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1장 7-25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적보다 좋은 것으로 나타나신다)

지난 한 달 동안 서울 방문으로 글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어린 아이들을 가급적이면 다른 집에 데려가지 않습니다.  다른 집에 가면 아이들이 그 집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다른 영향은 아이들을 키우는데 해로울 수 있습니다.  어른들도 자신이 방문하는 집에 어린 아이들이 있다면 방문을 자제합니다.

유대인들은 가급적이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밤에 외출하지 않습니다.  밤은 잠을 자는 시간이지, 활동하는 시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낮 시간은 활동이고, 밤은 휴식이라는 것을 구분해서 알려주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배려하는 어른들의 행동이 나타납니다.  어른 중심이 아니라 아이들 중심입니다.   부모 행동의 목적이 어른이 아니라, 아이들이 됩니다.

우리 신앙의 주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을 배려하십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모든 종교에는 그 종교의 주체, 신을 믿게 하는 기적의 사건들이 있습니다.  신의 기적적 행동은 신자들의 믿음과 종교적 행동을 유발시킵니다.  신의 행동이 우리와 같다면 우리는 신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신들에게는 신통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도 신통력이 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홍해 바다를 반으로 가르게 하신 신통력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적들을 괴멸시키는 신통력이 있습니다.  그럼으로 유대인들은 이러한 신통력을 나타내는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합니다.  엘리야, 엘리사와 같은 경우입니다.  예수님도 죽은 자가 살리시고, 물위를 걷는 신통력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선지자와 예언자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기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 되심을 계시하는 방법으로 사용하지만 이러한 기적으로 예수님 자신을 이해하거나 믿게하는 방법으로는 절대적 거부를 하십니다.

신약성경의 공통점은 후반으로 갈 수록 기적이 사라집니다.  사도행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고, 나병을 고치신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 되심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믿고 기대하는 세례 요한은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입니다.  이러한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아니하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기적은 초인적입니다.  비인격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십자가에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기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하늘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기적을 있지만 스스로 거부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십자가의 강도와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요구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기적을 거부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기적을 요구하는 세례 요한과 기적을 요구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경고가 무섭게 나타납니다.  그 내용이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하신 벳세다, 고라신 가버나움에 대한 예수님의 진노와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기에 오늘도 기적을 나타내십니다.  우리들이 기적이 없다고 하거나 기적을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기적은 우리들의 요구에 의하여 발생하거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적으로 하나님을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부모들이 자신의 자녀를 보호하는 방법을 참고하신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하나님 예수님은 인격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의 인격은 기적을 능가하십니다.  인격은 깊은 교제를 갖게 합니다.  오늘도 나의 삶의 현장에서, 기적보다, 나의 언어와 행동으로 하나님과 교제하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11장 1-6 (예수에 대한 실망-2 손등과 손 바닥의 하나님)

어느 신학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손에는 손바닥과 손등이 있습니다. 손바닥은 부드럽습니다. 무엇인가를 잡을 수 있습니다. 손바닥은 포용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손등은 딱딱합니다. 무엇인가 잡지 못합니다. 손등은 포용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손등이 없는 손이 없고 손바닥이 없는 손이 없습니다. 손은 손등과 손바닥으로 구성되어 집니다.

세례 요한은 주님에게 우리들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합니까? 세려 요한은 예수님이 자신이 기대하는 Messiah와 다르기에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현실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메시아는 자신과 민족의 미래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의심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의심하는 요한에게 이렇게 알려주라고 하십니다.

(v.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왜 예수님은 이러한 기적의 사건을 말씀하십니까? 기적은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는 표적입니다. 기적은 세상의 일반적 법칙을 파괴합니다. 나병환자가 깨끗해집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납니다.  기적은 일반적 법칙이 파괴되고 하나님의 법칙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기적을 기다립니다. 예수님이 정치적으로 로마를 멸망시키고, 경제적으로 모든 백성들에게 풍족함을 선물하고 종교적으로 예루살렘의 제사장들과 종교인들이 새롭게 회개하고 변화해야합니다. 세례 요한은 이러한 기적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맹인이 눈을 뜨는 것은 맹인에게 기적이지만 우리에게는 기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맹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면 죽은 자에게 기적이지만 우리에게 기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세례 요한에게 5절의 기적은 기적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의 기적과 예수님이 보여주는 기적이 자릅니다.  이러한 차이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의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바닥을 보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내가 경험한 손등의 하나님을 보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세례 요한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손등의 하나님이라면 그는 손바닥의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기적이 있습니다. 신비가 있습니다. 그러나 손등이나 손바닥의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손등과 손바닥을 동시적으로 경험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교리적으로 믿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신학적으로 해석하지 말라고 합니다. 저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의도는 이해합니다. 그러나 아주 무지하고 사악한 소리입니다.

