우리는 두개의 Birth Day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은혜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에게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저는 종종 죽음과 생명의 자리에 있는 분들을 심방하게 됩니다.  죽음이 아주 가까이 와 있는 분들을 만납니다.  가족들은 그에게 Memorial Day가 가까이 있다고 슬퍼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Memorial Day가 하늘 나라의 Birth Day가 됩니다.  그의 죽음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죽든지, 살든지, 2개의 Birth Day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광이며, 기쁨이며, 감사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믿음으로 사순절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마태 13장 공존의 끝

이 시대를 현대 (Post-modern)이라고 합니다.  현대의 특징은 모든 종교가, 가치관이, 인종이, 문화가 함께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절대적 가치가 없어지고, 모든 것이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우리는 거스릴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시대를 가장 잘 이용하는 것이 공화당 후보, Trump입니다.  그는 절대성을 강조합니다.  미국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합니다.  타국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타인종을 비하합니다.  흑백 문제를 노골적으로 건드립니다.  타 종교를, 이슬람을 노골적으로 공격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미국의 기독교 신자들에게 열광적으로 지지받습니다.

Trump로 말미암아 며칠전 CNN에서 미국의 인종문제을 노골적으로 토론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가치관과 문화는 모든 것이 함께 공존하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Trump의 행동은 타 종교나 타 문화에게는 공격적이고, 무시하는 태도로 보입니다.  그러나 절대성을 갖은 계층에는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시대에 가장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기독교와 이슬람입니다.  두 종교의 공통점은 절대적 신을 갖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 이슬람은 알라를 섬기고 있습니다.  현재 중동에서 일어나는 IS 사태는 같은 알라를 믿으면서 서로 죽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믿는 알라가 절대적이며 상대방의 알라는 거짓의 알라고 생각하기에 서로 죽입니다.

우리 기독교도 절대적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진리와 길과 생명이 되십니다.  이 시대의 성도들이 가장 혼란스러운 것이 내가 믿는 하나님과 타종교와 비교입니다.  우리의 절대 진리를 주장하지만, 상대방도 진리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나의 진리는 절대적 진리에서 상대적 진리가 됩니다.  나의 절대적 진리를 주장 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 결과 우리의 신앙은 정치, 경제, 문화, 사회의 일부분이지, 더 이상 절대적 영향력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세상은 우리들을, 기독교를 나의 Cult, 같은 종교성을 가진 집단으로 신자들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아주 적절한 말씀이 됩니다.  예수님은 공존하라고 하십니다.

(v.30) 가라지와 열매를 추수때까지 함께 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가리지와 열매의 뿌리가 함께 뒤엉켜 있기 때문입니다.  가라지를 뽑으려고 하다가 열매를 뽑게 된다고 하십니다.

우리를 추수 할 때까지 이 세상의 문화와 다양한 종교와 가치관과 문화와 공존해야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제가 가장 안타까운 것은 많은 신자들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많은 목회자와 교인들은 오늘 가라지의 뿌리를 뽑으려고 합니다.  그러기에 Trump와 같은 인물에게 환호합니다.

기독교 역사는 고난의 역사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들이 주님의 명령대로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해야합니다.  세상을 뒤 엎으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추수 할 때에,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가라지의 운명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불에 살리우는 심판을 당합니다.  그때까지 그들은 우리의 미움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Trump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으로 절대가치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미움과 증오와 갈등를 유발시키깁니다.  하나님의 듯과 반대입니다.  그는 자신이 가라지의 뿌리를 뽑겠다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과 믿음은 우리의 행위와 태도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오늘도 가라지와 공존하는 우리의 시대를 이해하며 사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 12장 -진정한 예배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 회당에 들어가 한쪽 손 마른 사람의 손을 치유하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려고,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냐고 묻습니다.

유대인의 율법도 많은 피를 흘리거나 목숨이 위중하면 죽어가는 사람은 안식일에 병을 고칩니다.  그러나 한쪽 손이 말랐다고 해서 당장 죽지 않습니다.  내일 고쳐도 무방합니다.  불편하지만 다른 손으로 지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병은 안식일에 못 고치도록 했습니다.  만약에 마른 손을 고치면 안식일에 아주 사소한 병도 고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유대인의 율법에 따라 안식일에는 1,000 발걸음을 할 수 없지만 어떤 병도 고치러 의사를 만나러 갈 수 있기에 십계명 안식일을 지키라는 4 계명은 무시된다고 유대인들은 생각했습니다.  천 보 이상 걷게 됩니다.

여기에 우리의 갈등이 있습니다.  4 계명을 철저하게 지킬 것인가 아니면 마른 손을 고칠 것인가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v.15)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모든 병을 구별하지 아니하고 고치셨습니다.

주님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4 계명을 파괴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병을 다 고칩니다.  그러나 주님이 안식일에 이렇게 모든 병을 고치시는 것은 사랑이 없는 안식일은 안식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바쁜 현실에서 안식일,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배가 중요성은 강조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예배에 사람에 대한 사랑과 이해가 없다면 그 예배는 형식의 예배가 됩니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있다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됩니다.

우리들이 가장 크게 실수 하는 것이 이 부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초점이 하나님에게 모든 것이 맞추어집니다.  분명히 이렇게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 초점에는 사람에 대한 용서와 이해와 자비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예배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상상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나의 옆 사람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과 같습니다.  나의 아내와 자식, 남편 그리고 나의 옆 사람들에 대한 자비와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나의 옆의 사람들과 관계가 나의 뜻대로 되지 아니할 때에, 사랑이 없을 때에, 하나님에게 위선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 괴롭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랑의 실력입니다.

한국의 김인식 야구 감독은 아주 유명합니다.  그는 선수마다 맞춤형 코치를 합니다.  그 방법은 아주 단순합니다.  선수를 자신의 눈 높이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코치가 선수의 눈 높이에 맞춥니다.  사랑은 나의 눈 높이가 아닙니다.  상대방의 눈 높이입니다.  내가 너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너와 나와 같이 되라는 것은 강요된 사랑입니다.

(요일 4: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v.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우리들이 진정한 예배를 드리려면, 나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감정과 태도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의 옆의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예배가 됩니다.

이것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순절 기간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