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5장 27-32 (인간 실종)

오늘 말씀은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NETFLEX 에서 만든 영화 Black Mirror와 같은 시대입니다.  우리는 전화기, Black Mirror로 수많은 정보들을 주고 받습니다.  그러나 그 정보를 주고 받는 화면에서는 우리의 얼굴이 반사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너와 나의 대화의 내용이 상실되었기에 연예, 스포츠,  타인의 사생활이 주요 대화 내용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부끄러움과 수치가 불륜이 정당화 시킵니다.  그러다가 이러한 것도 지겨우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마5:27-32)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5: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마5: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마5: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마5: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이 시대는 인간 실종이 나타납니다.  그럼으로 Black Mirror에서 나는 세상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이제는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을 만들어 내야합니다.

전화기를 손에 서 놓고 짧은 순간에라고 두 손 모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나를 찾는 것입니다.

마태 5장 21-26 (언어 살인에 대한 심판)

오늘 본문은 십계명의 제 6 계명인 살인하지 말라 입니다.  살인은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주님은 살인을 생명이 아닌 언어 살인으로 정의합니다.

성경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을 죽이는 것과 같기에 철저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이, 언어가 살인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죽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의도적 살인이 아닌 것은 보호 받습니다.  사고로 사람을 죽이면 도피성에서 보호를 받습니다.  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성에서 보호를 받습니다.  제사장이 죽으면 그 도피성에서 해방 되어 자유를 얻습니다.  그러나 의도적 살인은 반드시 처벌을 받습니다.

우리들이 말의 실수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이해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실수 있다면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말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 벌을 받는 과정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의살인의 의도가 없으면 // 죄를 물을 수가 없습니다.

(v.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이 말씀을 // 3 개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형제에게 노하는 자는 심판을 받는다고 합니다.  노 한다는 것은 Hella로 Olgozo입니다.  상대방을 분노 Angry하게 하는 일이 됩니다.  심판은 당시 유대 사회에 지역마다 있던 동네 재판소입니다.  상대방을 화나게 하면 지방 재판소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처벌이 약한 것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라가는 Hebrew 의미로 멍청한 놈, 바보입니다.  상대방을 조롱하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공회에 끌려갑니다.  공회는 Hella로 Shenaferion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Sanhedrin입니다.  지방에서 예루살렘으로 재판을 받으러 가야 합니다.

세번째는 형제에게 미련하다고 하면 지옥불에 들어갑니다.  미련한 놈은 Hella로 Moros입니다.  어리석고 미련하다는 의미입니다.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개새끼입니다.  상대방을 개새끼라고 하면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됩니다.

지옥불은 지방 재판소도 아니고 예루살렘의 대법원도 아닙니다.  죽어서 가는 지옥입니다.

(v.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v.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미움을 갖고 드리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그럼으로 급히 서로 화해하라고 합니다.

2017년도 우리들이 서로 위로하고 이해하는 말을 시작하는 한해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 5장 17-20 ( 우리의 민낮-2017)

제가 요사이 들어 보지 못하던 단어가 있습니다.  화장하지 않거나 성형하지 않은 얼굴을 쌩얼, 또는 민낮이라고 합니다.  실체의 모습입니다.  본래의 모습입니다.

신앙에서 진짜 우리의 민낮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쌩얼은 무엇일까요?

기적이 없으면 우리 신앙의 진짜 실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다면, 은총이 없다면, 인도하심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의 실력이 들어납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율법의 준수를 강조하십니다.

(마 5:19-20)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v.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건성과 참여성입니다.  오늘 날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과 도움과 축복으로 포장된 신앙 생활을 목표로 합니다.  그 결과 우리의 모습은 이러한 것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가로 우리의 신앙을 증명합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기적과 축복을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합니다.

그러면 가난하고 실패하고, 고난과 고통에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됩니다.  아주 이상한 논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과 고난은 우리와 상관 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가장 구박 받는 것이 됐습니다.

(마 7: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러한 심판을 피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항상 머물러야 합니다.  이 부분이 실행되지 아니하면 산상수훈 21절 부터 마지막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간디가 말하고, 슈바이처가 말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훈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고 오지 않았습니다.  생명과 진리를 주시려고 왔습니다.

2017년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명과 진리에 이르시기 바랍니다.

추신 내일 저녁 8시에 송구영신 예배가 있습니다.

 

마태 4장 17-22 (예수님이 주시는 성탄의 선물)

내일이면 Christmas Eve이고 주일은 성탄입니다.  우리들이 Merry Christmas라고 인사합니다.  아기 예수님이 오신 날 우리는 선물을 주고 받습니다.