우리의 경험과 체험으로 하나님을 설명하면, 하나님을 손등이나, 손바닥으로 이해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설교의 가장 무서운 독성은 우리의 죄를 우리들이 이겨 낼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체험하면 모든 것을 이겨 낸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성을 부정합니다.  설교하는 자도 이러한 독성을 모를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에 대한 교회의 신앙고백과 교리와 신학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손바닥과 손등을 알려줍니다.  신학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손의 구조를 설명합니다.  교리는 손등이나 손바닥으로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일 계속합니다. 좋은 하루를 만들어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11장 1-6 (예수님에 대한 실망-1)

우리는 기대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기대합니다. 조국에 훌륭한 지도자가 나올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그 일이 좋은 일리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의 희망을 저버리지 아니 할 것을 기대합니다.

이렇게 기대하는 것이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요? 희망이 절망이 되고 배신감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 배신감은 분노로 나타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마 3:11-12)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주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며 자신은 주님의 신발도 들 수 없다고 합니다. 주님이 손에 키를 들고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신다고 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한 엄청난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늘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킬 메시아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하신 일을 듣고 그는 절망합니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소식을 듣습니다.

제가 목회자로 고급 식당을 전전하고 비싼 요리에 술에 취하고, 제가 만나는 사람들이 창녀 도둑 전과자 이완용 같은 매국노와 술 마시며 어울린다면 저는 여러분의 기대에 못 미칩니다. 제가 목회자답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의 목회적 자질과 자격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제가 성경을 배경적으로 해석을 하면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배신했습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제자들을 공유했습니다. 오늘 날의 표현으로 공동으로 사역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체포되자 예루살렘에서 도망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배신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과 같이 부정한 죄악을 고발하지도 아니했고 갈릴리로 탈출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모든 행동이 매우 실망스러울 뿐입니다.

그러기에 세례 요한은 주님에게 우리들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합니까?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Messiah 이냐고 질문합니다.  당신은 내가 기다리는 메시아가 아닌 것 같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며 기대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기대치를 충족시키는 것을 믿음이라고도 합니다. 더 쉽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대대로 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기대하는 예수님은 우리의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고 두 번 다시 그러한 어려움을 당하지 않게 해야합니다. 우리에게 사회적 신분적 경제적 자유를 허락해야합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까? 이렇게 나의 기대를 채우지 못한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나, 부처를 믿는 것이나, 다른 종교의 신을 믿는 것과의 차이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종교들은 믿는 자들의 기대치를 채워주는 현상이 있습니다. 이것을 現世球福 (현세구복)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기대치가 충족되면 자신의 종교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나의 현실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신이 나의 미래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현실을 해결하면 우리의 미래를 해결 할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에 대한 의심을 갖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우리의 기대에 응답하십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까?  우리에게는 많은 실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망이 2 천 년 전의 세례요한의 질문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에 대한 실망을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내일 계속합니다.

마태복음 10:40-42 (우리의 신분)

우리는 우리의 신분을 우리의 직업이나, 민족이나, 국가로 이해합니다.  저의 경우는 저를 목회자로, Korean-American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신분을 부여합니다.

(v.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누군가 예수님의 제자를 영접하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그 사람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신분을 각성시키는 이유는 11장부터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는 길로 가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을 대신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무지한 갈릴리의 어부들입니다.

제자들을 전통적 유대의 랍비와 비교해보면 제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랍비로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유대의 랍비처럼 복음을 전하려면 너희 자신을 보지 말고 내가 너희와 함께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도 세상의 가치와 자격과 조건에 비교해보면 우리는 부끄러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성령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제가 이미 마태복음 10장을 설명 드린 대로 오늘 본문을 연결 해석하면 세상은 결코 우리를 결코 영접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리 가운데 가는 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제자들에게는 성령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의 입술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 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입술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또한 우리들이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갑니다. 성령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와 사신과 향기가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분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신분이 있습니다.  사람은 신분에 따라 행동하고 변화해야합니다.  그래야 신분이 유지됩니다.  저의 세상의 신분에 맞게 제가 행동하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주신 신분에 따라 행동하며 살아야 합니다.

(v.41-42)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v.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우리들이 우리의 신분에 따르는 행동을 하면 우리를 영접하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그들에게 구원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상을 주십니다.

