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복음 10장 1-15 (학교 선생의 제자와 학원 강사, 선생의 제자)

한국의 가장 큰 사회적 문제는 공립교육의 불신입니다. 국민들은 국가에서 제공하는 공교육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학교의 선생님들을 믿지 못합니다. 학교 선생의 가르침으로 자녀들이 대학을 갈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학원입니다. 학원은 사교육입니다.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밤에는 학원을 갑니다. 공교육은 무료이지만 학원은 많은 돈을 지불해야합니다. 사교육이 가정 경제에 엄청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선생님은 대학 입시만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은그 학생에게 선생(先生)이기에 한문의 표현대로 인생을 앞서 살았기에 사람이 무엇이고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하고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인격의 선생입니다.

이러한 것을 가르쳐주지 않으면 선생에서 강사가 됩니다. 강사는 학생이 원하는 대학에만 보내주면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선생입니까?  학원 강사입니까?

최초의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학원 강사로 이해했습니다. 대부분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는 방법으로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주님은 학원 강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야망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제자들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대학입시가 목적이면 주님의 진정한 제자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진정한 제자는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학원 강사에서 선생이라는 것을 3년 동안 알려주십니다.

(v.2-4)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v.3)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v.4)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어떤 신학자들은 이러한 제자들의 이름이 두개로 짝 지어진 것을 보고 대부분 제자들이 열심당원 출신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열심당 (Zealot)은 극단적인 애국적 국수적인 단체로서 로마의 지배를 폭력으로 물리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용해서 이스라엘 회복을 열망합니다.  그러나 방법은 폭력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현실 구원입니다. 죄의 용서보다는 배가 불러야합니다. 사람의 병든 것을 보고 가슴 아파하는 것보다 로마부터 정치적 자유입니다. 그들은 칼로 모든 것을 해결 하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학원 강사라고 하면 우리 현실 문제의 해결입니다. 항상 하나님에게 불만과 원망입니다. 배가 불러야하고 명예가 있어야 하고 잘 살아야 합니다.

썩어질 삯군 목사들이 예수님을 학원 강사로 만들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이러한 예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현실에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선전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학원 강사가 아니라 선생입니다. 죽음에서 부활이고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우리의 인격이 성령 안에서 새롭게 변화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욕심을 버리고 어떠한 환경에서 든지 하나님에게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이것이 진정한 제자입니다.

이러한 제자로 하루 사시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9:35-38 (우리의 이중의 직책)

이 시대에 우리의 신앙이 오해 받는 것의 하나는 합리성입니다. 종교는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합리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합리성은 우리의 직장, 가정 , 일반적 모습에서 나타납니다.

(v.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예수님은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가르치셨다는 것은 Hella로 Didasko입니다. 이 단어는 가르치는 사람이 합리성과 증거로 가르쳤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Ho Didaskalos라고 합니다. 선생이라고 합니다. 이론적으로 설명했다는 의미입니다.

오빠가 동생에게 1+1=2 산수를 가르쳐주는데 그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자신의 머리털을 2개 뽑아서 가르쳐주는 것을 봤습니다. 1+1= 2이라는 것을 증명해야합니다.

진정한 선생은 학생에게 무조건 나의 말을 믿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선생은 학생이 왜 나의 말을 믿어야하는 지 증명을 합니다. 이것이 증명이 되면 학생은 선생의 말을 믿고 선생의 말대로 살아야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말씀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합리적으로 보여주신 많은 사건들입니다.  예수님의 기적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의사가 아니라 우리를 가르치시는 선생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의사로만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환자는 의사의 말대로 약을 먹고 건강을 유지해야합니다.  의사는 환자의 선생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우리에게 이중적 자세를 요구합니다.

