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1장-기다림

사순절은 겨울과 봄 사이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길 바랍니다.  사순절도 기다림의 절기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우리에게는 기다림이 있습니다.  떠난 사람이 돌아오길 기다립니다.  영주권을 기다립니다.  휴가를 기다립니다.  지겹고 힘든 일이 끝나기를 기다립니다.  경제가 회복되기를 기다립니다.

우리는 왜 기다릴까요?  기다리는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다리는 사람에게 문제와 어려움이 있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에게 문제가 없다면 기다릴 이유가 없습니다.  기다림이 해결 될 때에 문제와 어려움이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에게 문제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본문에서 세례 요한은 메시야를 기다립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야로 이스라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 기다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기다림을 충족시켜주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v.2) 예수님의 하신 일을 듣고 절망을 하게 됩니다.  주님은 죄인들과 먹고 마셨습니다.  (v.19)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십니다.

제가, 고급 식당을 전전하며, 비싼 요리에, 술에 취한다면, 여러분은 분노 하실 것입니다.  제가 만나는 사람들이, 창녀, 도둑, 전과자, 세리, 이완용 같은 매국노라면 저에게 실망하실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눈에는 예수님이 이렇게 행동하셨습니다.

(v.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당신은, 우리들이 기다리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합니까?

주님은 자신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v.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맹인이 눈을 뜨는 것은 평생의 기다림입니다.  불구자가 걷고, 나병환자가 치유되고, 귀머거리가 듣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평생의 기다림입니다.  우리도, 나의 기대대로 되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합니다.  이렇게 기다리는 소원이 이루게 하시는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합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까?  우리들이 이러한 기적 때문에 주님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성경을 끝까지 읽어야 합니다.

(v.20-24)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v.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v.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v.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v.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사람들의 기다림이 가장 많이 이루어진 곳에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있습니다.  맹인이 눈을 뜨고, 불구자가 걷고, 나병환자가 치유되고, 귀머거리가 듣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가장 많이 일어난 곳에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있습니다.  죄의 회개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 기적을 경험하면서, 회개하지 못합니까?  기다리는 것들이 해결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기디립니다.  멀리 떠난 사람을 또 기다리고, 영주권이 나오면 시민권 기다리고, 또 다른 휴가를 기다리고, 경제가 더 잘 회복되기를 또 기다립니다. 우리는 끝없이 기다립니다.  우리에게 어려움과 문제는 끝없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다리기에 회개가 없습니다.  삶의 변화가 없습니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감사하지 않습니다.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만족과 감사가 없기에 우리는 또 기다립니다.

사순절을 맞이하면서 현재 나의 삶에서 기다리는 것들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기다리기 보다 현재에 감사와 만족하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마태 9장 -냄새

제가 몇 년전에 어느 교우한테 책을 빌려 읽었습니다.  제목은 향수입니다.  향수는 매우 향기로운 냄새입니다.  그러나 향수를 만들기 위하여 끓임 없이 살인하는 내용의 소설입니다.  그러나 소설의 주인공은 몸에서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한 번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몸에서 냄새가 나지 않는다면 얼마나 공포스러울까요?  그는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는 소녀들을 찾아 살인을 합니다.  그리고 여인들의 몸에서 아름다운 냄새를 체취합니다.

우리는 냄새를 풍깁니다.  몸에서 냄새가 납니다.  머리에서, 겨드랑이에서, 발에서, 입에서도 냄새가 납니다.  담배를 피는 사람은 담배 냄새가 납니다.  우리는 이러한 냄새를 막으려고 화장을 하고, 향수를 뿌립니다.  입에 가글 (Gargle) 합니다.  우리는 우리 몸에서 냄새를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을 때까지 우리의 냄새를 제거하지 못합니다.  죽으면서도 악취를 풍깁니다.  냄새는 우리의 죄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냄새는 우리들이 살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에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당시에 냄새나는 직업들과 연관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세리는 세금 걷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에게 천대받는 대표적 직업은 똥 푸는 사람, 가죽을 만지는 피장입니다.  똥 푸는 사람과, 가죽을 만지는 피장은 항상 몸에서 심한 악취가 났기에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지 못햇습니다.  세리와 똥푸는 사람과 피장은 죄인입니다.  세리는 냄새나는 직업과 같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세리는 냄새는 없지만, 더러운 직업 이였습니다.  소설 향수에서 주인공이 가죽 만드는 피장의 직업을 갖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그 자리에는 똥을 푸는 자와, 짐승의 가죽을 만드는 자들, 세리와 함께 식사하셨다면 예수님은 똥을 푸는 자, 짐승의 가죽을 만지는 자, 세리가 됩니다.  예수님의 몸에서 악취가 진동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지만 죄인의 자리에 앉으십니다.