오늘 날의 우리는 신분으로 영접을 받으려고 합니다.  목사의 착각은 목사의 신분으로 영접을 받으려고 합니다.  신자들의 오해는 교인이기에 세상에서 영접을 받으려고 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신분으로 절대로 영접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예수님의 신분대로 살아야 영접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와 편지와 사신으로 이 세상에서 영접 받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10:34-39 (나의 십자가는 죽는 것인가? 사는 것인가?)

오늘 본문은 매우 당황스럽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하십니다. 검은 불화, 분쟁,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스스로 우리들이 기대하는 모습과 반대입니다.

(v.35-37)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v.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v.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이 말씀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들이 예수를 믿기에 나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 나의 인간관계가 파괴되어도 괜찮다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가족과 사업을 버리는 것이 용납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왜 이러한 관계를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오늘 날의 기독교는 세상의 다른 종교와 차이 없이 변질됐습니다. Degraded 되었습니다. 불교 신자나 기독교 신자나 차이가 없습니다. 종교에서 변질, 타락이 일어나면 자신들의 추악함과 죄악을 감추려고 자신들의 종교성을 강조합니다. 종교적 행위로 자신들의 타락과 진리의 왜곡을 감추게 됩니다.

진리를 상실하면 진리가 없기에 종교적 행위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위선과 외식을 질타하신 것도 이러한 이유입니다.

오늘 날 교회에서 이러한 현상으로 동원되는 것이 선교, 구제, 교회적 성장입니다.  또한 교인들에게는 종교적 열심의 행위가 하나님의 축복과 직결되어 있다고 속입니다.  열심을 갖지 못하면 죄책감을 갖게  합니다.  이것은 종교적 사기 행위입니다.

물론 기독교는 이 사회에서 사회의 정의를 감당해야할 부분이 있고, 불신자에게 대한 선교와 사회의 약자에 대한 구제적 의무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는 물질적으로 축복해주시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교, 구제, 사회정의는 우리들이 해야 할 사명과 책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명과 책임으로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비본질입니다.  우리의 사명과 책임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역자들과 달란트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성경을 신학적 해석에 근거하면 본질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인간의 죄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과 천국에 대한 소망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창조와 우리를 사랑하심입니다. 성자 하니님의 십자가의 구원과 부활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죽음에서 승리하하게 하십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러한 신앙 고백으로 목숨을 버렸습니다.

오늘 날의 교회는 비본질을 주장하고 교인들의 비본질을 잘 수행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강조하시는 내용은 유대교가 하나님의 본질을 왜곡해서 비본질을 강조하는 것에 대한 분노입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예수님의 분노를 이해해야합니다.

(v.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복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을 믿기에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에 있습니다. 오늘 날의 거짓 복음은 십자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와 사명을 감당하면 하나님이 축복하신다고 할 뿐입니다.  불교에서 부처에게 공덕을 쌓는 것으로 변질시킵니다.

(v.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제부터 목에다 십자가 걸고, 차에다 십자가 달고, 집에다 십자가를 걸어 놓았다면 십자가가의 법칙대로 나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죽고 나의 이웃 앞에서 죽어야 우리에게 부활의 길이 열립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살지는 못하겠지만 이렇게라도 생각하고 흉내라도 내는 사순절이 되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10:24-33 (믿음의 정의)

우리들이 믿음으로 사는 것을 만사형통으로 해석합니다. 잘못된 믿음입니다. 실제로 믿음으로 살아보면 매우 두렵습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믿음으로 살았지만 현실의 어려움으로 때로는 믿음을 버리고 낙심하며 살았습니다. 믿음으로 살아보면 이 세상에는 우리의 믿음과 반대 현상들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무시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v.26)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세상은 우리의 육체와 정신적 고통을 줄 뿐입니다. 우리들이 당하는 현실의 고통은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고, 때로는 버리기도 합니다.

(v.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우리들이 두려워 할 것은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몸과 영혼을 죽이시고 살리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살아있지만 반드시 죽습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은 현실이고 죽음은 비현실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실체적입니다. 사실적입니다. 누구도 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몸의 죽음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영혼의 죽음이 더 무서운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영혼의 죽음을 절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지옥과 천당을 믿지 않습니다.

지옥과 천당이 없을까요? 있습니다. 그럼으로 예수님은 이러한 무서움에서 우리를 구하시려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v.29-31)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v.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v.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참새보다 더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보다 우리 사정을 더 잘 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어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날의 잘못된 믿음은 우리의 문제 해결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모독하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생명과 진리임을 다시 확인하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마태 10장 16-23 (양을 이리 가운데- 순결하라)

예수님은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면서 비둘기 같이 순결 하라고 하십니다. 순결은 다른 것과 섞이지 않는 것입니다.