(v.36-38)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v.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v.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우리들을 선생으로 부르십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선생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려면 합리적 신앙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대학교수가 학교에서 어려움을 무릅쓰고 학생들과 성경공부를 합니다. 전도도 잘하고 성경공부도 잘 인도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를 만나보고 싶어 하던 차에 그 대학교의 같은 과 교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에게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그 과에 ○○○ 교수님 계시죠?” 그러자 그 교수의 첫마디가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그 사람 때문에 골치가 아파요. 교수를 하든지 전도사를 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할 것이지, 전도한답시고 수업에 충실하지 않아서 큰일이에요.

우리의 복음은 합리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신앙과 삶이 일치해야 합니다. 나의 주어진 현실과 직업, 가정, 사업이 바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삶의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에게 영광이 됩니다.

이러한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미태복음 9:32-34 (우리는 사탄을 성령으로 성령을 사탄으로 볼 수도 있다.)

사람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똑같은 것을 보고도 100% 다르게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다윗의 자손, Messiah라고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으로 졸개 귀신을 쫓아냈다고 합니다.

사람에 따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자도 되지만 귀신의 왕 사탄도 됩니다.

본문의 벙어리는 말 못하는 벙어리이지만 귀머거리도 됩니다. 벙어리도 되지만 귀머거리입니다. 이러한 벙어리가 귀신 들렸다고 합니다. 귀신이 들렸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신앙은 이러한 극단적 성향을 내포합니다. 가장 신앙적인 것 같지만 가장 비신앙적입니다. 가장 비신앙적인 것 같지만 가장 신앙적입니다.

영성이라는 것은 이것을 구별하는 능력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을 이러한 차이를 구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날의 많은 교회와 신자들은 이러한 구별의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이러한 표현을 교만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가장 큰 죄는 성령 모독죄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사단의 사역이라고 하면 성령 모독입니다. 그러나 더 무서운 성령 모독은 사단의 사역을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사탄을 머리에는 두 개의 뿔이 있고 얼굴은 일그러져있고 이빨은 아래 위로 치솟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중세 시대의 미술가들이 사탄을 조롱하는 의미의 그림이고 Hollywood의 영화 창작품입니다.

성경의 사탄은 마귀는 우리들보다 훨씬 세련된 모습과 화술과 예의를 지킵니다. 계시록에는 우리를 속이려고 예수님처럼 백마를 타고 나타나기도 합니다. (고후 11:14)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합니다. 그는 우는 사자처럼 힘이 있는 모습입니다.

사탄의 졸개는 아주 큰 교회의 목사 일수도 있습니다. 설교도 아주 잘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회적 명예와 위치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가장 큰 증거는 건전한 양심과 이성 생각을 부정합니다. 교회의 교리 신앙고백과 신학을 사탄의 학문이라고 떠들어댑니다. 성경마저 조롱합니다. 성경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빼고 영적체험을 강조합니다.

이들은 가장 영적인 설교를 하는 것 같지만 거짓의 영으로 십자가의 복음에 자신들의 말을 더합니다. 성경은 참고서이고 자신들의 말이 교과서입니다.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과 말세의 공포분위기를 조성합니다. 지금을 공포와 불안과 저주의 날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자신을 이렇게 신격화시킵니다.  자신에게 도전하는 자는 하나님에게 도전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자신과 하나님을 동등화시킵니다.  전형적 사탄의 술수입니다.

또한 이들의 공통점은 물질의 축복을 강조합니다. 헌금과 축복을 연계시킵니다. 헌금으로 기적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외형적으로 교인의 숫자와 건물의 크기를 하나님의 축복과 직결시킵니다.

그 결과 교인들에게는 작고 힘없는 목사들은 하나님의 종도 아닙니다.  은혜와 성령의 역사도 없다는 인식을 줍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허무는 사탄의 수법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음란의 귀신들입니다. 100% 간음과 간통을 합니다. 100% 여성문제가 있습니다.  자신들의 타락한 귀신의 권세로 이성을 유혹합니다.  그것을 뒤 덮으려고 사람을 인신공격하고 돈으로 입을 막기도 합니다.