소설 향수에서 주인공은 냄새가 없지만, 냄새를 얻으려고 살인을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죄의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이 맡을 수 없는 죄의 냄새가 그에게는 진동했습니다.  욕망과 의심과 열등감이 있엇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끓임없이 살인을 저지릅니다.

우리 몸에서는 똥 냄새와 같은 추악한 죄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죽은 짐승의 냄새가 나는 구역질 나는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세리와 같은 탐욕의 냄새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죄(Sin)로 인한 죄악(sins)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냄새를 주시려고 죄악의 냄새나는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악의 악취를 풍기는 우리를 찾아와서, 용서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죄의 냄새가 사라졌습니다.  그러기에 죄의 냄새를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이 성화입니다. 거룩하게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에서 예수님의 냄새가 나야 합니다.    

사순절에 나의 몸의 냄새를 맡으시기 바랍니다.  그 냄새를 미워하시기 전에 예수님이 그 냄새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을 믿으시는 아름다운 냄새의 절기가 되길 바랍니다. 

PS: 책 주인에게 책을 돌려 드리겠습니다.  얼마전에 찾았습니다.

마태 복음 8장 -빛

며칠전 수필가 이어령 교수가 어렸을 때에 천자문을 배우면서, 하늘을 검다고 하는 것에 (검을 현) 훈장 선생에게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어린 자신이 볼 때에는 하늘이 푸른데, 천자문은 검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늘은 검은가?  아니면 푸른가를 질문해봐야 합니다.  사실 답은 둘다 맞습니다.  하늘에 태양 빛이 찾아오면 하늘은 푸른 색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태양의 빛이 찾아오지 않는 밤에는 하늘의 색갈은 검습니다.

이어령 교수는 밤의 하늘을 생각하지 아니한 것이고, 천자문은 낮의 하늘을 생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태양이 비추어도 하늘 높이 우주선이 올라가면서 보여주는 하늘은 검정입니다.  저의 생각에는 천자문이 더 정확한 것 같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하나님을 빛으로 비유합니다.  요한 복음 1장에서 예수님을 빛으로 비유합니다.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합니다.

고대 신화에서 빛은 절대적 존재였습니다.  모든 신화에서 태양과 태양의 빛은 신적 존재와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 빛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로 사용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를 빛과 같은 존재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빛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빛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첫째는 전자파입니다.  전자파는 빛이지만, Energy을 갖고 있습니다.  전자파는  파장이 아주 짧기에 Micro파라고 합니다. 우리들이 집에서 사용하는 Micro Oven은 이러한 전자파를 이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주 멀리 보낼 수 있습니다.  Radar에 사용합니다.

두 번째는 적외선입니다.  전등에 손을 대면 따뜻함을 느끼는 것은 적외선 때문입니다.  적외선은 열선입니다.  공항에서 적외선 Camera을 사용해서 Flu 환자를 구별해냅니다.  체온이 높은 사람이 적외선 Camera을 지나가면 빨간색으로 나타냅니다.  적외선은 열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도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자외선이 있습니다.  자외선은 병균을 죽이는 살균효과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어렸을 때에 이불을 바깥에서 말립니다.  빛에 의한 살균소독입니다.  우리 몸에서 Vitamin D를 합성하는데도 자외선이 꼭 필요합니다.  현대인에게 암 발병률이 높은 이유의 하나는 자외선의 부족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우리들이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네 번째가 가시광선입니다. 우리들이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볼 수 있는 빛은 수만 개의 빛의 입자 중에 우리는 일곱 개의 색갈을 봅니다.  빨강 // 주황 // 노랑 // 초록 // 파랑 // 남색 // 보라의 일곱 색입니다.  수만 가지의 색에서 우리들이 보는 것은 일곱 개의 색에 불과합니다.  개는 색맹이기에 색을 구별 못합니다.