우리에게는 도구가 필요합니다.  직장에 가려면 차가 필요하고, 주부에게는 부엌의 칼과 식기가 필요합니다.  세탁소에서는 세탁기와 Boiler가 기본 장비가 됩니다.  도구가 없으면 일을 하지 못합니다.

제자들을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하며 그들의 도구인 배와 그물을 버립니다.  배와 그물을 버렸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 방법을 포기한 것입니다.  이제 부터는 주님의 방법으로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v.19)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방법으로 살자고 하십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방법으로 살았는가를 돌아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각종 병자를 고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병을 고치신 것은 당시의 성경적 배경에서는 병든자를 죄인들입니다.  죄를 졌기에 병이 들었습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하심입니다.  물론 병든 자의 고통과 아픔에서 건져 주심이지만 유대적 배경에서는 죄의 용서입니다.

우리도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어야 합니다.  타인의 병든 것을 고치려면 내가 병들지 말아야 합니다.  건강해야합니다.  죄에서 멀어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가정에 충실해야합니다.  자식으로 부모에 효도해야합니다.  직장의 직원으로 성실하고 주인이면 주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죄악에서 멀어지는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와 말씀을 가까이 해야합니다.  예배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게 되면 죄에서 멀어집니다.  건강한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성실합니다.  그래야 사람을 낚을 수 있는 어부가 됩니다.  다른 사람의 병을 고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라틴어의 Discipulus은 Disciple 제자가 됩니다.  제자는 학생, 배우는 사람이 됩니다.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를 때에 우리는 왼벽한 존재로 변화되어 갑니다.  학생은 스승이 아닙니다.  그러나 스승처럼 되는 것이 학생입니다.  이러한 도구들이 갖추어 질 때 우리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성탄의 선물로 건강한 삶이 되길 바랍니다.

마태 4장 6-7 ( George Washington Bridge에서 떨어지면? )

마귀가 예수님을 두 번째로 유혹을 합니다.

(v.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성경은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신분을 밝힙니다.  예수라고 합니다.  나사렛 예수입니다.  예수님에게는육친의 아버지, Joseph 이 있고 육신의 어머니 Maria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인간 예수로 시험 당합니다.

우리들이 George Washington Bridge (일명 조다리) 에서 떨어지면 죽으까요?  살까요?  조다리에서 떨어지면 우리들이 살아나지 못합니다.  물에 부딪히는 충격도 대한 할 것이고, 물에 빠져서 나오는 시간에 이미 익사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조다리에서 떨어지면 죽을까요?  살까요?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시장하셨습니다.  먼길을 걸으면 피곤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죽습니다.

마귀는 항상 이것을 무시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유혹합니다.

(v.6)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나라렛 예수, 인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신다고 합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떨어지면 천사가 사뿐히 앉고 내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오늘 날 한국 교인들에게 만연된 시험이 바로 이러한 시험에 빠져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조다리에서 뛰어 내리면 산다고 합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부추기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믿음이라는명목아래에,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혀 예의를 지키지 않습니다.  전혀 법과 상식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니 세상은 우리를 보고 미쳤다고 합니다.  무식하다고 합니다.

Princeton University에 Firestone이라는 도서관이 있습니다.  2 차 세계 대전 이후에 지어진 가장 큰 도서관입니다.  그런데 도서관에 들어가 보면 지하로 지어 놨습니다.  이유는 그 옆에 University Chapel이 있는데 그 건물보다 높게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식이 사상이 하나님을 누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의미로 인간의 이성과 지성은 하나님으로 부터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 날 신자들은 인간의 이성과 지성을 하나님으로 부터 시작하지 않았고 마귀로 부터 시작했다는 오만한 발상을 갖고 있습니다.  신앙고백과 신학은 쓰레기 통에 처박앗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날 많은 신자들은 조다리에서 뛰어 내립니다.  조다리에서 뛰어 내리면 기적과 같이 살아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일이 생기면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이라고 합니다.  대부분 죽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죽으면 믿음이 없는 결과라고 합니다.

이러한 기적과 능력을 나태내려고 우리들이 즐겨 암송하는 말씀의 하나입니다.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을 악용해서 자신이 목적을 달성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심지어는 신자들을 선동합니다.  우리의 꿈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적과 능력을 베풀어주십니다. 2016년과 지난 목회와 저의 개인적 시간에서 저는 수많은 기적과 능력을 확인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적과 능력은 믿음의 비밀로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믿음 없는 저에게, 죄 많은 저에게, 불쌍해서 하나님이 도와 주신 것입니다.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의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알면 절대로 우리의 꿈과 목적으로 사용 할 수 없습니다.