또한 돈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들은 교회의 돈을 자신의 사비로, 개인의 경비로 사용합니다. 몇 년 전에 미국의 6대 T.V. 부흥사들이 상원의 청문회에 출석해야합니다. 헌금으로 몇 천만 불짜리 자가용비행기타고 휴가를 가고 성형수술하고 공금을 남용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영적이라고 하는 자들이 가장 더럽게 살아갑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돈을 자신의 돈으로 사용합니다.

이러한 귀신의 개들이 외형적으로 돈을 끌어 모으는 방법의 하나가 선교입니다. 구제입니다. 고아들과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배를 채웁니다.

수많은 선교사들이 죽음과 고난과 배고픔을 이기며 사역을 합니다. 수많은 정직한 목사님들이 마음의 아픔을 갖고 육체적 질병과 가난에서도 목회를 합니다.

그러나 일부 악한 목사와 사악한 선교 사역자들이 교회와 신자를 속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깨끗한 양심과 정직함이 없으면 귀신에게 유혹을 당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훼방합니다.

우리들이 깨끗한 양심과 정직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성령의 열매로 사탄이 우리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합니다.

마태복음 9장 27-31 (나를 거부하시는 주님이 나를 보게 하는 방법)

내가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는데 그가 나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저 앞을 갑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그가 뒤를 돌아볼 수 있도록 그를 불러야 합니다.

본문은 주님이 두 소경의 간절한 믿음을 보시고 그들의 눈을 뜨게 해주시는 것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본문을 잘 보면 예수님은 그들의 소원을 거절하시고, 눈을 회복 시켜주지 아니하려고 합니다. 주님은 이들의 부탁을 거절하십니다.

우리들의 큰 착각은 무엇이든지 주님에게 요구하면 들어주신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예수님도 피하고 싶은 믿음이 있습니다. 거절하고 싶은 일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과 혈루병 걸린 여인에게 기적을 베푸시고 길을 떠나십니다.

(v.27)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두 사람의 맹인이 소리 지르면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두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치며 주님을 부릅니다. 그들은 주님을 쫓아오면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것입니다. 그들의 애절한 소리는 제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습니다.

(v.28-a)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주님은 그들을 무시하고 집으로 들어갑니다. 주님은 맹인들을 혈루병 걸린 여인과 회당장의 딸과 다르게 차별합니다. 구박합니다.

(v.28)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맹인들이 주님을 집안까지 따라 들어왔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눈을 고쳐 줍니다. 왜 주님은 그들을 바같에서 고쳐주지 아니하시고 집안에서 고쳐주십니까?

어떤 학자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믿음을 확인 해보려고 의도적으로 집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들이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고 주님을 따라 집안으로 따라 들어갔기에 주님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눈을 뜨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들의 열정을 보시고 병을 고치셨다고 합니다.

우리들도 이들처럼 끈질긴 열심 있는 기도와 믿음을 본 받아야한다고 합니다.

전형적인 열심주의에 빠진 해석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심각한 성경적 신학적 문제를 야기합니다. 우리의 간절한 믿음과 열정이 기도응답의 조건이 됩니다. 오늘은 이 부분을 다루지 않습니다.

(v.30-b-31)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v.31)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맹인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은 또 한 번 다윗 왕처럼 이스라엘의 영광과 부흥을 나타낼 자입니다. 다윗의 자손은 다윗의 혈통으로 다윗과 같은 왕으로 이 땅의 Messiah로 이해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이 세상의 경제적 정치적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다윗의 자손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마 22:41-46)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v.42) 너희는 //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v.43)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v.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v.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v.46)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예수님이 인간 예수로 다윗의 자손은 맞습니다. 마태복음의 족보의 시작에서 주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사람으로 다윗의 자손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 결과 죄를 용서하십니다. 죄는 하나님만이 // 용서하십니다.

소경이 눈을 떴다는 것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그들의 죄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용서 된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피하신 이유는 그들이 주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병을 고쳐주는 의사입니다.  마술사입니다.  문제의 해결자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으로 증명이 됩니다. 예수님은 인간 다윗의 자손,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이 땅의 메시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오해로 이들을 회피하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신다면 바울의 로마서의 고백처럼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나사렛 예수에서 우리의 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고백에서 우리의 문제의 해결은 시작됩니다.