마지막은 X-Ray입니다.  빛이지만 인위적으로 높은 전압을 가하면 물체의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이 빛도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빛으로 비유합니다.  우리를 빛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빛을 받은 달과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전자파가 나타나야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 보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말에 힘이 있어야 합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적외선이 나타나야합니다.  너와 나의 오고 가는 말 한 마디가 따뜻해야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외선이 있어야합니다.  나의 죄악을 주님에게 고백하고 남의 약점에 인내해야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가시광선이 나타나야합니다.  우리의 삶에 아름다운 무지개와 같은 색갈이 있어야 합니다.  정숙하고,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색갈이 나타나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X-Ray가 나타나야합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나의 옆 사람은 아픔과 슬픔을 볼 줄 알아야합니다.  나의 입장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서야합니다.

이러한 빛으로 사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 7장- 커피와 계란의 진리

어제 신문에 Coffee 1-2잔이 골다공증에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연구 결과는 Coffee는 골다공증에 나쁘다고 했습니다.  지난 몇 십년 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논쟁의 하나는 계란 노른자가 Cholesterolㅇ에 나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연구 결과는 계란 노른자보다 달걀의 흰자가 더 몸에 나쁘다고 합니다.  노른자가 Cholesterol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나의 진실이 너에게는 진실이 아닙니다.   너의 진실이 나에는 진실이 아닙니다.  헤겔 (Hegel)은 이러한 반복으로 역사가 발전한다고 합니다.  갈등과 싸움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Hegel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칼 마르크스 (Karl Marcus)는 역사의 발전을 위해서는 인간과 인간의 계급투쟁은 지극히 당연하게 됩니다.  전쟁과 죽음은 역사발전의 원동력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자신의 진실을 자신이 절대화 할 때에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각자가 갖고 있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진실을 절대화하면 그것은 끝없는 싸움이고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됩니다.  이것이 소위 포스트 모던 (Post-modernism)입니다.

이 시대는 모든 것에 진실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과 분열을 회피하려면 상대방의 진실을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나의 진실이 인정을 받습니다.  이것을 관용 (Tolerance) 라고 합니다.  현대 사회의 중요한 정신입니다.  이러한 관용이 깊어지면 나의 진실은 상대적으로 매우 약해집니다.   동시에, 상대방의 물질적, 정신적인 것에 압도되면 나의 진리는 사라제게 됩니다.  절대적 진리에서 상대적 진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v.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현대사회에서 우리에게 매우 고민거리를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상대방을 수용하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는 내가 타인을 비판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나를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죄인으로 단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나를 죄인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면 하나님도 나를 용서 하십니다.

(v.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v.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예수님은 이 시대에 우리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말씀하십니다.  이 시대의 우리의 진리성을 절대화하는 것은 매우 졸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철저한 죄인에 근거한 진리성입니다.  이 시대의 교인들과 교회는 우리의 진리성은 절대화하지만, 우리 자신이 죄인 됨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복음을 진리화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합니다.  진리가 삶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말로만 나타납니다.

그 결과 봉은사에 가서 뺑뺑이를 돕니다.  단군상의 머리를 자릅니다.  지하철에서 마이크로 예수 믿으라고 합니다.  진리를 외치지만,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우리의 진리는 나의 눈의 들보를 보는데서 시작합니다.  나의 눈의 들보를 보고, 상대방의 진리를 철저하게 비난하고 공격하는 실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나의 눈의 들보가 보이지 아니하고 상대방의 들보를 보고 틀렸다고만 합니다.  이러한 행동을 진리수호로 생각하는 교회와 신자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믿음이 광란적입니다.   폭력적입니다.  자극적이고, 공격적입니다.  예수님의 행동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는 것이 아니라 헤겔 (Hegel)의 역사 투쟁을 따르는 자입니다.

Coffee 1-2잔이 골다공증에 좋은지 나쁜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계란 노른자가 Cholesterolㅇ에 나쁜지, 달걀의 흰자가 더 몸에 나쁜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들보를 봐야 합니다.  우리의 들보는 보고, 나의 진리를 주장해야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겸손과 자비와 인내입니다.  이것이 사순절의 묵상입니다.

마태복음 7장

최근 한국에서 언론의 초점이 되는 사람이 김종인 씨입니다.  그가 이런 말을 합니다.  불황은 윤리로 뚫어야 한다고 합니다.  경제를 경제로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는 불황기에는 모든 경기부양을 해봤자 소용없다고 합니다.  불황일 때에 모든 경제주체들은 경제적 윤리와 도덕성을 세우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합니다.