(빌 4:10-12)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v.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v.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바울은 자신의 현실에서 모든 것을 감당한다고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듯이 자신의 현실을 십자가로 질 능력을 달라고 합니다.  이것이 내게 능력 주시는 주님에게 행하는 모습니다.

예수님이 죽어야 할 곳은 십자가입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 죽으시면 안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곳은 나의 십자가입니다.  나의 현실에서 진지하게, 성실하게 하루를 사시기 바랍니다.

 

마태 4장 1-4 떡과 말씀

(마 4:1-4)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v.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v.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v.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귀의 첫 번째 유혹은 광야에서 사십일을 먹지 못하신 주님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명령해서 떡이 되게 하라고 합니다.  마귀가 주님을 3 번 유혹 할 때마다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면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시험을 대응하는 주님의 태도는 하나님의 아들 보다 인간 예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신적 권위로 40일을 굶어도 배가 고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혹을 당하시는 예수님은 인간으로 배가 고프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많은 유혹을 당합니다.  예수님의 유혹은 우리가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탄은 돌이 떡이 되게 하라고 합니다.  돌과 떡은 성분이 다릅니다.  돌은 먹을 수 없지만 떡은 먹을 수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자연에서 초자연적 현상을 요구합니다.  우리들이 신자로 초자연 증거를 갖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돌이 떡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능합니다.  자연에서 초자연을 만들어내십니다.  주님은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죽은 자를 살리고, 물 위를 걸어가셨습니다.

마귀는 주님이 할 수 있는 당연한 부탁을 합니다.  주님에게는 이러한 요구는 어려움이 없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유혹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깊이 살펴보면 엄청난 유혹입니다.  예수님은 인간 예수, 자연인, 우리와 같은 사람이시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으로 나타나라고 합니다.

(v.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인간의 인간 다움은 무엇입니까?  철학적 표현으로 자연인의 자연인 다움은 무엇입니까?  사람의 사람 다움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 사람은 //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메추라기와 만나 반석의 물을 먹었습니다.  돌이 떡이 되는 기적과 능력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정력이 약해졌다고 합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생선과 부추와 마늘을 먹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애굽에서 생선 부추  마늘을 먹을 때에는 하나님에게 노예로 사는 고통으로 탄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생선 부추 마늘도 그들에게 절대로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인간의 자유와 진리와 행복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어느 남자가 여자에게 Diamond을 선물합니다.  여자가 매우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그 Diamond을 좋아하는 이유는 첫째는 Diamond 때문입니다.  둘째는 Warranty Paper 때문입니다.  그 반자를 준 남자가 사라집니다.

우리에게 자유와 진리와 행복은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삶입니다.  그 방법의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 6:51) 주님은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한다고 합니다.  세상은 나의 떡으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도 좋은 식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식사 할 때마다, 하나님의 떡, 말씀의 떡을 드시기 바랍니다.

마태 4장 1-4 (유혹과 시험)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마태 복음 4장의 말씀을 사탄이 예수님이 시험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유혹과 시험을 구분해야합니다.  이러한 구분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필요합니다.

유혹은 상대방을 미혹 현혹시켜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창세기에 뱀 사단이 Eve을 유혹하여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명령한 선악과를 먹도록 유혹합니다.  유혹은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상대방을 잘못 된 길로 인도합니다.  이러한 유혹의 결과 아담과 이브에게 죽음과 사망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시험은 상대방의 의지와 실력을 알아보는 방법입니다.  우리들이 학생 때에 시험 때문에 공부합니다.  학생들은 시험 때문에 원망하며 불평하며 밤을 새워 공부합니다. 시험은 학생을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시험은 그 학생을 적정한 수준으로 이끌고 갑니다.  학생을 학생답게 하는 것이 시험입니다.  시험 없는 학생은 학생이 되지 못합니다.

사탄의 유혹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에서 사탄의 자식이 되게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답게 만들어줍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탄을 3 차례에 걸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겨냅니다.

다음과 같이 정리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유혹을 당 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만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가 없다면 우리는 유혹으로 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르 시험하시는 이유는 고전 10장 12절에서 이렇게 밝혀줍니다.