마태 9장 18-26 (관계 없는 예수에서 관계 있는 예수로)

두 가지의 사건이 동시적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죽음입니다.  다른 하나는 혈루병 걸린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는 회당장 딸에게 찾아가시는 중입니다. 혈루병 걸린 여인은 찾아가지 않습니다.  반대로 혈루병 걸린 여인은 예수님을 찾아가고 야이로의 딸은 예수님이 찾아가고 있습니다.

이 둘 사이에서 가장 완벽한 관계는 예수님이 찾아가시는 야이로의 딸입니다. 목적이 있고, 방향이 있습니다.  혈루병 걸린 여인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목적과 방향 그리고 결과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과 가장 관계 없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디에 가까울까요?  우리의 현실에 방향과 목적을 정하고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현실은 옷 자락을 잡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가십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우리의 목적과 다른 것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다른 사람들에 떠밀려서 가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나와 무관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혈루병 걸린 여인과 같이 잡을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옷 자락입니다.  우리들이 유대인들이 지나 갈 때에 볼 수 있습니다.  하얀 색깔로 옷 밖으로 나와 있는 끈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탈릿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항상 착용한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이 쓰던 탈릿을 잘라냅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얼굴과 몸을 싸매어 줍니다.  탈릿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방향과 목적이 다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의 하나로 예수님과 관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단 하나 만질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입니다.

하루에 한 번 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시면 우리와 가장 관계 없는 예수님이 우리와 가장 관계 있게 됩니다.  저에게는 오늘도 시편의 말씀이 참으로 큰 위로가 됩니다.

 

마태 9장 14-17 (종교와 신앙)

종요와 신앙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어떤 분들은 종교적인 것으로 신앙으로 착각합니다.  종교와 신앙은 분명한 경계선이 있습니다.  종교와 신앙을 연결시켜주는 것은 믿음입니다.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것을 불평합니다.  금식은 유대인들의 신앙을 증명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금식은 구제, 기도, 성전의 예배와 같이 유대인들의 중요한 종교적 행위입니다.   마치 우리에게 기도와 예배와 금식과 전도와 선교가 중요한 것 과 같습니다.  종교적 행위는 우리의 신앙을 고양시키고, 하나님과의 접촉점을 만들어줍니다.  매우 중요한 행위입니다.

종교적 행위가 없이 신앙은 없습니다.  종교적 행위는 우리의 신앙의 형태를 세워줍니다.   본문에서 예수님도 금식자체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복되는 종교적 행위는 그 행위에 따른 자신을 의롭게 평가 합니다.  또는 타인의 종교적 행위에 대한 평가를 하게 됩니다.  율법적 태도를 갖게 됩니다.  그럼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일 성수 잘하면 신앙이 좋은 사람이 됩니다.  맞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의 잣대는 행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가 됩니다.  주일 성수로 우리의 믿음과 구원이 결정되지 않습니다.  주일성수가 우리의 믿음과 구원에 절대적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자는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립니다.

그럼으로 예수님은 생베의 예와 포도주의 예를 드십니다.  생베와 낡은 옷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낡은 가죽 부태와 새 가죽 부대는 다릅니다.

새로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입니다.  종교 행위가 우리에게 신앙을 고양시키고, 접촉점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행위이지만 믿음과 구원은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우리의 구원과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집니다.  성경은 이러한 믿음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우리의 의로움은 우리의 행위와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자격과 조건을 보지 아니하사고 하나님이 믿음과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그럼으로 종교와 신앙은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신앙이 우선합니다.  그러나 종교적 행위가 중요함을 인식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9장 9-13 (불안한 자리에서 편안한 자리로)

예수님이 지나가시다가 세리로 앉아있는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당시의 세리는 로마 정부의 청부업으로 로마가 정한 금액을 징수하고 나머지는 착복을 했습니다. 세리는 유대인의 입장에서 로마에 빌붙어 먹고사는 매국노며 사기꾼이며 약자를 괴롭히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마태가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부르셨습니다.  마태는 세관의 자리에 앉고 싶어서 앉은 자리가 아니라 돈과 힘이 있기에 그 자리를 앉아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치욕과 멸시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나면 당장 먹고 사는 길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다시 주저앉아 자리를 지킵니다.