기업의 투명성을 높이고 정부는 불공정 규제를 제거하고 기업의 경쟁체질을 높이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기업 윤리는 후퇴하고 불황이 심화된다고 합니다.  경제가 불황의 해결은 돈이 아니라 경제 윤리입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불행과 행복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공과 실패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결과와 과정은 얼마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가에 달려 있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행복하고, 성공하려면,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윤리와 도덕성을 유지해야합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강조합니다.

 (마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준다는 것은 Hella로 Didomi입니다.  Didomi의 의미는 나의 것을 너에게 준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을 앵무새처럼 그대로 전달하는 것은 Didomi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복음은 전파하는 것이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전파는 Hella로 Keruso입니다.  전령입니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나의 것으로 만들어 표현하는 것입니다.  앵무새처럼 그대로 전달하지 않습니다.  내가 만난 예수를 나의 살아가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나타내는 것은 Keruso입니다.

김종인씨의 말처럼 나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의 윤리와 도덕성이 나타나야합니다.  예수님의 진선미가 나타나야 합니다.  성경적 표현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물론 Didomi처럼 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방법이 받아들여 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우리 주변에 왜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지를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윤리성과 도덕성이 부족한 자신감의 결여입니다.  우리에게 진선미가 있어야 합니다.  윤리성과 도덕성을 유지해야합니다.

우리에게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The truth 있어야 합니다.  수학적으로 맞는 것을 추구하듯이, 맞는 것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The good 선함이 있어야 합니다.  착함과 정직함과 사랑과 용서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합니다.  그리고 The beauty미가 있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을 해야하고, 슬픈 것을 보고 슬프다고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미는 마음의 성숙과 풍성함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The truth, The good, The beauty가 있습니다.

이러한 삶이 행복과 성공을 보장합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사순절 마태 5장-진정한 영성

마태 복음 5장은 산상수훈입니다.  산상수훈은 모든 사람이 좋아합니다.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구약의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신 말씀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가라 앉게하는 말씀입니다.

저는 산상수훈을 우리의 영성을 나타내는 말씀이라고 정의합니다.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영성을 말합니다.  그러나 많은 영적 훈련과 경험을 희망합니다.  우리는 영성을 영적 체험으로 이해합니다.

천국에서 베드로와 바울이 100불 내기 골프를 칩니다.  돈을 걸고 치기에 누구도 양보 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기도하면서 친 첫 타가 한 번에 Hole in one이 됩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바울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첫 타를 칩니다.  바울의 첫 번 타도 역시 Hole in one입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던 예수님이 베드로와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기적을 빼고 원래 실력대로 골프를 치라는 것입니다.  기적 없는 Golf가 두 사람의 진짜 실력입니다.  이것이 산상수훈입니다.  진정한 영성입니다.

기적은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우리만 기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타종교에도 있습니다.  기적을 강조하면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이 매우 흐려집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기적이 많이 일어난 부흥의 시대에는 반드시 이단이 나타나는 휴유증이 뒤따랐습니다.  미국의 부흥운동의 결과로 세계적 이단은 미국에서 나옵니다.  개인적 신앙의 체험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 체험이 말씀으로 신학화되지 아니하면 아주 위험해집니다.

(v.17-18)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v.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주님은 스스로 법을 폐하러 Destroy 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Fulfill 하러 오셨다고 합니다.  파괴와 채우는 것은 반대개념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이 세상의 끝이 날 때까지 율법은 예수님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진정한 영성은 이러한 법을 완전케 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따라사는 것입니다.

진정한 영성은 나의 살아가는 모습이 이 시대의 상황과 역사에서 성경적으로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신학적 평가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는 영성을 갖지 못하면 산상수훈은 우리와 멀리 있습니다.

 

마태 4장 사순절

Harvard 대학에서 행복을 75년 동안 연구한 결과가 발표됐습니다.   1938년에 724명의 사람들을 행복을 지금까지 조사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최장기 프로젝트의 하나입니다.

행복의 원인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인간관계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관계입니다.  결혼, 건강, 명예, 돈과 상관 없이 누군과 나와 함께 있어줄 때에 사람들은 행복을 얻었습니다.  나와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행복의 최적의 조건이였습니다.