순결은 구별입니다. 구별은 거룩입니다. 본문의 순결은 Hella로 Ake-rai-os입니다. 불순물이 전혀 석이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성전의 성소에서 불을 밝히는 등대의 기름입니다. 감람나무의 열매의 기름으로 전혀 불순물이 섞이지 않는 기름입니다. 이것을 금 기름이라고 합니다.

금 기름을 태우면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감람열매의 조각이 섞여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순물이 섞여 있으면 그을림이 생기고 탈 때에 소리가 납니다.

이번 이스라엘 여행에서 이미 경험을 했지만 유대인들은 유제품과 고기는 절대로 함께 먹지 않습니다. 저녁 식사 때에 식당에서 커피를 달라고 하지만 주지 않습니다. 커피에는 우유와 같은 유제품을 넣습니다. 유대인들은 저녁에 고기를 먹기에 아예 커피를 주지 않습니다. 커피는 고기를 먹지 않는 아침에만 먹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리 가운데서 살아남은 방법은 순결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음성을 동시적으로 듣습니다. 순결 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세상의 음성과 함께 사용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정당화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행동을 정당화 시키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나의 마음대로 하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저녁에 우유를 마시고 고기를 먹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책임져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의 경제 활동, 인간관계, 타인과의 약속, 정직, 신뢰는 우리들이 책임져야 할 부분입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부분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우리의 책임을 회피할 때가 있습니다.

순결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면 우리는 합리성과 근거성을 지켜야합니다. 세상의 책임과 의무를 수행해야합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종교성을 유지하는 것을 신앙으로 착각합니다. 이것은 이중성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순결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에게 거룩이 나타납니다. 성전의 금 기름과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순결성을 지킵니다. 이 세상의 이리들이 우리를 두려워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힘과 영광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세상에서 순결하게 사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 10:16-23 (양이 이리 가운데 -2)

오늘은 지혜만을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리 가운데 보내시면서 우리들이 뱀 같이 지혜롭게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뱀 같이 지혜로우라고 합니다. Hella로 Pr–ni-mous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는 긍정적 의미와 부정적의미가 있습니다. 영어 번역 중에 긍정적으로 Wise, 지혜로 번역하지만 NIV나 NASB는 Shrewd로 번역했습니다. 상대방보다 빈틈없이 재빠르게 대응하는 순발력과 재치를 의미합니다.

양이 이리보다 뛰어나려면 뱀 같이 지혜로워야 합니다. 그러나 양은 이리보다 뛰어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힘도, 머리도, 행동도 다 열등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모든 면에서 열등합니다. 그러나 단 하나 열등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세상의 거짓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거짓을 거절하는 것이 지혜 중의 지혜입니다.  이리는 거짓으로 살아갑니다.  위선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거짓과 위선을 거절하면 이리를 이기는 지혜를 얻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진실하게 살려고 하지만 우리의 살아가는 삶의 구조가 진실로만 살 수 없습니다.  거짓의 유혹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무엇이 나쁘고 무엇이 좋은 줄 알지만 우리는 좋은 것만 선택해서 살 수 없습니다.  거짓의 유혹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선택의 권리가 있습니다.  이러한 순간에 거짓은 중단하거나 거부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좋은 것, 진실한 것 만을 선택 할 수 없지만 거짓은 거부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경계선은 거짓입니다.  우리들이 진실 할 수 없디만 좋은 것을 선택 할 수 없지만 우리는 거짓의 경계를 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한 번 거짓을 사용하면 더 큰 거짓을 사용해야합니다.  이것이 거짓의 힘입니다.  그 결과 거짓은 우리를 망하게 합니다.

이러한 거짓을 거부하는 유일한 방법은 진실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실, 진리가 주어지면 거짓을 사라지게 합니다. 진실은 거짓을 부끄럽게 합니다.

우리의 진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이 지금의 거짓에서 멈추려면 예수님에게 돌아가면 됩니다.  우리에게 완벽한 정직과 선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거짓을 멈추면 우리는 이리보다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 이리는 거짓에서 거짓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을 기억하고 거짓을 거부하면 우리는 뱀과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  Wise 합니다.  Shrewd 합니다.  우리는 상대방보다 빈틈없이 재빠르게 대응하는 순발력과 재치를 갖게 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마태 1마태 10장 16-23 (양을 이리떼에게 보내시는 하나님)

이스라엘 잘 다녀왔습니다.  저의 computer의 문제로 오늘 이렇게 메일로 새벽기도 보냅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의 전환점을 이루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양으로 비유하십니다.  양을 이리떼에 보낸다고 하십니다.  양을 이리에게 보내면 100% 죽습니다.