우리들이 앉아있는 자리들은 다 똑같습니다. 우리는 현재의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만 일어나지 못합니다. 우리의 각박한 현실이 오늘의 자리를 지키게 합니다.

(v.9-c)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님은 그 자리를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죄의 자리입니다.  돈의 힘이 눌려 있는 자리입니다.  인간의 자유와 희망을 빼앗아가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인격과 인격이 만나지 못하는 자리입니다.  돈이 중요하지만 돈이 우리 자신을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돈의 노예가 죄입니다.  돈의 사슬을 벗어나는 것이 사람입니다,

마태가 이렇게 돈의 지배를 벗어나자 예수님은 세리 마태의 친구가 됩니다.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십니다. 예수님 그 누구도 함께 하지 않는 세리와 함께 하십니다.

돈의 지배를 벗어나면 수용 능력이 생깁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받아들입니다.

우리들에게 이러한 수용능력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타인에 대한 수용능력을 가진 자들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이 시대의 세리를 수용하지 못하면 우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마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우리들이 이슬람을 얼마나 수용 할 수 있습니까? 촛불과 태극기를 얼마나 수용 할 수 있습니까? 일본 사람을 얼마나 수용 할 수 있습니까? 나와 다른 인종을 얼마나 수용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일치와 사랑과 희생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있는 곳에는 분열과 미움과 착취입니다.

미국은 우리만 잘 살아보겠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서 이러한 수용 능력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은 촛불과 태극기가 사로의 수용 능력이 없기에 분열과 갈등이 생깁니다.  이렇게 수용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세리를 미워하는 유대인들과 같습니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하늘나라가 없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불편한 자리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수용 능력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창기의 친구가 되십니다.  나와 다른 것을 포용하십니다.  이것이 천국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마태복음 9:1-8 (무거운 돌을 들고 가는 어려운 신앙생활)

전설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높은 산을 올라가자고 하시면서 돌을 하나씩 갖고 올라가자고 합니다. 가급적이면 큰 돌을 갖고 올라가자고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대로 무거운 돌을 낑낑대며 갖고 올라갑니다. 의심 많은 도마는 자갈 하나를 갖고 올라갑니다. 요한은 투덜대며 적당한 것을 골라갖고 갑니다. 머리가 좋은 가롯 유다는 저 산위에 가도 돌 천지인데 빈손으로 올라갑니다.

모두 산위에 올라갔습니다. 모두가 허기가 집니다. 주님이 각자의 돌들을 앞에 두고 기도하십니다. 기도가 끝이 나니 돌들이 변하여 떡으로 변해있습니다. 갖고 올라온 돌의 크기와 수고한 대로 떡을 먹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어려움을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중풍병자의 치유입니다. 친구들이 환자를 메고 왔고 그 환자를 고치는 과정에서 서기관들과의 충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중풍병자를 작은 자라고 하십니다. 그에게 안심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예수님 당시에 질병에 걸리는 것은 죄의 결과로 보았습니다.

(v.2) 죄라는 단어는 Hamaltia입니다. 이 단어는 Hebrew의 Hata와 연관성을 갖는데 물매 돌을 던져 표적을 못 맞힐 때에 // Hata 쓰입니다.

다윗이 물매 돌을 던져 골리앗을 죽이지 못하면 다윗이 죽습니다. 이것이 Hebrew의 Hata입니다. 잘못 던지면 다윗이 죽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골리앗을 맞히면 다윗은 살게 됩니다. 신약에서 Hamaltia로 발전됩니다.