4장에는 예수님의 시험이 나타납니다.  또한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시는 내용이 나타납니다.  성경을 깊이 생각해보면 참으로 신비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두 개의 사건은 아주 다른 것 같지만 동일한 사건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신적 관계와 인간관계가 형성이 됩니다.  예수님의 광야 시험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가 형성되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부르심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으로 사탄의 유혹을 받습니다.  시험과 유혹이 2개로 나타납니다.  유혹은 상대방을 미혹, 또는 현혹시켜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창세기에서 사단이 Eve을 유혹합니다.  유혹은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상대방을 잘못 된 길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시험은 다릅니다.  시험은 상대방의 의지와 실력을 알아보는 방법입니다.  학생은 시험을 통해서 자신의 실력을 검증합니다.  Test입니다.  시험은 고통스럽습지만, 나를 적정한 수준으로 이끌고 갑니다.

예수님은 광야의 시험에서 하나님과 관계가 형성되지만 사탄의 유혹으로 그 관계는 원수의 관계가 됩니다.

우리는 나의 현실에서, 유혹을 당하는지, 시험을 당하는지 구별을 해야합니다.  나를 시험하는 자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나를 미혹하는 자는 처음에는 달콤하지만, 나중에는 쓰디쓴 관계가 됩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예수님이 모든 제자를 찾아가서 부르시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제자들은 스승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스승이 제자를 찾아가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제자들이 주님이 쫓은 이유는 예수님을 통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제 해결입니다.  스승의 입장에서는 선택해서는 안 될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야망의 성취가 목적인 제자들을 찾아가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고난 당하실 때에 모두가 비겁하게 도망 갈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 할 자들입니다.  심지어는 자신을 은 삼십에 팔자를 찾아가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인간관계입니다.  자신이 선택하시고, 관계를 맺으려고 찾아가시는 관계입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 Harvard 대학의 발표를 보면서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행복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에 조금만 차지 않으면 관계를 파손합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기에 두번 다시 얼굴을 보지 않습니다.  가정을 버리고, 교회를 떠납니다.  불행의 시작입니다.

사순절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의 관계가 우리의 관계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3장 사순절 -천국가는 이유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옵니다.  그러나 요한은 주님에게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며 세례를 거부합니다.  요한이 세례를 거부하는 이유는 세례는 죄를 고백하고 물로서 씻어내는 의식입니다.  유대인의 정결의식의 하나가 물로 씻는 것입니다.

(v.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주님은 요한에게 내가 요구하는 대로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을 들은 세례 요한은 주님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이렇게 세레를 베푼 후에 예수님과 세례 요한에게 공통적 현상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의가 다음과 같이 나타납니다.

(마 3:1-2)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v.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처음 외치는 내용이 회개와 천국입니다.

그리고 주님도 (마 4: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처음 외치는 내용과 주님이 처음 외치는 내용이 같습니다.

같은 것 같지만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천국, 에수 그리스도가 오셨으니 회개 할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천국이 와 있으니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이 차이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차이입니다.

이러한 차이가 됩니다.  예를 들면 세례 요한에게 폭탄이 하나 있습니다.  마치 수류탄과 같습니다.  안전핀을 뽑고 4-5초 후에 던지면 폭발합니다.  그는 안전핀을 뽑은 상태입니다.  던지면 터집니다.  수류탄이 던져 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폭탄이 던져졌다는 것입니다.  내가 천국이라고 하십니다.  공중에 폭탄이 터지기 일보직전입니다.  이것을 종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의미는, 나로 세상의 끝이 왔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시간은 사람의 시간, Chronos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 Karios, 은혜의 시간입니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입니다.  공중에 폭탄이 던져진 상태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의롭게 여기십니다.  그 폭탄이 터질 때에 자신의 생명이 구원 받습니다.  하나님의 의입니다.

많운 분들이 우리는 천국 가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나를 의롭게 여기시는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천국에서 예수님, 하나님과 교제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입니다.  우리들이 천국가는 이유입니다.