우리들은 세상에서 100% 죽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의 유혹과 시련을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과 차이 없이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죄로 죽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은 주님의 말씀대로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해여합니다.

이 말씀이 마태복음의 전환입니다.  마태 1-9장은 예수님의 기적과 능력이 수없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10장 부터는 이러한 기적과 능력보다는 세상이 주는 고난, 시련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이러한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면 마태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신자는 기적과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이 세상에서 고난과 시련속에서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되심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지, 예수님의 기적과 능력이 아닙니다.

오늘 날의 수많은 거짓의 목회자들은 마태복음의 1-9장을 강조합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예시, Sign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본질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도 기적과 능력을 추구하는 신앙에서 벗어나 나의 십자가를 찾아서 살아가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신앙에서 필요한 것이 뱀의 지혜와 비둘기의 순결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서 기적과 능력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그 증거의 하나가 빌라도와의 대화입니다.  빌라도와의 대화에서 진리를 놓고 설전을 합니다.  진리는 당시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방법의 하나입니다.

빌라도의 진리는 철학적 진리로 인간의 지혜가 근원이고 지혜의 근원은 지식에서 출발합니다.  세상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진리는 예수님 자신,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서로 다른 진리, 세상의 진리와 하나님의 진리, 서로 다른 두개의 서로 다른 진리를 연결하는 것이 바로 뱀의 지혜와 비둘기의 순결입니다.

이 부분은 내일합니다.

좋은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이상칠 올림

마태복음 10장 5-16 (월요일에서 토요일의 동정에서 주일의 공감으로)

이 시대의 중요한 화두는 공감입니다. 상대방의 아픔과 슬픔이 저의 아픔과 슬픔이 되고 상대방의 기쁨과 감사가 저의 기쁨과 감사가 되어야합니다. 영어로 Sympathy가 됩니다. 공감은 상대방이 주체가 되고 내가 객체가 됩니다. 내가 그와 같이 됩니다. 그러나 동정은 아무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감정적 상태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회자로 상대방과 상담하면서 상대방의 상황을 동정해야합니다. 그러나 동정만하면 상담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동정에서 벗어나서 상대방에게 새로운 길과 방법을 제시해야합니다. 이러한 것을 공감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Empathy입니다.

Empathy는 내가 그 안으로 들어갑니다. 들어가는 주체가 나입니다. En (In) -Pathos입니다. 동정은 나의 주체성을 상실하지만 공감은 나의 주체성을 지켜야 합니다. 상대방의 분노와 슬픔에 동정하지만 그와 같이 똑같이 분노하거나 슬픔에 빠지면 안 됩니다.

공감은 동정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입니다. 동정에서 공감으로 이동하지 못하면 문제의 해결은 없습니다. 공감에서 새로운 길과 방법을 찾아야합니다.

(v.5-6)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v.6)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잃어버린 양으로 비유하십니다. 그들을 동정하십니다. Sympathized입니다.

(v.7-10)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v.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공감이 나타납니다. 전도하는 자는 천국이 가까이 왔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나병환자를 깨끗하고 귀신을 쫓아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것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모든 것의 특징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논리가 형성됩니다. 예수님의 것을 너에게 주는 것이 전도입니다. 전도하는 자가 전도 받는 자보다 한 단계 높아야 합니다. 전도하는 자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전도 받는 자에게 주는 위치에 있습니다. 주고받는 위치가 아닙니다.

지적으로 감정적으로 물질적으로 모든 면에서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주는 것은 예수님이 전도하는 자에게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삶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v.9-10)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v.10)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세상은 돈에 의하여 통치되어집니다. 이 말씀은 세상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돈이나 세상의 것으로 상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인격체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공감입니다.

(v.11-15)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v.12)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v.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v.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v.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이 말씀을 잘 보시면 완전히 동정에서 벗어난 상태입니다. 잃어버린 양의 상황에서 벗어난 상태입니다. 전도자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미국선교 단체의 선교 방침의 하나는 안식년입니다. 7년 동안 철저하게 그 문화에 동화됩니다. Sympathized 됩니다. 선교사의 가장 큰 약점이 됩니다. 반드시 1년을 그곳에서 벗어나 안식합니다. 선교지를 벗어나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합니다. Empathy 합니다.

우리들이 세상에서 일 주일 동안 살아갑니다. 우리는 세상과 Sympathized 됩니다. 그러나 주일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Empathy 합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살아야 영혼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월요일에서 토요일의 동정에서 주일의 공감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