우리에게 오늘도 수많은 표적이 있습니다. 그 표적을 맞추면 나는 살고 맞추지 못하면 나는 죽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죽습니다. 우리들이 생로병사, 태어나서 늙어서 병들어 죽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생리적 표현입니다.

우리들의 심리적 정신적 세계는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오는 수많은 표적들, 이 시대의 골리앗에게 정확한 타격을 가해야하지만 맞추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죽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죄로 인하여 죽습니다. 이것이 죄의 값입니다. 우리는 죄로 죽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러한 싸움이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산위에 올라가는 베드로와 같이 우리의 신앙생활은 끝이 없는 시련과 고난입니다.

가룻 유다와 같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현실은 평안과 기쁨과 위로만이 있지 않습니다. 오늘 날 많은 신자들은 이러한 신앙을 갈구합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것에 서기관들이 반발합니다.

(v.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서기관들에게는 둘 중의 그 어느 것도 쉬운 것이 없습니다. 둘 다 할 수도 없습니다. 자신들의 입으로 죄를 사한다고 하면 자신들이 하나님을 모독합니다. 중풍병자를 일어나서 걸어가라고 할 기적의 능력도 없습니다.

(v.6-7)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v.7)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예수님 만 죄를 용서하시고 기적을 만들어 내십니다.

우리는 오늘도 골리앗에게 물매를 던지지만 맞추지 못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매우 피곤합니다. 고단합니다. 믿음을 갖지만 증거가 없습니다. 오늘도 골리앗에게 죽음을 당하는 현실인 것 같지만, 우리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질 미래의 영광은 죄의 용서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기에 죽음에서 부활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렵습니다. 우리의 결과는 죽음 이후에 주어집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무거운 돌을 갖고 힘들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어질 미래의 영광을 바라봐야 합니다.

세상은 이것을 종교적 사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믿음입니다. 세상은 이러한 이야기는 현실을 왜곡시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주어진 현실입니다.

쉬운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어려운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어려운 것을 선택하고 믿음의 힘으로 오늘도 힘을 내며 사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 8:29-34 (어디에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는 살고 있는 집이 있습니다. 그 집은 행복의 근원입니다. 일하는 보람과 살아가는 기쁨을 갖고 희망을 생산하는 곳입니다. 사는 집이 천국과 같습니다. 그러나 나의 사는 집이 집이 무덤과 같은 죽음의 장소도 될 수 있습니다. 갈등과 분열입니다. 집이 천국이 아니라 지옥입니다.

본문은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예수를 만났다고 합니다. 죽은 자에게는 무덤이라는 안식처가 있습니다. 그들은 숨을 쉬고 살아있지만 죽은 자의 안식처에서 살고 있습니다. 살아 있지만 죽은 자들입니다. 살사는 것이 죽은 자와 같으면 지옥입니다. 사는 곳이 지옥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은 무덤 사이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힘으로 자신을 이해고 그 힘을 남용하면 무덤에 살고 있습니다. 지식의 힘, 돈의 힘, 건강희 힘, 사회적 위치의 힘, 권력의 힘을 남용하면 지옥에 살고 있습니다.

(v.28-b)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이들에게는 엄청난 힘이 있지만 // 사랑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힘이 있어야합니다. 각종 힘이 있어야 합니다. 돈의 힘, 건강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힘만 추구하면 우리는 무덤에 살게 됩니다. 지옥에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 힘과 동시에 사랑을 추구하면 우리의 사는 곳은 천국이 됩니다. 우리의 힘을 사랑이 천국과 지옥으로 결정합니다.

우리에게 힘도 필요하지만 더 필요 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고 힘만 갖고 있으면 그는 귀신들린 자가 됩니다. 돈에 귀신 들린 자, 권력에 귀신들린 자, 건강에 귀신 들린 자들이 우리 주변에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매일 언론을 통해서 보고 있습니다.