 

마태 복음 2장 12-23절 사순절

우리는 꿈을 꿉니다.  우리들이 왜 꿈을 꾸는지 그 이유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Sigmund Freud와 Carl Gustav Jung은 꿈을 비현실적인 사건이 아닌 실질적으로 일어나는 삶의 일부분으로 봅니다.  그들에게 꿈은 하나의 현실입니다.   프로이드와 같은 학자는 꿈을 통해서 그 사람의 정신을 분석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예측합니다.  우리도 꿈을 꾸면 그 꿈으로 프로이드와 같은 동일한 방식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구약에서 꿈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의 전달 매개체입니다.  요셉의 꿈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구약은 꿈에 대해 부정적이기도 합니다.  거짓 선자자의 꿈과 복술자의 해몽을 믿지 말라고 합니다. (신 13:1-5) 꿈꾸는 자를 죽이라고 합니다. 사악한 꿈이 있음을 분명히 지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꿈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꿈은 반드시 예수님을 나타내기 위한 보조적 도구입니다. 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 드리면 우리가 꿈에 하나님을 보고, 예수님을 봤다고 할지라도 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꿈을 통해서 나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가 입니다.

(2장 :12) 헤롯은 동방박사들에게 아기 예수를 만나면 자신에게 알려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꿈에 헤롯의 부탁을 거절하고 다른 길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동방박사들이 꿈 때문에 다른 길을 갑니까?  아기 예수 때문에 다른 길로 갑니까?  어느 것 때문에 다른 길로 갑니까?  외형적으로 꿈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성경은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

(1:18-25)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v.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하여 (v.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요셉은 마리아의 임신을 알고 조용히 파혼을 계획합니다.  그러나 20절에서 23절을 읽으셔야 합니다.

(v.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요셉이 꿈을 꿉니다.(v.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v.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하니라 (v.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v.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 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v.24)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 (v.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꿈도 중요했지만, 꿈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요셉은 그 꿈대로 행동했습니다.

(v.24-25)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 (v.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그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 마리아를 아내로 데려옵니다. 그와 잠을 자지 아니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행동의 연속입니다.  성경은 꿈의 중요성이 아니라 꿈에 나타난 예수를 위한 계속되는 행동입니다.

(v.13)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다시 요셉이 꿈을 꿉니다.  헤롯은 두 살부터 그 아래의 아기를 다 죽이게 됩니다.  꿈에 애굽으로 피신을 가라고 합니다.

(v.13-b)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요셉은 그 꿈대로 행동을 했습니다.  계속 꿈의 행동이 반복됩니다.

(v.22-23)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v.23)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오늘 우리들이 무슨 꿈을 꾸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꿈에 보든지, 하늘의 영광에 참여했던 꿈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행동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꿈의 해석으로 사순절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마태 1장 18-25 사순절-3

오늘 본문은 성령의 잉태입니다.  참으로 이해 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에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의 육친의 어머니가 마리아입니다.  (v.20)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남자와 관계 없이 임신했습니다.  성령의 잉태는 성령의 임재로 하나님의 능력이 주도하심입니다.

예수님의 잉태에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와 간섭입니다.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시작은 절대적 은혜와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과 인도하심입니다.

성령의 잉태는 마리아의 공로와 의지가 철저하게 배제되어있습니다.  인간의 행위가 철저하게 배제되는 것이 성령의 잉태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잉태는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의심과 생각을 하게합니다.

초대교회의 교부들든 마리아는 Theotokos라고 합니다.  직역하면 하나님을 낳은 여인입니다. 정확한 번역은, One who gave birth to God입니다.  Latin로 // Dei-para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을 낳은 여인, Maria입니다.

오늘날 Roman Catholic에서는 Theotokos에서 한 단계 더 발전시킵니다. Latin로 Dei Genitrix입니다.  번역을 하면 Mother of God입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입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 예수님의 출생에서 마리아의 주도성과 의도성이 강조됩니다.  한국적 번역은 성모 마리아입니다.  성당에 가면 자주 볼 수 있는 글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적 해석은 오늘 본문과 비교하면 너무나 심하게 Maria을 강조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출생의 근원과 원인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Maria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출산했지만, 그 출산의 근원과 원인은  성령이 임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덮으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Theotokos도 인간의 공로가 강조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개신교는 이러한 입장을 거부합니다.  예수님의 출산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Theotokos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Theotokos가 부정되어야 할 결정적 근거가 있습니다.  마리아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눅 1:38)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마리아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하나의 도구입니다.  자신의 몸을 빌려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Maria의 고백대로 하나님이 사용하신, 여종, 비천한 계집종에 불과합니다.  비천한 계집종을 하나님을 낳은 여인 이것도 부족해서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입니다.

이러한 사순절에 성령의 잉태를 묵상하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추신: 날이 너무나 춥습니다.  주일 예배는 아래층 큰 방에서 드립니다.  춥지 않을 것입니다.  토요 새벽기도 많은 참석을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