(고전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믿음의 사람이 교만해지만 하나님은 시험을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고, 시험을 피하게 하시고 또한 시험을 당하면 그 시험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유혹과 시험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죄악에 빠지면 사탄에 유혹을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 교만하면 하나님이 시험을 하십니다.

이러한 선택에서 벗어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추신: 3번의 유혹을 3 번에 나누어 하겠습니다.

 

마태 3장 13-17 (천국과 유토피아의 차이)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세례 받는 장면입니다.  세례 요한은 세례를 줄 수 없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십니다.

세례 받으실 때에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하늘에서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비둘기와 같이 강림하십니다.

초자연의 하나님이 자연에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이 보고 느끼고 알 수 있는 존재로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시간과 질서와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하늘에 계시지만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이 감옥에 수감된 것을 아시고 세례 요한의 설교를 반복하십니다.  (마 4:17)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 천국입니다.  루터의 말대로 지옥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이 계신 곳은 천국입니다.

인류도 계몽주의 이후에 천국을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이것을 유토피아 (Utopia)라고 합니다.  인간의 이성과 지식과 경험으로 천국과 같은 유토피아를 만들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류는 전쟁과 빈부의 격차와 사상적 갈등으로 Dystopia (디스토피아)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도 미국의 정치 한국의 최순실 사태는 전형적 디스토피아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하여 상대방을 디스토피아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에 우리의 환경과 조건을 초월하는 천국이 나타납니다.  장차 우리에게 천국이 주어지지만 우리는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천국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유토피아와 천국의 차이입니다.

천국의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 3장 1-12 (우리의 신분)

세례 요한이 등장합니다.  그는 제사장 집안 출신입니다.  그럼으로 그가 있어야 할 곳은 광야가 아니라 예루살렘의 성전이 됩니다.  그가 입어야 할 옷은 제사장의 옷이지만 그는 낙타의 털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가 먹어야 할 음식은 제사의 제물이지만 그는 꿀과 메뚜기를 먹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신분의 변화가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신분의 변화가 있습니다.

우리는 조국을 떠나 이곳 미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민자라는 신분으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도 세례 요한과 같이 당연히 있어야 할 곳이 있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왓다고 합니다.  정확한 의미는 천국이 IS AT OUR HAND입니다,  우리는 천국의 신분입니다.  우리는 광야 같은 세상에 살지만 우리의 신분은 한국도 아니고 미국도 아닌 하늘의 시민권자들입니다.

그럼으로 회개합니다.  우리들이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서 회개해야합니다.  우리의 신분이 천국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세례요한과 같이 광야 같은 세상에 살아가지만 우리들의 영원한 장소가 아닙니다.  언제가는 우리의 집 천국으로 가야합니다.

우리의 신분을 확인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 2장 13-23 Draem에서 Vison으로

우리는 꿈을 꿈니다.  꿈에는 2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Dream과 Vision입니다.  Dream은 누군가 해몽을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Vision은 스스로 꿈을 꾸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꿈이 나타납니다.  Dream과 Vision 어느 것에 해당하는 꿈이 됩니까?

요셉이 다음과 같은 꿈을 꿉니다.

(마 2: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하나님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을 가라고 합니다.  그 결과 헤롯은동방박사들에게 아기 예수의 탄생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합니다.  헤롯은 16-17절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들을 죽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그의 잔학성에 의심을 표합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는 충분히 아기들을 죽입니다.  그는 자신의 왕권을 지키려고 자신의 아들, 아내 심지어는 어머니도 죽였다고 합니다.

(v.22-23)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v.23)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물론 꿈으로 이러한 일들과 과정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요셉의 입장이 되어 본다면 요셉은 꿈을 따른 것 같지만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요셉은  Dream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Vision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잉태된 임마누엘의 하나님되심을 알려 주었습니다.

꿈은 Dream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방법의 하나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우리의 Vision이 됩니다.  그의 말씀과 명령을 따라 살아갑니다.  꿈으로 계시된 예수님이 우리의 현실에 빛과 목표가 됩니다.  우리의 Vision이 됩니다.

이러한 꿈의 결과 예수는 베들레헴의 예수가 아니라 나사렛 예수가 됩니다. 나사렛 사람이라고 합니다.  요셉은 꿈을 통해서 임마누엘, Immanuel,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동시에 나사렛의 사람이 됨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지난 밤에도 개꿈이든 용꿈이든 꿈을 Dream 꾸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Vision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임마누엘입니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는 우리와 같은 현실을 살아가십니다.  꿈을 통해서 예수님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Dream에서 Vision으로 살아갑니다.  우리의 Vision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