귀신을 특별한 존재나 특별한 사람들에게 나타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귀신에 들린 자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사랑으로 살아간다면 우리의 사는 곳은 천국입니다. 우리에게 각종 세상을 살아가는 힘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함께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남편을 향해서 웃어주고, 나의 아내를 이해하고, 나의 자식의 아픔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의 이웃과 함께 발을 맞추어 가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힘은 정말로 아름다운 힘이 됩니다. 나를 살립니다.  귀신의 힘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가족을 살리고, 이웃의 기쁨이 되고 이 시대에 희망을 줍니다.

마태 8장 23-27 (기도하면서 책망을 듣는 경우)

한국 교회에서 기도는 모든 문제의 해결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도 예수님에게 책망을 듣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라고 책망을 듣습니다.

본문은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시고 호수를 건너다가 풍랑을 잠잠하게 하신 말씀입니다.  갈릴리 호수 이편에서 저편으로 배로 건너갑니다.  당시의 배로 호수를 건너려면 오랜 시간이 사용될 것입니다.  건너는 중에 주님은 잠이 드셨고 제자들은 풍랑을 만납니다.

갈릴리 호수에 서보면 제법 파도가 높을 때가 있습니다.  지형적으로도 아주 낮은 위치에 있기에 풍랑이 자주 일어 난다고 합니다.  또한 유대인들에게 물은 매우 익숙하지 않은 장소입니다.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고 부릅니다.  우리들은 호수를 바다라고 부르는 유대인들에게 과장이 심하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바다는 물이 모인 장소이고 죽음의 장소입니다.  계시록에서도 바다에는 음녀가 있습니다.  바다는 두려움과 죽음의 장소입니다.  바다는 이 세상을 의미합니다.  (계 21)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에서 내려 올 때에 바다가는 있지 않습니다.  바다는 죽음의 세상을 의미합니다.

제자들과 주님이 바다를 건너는 데 풍랑을 만납니다.

(v.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예수님은 배에서 주무십니다.  성경에서 잔다는 것은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탄 배에 물이 덮이고 죽겠다고 아우성이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죽은 시체와 같습니다. 제자들의 고난에서 주님은 주무십니다.

같은 배에 탔다는 말이 있습니다.  똑 같은 운명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과 같은 배를 타고 있습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때에 주님에게 기도합니다.  우리들이 죽게 되었으니 살려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에게 죽은 사람과 같습니다.  주님의 도움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위기가 있습니다.  그 위기에서 주님이 도와 주셔야 합니다.

(v.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제자들이 주님을 // 흔들어 깨웠습니다.  제자들은 풍랑을 보고 주님을 깨웠습니다.

제가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 배가 강풍에 뒤집힐까요? 아니 뒤집힐까요?  설령 배가 물에 뒤집어진다고 해도 제자들이 죽을까요? 살까요?

우리는 기도하기 전에 이런 생각을 해야합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 함께 하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바다의 풍랑만을 바라봅니다.  세상의 시련과 고난을 보고 주님을 깨웁니다. 신앙이 초보적 수준입니다.

오늘 날의 우리들은 무슨 문제만 생기면 기도 한다고 합니다.  문제를 보고 기도는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신앙에 생각이 없고, 염치도 없고 양심도 없습니다.  그 결과 신앙에 대한 판단도 없고 자생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모든 것을 기도로 해결하겠다고 합니다.

저는 아침마다 시편을 읽습니다.  잃을 때마다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이기적인를 생각하며 회개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고자질입니다.  나의 잘못과 책임의식은 전혀 없습니다.  매우 비인격적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선장이고, 우리들이 주님과 한 배에 탔다면 우리가 풍랑으로 죽고 망 할까요?

기도하고 매어 달리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진정한 신앙은 주무시는 주님을 보면서 나도 잠을 잘 줄 알아야합니다.  주님에게 맡기시고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담대하고 당당해야합니다.

그래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당황하면 문제가 해결 안 됩니다.  우리는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v.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주님을 깨웠더니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큰 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아무리 큰 풍랑이 일어도 예수님이 우리의 배에 함께 하십니다.

시편 6편을 보시고 기도하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